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마르탱 베롱 지음, 김미정 옮김, 레프 톨스토이 / BH(balance harmony)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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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 한 이야기를 프랑스 만화가 마르탱 베롱이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로 그린 만화책이다. 마치 단편영화를 한 편 보는듯한 만화적 연출로 단숨에 책장을 넘기도록 만든다. 19세기 러시아 시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21세기 현실에서도 크나큰 이야기의 힘을 지니고 있다. 


최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동산 투기의 열풍은 땅값, 집값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땅 한떼기, 집 한 칸 없는 이들에게 허탈감만을 안겨주는 부동산의 고공행진. 한 번 올라타지 못하면 영영 올라갈 기회를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내 이름으로 된 땅이나 집을 갖기를 소망한다.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주인공 바홈도 그렇다. 소작농이었던 바홈은 지주에게 시달림을 받으면서 자신의 땅을 갖기를 소망한다. 빚을 져가며 땅을 넓혀가던 바홈은 바시키르라는 곳에 가면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땅을 소유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머나먼 길을 나서 바시키르에 도착한 바홈. 해가 뜨고 질 때까지 자신이 출발했던 곳에서 빙 둘러보다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자신이 걸었던 그 길을 경계로 하는 땅을 얻을 수 있게 됐다. 과연 바홈은 얼마만큼의 땅을 갖게 됐을까. 


이야기는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인간의 탐욕이 어떻게 불타오르기 시작했으며, 그 탐욕의 끝은 무엇인지를 짧은 우화 속에 담고 있다. 톨스토이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는다. 오늘도 끝없이 사다리를 오르고 오르려는 이들은 마치 이 책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주인공 바홈이 땅을 얻기 위해 쉼없이 걷고 또 걷는 모습과 닮아 있다. 부디 그 결말만큼은 닮아있지 않기를 바라며, 사다리를 왜 오르려하는지 끊임없이 물으며 살아가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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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 뇌가 당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7과 1/2가지 진실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변지영 옮김, 정재승 감수 / 더퀘스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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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장 큰 착각은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일지 모른다. 지구 먹이그물의 제일 꼭대기에 있다는 착각, 그래서 가장 진화한 종이라는 착각 말이다. 이런 착각의 근거는 인간이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합리적인 생각, 즉 이성을 갖춘 존재이기에 가장 앞서 있다고 자평한다. 그리고 이런 이성은 바로 인간의 뇌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며, 지구의 최상위 지배종인 것일까.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이라는 책을 쓴 저자 리사 팰트먼 배럿은 최신의 뇌과학 연구를 토대로 뇌란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이책에서는 첫번째로 "뇌는 생각하기 위해 있는게 아니다"라는 그야말로 급진적 주장을 한다. 즉 지구를 지배하는 인간의 근거가 되는 뇌의 합리성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주장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가? 그렇다면 저자의 다음 주장을 더 들어보라. "뇌는 당신의 거의 모든 행동을 예측한다" "인간의 뇌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즉 인간의 뇌가 현실을 인지하고, 그를 토대로 예측한 사건을 위해 행동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다. 뇌는 자신의 의도에 맞추어 현실을 만들어내고, 인지 전에 미리 예측하여 행동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객관적 인식이란 불가능한 것이며, 행동은 합리적 계산보다는 본능적 예측으로 행해지는 셈이다.


오라! 그러고 보니 행동경제학에서도 말하고 있는 이성적이지 않는 인간이 우리의 본모습이란 소리로 들린다. 그리고 실제 우리가 지켜보는 현실이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인간들의 사건, 사고들로 가득차 있다. 도대체 왜?


저자 배럿은 뇌가 정확한 것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확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즉 살 수 있는 조건에 최적합화되도록 에너지 효율을 따져서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자동으로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이다. 이를 알로스타시스라고 한다. 뇌의 예측은 과거 경험을 토대로 하며, 즉 자신을 지금 생존해 있게 만든 그 경험들을 토대로 해야지만 생존의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만약 이런 예측이 틀렸을 경우 아직 생존해 있다면 무엇이 틀렸는지를 학습 하게 되면서 기존의 토대가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이는 바로 과거의 경험, 즉 우리의 기억이 우리가 보는 것을 만들어내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지한다는 것은 나 이외의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것과 뇌(기억)가 구성한 것의 조합이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사물, 사건을 접해도 서로 다르게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 아마도 이것을 불교에서는 업이라 부를듯하다. 업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존의 행동과 다른 특정행동을 끊임없이 반복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인간의 뇌는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걷거나 보거나 뛰거나 등등 그 동물 특유의 행동을 곧바로 행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그야말로 무력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불완전하다. 인간의 뇌가 이렇게 불완전하게 태어난 것은 바로 문화적, 사회적 지식이 전달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기 위해서다. 이를 적소라고 표현하는데, 인간은 이런 적소를 건설해왔다.-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국가, 화폐와 같은 상상력의 산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다만 우리가 적소를 건설하는만큼 조작에도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다. 즉 인간은 동물과 달리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왔지만, 그 사회적 현실은 조작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통해 발전의 가능성을 열면서도 위기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사회적 현실을 만드는 인간만의 능력은 그야말로 인간만의 독특한 뇌, 즉 초능력 덕분이다. 이런 인간의 독특한 뇌를 저자 배럿은 초능력 5C로 표현한다. creativity 창의성, communication 의사소통, copying 모방, cooperation 협력, compression 압축(감각 통합을 가능케 하며 추상화 원동력)이 바로 5C 이다.


알로스타시스를 위한 뇌, 그리고 그런 뇌의 초능력 5C가 어우러져 탄생한 인류의 문명. 단순히 생존이 아니라 행복한 생존을 위해 알로스타시스라는 본능과 5C라는 초능력을 어떻게 잘 활용해야 하는지, 기후위기에 처한 지구를 위해서라도 고민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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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만 잘 하면 456억원을 벌 수 있다고? 누가 참가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패배는 죽음이라.... 머뭇거려지는가. 목숨을 걸기엔 부족한 액수라서? 아니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으니까? 그런데 이승이 지옥같다면 게임에 참가할 마음이 생길까. 




넷플릭스에서 화제를 몰고 있는 <오징어 게임>을 보았다. 1화를 보자마자 드는 생각은 일본 만화 <도박 묵시록 카이지>의 한국판 게임 버전이었다. 물론 카이지는 게임이 도박이라는 것이고, 오징어 게임은 한국의 전통(?) 놀이라는 것이 다르다. 여기에 더해 아주 큰 차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공정성이다. 



카이지에서는 도박 게임의 결과가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유리하도록 조작되어진 상태로 게임이 진행된다. 주인공인 카이지는 이런 조작을 간파하고, 오히려 불리함을 이로움으로 바꾸는 통쾌한 반전을 펼친다. 반면 오징어 게임은 게임의 주최자가 게임이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관리한다. 미리 다음 게임을 알고서 유리한 선택을 취했던 참가자를 공개처형할 만큼 신경을 쓴다. 소위 말하는 부정부패나 비리는 없다는 것이다. 참가자들이 뛰고 있는 운동장만큼은 현실과는 달리 기울어지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로또는 1,000원을 투자해 수십억원을 벌 수 있는 도박이다. 결과는 순전히 운에 달렸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운이 적용된다. 1,000원의 가치는 동등한 1등 확률을 보장한다. 너무나 희박해서 그렇지... 그런데 화천대유 사건은 어떤가. 로또와 다름없는 대박을 얻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정보를 입수하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일반인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힘의 커넥션이 작용했을 것이다. 화천대유가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그 불공정성에 있다. 한편으론 내가 그 불공정의 특혜를 입을 수 없다는 좌절과 분노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확천금을 목표로 살고 있는가는 논외로 치고 말이다. 


주인공인 이정재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줄다리기, 구슬치기, 징검다리 건너기 등의 각종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참가자들과 도움을 주고받는 연대였다. 물론 죽음 앞에서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이기기 위해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았다. 그런 마음을 갖고서 게임에 임했는데 우승을 차지하다니... 정말 용케도 우승을 차지한 셈이다. 선한 마음의 선한 결과는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징어 게임 속에 등장하는 게임들은 얼핏 보면 공정한듯 보인다. 게임의 승패를 가르는 요소 중의 하나가 운이기 때문이다. 달고나의 모양이라든가, 건너뛰기의 순서 등은 그야말로 운발이다. 하지만 달리기가 빠른 이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유리 전문가의 건너뛰기, 힘이 강한 자의 줄다리기 처럼 필시 누군가에겐 유리한 게임이 등장할 수 밖에 없다. 참가자들이 모두 똑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징어 게임처럼 공격자가 일방적으로 유리하지 않도록 암행어사를 외치기 전까지는 한 발로 뛰어다니도록 핸디캡을 만드는 등의 보완요소가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게임의 공정성도 중요하지만(공정성에 대한 의견통일은 지난하다) 그 결과가 몰아주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승자독식! 공정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이 승자독식의 결과가 아닐까.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 456명 중 오직 1명 만이 456억원을 차지하는 게임이 정말 공정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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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역습 - 우리는 문명을 얻은 대신 무엇을 잃었는가
크리스토퍼 라이언 지음, 한진영 옮김 / 반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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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트허르 브레흐만의 책 [휴먼카인드]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아니 적어도 이기적이며 악하지는 않다는 증거를 들이댄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한 가지 드는 의문! 왜 이렇게 선한 인간들이 모여사는 지금, 현대인의 삶은 행복하지 않는 것일까? 인간이 이기적이다는 전제하에 굴러가고 있는 자본주의 탓인가? 전제를 잘못 세웠으니, 그 과정과 결과 또한 잘 될리가 없을테니 말이다. 


크리스토퍼 라이언은 책 [문명의 역습]에서 인간이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은 농업이 생겨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수렵채집으로 살고 있던 인간은 남녀노소가 모두 평등했고, 무리로부터 언제나 벗어나 새로운 무리에 합류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으며,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농업이 생겨나면서 권력, 계급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불평등이 생겨나 그 격차가 벌어지면서, 우리는 승부가 없는 지속적인 게임에서 이겨야만 하는, 그래서 끝을 맺어야 하는 게임에 빠져들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농업을 시작하게 된 것일까. 온화한 기후 덕에 풍부한 식량을 얻을 수 있어 인구가 증가하게 됐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줄어든 식량 탓으로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선택이 농업이었다는 가설. 하지만 초기엔 언제고 다시 수렵채집으로 돌아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서지 못한 채 농업이라는 늪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마치 브라이언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이 열기구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를 막기 위해 줄을 잡았다 열기구와 함께 공중으로 떠오른 후 결국 떨어져 죽은 사건처럼 말이다. 얼른 줄을 놓아야했음에도 불구하고 줄을 놓지 못한채 열기구와 함께 공중으로 떠오르듯 인류도 농업을 시작하고 나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농업은 축적을 낳았고, 이는 불평등의 씨앗이 되었다. 힘겨운 농업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이는 노예를 얻기 위한 전쟁 등 필연적으로 갈등을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문명의 역습]은 문명 이후의 인간의 삶이 발전했다는 생각은 오해이며, 오히려 수렵채집 시대의 인간이 행복한 삶을 누렸다는 것을 다양한 사료와 자료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 수렵채집 시대로 회귀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저자인 크리스토퍼 라이언이 과거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수렵채집 시대의 삶의 양식을 가져온다면 우리의 삶이 보다 행복해지지 않을까 상상해보고 있다. 


저자는 "자연분만, 가축의 방목과 인도적 도축, 유기농 채소와 과일, 평등한 기업조직, 공유경제, 남녀이분법을 벗어난 다양한 성, 유연한 인간관계, 성소수자들의 권리,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집과 개인경제, 대체의학, 환각제를 이용한 심리치료, 이 모든 유행의 뿌리는 고대인들이 영위하던 삶이다"고 말한다. 이를 근거로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수직적인 기업구조를 동료 진보주의 네트워크와 수평적인 조직으로 전환하고,  각 지역에서 청정에너지를 생산하며, 전쟁 비용으로 쓸 돈을 모아 전 세계적 차원의 기본소득제를 실시하고, 자녀 갖지 않기를 장려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수렵채집 시대의 삶의 양식에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이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은 몽상가처럼 느껴진다. 전 세계적 합의라는 것이 지금의 현실에서 가능한 것인지 의심이 가기 때문이다. 


[휴먼카인드]와 [문명의 역습]을 통해 생각하게 된 것은 현대인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의 본성에 있다기 보다는 사회 환경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불안이 우리를 불평등으로 몰아갔고, 불만이 우리를 폭주하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후위기로 언제 굶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생기면서 농사를 통해 축적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수렵채집 시대 인류는 저장을 하지 않았으며, 혹여 누군가 저장을 했다 하더라도 1년이 지나갈 즈음 축제를 통해 모두 소진해버렸다. 축적을 행한 이를 영웅시하지 않음으로써 축적에 대한 욕망이 억제되었다. 하지만 기후 변화가 가져온 불안이 이런 소진의 시대를 끝내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 우리가 겪는 기후변화 또한 우리의 불안을 자극해 더욱 불평등의 격차를 키워가는 것이 아닐지 걱정이 되는 부분이다. 

이런 불안으로 비롯된 축적은 계급을 낳았고, 점차 불만을 불러왔으리라. 누군가의 축적은 누군가의 가난을 의미했다.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모두 불만투성이게 되었을 것이다. 보다 더 가지지 못했다는 불만은 상대를 누르고 더 많이 차지해야하는 경쟁으로 치닫게 만들었을 것이다. 불만은 무한경쟁으로 우리를 내몰고, 그 경쟁이 발전을 가져온 양 보이지만, 불만은 결코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못하기에, 우리는 경쟁이라는 끝없는 폭주기관차에 몸을 실었다고 여겨진다. 


수렵채집 시대의 행복한 인류란 결국 불안과 불만이 없는 인류였지 않았을까. 불안과 불만이 없는 삶이란 결국 축적이 없는 무소유의 삶일 수밖에 없다. 두 책을 통해 결국 우리의 불행은 '부'로부터 또는 '부'를 바라보면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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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가 끝났다. 직장 내 애환을 담은 이 드라마는 신입사원의 적응기가 아니라 N년차 직장인의 생존기였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든 버텨내기 위한 직장인들의 눈물겨운 사투기였다. 


드라마의 결말은 모든 직장인이 꿈꾸는 환상을 담아냈다. 결국 직장에서 쫓겨났지만, 내 사업을 차려서 멋지게 성공함으로써 나를 쫓아낸 직장에 복수하는 짜릿한 상상말이다. 드라마니까, 이런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쾌감을 준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이런 해피엔딩이 결코 해피하게 보이지 않는다.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주인공은 그렇게 일에 매달리는 것일까. 미쳐야 미친다고 했지만, 주인공이 코피 쏟아가며 야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분투를 넘어, 자신의 사업을 차리고 나서도 그는 일에 매진한다. 집에 홀어머니와 어린 딸아이가 있는데도 말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일에 매달리도록 만들었을까. 정말 일이 즐거워서? 하루종일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즐거운 일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일이 전부인 것일까. 


자기사업, 쫓겨난 회사에 대한 통쾌한 복수, 성공... 직장인이라면 한번쯤 꿈구는 이것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근면, 성실, 자기 희생을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지만, 정녕 그 덕목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버트란트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글을 썼다. 말 그대로 게으름을 피우라는 것이 아니라 여가를 충분히 갖는 삶에 대한 찬양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여가는 왜 우리로부터 도망갔는지, '미치지 말고'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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