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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게 "내거야"다. 아이는 마치 이 세상 전부가 자기 것인양 당당하게 "내거야"를 외친다. 다른 아이들 손에 들린 것이 마음에 든다면 주저없이 빼앗아 "내거야"라고 한다. 그렇기에 내거야 뒤에는 "아앙"이 따른다. 싸움이 일고, 실제적으로 자기 것이 아니기에 돌려주어야만 하는 상황에 눈물을 흘리고야 마는 것이다. 

 

아이들은 다 이런 시기를 겪는다고 한다. 어떤 아이들은 겪는듯 마는듯 지나가기도 하겠지만 열병처럼 지독하게 앓고(?) 가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점차 남의 것도 인정하고, 나의 것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고 해서 "내거야"의 시기를 다 지나보내는 것은 아니다. 특히 승자독식사회에선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모든 것이 내것이 되니 그 욕망을 놓아버리는 것이 쉽지않다. 여기에서도 세살 버릇은 여든까지 가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내거야" 뒤엔 "아앙"이 따랐다는 것을.   

 

정말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 것을 줄여나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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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지금이 가장 좋을 때'라는 것이다. 육아 선배들은 항상  '조금만 더 커봐라, 이러이러해서 더 힘들다'며 충고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기어다닐 때, 걷기 시작할 때,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등등 커가는 과정 속에서 주변으로부터 계속 듣게 된다. 기어다닐 땐 걷기 시작하면 더 힘들어진다고 하더니만, 걷기 시작하면 말 배우기 시작할 때 장난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가 제일 힘들고 언제가 제일 좋은 시절이란 말인가?

 

법륜 스님은 수행이란 지금의 처지가 바로 좋을 때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옛 시절이 좋았다고 과거 속에서 살거나 미래의 좋은 처지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순간이 가장 행복한 때라는 것을 아는 것이 수행의 목표점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수행하는 것과 똑같다.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상하며 살기엔, 또는 좀 더 크면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 속에서 살기엔, 현실은 너무나 쏜살 같기 때문이다. 지금 이순간 아이가 보여주는 다양한 표정과 행동들을 뒤로 하고 힘든 기억과 마음만을 간직한다면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난 아이를 웃으면서 쳐다보려 한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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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돌도 안된 아이에게 고함을 쳤다. 아니 고함이라기 보다는 분풀이를 위한 절규였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이는 처음 듣는 고함소리에 놀라는 눈치다.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고 눈치를 살핀다. 물론 잠깐이지만. 이내 다시 떼를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번 더 아이에게 고함을 칠 순 없었다. 아이가 깜짝 놀라는 모습에서 왠지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했다는 느낌이 떠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고함은 그저 나의 분을 삭이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지독한 감기 몸살이었다. 몇년 만에 이렇게 앓는 건지 모르겠다. 아이로부터 시작된 감기가 온 가족에게 다 옮겨간 것이다. 그러니 아기도 얼마나 컨디션이 나쁘겠는가. 안겨있으면서도 계속 칭얼댄다. 한두시간은 어떻게 참아보았지만 세시간을 넘어서니 그 울음소리가 내 신경을 자꾸만 갉아먹는것 같다. 더구나 몸살에 걸린 몸뚱아리가 제발 쉬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한계를 넘어섰다고 느끼는 순간 고함은 거리낌없이 튀어나왔다.

 

법륜 스님은 짜증과 성냄은 모두 다 자기만을 생각했을 때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타인의 입장에서 취하면 성낼 일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가깝지만 타인은 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짜증과 성냄 속에서 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돌아봤다. 아이에게 고함을 친 일은 분명 내 몸과 마음이 지쳐있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즉 오직 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어떤가. 몸에 열이나고 콧물이 흐르고 눈꼽이 끼는 불편함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이었겠는가. 이런 불편함을 단시간에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저 칭얼대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모든 문제의 해결을 개인이나 마음가짐으로 푸는 건 제도나 환경의 개선을 가져올 기회를 날려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해야 할 부분이긴 하지만, 때론 꿈쩍도 않는 벽 앞에서 통곡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다. 일단 짜증나고 화가 난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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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한 시대가 열리고 과학이 아무리 발전을 해도 생명에 대한 비밀을 밝히는 것은 아직도 멀기만하다. 최근 뇌과학이 각광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뇌의 작동은 신비라는 이름을 빼앗기지 않았다. 신체 작용의 비밀 중 또하나 잠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추론만 가능할 뿐 정확한 작동기제는 밝혀지지 않았다. 도대체 동물들은 왜 잠을 자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잠은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일까. 잠을 자며 꿈을 꾸는 것은 왜일까.... 

아이가 백일을 지나면서 잠을 재우는 게 힘들어졌다. 두 눈을 자꾸 비비면서 잠이 온다는 신호를 보내면 잠 재우기에 들어간다. 하지만 어지간해선 도저히 잠을 청하지 않는다. 자꾸 보채며 가끔씩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안아주지 않으면 발버둥을 친다. 누군가는 손을 탔다고 그러지만 '와서 키워봐라 그런 소리 나오나'라는 말을 꼭 집어 삼키며, 그냥 웃어 넘긴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한달이 넘게 아이의 잠떼와 씨름하다 보니 점차 지쳐간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잠을 자고 나서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사 그 자체인 것을. 천사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는 말 할 필요가 없을테다. (가끔씩 야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눈물이 글썽해질 때가 있다. 끝없이 차오르는 어떤 행복감과 충만감으로 말이다. 한편 잠자는 모습을 보고 나갔다 돌아와서도 다시 잠자는 모습만 봐야 한다는 비애감으로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아이들은 잠떼를 부리는 걸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정답은 없겠지만 나름 해답을 내려봤다. 우리 신체는 잠이 오면 그 기능이 저하된다. 눈꺼풀도 감기고 손발의 힘도 떨어진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의 신체가 저하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자신을 제어하고 싶은 욕구대로 신체가 따라오지 않는 것에 화가 나는 것이다. 배고프면 울고 기저귀 갈아달라고 울면서 욕망을 채우는 아이가 아니던가. 이 제어에 대한 욕구를 타인에게로 확장한다면 그것은 권력욕이 될 것이다. 세상을 자기 뜻대로 움직여보고 싶은 욕망, 그래서 어른들도 떼를 부린다. 권력욕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찌질한 어른들의 행동은 바로 권력떼인 것이다. 하지만 권력떼를 부리다가 잠잠해진 그들의 얼굴은 결코 천사가 될 수 없기에 세상은 참 슬프다. 제발 떼 좀 부리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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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에요?" 

아기를 데리고 나가면 으레 들려오는 질문이다. 우리 부부는 질문한 사람이 무안하지 않게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진짜 남자 같죠"라고 답한다. 그 질문을 듣지 않으려고 일부러 분홍색 치마를 입히고 모자를 씌우고 나가도 마찬가지다. "남자아이죠?"라는 말은 여전히 귓가를 울린다. 

여자아이란 걸 안 사람들은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예쁘네요"라는 말 한마디 건네면 서운함이 싹 가실텐데 ㅋㅋ 그저 '그렇구나' 라는 표정이다. 아빠 눈엔 너무나 귀엽고 예쁜 딸인데... 특히 점점 커가면서 눈매가 날 닮아가는 것 같아 흐믓하다. (그런데 도대체 코는 누굴 닮은 거야?) 날 닮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니 참 신기하다. 입은 또 어떤가. 병치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나만큼이나 작은 입이 참 마음에 든다.  

그런데 남자같이 생긴 것과 여자같이 생긴 것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우리 아기를 보면서 느닷없이 이런 생각에 빠져봤다. 전체적인 얼굴의 윤곽선일까. 아니면 마음의 창이라는 눈일까. 섹시함을 드러내기도 하는 입술에 있을까....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건 헤어스타일이었다. 국민할매 김태원의 CF에서 치렁치렁한 뒷머리로 인해 여자로 오인한 남자의 모습처럼 말이다. 반대로 과감하게 삭발을 한 여자가 화장까지 안한다면 남자와 구별하기가 쉽진 않다. 우리 아기도 그나마 모자를 씌우면 여자에 더 가까워진다. 그런데... 이거 굉장한 선입견 아닐까. 100년 전만 해도 똑같이 댕기머리를 하면서 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옷차림은 또 어떤가. 150여년전 여성해방운동의 한 방편으로 여자 바지가 등장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적 차이가 만들어낸 외모적 차이. 그리고 그것을 극대화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사회가 있다면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은 그런 차별을 공고화하는 족쇄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여자와 남자라는 차이를 외모에서 구현해내는 것은 찬성한다.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서 다양성 또한 드러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야기가 갑자기 삼천포로 흘러가긴 했지만, 아무튼 뭐, 남자처럼 생겼으면 어떻고, 여자처럼 생겼으면 어떠냐. 우리 아기가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길 바랄 뿐이다.  

떡두꺼비 같은 내 딸아. 생김새야 커가면서 변할텐데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다만 얼굴 속 표정은 네가 만들어가는 것이니, 온화하고 평온한 모습을 가졌으면 좋겠구나. 지금처럼 환한 미소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듯이, 다른 이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그런 얼굴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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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7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12-10-18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정말 반갑네요. 이카루 님도 잘 계시죠. 아이를 통해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것도 너~~~무 많이. 종종 마실 나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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