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컬처 - 거짓과 편법을 부추기는 문화
데이비드 캘러헌 지음, 강미경 옮김 / 서돌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미국사회 전역에 만연해 있는 속임수 문화를 반영한다. 원래 속임수는 들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그 때문에 그런 행동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미국인이 많은 분야에서 갈수록 속임수에 기대고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대해 점차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다들 그렇게 할 때 또는 다들 그렇게 한다고 여겨질 때 속임수 문화가 모습을 드러낸다.  

 

자유시장의 도덕률이 확산되면서 사기의 유혹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경쟁이 미덕이라면, 탐욕도 미덕이라면, 문제의 소지가 많은 극한 행동 또한 미덕이다. 원칙적으로 힘이 곧 정의다 라는 생각에 동의하는 미국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러한 생각은 현재 우리 사회전체에 만연해 있으며, 신종 사기 대부분이 소득과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성공하는 계층의 막강한 영향력은 레오나 험슬리가 하찮은 사람들이라고 지칭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법규는 자신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오만한 생각을 낳았다. 이러한 오만은 물질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도덕적으로도 우월하다고 여기는 문화가 만들어낸 그릇된 망상에 근거한다. 아울러 현실에 근거하기도 한다. 성공하는 계층은 항상은 아니더라도 속임수를 쓰고도 종종 피해간다. 첩멀을 ㅂ맏는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에 대한 여론을 유리하게 돌려놓은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데이비드 사이먼이 엘리트의 일탈이라고 명명한 행동을 저지르고 나서 명예를 회복하는데 드는 수고는 최근 들어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손익계산만을 문제 삼는 상업주의가 부자와 유명인사의 성취를 찬양하면서 언론의 임무를 비판 어리 ㄴ취재보다 선정 보도에 치중하게 만든 결과다.  

 

경제 사정이 넉넉지 않은 서민들에게 속임수를 써서라도 수익을 올리라는 압력이 주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고 싶은가? 답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사람들은 경제적인 안정 앞에서 정직성을 희생한다.  

사회과학자들은 극심한 빈부격차의 원인을 둘러싸고 오래전부터 갑론을박해왔다. 이 문제와 관련해 과학기술의 변화와 세계화가 가장 큰 주범으로 꼽힌다. 하지만 학자들은 기업을 인ㅅ핵하고 야비하게 만들고, 결국 형평법 폐지로까지 이어진 성과주의 사업 전략을 비난하기도 한다.  

 

승자와 패자 사이의 극심한 격차는 개인ㅇ츼 정직성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승자가 그 어느 때본다 큰 몫을 책기고, 패자는 일자리를 잃거나 돈을 벌어보야 생활비에도 미칯지 못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대가를 치러햐 하는 사회에서 점점 많은 사람이 승자가 되기 ㅜ이해선 무슨 짓이든 기꺼이 하려고 든다. 이는 속임수 문화는 이해하는 데 매ㅔ우 중요한 요소다. 실패에 따르는 대가가 클수록, 시어스의 수리공이나 오늘날의 수많은 변호사처럼 심한 압력을 느낄 수록 속임수의 유혹은 강해진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공에 뒫따르는 보상이 클수록, 속임수가 갑부로살아가느냐 그날 벌어 그날 살아가느냐의차이를 만들어낼수록 그 유혹은 강해진다. 상황 인식이 이런 식일 경우 사람들은 정직성 따위는 쉽게 내팽개칠 것이다.  

자유방임주의 이데올로기는 불평등은 원래 당연하지만 모두가 부자가 된다면 더욱더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큰 폭의 소독 격차는 자기가 버는 돈의 액수에 만족해야 마땅한 사람들의 정직성에 도 악영향을 미친다.  

돈, 사회적 지위, 행복의 상관관계를 다룬 연구들은 다음과 같은 개념, 즉 사람들은 급료 액수보다 경제 서열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위치에 더 많이 신경쓴다는 개념을 뒷받침해준다. 생물학자와 건강 전문가의 연구 결과 역시 서열이 낮을 수록 자긍심에 피해를 입기 쉬우며, 스트르스에0 노출될 확률이 높아 건강을 해칠 염려가 크다고 주장한다. 장기간에 걸쳐 수천 명의 공무원을 대상으로 실시된 영국의 한 유명한 연구는 음식을 주의하고 금연을 했는데도 지위가 낮을 수록 빨리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스트레스와 낮은 업무 권한이 수명을 단축시킨 요인으로 지목되었다.  

불신의 증가에 대한 논의는 오래전부터 있어왖지만,학자들이 불신을 불평등과 연관시킥시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 둘 사이에 연관관계가 있다느 ㄴ견해는 어느 정도는 상식에 근거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경제적으로 뒤처져 있고, 체계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할 경우 세상을 비관하면서 원망에 사로잡히기 쉽다. 반대로 신뢰의 감정은 미래를 낙관하고 다른 사람에게 선의를 품을 때 생겨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 한 명품 중독자의 브랜드 결별기
닐 부어맨 지음, 최기철.윤성호 옮김 / 미래의창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저자 닐 부어맨은 한때 명품중독증에 걸렸다. 사람을 대할 때면 그 사람이 무슨 옷과 신발, 가방 등을 걸치고 있는지로 캐릭터를 판단했다. 자신 또한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서 브랜드의 종류를 바꿔가며 스타일을 연출했다.

그러나 어느날 이런 자신이 허망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접하게 됐다. 행복해지기 위해 명품을 구입했지만 행복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자꾸 더 불안해지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결심하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브랜드 제품을 다 불태워버리기로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블로그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자 수많은 네티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유명해지기 위해 별의별 짓거리를 꾸민다라거나 왜 태우느냐 그대신 기증해라 라거나... 비판을 넘어선 모욕적인 언사도 많았다. 물론 그의 행동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자 저자는 망설이기 시작했다.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이라도 다시 명품과의 이별을 철회하고 친하게 지내볼까. 그래서 공부하기 시작한다. 나는 왜 허망함을 느꼈을까 하고.

그 과정에서 광고라는 것의 속성을 접하게 된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라 했으니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알게 됐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이 현재 처한 자신의 상황을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들고, 이상적인 모델이니 이미지를 통해 상품을 구입했을 때 자신도 그들처럼, 또는 그 이미지처럼 행복해질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바로 광고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환상을 쫓아 소비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소비는 행복의 그림자일뿐 행복 그 자체는 아니였다. 쫓아가면 다시 달아나고 또 쫓아가면 한발자국 멀어져가버린다.

그래서 저자는 명품 브랜드를 다 불태워버리고 꼭 필요한 물건만을 구입해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과정 또한 결코 만만치않다. 브랜드 없는 상품을 구입하기란 하늘의 별따기가 되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품을 사기 위해 벌어야 하고 벌기 위해선 일해야 하고, 그 스트레스는 명품으로 푸는 악순환에서 벗어나보니 세상을 달라져 보였다. 덜 쓰고 덜 일하고 늘어난 시간은 가족과 보내거나 자기계발에 쓴다.

그런데 욕망을 자극하는 소비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을까. 소위 미래 산업의 하나인 디자인 시대를 거부하는듯한 인상을 풍기는 이 말은 미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간다. 디자인이라는 것 또한 인간의 필요인가 아니면 헛된 욕망인가. 그러나 책을 잘 읽어보면 이 질문은 다르게 바뀌어야 한다. 디자인 또한 우리가 살아가며 필요로 하는 소중한 것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에 브랜드가 붙으면서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바로 그 과정에서 허영이 깃들고 욕망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허영과 욕망이 자본주의를 힘차게 돌아가도록 만드는 영양분이 된다. 누구나 갖고 싶은 펜트하우스, 또는 보트에의 욕망말이다. 희귀하면 희귀할 수록 더욱 더 갖고 싶은 욕망이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끌어간다.

과연 우리는 그 욕망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날려버릴 수 있을까. 저자의 퍼포먼스가 부싯돌의 작은 불꽃이라도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 한 명품 중독자의 브랜드 결별기
닐 부어맨 지음, 최기철.윤성호 옮김 / 미래의창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저자는 악마였을지도 모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가정하에서 말이다. 그래서 과감히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선언한다.

저자는 명품 중독증에 걸렸다. 어렸을 적 브랜드없는 신발과 옷 때문에 왕따 당한 경험이 그를 명품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프라다의 여주인공처럼 차츰 명품에 젖어든 것이다.

내 주위 사람들은 내가 날마다 몸에 걸치고 다니는 브랜드 로고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23쪽)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명품을 걸친다고 해서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것은 한낱 착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은 물론 내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 적용하는 나의 가치 기준이 알맹이 없는 허망한 것들이라는 자각의 순간이 내게 닥쳐오고야 말았다....나는 누가 뭐래도 행복했어야 마땅하다... 이런 저런 친구도 많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직업도 있고, 유명 브랜드의 명품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허무함을 느낀다. 속았다는 생각이든다. 환상에서 깨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41쪽)

그래서 그는 과감히 명품으로부터 벗어나기로 작정했다. 어떻게. 마치 담배를 끊듯, 술을 끊듯 한번에 확실하게. 그러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브랜드제품을 불태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블로그에 옮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걸 왜 태우냐? 차라리 기증하라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쇼맨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저자는 그래서 갈팡질팡한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하며 후회도 든다. 그러나 차츰 자신이 옳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해 불만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광고 속 제품을 사면 그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부추긴다. 현재의 자신보다 더 나은 모습이 될 수 있다고 부추긴다. 광고는 불안감이라는 것 때문에 먹혀들고 효과를 낸다... 광고는 자기들이 광고하는 그 물건을 가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불안감을 조장한다.(44쪽) 

상품을 사람들의 정서나 느낌과 연결시키면 사람들이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버네이즈는 깨달았다. 사람들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에 대해 파악하면 전혀 엉뚱한 물건을 갖고 싶도록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88쪽)

사람들이 브랜드 제품을 구입함으로써 충족시키고자 하는 정서적 욕구 대신 해로운 정서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브랜드는 사람들에게 탐욕, 대인기피증, 열등감, 질투심 등을 초래할 수 있다. (152쪽)

당신이 추구하는 행복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우리는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절정의 행복을 맛보기도 하지만 슬픔의 나락으로 추락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은 그 양극단의 중간쯤 된다고 할 수 있지요. 우리가 기대할 수 있고, 또한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는 결국 일종의 만족감입니다. (173쪽)

그 만족감을 위해 사람들은 브랜드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 만족의 순간을 찰나에 그치고 만다. 보다 새로운 보다 좋은 것을 찾도록 만드는 광고들에 휩싸여 불안감만 커지게 될 뿐인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욕구에 의해서 소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욕구라는 것은 감성적인 브랜드 광고에 의해 교묘히 만들어지고 조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210쪽)

소비문화는 오늘날의 대량소비사회에서 강조되는 소유가 곧 존재라는 강박관념과 완벽한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로 특징지어지는 소비의 사회문화적이고 경험적이며 상징적이고 이상화된 측면을 통해 가장 잘 조망해 볼 수 있다... 이상화된 이미지의 뉘앙스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이들은 결국 물질적인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중심주제에서의 변형에 불과할 것이다.(248쪽)

명품중독증은 현대사회의 소비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소비문화란 곧 환경문제와도 직결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불필요한 소비를 용인하면서 각 가정 내 불필요한 등 끄기 운동을 통해 환경파괴 문제에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발상은 정상이 아니다.(300쪽)

그러나 사람들의 이성이나 도덕, 윤리에 호소한다 하더라도 감성적 측면에서 이미 마케터들에 의해 점령당한 소비자들은 그 행동을 쉽사리 바꾸지 못한다.

비록 대중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우려를 갖는다 할지라도 이 우려는 그들이 좋아하는 브랜드에 대한 감정적 애착마저 끊어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는 못하다는 말이다. (304쪽) 그 무언가로 인해 소비자들은 원가의 수십 배가 넘는 과도한 가격이 책정된 제품을 계속해서 구입한다. 그것은 바로 브랜드에 대한 뿌리 깊은 감정적 애착이다. (308쪽)

그래서 저자의 행동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명품 브랜드의 화형식. 이것은 그냥 쇼가 아니다.

소비를 위해 노동하고, 노동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소비해야하는 끝없는 악순환은 불합리하다. 노동의 강도가 클수록 우리는 보다 더 많은 것을 소비해야 하고,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또 그만큼 더 노동해야만 하는 이와 같은 조건을 마르쿠제는 불행의 도취라고 불렀다.(315쪽)

마르쿠제에 있어 진정한 자유란 경제로부터의 자유, 일상의 생존경쟁으로부터의 자유, 그날그날의 생계유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러한 삶이 불가능한 이유는 소비에 대한 감정적 의존 때문이다. (314쪽)

소비자로서의 자유를 행사한다는 것이 BMW나 벤츠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바람직한 소비 습관은 다름 아닌, 꼭 필요할 때만 소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소박함에 기반을 둔 생활방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325쪽) 우리는 더 단순한 형태의 삶으로 하향 이동해야 한다. 소비를 줄이면 자연스레 노동에 투여되는 시간도 감소할 것이다. 그렇게 획득된 시간적 여유를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활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전제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이야기로 들린다면 그 이유는 하나다. 우리가 복잡한 삶을 사는데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32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레미 리프킨이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까지 세상을 이끌어온 아메리칸 드림의 생각으로는 더이상 드림에 걸맞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반대선상에 있는 동양적 사고가 해결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과 동양적 사고를 융합한 유러피언 드림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메리칸 드림과 유러피언 드림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메리칸 드림이란 무한한 기회를 강조하며 물질적인 부를 쌓는 것을 성공이라 본다. 무한한 기회란 자율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자율이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영역 밖의 상황에 영향받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를 축적해야 한다. 부는 독립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은 배타성을 띄며 이 배타성이 안전을 보장해준다. 이러한 현세의 행복은 인내와 자기개선, 자립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내세의 구원추구라는 청교도적 근로 윤리와 맞물린다.

하지만 이런 아메리칸 드림의 장점이 점점 변질되면서 물질적 부를 운이나 뻔뻔스러움으로 추구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팽배해졌고 자기 이익추구라는 것도 단순히 부의 축적에서 쾌락과 심리적 생존으로 변화하게 됐다. 이것은 베이비붐세대 부모가 이미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게 되면서 젊은 세대들은 부에 대한 동기유발이 없어지고 대신 쾌락과 경험만에 사로잡혀 권태에 빠지게 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아메리칸 드림적 성격은 정부보다는 개인을 중시하게 됨으로써 사회 경제적 문제에 대해 비영리단체가 중심이 되어 움직이게 된다. 또한 기회균등의 나라이지 결과 균등의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에 자신의 운명은 자신에게 달렸다고 생각한다. 

또한 미국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지금까지 생산성을 지녀 왔다. 단일 언어와 함께 값싼 노동력, 천연자원이 생산성과 효율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효율성에 대해선 유럽인들은 반대한다. 인간이 효율성만 따진다면 인간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러피언 드림은 무엇인가.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 관계를, 동화보다는 문화적 다양성을, 부의 축적보다는 삶의 질을, 무제한적 발전보다는 환경보존과 지속가능한 개발을, 무자비한 노력보다는 심오한 놀이를, 재산권보다는 보편적 인권과 자연의 권리를, 일방적 무력행사보다는 다원적 협력을 중시하는 것이 유러피언 드림의 기본 생각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자유와 달리 유러피언의 자유는 어딘가 소속되어 있음으로 보장된다. 타인과 수많은 상호의존관계속에서 안전이 보장됨으로써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과 유럽의 지리적 환경 차이에 기인한다. 성을 중심으로 성 안에서 오밀조밀하게 생활했던 유렵과 광활한 대지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배타적이어야 했던 미국의 차이가 자유에 대한 개념에도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미국은 무료 교육기회를 제공한 후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부과한다. 반면 유럽은 적자생존 시장에서 사회가 균형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뒤처지는 사람이 없도록 불운한 사람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처럼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시장자본주의적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현재까지 발전을 이끌어온 아메리칸 드림이 유러피언 드림으로 바뀌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있을까.

저자는 공감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네가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정신이야말로 새로운 사회를 열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투쟁과 경쟁의 진화론이 상호관계와 공생의 생태학으로 바뀌듯 개별화에서 통합으로 바뀌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감은 단순히 이타주의나 온정보다는 취약성(핵에 대한 위험성과 같은)에 대한 인식과 안전의 필요성에서 비롯되어야 그 바탕이 튼튼해진다. 이런 공감은 연습과 활력이 필요하다. 의사소통의 궁극적 표현이 공감이 된다. 인간의 삶이란 어찌보면 이런 공감의 확대과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현재와 같이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이런 공감능력을 더욱 키워줄 수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라 할 수 있다.

시장의 변화는 또 어떤가. 현재 아마존과 냅스터가 경제모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단초를 보여준다. 아마존에서는 실제 책이나 CD를 판매한다. 그러나 냅스터는 시간을 판매한다. 소비자를 음악 네트워크의 일부, 일원으로 만들어 콘텐트를 제공해 접근권을 판매하는 것이다. 이는 시장이 적대적 공공장소, 즉 싸게 사고 비싸게 팔아야 하는 곳인데 비해 새로운 네트워크는 다른 사람과 전체 이익을 최대화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구조가 된다. 구매자가 부담해야 했던 위험부담을 모두가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네트워크는 내것도 네것이 되는 것, 즉 소유와 사용권을 공유하는 중에 이익을 창출한다. 하지만 이때 주권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만 한다.

세상의 이런 변화는 개인의 발전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일생은 전체에서 자아를 분리해 나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아가 정체성을 주장하면서 어머니와 분리되고, 청소년기에는 가족과 분리되며 성인 초기에는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이 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개인은 점차 넓어지는 사회적, 환경적 관계에 새롭게 동화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즉 점점 강해지는 개인화 노력과 더욱 커지는 사회적 의무 사이에서 미묘하게 균형을 맞춰가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나'라는 개인은 성장을 하다 어느 수준에서 정체에 빠지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공감의 능력을 확대하지 못하고 아메리칸 드림이 강조하는 독립성에서 멈춰서 있는 것이다. 고전적 시장에 대한 반발감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트워크로의 전환은 이루지 못한 채 마지막 시장의 단물을 빨아먹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도 든다. 독립의 장점만에 취해 있다보니 정녕 네트워크가 주는 기쁨을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공감의 능력을 점점 떨어지고 점차 누에고치처럼 안으로만 파고든다. 과연 '나'는 성장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독립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타인 또는 네트워크에 쏟을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 한가닥 희망을 가져본다.

스스로 일어서 스스로 걸어가 손을 내밀어 상대의 손을 잡아보는 것 속에 유러피언 드림은 살아 숨쉬고 있을지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책과 자본주의
김영민 지음 / 늘봄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우리 고유의 말이지만 일상용어에서 사용하지 않은 것을 접할 때면 사전을 뒤적일 수밖에 없다. 대학 이후 한글을 읽으면서 국어사전을 펼쳐야 할 때가 별로 없을뿐더러, 설령 알지 못하는 단어라 하더라도 문맥상 이해해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 책, 사전이 필요했다. 깨단하다, 반지빠르다, 명개 등은 어림짐작 뜻을 알겠지만 적확한 뜻을 위해 사전을 이용해야 했다. 물론 요즘은 인터넷 사전으로 쉽게 그 뜻을 찾을 수 있어 편해지긴 했지만 아무튼 책을 읽는 속도를 더디게 만든다. 게다가 문체 또한 친숙하지 않아 머릿속에서 문맥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장점은 자본주의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능토록 한다는 것에 있다. 물론 개인적으론 전체적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한 관계로 오히려 아포리즘 형식으로 다가오지만 그 번뜩임만은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아파트 관리비와 그 실제가 일치한다면 이데올로기도 유토피아도 힘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이론에 틈이 생기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속의 본질이고 환상의 체계와 무리의 정치는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계속될 것이다. (51쪽)

이론대로 현실이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어딘가 어긋남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어긋남을 알려고 드는 순간 그 틈을 통해 이익을 획득하는 권력과 마주치게 된다. 흔히 말하는 알면 다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투쟁의 역사로 표현될 수도 있겠다. 그 간극을 줄이고자 노력하는 쪽으로 세상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진보 또는 발전이라는 이름을 얻을 것이다.

물론 이론과 실제의 차이는 변주를 일으키고 그 변주가 삶을 풍성하게 만들수도 있다. 간격의 틈을 메우는 것뿐만 아니라 그 변주를 즐겁도록 만드는 것 또한 다른 이름의 진보가 될 수도 있겠다. 이것은 그 차이에 대해 무관심한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어떻던가 현실은.

몸은 의도를 하염없이 비껴가고(113쪽) 무관심이 구조적으로 관심의 흉내를 내는 것으로부터 우리들의 자본주의는 제 몫을 다한다.(165쪽)

간격을 메우는 것도 변주도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움직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제자리에서 스피드의 쾌락을 제공함으로써, 또는 다른 쾌락을 통해 그 늪에 빠지도록 만든다. 관심의 영역을 바꿈으로써 무관심하도록 이끄는 셈이다.

그러한 것들을 이겨내고자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자들은 매사를 의도 중심으로 이해하려하지만 원천적 한계를 단숨에 드러내게 된다. 진리는 늘 진실보다 한발 늦은 엉성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늪에 빠뜨리는 자본주의라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낭비와 잉여에서 스스로의 취향을 티내고 권력의지를 과시하고 노동과 축적의 세계에 결락한 존재감을 보충한다.(214쪽) 소비가 사용가치에 머무는 적은 없었고, 그리고 인간의 소비는 언제나 사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는 또 어떤가.

주체는 곧 타자와의 교환방식이자 그 내용이며, 그 어긋남과 결락에 대한 자아의 상징적 대응 방식이다.(225쪽) 어리석은 자의 특징은 자기 생각의 비용을 치르느라고 인생을 허비하는 것(250쪽)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내 몸을 이끌고 자본주의라는 세상에서 산책에 나설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 변주에 주목해야 할 듯싶다. 무상한 삶 속에서 변주만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고, 차이에 무관심하지 않으면서 그 변주가 놀이가 된다면 삶은 조금 더 흥미로워지지 않을까. 변주란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낭비와 잉여로부터 벗어난 여유로부터 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무소유의 여유와 텅 빔의 여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