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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아마 저자는 세월이 흐르면 인간은 성숙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고 할 정도의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세월이 주는 것은 성숙이라는 이름보다는 변화라는 말이 맞을 듯 싶다.
군에 입대하기 전, 톰 크루즈가 주연했던 <어 퓨 굿맨>이라는 영화를 봤었다. 군부대의 구타와 관련된 재판과정을 담은 영화였다. 구타란 무조건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군 제대 후 다시 이 영화를 우연히 보게됐다. 그리고 구타란 무조건이 아니라 조건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누군가의 실수로 타인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실수를 줄이기 위한 구타는 용납되어져야 하는가, 또는 용납될 수 없는가. 이 질문에 군이라는 경험은 그 대답을 다르게 만들었다.
이런 극단적 예는 아니지만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도 보면 볼 수록 다른 느낌을 주었다. 무려 5번을 봤고, 5번의 다른 느낌을 얻었다.
책도 마찬가지다. <어린 왕자>나 <데미안>은 중고등학교 시절 때 읽었던 느낌과 대학교 시절, 그리고 직장에 다니면서 다시 읽게 되면 그 의미가 많이 달라진다. 책은 그대로인데 그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책들뿐만은 아니다. 밑줄을 그었던 책들을 다시 꺼내들면 왜 그당시 이 부분에 밑줄을 그었을까 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책들도 있었다. 아마 세월이 흘러 다시 읽게 되면서 밑줄을 다른 색연필로 그으라고 한다면 책은 온통 무지갯빛 줄로 가득차게 될지도 모른다.
소설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이런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9편의 단편들이 책에 대한 소중함과 추억을 이야기한다. 책과의 인연을 통해 자신이 또는 타인이 변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인생에 대한 통찰을 잔잔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책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불행의 씨앗이라고 생각하는 책을 친구에게 빌려줬는데, 그 책이 친구에게 불행을 가져다 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친구는
불행이랄거 하나도 없었어. 나는 웃는 일도 우는 일도 없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담담한 매일이 되풀이되는게 불행이라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책이 내게 있었던 지난 몇 년동안 나는 행복했다고 생각해. (93쪽)
그래서 책을 빌려줬던 친구도 깨닫는다.
슬픈 생각이나 풀 길 없는 분노를 몇 번 맛본다고 해도, 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 친구의 집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일, 갓 나온 꽁치를 먹고 맛있다는 탄성을 지르는 것, 영화를 보며 다른 사람을 의삭하지 않고 우는 것과 같은, 특별할 거 하나 없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이 책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라고.(95쪽)
이제 책을 통해 과거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슬픈 사실 하나를 소설 속 주인공처럼 똑같이 깨닫느다. <서랍 속>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책은 그 책안에 사람들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또는 최초의 기억을 써 놨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그래서 주인공은 생각한다. 과연 그 책을 만나면 자신은 그 책에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그럼 가장 소중한 기억이라면... 그런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만족스러웠을 때라는 기억에 다다르자 더 오리무중이다. 그 사실에 놀랐다. 찾지 못한 것이다. 소중한 시간도, 만족스러웠던 시간도. (111쪽)
과연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변함없이, 이런저런 일이 일어난다. 슬픈 일도, 기쁜 일도, 다 틀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힘든 일도. 그때마다 나는 늘 할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벌어진 일보다 미리 생각하는 게 더 무섭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눈앞의 일을 하나씩 처리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벌어진 일들이 다 끝나 사라지고, 기억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161쪽)
희. 노. 애. 락. 삶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 곁을 떠난다. 세월은 그 희노애락의 깊이와 색깔을 다르게 만들어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희노애락에 감사할 줄 알게 됐을 때 비로소 철이 들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