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 - 미국 없는 세계에서 어떤 국가가 부상하고 어떤 국가가 몰락하는가
피터 자이한 지음, 홍지수 옮김 / 김앤김북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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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세를 바라보는 관점 중의 하나로 지정학이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은 한, 미, 일과 북, 중, 러 간의 해양과 대륙 세력 간 갈등이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는 곳이라 지정학적 해석에 눈길이 쏠린다. 


이책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의 저자인 피터 자이한은 지정학 전략가이자 글로벌 에너지 및 안보 전문가이다. 그는 지극히 미국 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이 책은 미국이 셰일가스를 발견하고 개발하게 되면서, 더이상 에너지를 수입할 필요가 없어져, 세계 질서 또는 안보를 위해 힘쓸 필요가 없어졌다고 평한다. 즉 미국은 자국 내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원, 에너지, 식량을 비롯해 안보까지 갖추고 있어, 지구가 평평할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미국이 세계 곳곳의 갈등이 벌어지는 곳에서 점차 발을 떼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세계는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으로 들린다. 


그리고 각자도생을 위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먼저 식량확보가 가능한 기후, 그리고 자국 내 원활한 물류, 미래 경제를 가능케하는 인구구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에너지와 식량의 수출과 수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는 해군의 힘을 꼽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지정학적 조건을 바탕으로 미래에 떠오를 나라로, 프랑스, 터키, 일본, 아르헨티나 등을 꼽는다. 


개인적으론 세계가 현재와 같은 평화적 무역 체계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 미국의 막강한 해군력(항공모함 등)에 있다는 관점에 흥미가 간다. 우리는 가끔 해적에 나포된 선박으로 인해 인질 등을 구하기 위한 협상에 나서는 정부의 모습을 뉴스에서 접하곤 했다. 생각해보면 하루에 수백, 수천 척의 배가 바다에 떠 있을텐데, 유조선을 포함, 다양한 선적들이 무사히 다닐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피터 자이한은 이런 평화적 무역이 바로 미군의 해군 덕분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굳이 이런 일을 도맡아 할 필요가 없어졌다 판단하고, 대양에 있는 미국의 해군을 철수시킨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멀어지면서-셰일 가스 덕으로 석유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자- 벌어지고 있는 중동의 변화를 보더라도, 미국의 움직임으로 인한 세계 정세의 변화는 결코 무시할 수 없어 보인다. 


한편으론 지금 우리의 시선은 미, 중 간의 대결구도에 쏠려 있는데, 피터 자이한은 머지않아 중국이 쇠퇴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물론 앞에서 말한 지정학적 조건이 불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예측 근거이다. 이또한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게 된 해군세력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세계 2위의 해군을 보유한 일본은 앞날이 창창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항공모함(2022년까지 3척, 2035년까지 6척 운항 계획)과 운항능력과 경험이 부족한 중국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지정학적 측면에서 미래가 어떨까. 피터 자이한이 말한 조건들을 살펴보면 식량자급률 20%대에, 초고령사회로 접어들고 있으며, 걸음마 단계인 해군까지... 결코 앞날은 밝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정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라도, 정말 세상이 미국의 방임으로 흘러갈지, 또 설사 미국이 방임한다면 이후 어떤 새로운 질서가 나타날지 등등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요인들이 나타날 것이다. 다만 다양한 관점 중 지정학적 관점에서도 식량 자급률과 저출산 해결 등 우리가 앞날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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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새로운 생각 - 우리는 더 이상 성장해서는 안 된다
마야 괴펠 지음, 김희상 옮김 / 나무생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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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세계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세계경제가 잠시 멈추면서 우리가 마주친 것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경제는 여전히 예전대로 성장하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잠시 맑았던 공기는 다시 미세먼지로 가득하고, 지구는 계속 달구어지고 있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는 어찌됐든 시간이 지나면 바이러스라는 속성상 결국 해결되어질 것이다. 다만 얼마나 빨리 해결되는가의 문제이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줄이기 위해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한 노력이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지구가 달구어지고 있는 위기는 어떤가. 폭염, 폭한, 폭우, 폭설 등 점차 기후변화의 혹독함을 자주 접하면서 그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삶에서는 동떨어진 느낌이다. 지구의 온도를 낮추자는 목소리는 들리지만, 그것을 위한 행동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이책 [미래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저자 마야 괴펠은 우리가 지구를 위한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더 늦기 전에 즉각 행동에 옮길 것을 주장한다. 

그가 책에서 내세운 여러가지 이유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 역설이다.


하나는 가치의 역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물과, 생존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는 다이아몬드는 그 가치에 있어서는 물이 훨씬 중요하지만, 그 가격은 다이아몬드가 수만 배 높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격, 즉 돈이 가치를 결정하는 듯 여겨지지만, 물과 다이아몬드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 지구는 물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그 가치는 엄청나지만 가격은 홀대받는 것. 하지만 공기와 자연이 공짜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대접할 순 없다. 진정한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또하나는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이스털린 역설이란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정체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의식주를 해결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이 생기고 난 이후에는 소득과 행복 간에는 비례관계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득을 더 얻기위한 노력보다는 행복을 얻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자본주의는 끝없는 성장을 추구하고, 이 성장이 행복을 보장할 것이라고 유혹한다. 물질에 대한 욕망을 끝없이 자극함으로써 자본주의는 그 힘을 키워가는 셈이다. 이런 성장의 논리는 지금의 화석연료가 가져온 폐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그린에너지를 택한다. 언뜻보면 지구를, 환경을 위한 정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막대한 에너지 소비 자체가 가져오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의 방법만을 바꾸고자 할 뿐 성장에 대한 집착은 여전하다. 지구를 살리기 위한, 아니 인류를 살리기 위해선 욕망을 덜어내고 성장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스털린 역설이 말해주는 듯하다. 


지구온난화가 가져오는 위기는 공유지의 비극을 닮았다. 지구라는 공유지를 개인(국가)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함으로써 지구는 황폐화되고 있다. 지구의 황폐화는 한 개인이나 국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전체 인류, 국가는 물론 후대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친다. 기후변화의 피해는 우리의 삶 전체를 흔들 수 있다. 영화 [돈룩업]에서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각자의 진영 논리로 인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종말을 맞듯, 우리는 지구온난화라는 혜성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음에도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미래를 위해 우리는 돈과 성장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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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역습 - 우리는 문명을 얻은 대신 무엇을 잃었는가
크리스토퍼 라이언 지음, 한진영 옮김 / 반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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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트허르 브레흐만의 책 [휴먼카인드]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아니 적어도 이기적이며 악하지는 않다는 증거를 들이댄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한 가지 드는 의문! 왜 이렇게 선한 인간들이 모여사는 지금, 현대인의 삶은 행복하지 않는 것일까? 인간이 이기적이다는 전제하에 굴러가고 있는 자본주의 탓인가? 전제를 잘못 세웠으니, 그 과정과 결과 또한 잘 될리가 없을테니 말이다. 


크리스토퍼 라이언은 책 [문명의 역습]에서 인간이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은 농업이 생겨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수렵채집으로 살고 있던 인간은 남녀노소가 모두 평등했고, 무리로부터 언제나 벗어나 새로운 무리에 합류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으며,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농업이 생겨나면서 권력, 계급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불평등이 생겨나 그 격차가 벌어지면서, 우리는 승부가 없는 지속적인 게임에서 이겨야만 하는, 그래서 끝을 맺어야 하는 게임에 빠져들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농업을 시작하게 된 것일까. 온화한 기후 덕에 풍부한 식량을 얻을 수 있어 인구가 증가하게 됐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줄어든 식량 탓으로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선택이 농업이었다는 가설. 하지만 초기엔 언제고 다시 수렵채집으로 돌아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서지 못한 채 농업이라는 늪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마치 브라이언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이 열기구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를 막기 위해 줄을 잡았다 열기구와 함께 공중으로 떠오른 후 결국 떨어져 죽은 사건처럼 말이다. 얼른 줄을 놓아야했음에도 불구하고 줄을 놓지 못한채 열기구와 함께 공중으로 떠오르듯 인류도 농업을 시작하고 나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농업은 축적을 낳았고, 이는 불평등의 씨앗이 되었다. 힘겨운 농업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이는 노예를 얻기 위한 전쟁 등 필연적으로 갈등을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문명의 역습]은 문명 이후의 인간의 삶이 발전했다는 생각은 오해이며, 오히려 수렵채집 시대의 인간이 행복한 삶을 누렸다는 것을 다양한 사료와 자료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 수렵채집 시대로 회귀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저자인 크리스토퍼 라이언이 과거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수렵채집 시대의 삶의 양식을 가져온다면 우리의 삶이 보다 행복해지지 않을까 상상해보고 있다. 


저자는 "자연분만, 가축의 방목과 인도적 도축, 유기농 채소와 과일, 평등한 기업조직, 공유경제, 남녀이분법을 벗어난 다양한 성, 유연한 인간관계, 성소수자들의 권리,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집과 개인경제, 대체의학, 환각제를 이용한 심리치료, 이 모든 유행의 뿌리는 고대인들이 영위하던 삶이다"고 말한다. 이를 근거로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수직적인 기업구조를 동료 진보주의 네트워크와 수평적인 조직으로 전환하고,  각 지역에서 청정에너지를 생산하며, 전쟁 비용으로 쓸 돈을 모아 전 세계적 차원의 기본소득제를 실시하고, 자녀 갖지 않기를 장려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수렵채집 시대의 삶의 양식에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이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은 몽상가처럼 느껴진다. 전 세계적 합의라는 것이 지금의 현실에서 가능한 것인지 의심이 가기 때문이다. 


[휴먼카인드]와 [문명의 역습]을 통해 생각하게 된 것은 현대인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의 본성에 있다기 보다는 사회 환경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불안이 우리를 불평등으로 몰아갔고, 불만이 우리를 폭주하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후위기로 언제 굶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생기면서 농사를 통해 축적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수렵채집 시대 인류는 저장을 하지 않았으며, 혹여 누군가 저장을 했다 하더라도 1년이 지나갈 즈음 축제를 통해 모두 소진해버렸다. 축적을 행한 이를 영웅시하지 않음으로써 축적에 대한 욕망이 억제되었다. 하지만 기후 변화가 가져온 불안이 이런 소진의 시대를 끝내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 우리가 겪는 기후변화 또한 우리의 불안을 자극해 더욱 불평등의 격차를 키워가는 것이 아닐지 걱정이 되는 부분이다. 

이런 불안으로 비롯된 축적은 계급을 낳았고, 점차 불만을 불러왔으리라. 누군가의 축적은 누군가의 가난을 의미했다.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모두 불만투성이게 되었을 것이다. 보다 더 가지지 못했다는 불만은 상대를 누르고 더 많이 차지해야하는 경쟁으로 치닫게 만들었을 것이다. 불만은 무한경쟁으로 우리를 내몰고, 그 경쟁이 발전을 가져온 양 보이지만, 불만은 결코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못하기에, 우리는 경쟁이라는 끝없는 폭주기관차에 몸을 실었다고 여겨진다. 


수렵채집 시대의 행복한 인류란 결국 불안과 불만이 없는 인류였지 않았을까. 불안과 불만이 없는 삶이란 결국 축적이 없는 무소유의 삶일 수밖에 없다. 두 책을 통해 결국 우리의 불행은 '부'로부터 또는 '부'를 바라보면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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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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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선 최소 굶어 죽는 일은 없을까. 굶어 죽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해볼 수 있을까.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아직까지 뉴스엔 굶어 죽었다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굶어 죽는 이들이 있다. 영양실조로 인해 눈이 머는 아이들이 매년 700만명이 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보면 이렇게 굶어죽는 이들에게 지금 당장 먹을 수 있는 것을 비행기에 실어 떨어뜨려 주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한다. 언뜻 생각할 땐 먹을게 없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급선무처럼 느껴지는데 말이다. 이렇게 먹을 것을 눈앞에 주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계속된 굶주림 이후 갑작스레 아무거나 먹는 것이 도리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긴 시간 단식을 한 이후 회복식을 하고 몸이 컨디션을 찾았을 때 일반적인 식사를 하는 이유와 같다. 그래서 의사와 같은 전문성을 지닌 이들이 정상적인 몸 상태를 회복할 수 있도록 먹는 방법을 가르치며 차근차근 몸이 회복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세계는 이런 전문가와 식량을 굶주림의 현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줄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음에도 부패한 권력과 행정, 독점적 곡물기업, 세계적 금융세력 등으로 인해 극히 일부에서 겨우 굶주림을 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코로나19를 극복하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무턱대고 지급되는 식량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재난지원금이나 기본소득은 위기를 극복하는 최소한의 긴급처방약처럼 보이지만 혹여 땜방식 처방으로 인한 독이 될 여지는 없는 것일까.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에게 지금 당장 먹을 것도 주어져야 하지만, 이들이 앞으로도 굶어죽지 않고 자급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데 더 힘을 쏟는게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지금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돈>은 분명 급한 불을 끄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자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지 못하면, 결국 그 돈은 가진자들에게 돌아가 생계의 위협은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 지원금이나 기본소득과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은, 돈만으로는 깨진 독에 물 붓는 것에 다름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과, 그리고 새어나간 물은 결국 내를 거쳐 강을 지나 바다로 흘러가버릴 것이기에, 자생할 수 있는 기본 시스템을 갖추는데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재난 시기 월세의 형태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실업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직업교육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등등 돈만 주면 해결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전문가의 세심한 손길이 필요하지 않을까. 잠깐 목 마른 이에게 물을 주는 것은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현재의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이 잠깐 목 마른 상태라면 좋겠지만). 하지만 주위에 샘이 말라 목 마른 이들에겐 물을 주는 것과 함께 새로운 샘을 팔 수 있는 도구와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병행되어야만 한다. 이 도구와 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풍성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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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재난 국가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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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자영업자들은 죽어나가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휘청거린다. 재난은 취약계층에게 더욱 잔인하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실업상태에 빠져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영끌해서 코인과 주식에 투자해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이 늘어난다.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은 아직도 견고하고, 결혼과 출산 등으로 인한 경력 단절은 사다리를 부숴놓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아이를 낳는 일은 주저되고, 출산률은 최저를 경신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헬 조선'의 모습이다.


대한민국의 위태로움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베이비붐 세대와 청년세대, 남성과 여성 등등의 불평등의 격차가 커짐으로써 더욱 위험해졌고, 그 불평등은 불공정이라는 화두를 낳았다. 공정을 향한 열망이 불평등한 것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열망과 맞닿아 있는지, 아니면 불평등함 속에서 최상위로 가는 길이 열려있기를 바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정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분노로 폭발하고 있다. 


도대체 왜(?), 어쩌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불공정과 불평등으로 인해 화가 잔뜩 쌓여 비틀거리고 있는 것일까. 저자인 이철승 교수는 그것의 원인으로 연공제를 들고 있다. 물론 연공제 단독범은 아니다. 세대와 인구구조와 맞물리면서 이 연공제가 대한민국을 위기로 몰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와 2차 베이비붐 세대는 연공제의 단 맛을 최상으로 즐기는 위치에 서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연공제의 단 맛 이면에는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의 증가가 도사리고 있다. 직무와 직능제로의 변화를 통해, 그리고 직무와 직능간 평가의 차이의 제한을 통해 불공정과 불평등을 해결할 단초가 있음에도 우리는 연공제에 묶여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토록 연공제에 목을 매달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쌀 생산국가로서의 문화, 제도로 설명한다. 밀의 재배는 한 개인이나 가족이 거뜬하게 해낼 수 있지만, 쌀은 엄청난 규모의 물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수로 체계와 수자원의 확보를 위한 마을 전체를 넘어선 국가적 규모의 계획과 노동이 필요로 한다. 이는 자연스레 협력을 필요로 하며, 이 협력은 표준화와 평균화가 개입된다. 즉 내가 다른 이의 논에 딱 내가 받은만큼의 기술과 노동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쌀 농사에 있어서 기술이란 경험의 축적이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나이를 먹은 농부들은 자연스레 대접을 받는 위치에 선다. 이 농부들은 또한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 기술을 대물림하는 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 한편 쌀 농사에 있어서 공동의 노동은 오히려 수확의 차이에서 개인의 노력 차를 반영함으로써 질시의 씨앗이 된다. 또한 이런 노동의 동원을 조정하는 권력에 얼마나 가깝게 있느냐에 따라 노동력의 조달이 손쉬워지면서 수확의 격차는 벌어지게 된다. 이런 문화적 전통은 아마도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벼 생산의 체계가 고스란히 공장으로 옮겨지면서 우리는 연공제라는 제도를 자연스레 이식했다. 이 연공제는 뛰어난 기술을 가진 이보다 오래 근무한 이에게 보다 많은 보상을 제공한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는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산업생태계를 바꿀 정도로 변모했다. 연공제는 베이비붐 세대들이 활약했던 전성기에 우리의 산업생산력을 이끌었던 제도였지만, 지금은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독이 되어버렸다. 


<쌀 재난 국가>라는 책을 통해 대한민국의 위기의 근원은 연공제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철승 교수의 진단은 곱씹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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