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기 좋은 날 - 제136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아오야마 나나에 지음, 정유리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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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는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때론 그 관계의 끈을 다 놓아버리고, 오직 혼자서 있고 싶다고 외쳐댈 때도 있겠지만, 잠시다. 외로움이라고 부르든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간에 그 고독 때문에 또다시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관계의 소멸과 생성의 반복을 인생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소설은 이제 갓 스무살의 치즈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회라는 무대로 들어가기 전의 두려움과 고독을 이야기한다. 그녀와 함께 생활하게 되는 사람은 먼 친척뻘의 할머니 깅코. 나이를 먹을 수록 지혜도 커지는 걸까. 아무튼 깅코의 삶이 치즈의 삶에 서서히 스며들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치즈에게 다가왔다 떠나가는 남자친구, 깅코의 남자친구 할아버지 등이 정말로 아주 잔잔하게 삶이란 관계의 연속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연 그 관계란 어떻게 형성이 될까.

그렇게 아는 사람들을 교체해간다. 낯선 사람들 속에 자신을 내던져본다.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그저 눈을 뜨면 닥쳐오는 그날그날을 혼자서 어떻게든 헤쳐 나간다. (188쪽)

치즈가 비로소 사회로 발을 내디디면서 느끼게 되는 관계의 정의다. 관계란 때론 희망으로 때론 절망으로 다가온다. 두근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때로는 딱딱하게 굳은 심장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갈 뿐이다. 누군가가 그 관계맺기의 방법을 가르쳐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해가는 관계 속에서의 수많은 순간들마다 정답이 있다면 또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누군가 옳다 그르다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불안한 것이다. 산처럼 쌓인 바나나들 속에서 한 송이를 골라내는 일에도 나는 이걸 고르길 잘한 걸까 하고 먹을 때까지도 끙끙 고민을 하겠지.(178쪽)

젠장. 정말 내가 잘 한 것일까. 고민도 하고 후회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한다.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인 사람들간의 관계맺기. 

나는 누군가를 나와 튼튼히 연결해두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다. 혼자서 살아보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떠나보내는 게 아니라 한 번은 자신이 먼저 떠나보고 싶다. 나갈까? 깨끗하게 연을 끊고, 누구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또다시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겠지. 그리고 문득 깨닫고 보면, 파국을 맞이하고 있겠지. 그 의미 따윈 생각하지 않고 그저 되풀이하고 있다 보면 인생도 결국 끝이 나게 될까?(150쪽)

극도의 허무감이 밀려올 때 차라리 나이들었으면 하고 바란다. 사람들에 치이고, 혼자서도 치이고. 늙는다는 것은 이런 치임에 무뎌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노인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젊을 때가 정말 좋은 땔까요? 매사에 끙끙 앓고, 비관적이고, 피곤해요. 그런거, 이제 다 지겨워요. - 젊을 때는 다들 무턱대고 손을 뻗으니까... 나처럼 나이가 들면, 내밀 수 있는 손도 점점 줄어드는 법이야.(151쪽)

내밀 수 있는 손이 줄어드는 게 나이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점점 무덤덤해지는 삶일까.

전, 젊을 때 허무감을 다 써버리고 싶어요. 노인이 됐을 때 허무하지 않게.-치즈 짱, 젊어서 그런 걸 다 써버리면 안돼. 좋은 것만 남겨두면 나중에 나이 먹어서 죽는 게 싫어져.-싫으세요, 죽는 거?-그럼. 당연히 싫지. 괴롭거나 아픈 건 몇 살을 먹어도 두려운 법이야.(60쪽)

아마, 그럴 것이다. 10대 때보다 20대 때보다 30대가 되면 세상을 좀더 잘 알고, 잘 대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절대 아니었다. 다만 관계 속에서 터져나오는 감정의 일렁임을 표정에 드러내는 강도만 달라졌을 뿐이다. 마음 속에서의 일렁임은 큰 차이가 없지만 표정은 점점 무덤덤해진다. 그래서 오히려 더 슬퍼진다. 그런 자신의 표정을 바라볼 때면.

사람은 변한다는 것도요. 그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 말이에요. 변했으면 하는 부분은 안 변하고... 그 반대로 될 수 있는 지혜를 배울 수 있으면 좋은데.(176쪽)

그래서 세상은 그렇게 마음 먹은 것과 하등의 상관없이 흘러가고, 그 흘러가는 세월은 마음에 생채기를 남긴다. 때론 가벼운 긁힘 정도에서 끝나지만 때론 깊은 상처 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상처 위에 상처가 덧나기도 할 것이다. 아픔은 나이와 상관없이 전해져온다. 다만 펑펑 울거나 조용히 흐느끼는 정도의 차이일뿐. 또는 눈물을 집어 삼키기도 하고. 그래도 어쩔 것인가. 그렇게 흘러가는 것임을. 오늘도 아픈 가슴을 쥐어잡고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누군가가 깊게 패인 상처를 쓰다듬어주기만을 바라면서. 나 또한 누군가의 상처를 덧내기 보다 후시딘이라도 발라줄 수 있기를... 하지만 오늘도 난 스스로의 절망감에 누군가로부터 상처받았다고 혼자 슬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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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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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먼저 이 책을 거칠게 평가하자면, 흥미진진하지만 다소 투박하다라고 해야할 듯싶다. 기대되는 끝없는 상상력, 하지만 어딘가 모를 비약과 다급한 결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현재 지구처럼, 환경오염과 전쟁, 기아가 끊이지않고, 권력에 대한 투쟁과 자본에 대한 끝없는 탐욕 등으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지구를 탈출하고자, 파피용이라는 우주선을 만든다. 이 우주선은 새로운 인류를 시험하기 위해 14만 4천명을 선발해 태우고, 새로운 은하계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행성으로 1200년을 넘게 항해한다. 세대가 거듭되면서 결국 마지막에 남은 세대 중 남녀 두명만이 새로운 행성에 도착하고, 인류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려 한다.

소설의 재미는 과연 폭력적이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된 파피용에 올라탄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 변해가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꽤 흥미롭다. 이 과정에서 베르나르의 풍자가 돋보이기도 한다.

제 생각에 꼭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정치인, 군인, 목사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부도 군대도 종교도 없는 최초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권력과 폭력, 신앙 이 세가지야말로 대표적인 의존 형태지요.(98쪽)

하지만 정작 우주선의 사회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이 세가지에 휩싸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기폭제가 된 원인은 바로 치정에 의한 살인이었다. 그전까지 범죄 한 건 발생하지 않으면서도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던 사회는 이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가 도입되면서 급격하게 지구의 현 모습을 닮아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에게는 노예 기질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정말로 자유가 주어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어. 반대로 권위와 폭력 앞에서는 안도감을 느끼지.(중략) 그게 바로 인간이 지닌 역설이야. 더군다나 사람을 세뇌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공포라고.(216쪽)

지구와 닮은 사회로 나아가다 행성에 도착한 단 두명의 남녀. 과연 이들은 지구와는 다른 새로운 지구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들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번식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물론 인공수정이라는 다른 방법으로 해내기는 하지만. 그것도 아담을 연상시키는 갈비뼈의 세포를 통해서 말이다. 이것은 순전히 창세기를 연상시키는 의도적인 장면들이다.

어쨋든, 파피용이라는 우주선에서 최초의 범죄와 제도가 등장하게 된 계기가 치정이었던 것처럼, 새로운 지구의 첫 인류가 아이를 낳지 못한 이유도 그들의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때문이다. 거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거대함의 시발점을 남녀간의 사랑에 두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반면 거대담론에서 내비치는 인간에 대한 관점도 대비되고 있어 흥미롭다. 고통이야말로 인간을 진보시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욕망이야말로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인줄 알면서도 억제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쉽게 긍정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아담과 이브, 야훼에 대한 창세기가 우주 어디에선가 계속 되풀이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정이다. 상상력에 놀랍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그는 인간이 개미와 쥐 사이에 놓여있는 사회라고 보고 있다. 이타적 혼연일체의 개미와 이기적 개인주의의 쥐는 지구에서 가장 환경의 변화에 잘 적응하는 동물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그 둘 사이에 존재하면서도 스스로를 파멸시키려는 폭력적 유전자를 지닌 종족인가?

유토피아를 꿈꾸면서도 유토피아를 산산조각낸 파피용이라는 소설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세에서 계속 머물러야만 하는 종족이 바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서글픈 생각이 든 것은 왜일까. 새까만 우주 속에 푸른 빛을 띠는 지구. 세상은 어둠 속에서 그렇게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왠지 지금과 같은 현실은 파피용을 어디에선가 만들어봐야 겠다는 상상을 자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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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밴드왜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4
쇼지 유키야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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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의 역자가 전달하듯, 저자는 마치 TV 홈드라마의 각본을 쓰듯 소설을 써 나갔다. 홈드라마에 대한 오마쥬라고 해야할까.

4대가 함께 살고 있는 가족. 여든을 코앞에 둔 헌책방을 3대째 운영하고 있는 칸이치 영감과 그의 아들인 전설의 로커 가나토. 그리고 손주로 화가인 아이코, 그녀는 싱글맘으로 딸 카요가 있다. 손주인 콘은 돈을 썩 잘 벌지 못하는 프리라이터이고 그의 배다른 동생 아오는 투어가이드이면서 훈남이라고 해야할 듯싶다. 콘은 아미라는 아내와 사는데 콘과의 결혼을 반대한 친정집과는 여전히 절연 상태다. 이들 사이엔 아들 켄토가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소설마다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을 해결하는데 이 가족들은 열심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들은 문화와 문명에 관한 이런저런 문제라면 어떠한 일이든 만사 해결이라는 가훈을 철통같이 지키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추리물을 읽어나가는 듯한 재미까지 가세하면서 책은 재미를 더한다. 그리고 이 책의 내레이션은 칸이치 영감의 아내인 사치라는 할머니로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다. 객관적인듯하면서도 주관적인 시선과 함께, 귀신이라는 처지가 가지고 있는 이동의 편이성과 비밀에 대한 접근 가능성이라는 장점과 함께, 무엇인가 해주고 싶어도 행동을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함께 녹아있는 것도 책을 맛깔스럽게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주는 재미는 명랑 홈드라마라는 것이다. 어찌됐든 해피엔딩이 될 것이라는 것이 책을 읽는 내내 기분을 밝게 만든다. 더군다나 가나토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는 책이 더 빛을 발하도록 만든다. 환갑의 나이에 엉뚱한 말을 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내팽개친듯 하지만, 실제론 사랑이 가득 넘치는 로맨티스트이다. 자신의 배 다른 아이 아오의 탄생비밀이 벗겨지는 순간은 아찔하면서도 감동을 준다. 그가 주장하는 "러브다! 상처를 덮고 치유하는 건 말이지, 역시 러브라는 이름의 반창고라고"는 그야말로 명랑한 가족의 버팀목이 된다.

세상이 명랑 홈드라마처럼 살아가도록 놔두지 않겠지만, 그래도 "러브다"라고 한번 외치고 살았으면 싶다. 왠지 미소가 얼굴 가득 번질것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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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너덜해진 사람에게
릴리 프랭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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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너무 이상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금전주의에 몰입된 현실적 상황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릴리 프랭키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도쿄타워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그의 인생역정은-어머니를 자꾸 떠올리게 만들어서- 그에 대한 믿음으로 돌아왔다. 릴리 프랭키라는 작가의 이름만으로 서슴지 않고 책을 읽어갔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과연 이렇게 솔직한 글쓰기가 있을까.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또는 정반대로 가볍게 생각한다고 해서 과연 나의 인생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무력하고 회의에 빠진 젊은이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은 일면 냉소적으로 비쳐지면서도 진실되다.

<대마농가의 신부>는 웃는라고 정신을 못차렸다. 약에 찌든 도시인들에게 대마를 제공하는 농촌 총각의 결혼도전기이기도 하다. 왠만한 도시의 갑부보다도 더 부자인 농촌총각의 공개 구혼. 여기에 그리 예쁘지 않은, 또 젊지도 않은 여자가 시골로 향한다. 람보르기니라는 스포츠카를 싸구려 차 몰듯이 운전하는 시골 총각과 그의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웃음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그냥 2분 정도 정신없이 웃었다. 그 상황이 왜 이리 웃긴 것일까. 한쪽엔 희망을 품고, 한쪽엔 불안을 간직한 처녀의 신세도, 예쁘지 않은 여자를 구하려는 총각의 마음도 웃음을 유발하는 한편 뭔가 쌉싸름한 맛을 풍긴다.

<사형>은 정말 노골적이다. 흔히들 강력 범죄가 터지면 "다 사형시켜버려야 돼"라고 서슴지않고 말하는 사람들의 상상을 그대로 소설로 옮겼다. 그 정도를 극에 달하도록 해, 아무리 가벼운 범죄라고 사형에 처하도록 만든 미래사회. 과연 인권이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세상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갔을까. 그의 상상력이 놀랍다. 책을 훔쳤다는 이유로 사형을 목전에 둔 젊은이의 모습이 위태위태하다.

<둥근파꽃>은 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신적 사랑이라든가, 부부간의 정이라는게 과연 진정일까?라는 의문에서 비롯된 것 같다. 육체적 접촉을 통한 사랑만큼 강렬한 것은 없다는 생각, 그것은 오히려 찰나적이기에 영원히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오사비시 섬>은 그야말로 삶의 태도에 대한 극단적 제시를 보여준다.

아무려나 상관없는 이곳에서 아무려나 상관없는 일을 아무려나 상관없이 해온 나 자신의 한심함을 꾸짖었다. 정말로 아무려나 상관없을때, 사람은 아무려나 상관없게 된다.(102쪽)

그래서 삶으로부터 도피한 사람들이 오사비시 섬으로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한가지 삶의 양식을 배운다.

슬슬 일 좀 하고 술 한 잔 하고 절구질하고, 오직 그것뿐인 섬이다. 하긴 그건 어디서나 다 마찬가지지만.(140쪽)

하긴 다 마찬가지 아니던가. 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당신은 릴리 프랭키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포장하고, 숭고한 척 하는 사람들에게 한방 먹이는 것이다. 물론 이건 한방으로 족하다. 실은 다 마찬가지인 것 같으면서도 아니기 위해 사람들은 발버둥치니까.

<리틀 베이비 나띵>은 삶의 전환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쓰레기장 옆에 쓰러진 여인.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운 사람. 성적인 매력 앞에 두근 거리는 세 청춘. 아무런 일도 저지르지 못하는 세 청춘. 한 친구의 집으로 여자를 데려오고 나서도 이들은 갈등에 쌓인 채 아무런 행동의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그러다가 여자의 거침없는 면을 보면서 이내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한 차원을 뛰어넘어 삶의 변화를 택한다. 이 소설은 굉장히 야하다. 하지만 야하기 이전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청춘들에 공감을 먼저 하게 되면서 슬픔에 빠진다. 삶의 변화는 쉽게 이루어질듯 하면서도 또한 그 반대이기도 하다.

진짜 어려운 일은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머릿속과 입 끝만으로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내 몸뚱이를 움직여 생활 그 자체를 바꿔나가는 수밖에 없다. (중략)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서는 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귀찮은 건 둘째 치고 몹시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사회의 흐름에 흡수되어 그저 살아가는 것뿐인 인간이 되는 것이. 그리고 자신들이 그렇게 되기 쉬운 약해빠진 인종이라는 것을 아플만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174쪽)

<너덜너덜해진 사람에게>는 전쟁통에 오른발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다.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왼쪽발의 엄지발톱을 다친 것이 몹시 아프다.

할 일도 없고 죽지도 못하고 내내 생각만 굴리고 있을 뿐인 채 휘고의 발톱만은 그로부터 몇번이고 재생하였다. (226쪽)

큭, 너덜너덜해진 사람에게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만 죽도록 하다가 아무런 생활의 변화는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 당장 사표라도 쓸듯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다가도 실상 퇴근 후 술로 달래는 사람들 속에서 너덜너덜해진 사람들을 엿볼 수 있다. 꿈만 꾼 채 아무런 노력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바로 너덜너덜해진 사람들이다. 소설은 이 너덜너덜해진 사람들의 너덜너덜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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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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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으면서도,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혼란스럽다. 도대체 소설 속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연극 대본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줄거리를 요약한다는 것도 쉽지가 않다.

소설은 크게 현실과 대본, 그리고 대본 속 연극(또는 극 중 극)이라는 세 가지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이 뒤얽혀 있다. 현실에서는 빌딩 숲 사이 카페로 둘러싸인 광장에서 젊은 여자가 죽고, 극 중에선 극작가가 죽었다고 생각되어지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이것마저도 확신할 수 없다. 각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범인은 누구일까 곰곰히 쫓아가다보면 현실 속 범인과 극본 속 범인을 헷갈리게 된다. 아니 범인이 서로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극도의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니 줄거리를 요약해 보겠다는 생각은 포기한다. 다만 소설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과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만 잠깐 이야기해보려 한다.

인생은 연극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때의 연극은 희노애락이 함께 녹아있는 터전이라는 뜻일테다. 그 속에서 웃고 울고있는 우리는 각자가 배우인 셈이다. 그런데 소설 속에선 말 그대로 우리의 삶이 연극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각자 허구의 삶을 연기하며 살고 있는 배우이며, 인생은 바로 그런 허구들로 이루어진 연극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남들에게 보임으로써 예뻐진다. 여자만이 아니다. 남자도 그렇다.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제2의 자신, 밖에서 본 자신이라는 존재를 완성해가는 것이다. 사람은 보이는 것, 연기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낀다. 소설, 드라마, 게임. 전에 없을 정도로 허구가 소비되고 있는 이 시대. 자신을 허구 안의 등장인물로 간주하는 것이 큰 오락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일찍이 그것은 은밀한 재미였다. 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사람들은 타인의 인생을 상상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당당하게 타인이 되기를 원한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예전의 대스타에서 자신과 비슷한 타입의 사람으로 바뀌면서부터 자기도 히로인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한 것이다.(245쪽)

그래서 도시를 바라보면 상점이나 카페 등의 벽은 유리가 되어 서로 보이고 보는 것에 탐닉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자신을 연기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의식하고 집 안에서도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요구되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 배우는 당신들이기도 해요. (367쪽)

세상은 보여지고, 또 보는 것으로 관계되어진다. 그속에서 우리는 잘 보이기 위해 연기를 한다. 연기는 거짓이다.

인간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지요. 보신을 위해, 허영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무관심, 질투,회유, 자비, 상식, 변덕. 이 중 어떤 것이라도 거짓말을 할 이유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지요.(76쪽)

보여진다는 의식은 늘 허구를 갖고 있다. 내부 정원은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쌍방에게 연기를 강요한다. (390쪽)

그렇다면 이렇게 거짓 연기로 이루어진 관계 속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까.

사람의 마음과, 뭔가를 달성하는 동기라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이렇지 않았을까 상상하거나 어거지로 끼워맞추거나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는 것이 고작입니다.(337쪽)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 사람의 마음이란 참 이상한 거지.(240쪽)

그래서 인생이란 어떤 모습일 것인가?

그토록 원했지만 가질 수 없는-그렇다, 지금 우리처럼. 그야, 현실이란 그런 게 아닌가. 대부분의 인생은 사람이 그렇게 오래도록 원하기만 하고 인생 쪽에서는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350쪽)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가삿말은 수많은 가면을 쓰고 있는 나를 표현하는 또다른 말일 것이다. 가면은 내가 서 있는 장소에 따라 바뀐다. 또 내가 지금 대면하고 있는 사람에 따라서도 바뀐다. 마치 중국 사천 지방 특유의 경극인 변검술을 익힌 사람들처럼 말이다. 난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아니 한명이라도 존재할 수 있으려나. 그래, 그 가면들을 인정한다면 세상은 또 타인은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거짓을 없애자고 칼을 휘둘러 허영과 그림자를 물베듯 베려 허우적대지 말고, 차라리 그 수많은 가면들을 인정하는 것은 어떨까. 비록 그것이 이해가능한 수준을 넘어설지라도 사람과 사람을 잇는 끈이 더욱 견고해질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를 향한 그 가면에 집착하지 않되 그 가면을 벗고 다른 가면을 쓰지 않도록, 그리고 나 또한 그 사람 또는 그 환경 앞에선 흐뜨러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은 아닐까. 가면을 쓰고 최대한 멋진 연기를 펼친다면 박수를 받으며 퇴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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