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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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염을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듯하다. 오죽하면 항균 99.9%, 살균이라는 단어가 마케팅의 키워드가 됐겠는가. 인간의 감염에 대한 공포는 구제역 사태를 보면 더욱 실감할 수 있다. 감염에 대한 조그마한 가능성에도 무차별 살처분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가. 이 소설은 작가가 비명을 지르며 땅속에 파묻혀 간 소, 돼지들을 모티브로 써내려간 것이다. 만약 감염의 대상이 소,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어떨까? 라는 상상이 소설을 이끌어간다. 

감염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를 통해서 특히 좀비라는 형식을 통해 워낙 많이 접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식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전혀 식상하지 않다. 점차 감염이 확대되고 사건이 결말로 치달아갈수록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아니,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고 하면 이 표현이 식상하다. 할리우드식 줄거리에 익숙한 사람일 수록 이 소설의 전개는 그야말로 충격에 가깝다. 한마디로 리얼하기 때문에 충격적인 것이다. 전혀 리얼하지 않은, 소설이라는 만들어낸 이야기임에도, 리얼하다는 말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애써 감정이입이 된 주인공들이 가차없이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그것을 슬퍼할 겨를도 없다. 비극은 비극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너무나 어두운 소설이다. 물론 질서의 파괴가 몰고 온 인간성 파괴라는 극단의 상황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은 있다. 곳간에서야 그 누구나 인심 쓸 수 있지만 빈 헛간에서야 쉬운 일일까. 사람의 됨됨이는 곳간이 아니라 빈 헛간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99%의 절망 속에서도 단 1%의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그 희망에 목을 맨다. 하지만, 정녕 나는 또는 당신은 그 1%가 될 수 있겠는가 자문해본다. 또한 이 소설을 덮으면 떠오르는 것이 우리가 생명을 사물로 식품으로 대한 것은 아니었는가 반성해보게 만든다. 한편 더 나아간다면 도대체 생명산업이라는 조어가 가당키나 한 말일까 곰곰해 생각해본다.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성이었다. ...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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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불꽃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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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유스케의 다른 작품들, 특히 '검은집'과 '천사의 속삭임'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푸른 불꽃'에까지 손을 뻗게 만들었다. 개인들의 사건 뒤에 감추어져 잘 보이지 않던 사회적 맥락까지 파고 들었던 두 작품들에 비해 푸른 불꽃은 개인적 느낌이 더 강해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푸른 불꽃이 흥미로운 것은 범죄자의 입장에서 그 심리를 쫓아간다는 것이다. 17살 고등학생이 2건의 살인사건을 완전범죄로 꾸미고자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정의를 가진 힘만이 가장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거야. 애당초, 힘 이외에 효과가 있는 해결방법이 어디 있다는 거지? 132쪽 

슈이치는 의붓 아버지의 횡포로 동생인 하루카와 어머니를 잃을까 조마조마해 한다. 변호사의 도움을 빌려 보고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주위에서 도와 줄 사람도, 사회 시스템에 기댈 구멍도 없다고 느낀 슈이치는 결국 아버지를 죽일 결심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살인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를 친구였던 다쿠야에게 들키고 만다. 다쿠야는 그것을 빌미로 돈을 달라는 협박까지 해온다. 한번 살인을 저질렀던 슈이치는 다시 완전범죄를 꾸민다. 오직 어머니와 동생을 지키겠다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살인을 정당화 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살인자의 마음을 철저하게 괴롭히는 것은 신에 대한 외경도, 또한 양심의 가책도 아니다. 더구나 세상에 대한 체면이나 소문 따위는 쓰레기통에나 들어갈 시시껄렁한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저주의 톱니바퀴처럼 마음을 옭아매는 것은 단지 사실일 뿐이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그 사실에서는 평생 도망칠 수 없다. 는 걸로 괴로워 한다.  

슈이치의 친구인 다이몬과 노리코는 그를 이해하고 그의 거짓된 알리바이를 지켜주려 애쓴다. 범죄를 계획하던 슈이치에게 다이몬은  
 

분노는 3독 가운데 하나야. 한번 불을 붙이면 분노의 불꽃은 끊임없이 타오르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까지 모두 태워버리고 말지. 361쪽 

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슈이치는 끝내 그 불꽃에 자신까지 타버린다.  

소설을 다 읽고나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개인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 분노에 대해서도 우린 분노의 불꽃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분노를 삭여야만 하는 것일까. 정당한 분노란 없는 것일까. 때론 분노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당하고만 있지 않았을까.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그리고 어디까지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닐까. 슈이치가 동경한 정의를 가진 힘은 그저 망상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분노를 정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또는 승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과연 슈이치는 좋은 사람이었을까, 나쁜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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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2010-01-14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조인스 닷컴에서 보고 주문할려고 알라딘에 왔더니....알라딘 회원이시네요. 반갑습니다.

하루살이 2010-01-14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우연이. 정말 반갑네요 ^^
 
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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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 <라쇼몽>은 살인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각기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고백>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보여준다. 단, <고백>은 살인사건으로부터 시간이 꽤 흘러가면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이 첨가된다. 사건의 진실이라는 측면보다는 심리묘사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것도 다르다. 그리고 이것은 뜻밖의 사건들과 새로운 사실들을 보여줌으로써 재미와 충격을 준다. 

<고백>은 한 중학교 여교사의 종강 연설로 시작된다. 이 연설은 수영장에서 숨진 자신의 딸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것이 단순사고가 아니라 살인이었음을 밝힌다. 게다가 그 살인범이 자신의 반 학생이었음을 고백하면서 파장을 일으킨다. 그러나 여교사는 이 살인범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복수한다. 물론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 빠지도록 만든다. 성직자라는 챕터로 구분된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도 완결된 한편의 단편소설이 된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이 챕터만으로도 소설은 충분해 보였다. 오히려 이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를 더한다면 그야말로 사족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살인범의 시선으로 바뀌면서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소설은 소년범에 대해선 이야기한다. (열세살과 열네살의 정신 연령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의도적인 살인을 저질러도 감옥에 가거나 법적 제재를 받지않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상황인지를 말한다. 살인을 계획했던 아이의 독백을 들어보자.  

살인이 범죄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악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물체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어떤 물체가 소멸해야 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 하고싶은 말이 뭐냐고? 문장으로 나타내는 도덕관념은 학교에 들어와 익히는 단순한 학습 효과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잔인한 범죄자는 당연히 사형시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가능한 것이다. 거기에 모순이 있는데도. 207쪽 

사회적으로 흥미진진한 소설들은 그 등장인물들의 궤변에 심사숙고해보거나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이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살인은 범죄이기는 하지만 악은 아니라는 생각, 우리가 갖고 있는 도덕관념은 그저 학습효과일 뿐이라는 주장은 다소 오싹하다. 그래서 작가는 항상 부작용을 염려해 다른 인물을 통해 반박을 가한다. 여기에선 여교사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의 중심적인 시각도 왠지 그녀에게로 집중되어지는 느낌도 있다.  

소설은 한편으론 범죄자와 피해자 이외의 일반 사람들에게도 시선을 돌린다. 여교사가 범죄를 저지른 학생들에게 복수를 꾀한 방식도 주변인들의 반응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의외의 피해자를 양산한다. 
   

역시 아무리 잔인한 범죄자라도 제재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결코 범죄자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재는 평범한 세상 사람들의 착각과 폭주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7쪽 

법적 제재는 범죄자에 대한 처벌과 함께 일반인들의 폭주를 막아주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소위 중세시대의 마녀사냥과 같은 일을 방지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소년범과 함께 소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니트족과 같은 사회 부적응자에도 있다. 

몇 년 전부터 은둔형 외톨이니 니트족이니 하는 단어를 종종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현상에 해당하는 청년들이 해마다 증가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항상 이런 현상에 해당하는 사람들, 학교에도 가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집 안에서 빈둥거리는 청년들에게 이런 명칭을 부여한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느 집단에 속하거나 직함을 얻음으로써 안도하고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은둔형 외톨이니 니트족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버리면 그 시점부터 그것이 그 사람들의 소속이자 직함이 되고 맙니다. 사회속에서 은둔형 외톨이나 니트족이라는 자리를 확보한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안심해서 일을 하거나 학교에 가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거예요. 127쪽 

어떤가. 이름은 때론 우리를 얽어매는 족쇄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이름 안에서 우리가 안주할 수 있는 포근한 울타리가 되기도 한다니...  <고백>은 이름의 상반된 영향력처럼 하나의 사건이 사람들에게 주는 상반된 영향, 극과 극의 심리적 파장을 통해 재미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사회적 문제를 살포시 건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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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개정판)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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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는 성장소설이다. 성장의 기간은 아프가니스탄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 시대 속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아이의 성장이야기는 아니지만 영화 <박하사탕>과 얼개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소설은 아프간의 평화롭던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아미르와 하산이라는 두 아이가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부터다. 그런데 주인공 아미르는 하인인 하산에게 애정을 더 쏟는 아버지 바바 때문에 질투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아프간의 전통놀이인 연싸움이 있던 날. 아미르는 우승을 한다. 하산은 끈 떨어진 연을 차지하기 위해 뛰어가고 아미르는 시간이 조금 지나 뒤쫓아간다. 하지만 아미르를 위해 헌신하던 하산은 연을 줍다 성폭행을 당한다. 그런데 아미르는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면서 아무런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못한다. 하산은 예전에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주려 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아미르는 이 사건 이후 도저히 하산을 지켜볼 용기가 없어 거짓 도난 사건을 만들어 하산과 그의 아버지를 내쫓고야 만다.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감정은 바로 이 사건에서 비롯된 비겁함이다. 소설은 주인공이 성장해 가면서 아버지의 용기와 그 뒤에 감추어진 비겁함을 보여주고, 하산의 우정과 용기를 지켜보며, 주인공 아미르가 어떻게 속죄에 이르게 되는지를 묵묵히 전달하고 있다. 이 성장의 과정에선 아주 큰 반전이 숨겨져 있고, 반전 이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충격적 사건도 이어진다. (소설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기 위해 여기서 밝히진 않겠다.) 또한 아프간의 현실을 배경 속에 펼쳐보인다. 수니파 이슬람교 파쉬툰인과 시아파 이슬람교 하자라인 사이의 차별과 소련 침공. 탈레반 집권 등의 역사적 진행이 아프간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알게 해준다. 
  

아무튼 이 소설이 감동을 전하고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것은 비겁함과 거짓말, 용기와 속죄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또다른 말로 어른이란 무 엇인가를 깊게 생각하도록 해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책장을 덮는 순간 아직도 우리는 성장 중에 있음을 고백하도록 종용한다. 아니다. 오히려 성장을 멈추고 있음을 고백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무슨 말이냐고? 이렇다. 조직에 살아남기 위해 해야만 하는 말을 못하는 경우는 없었던가. 그저 갈등을 피하기 위해(해소나 해결이 아니라) 거짓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적은 없었던가. 외부적 압력, 폭력으로 인해 소신을 저버린 적은 없었는가.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이런 저런 핑계로 넘겨버리고 현실에 안주한 적은 없었는가. 왜냐하면

 

그렇지만 명심하렴. 결국에는 세상이 항상 이기고 만다. 그게 세상 이치. 152쪽  

라면서 말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라. 얼굴이 화끈거리고 고개를 숙이고 싶은 경험들이 있었을 것이다. 혼자 해결하지 못해 끙끙댄 경험도 있을 것이다.

   

너는 어쩌란 말이냐고 물었니? 지난 세월 내내 너한테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질문을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법 말이다. 238쪽 

 

그래도 우리는 아직 성장할 여지가 있다.  

 

양심이나 선이 없는 사람은 고통스러워하지도 않는다. 449쪽 
 

아미르가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서 비겁하고 부끄러웠던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야만 하는 고통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끄러움을 아는 양심과, 비겁함과 옮은 것을 아는 선을 놓쳐서는 안된다. 즉 "비겁하다 욕하지 말라"고 외치기 보단 비겁함에 부끄러워 할 줄 알았을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직도 성장을 멈추고 있는 우리에게 이 소설은 뜨거운 눈물과 함께 따끔한 회초리도 숨기고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용서란 요란한 깨달음의 팡파르와 함께 싹트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소지품들을 모아서 짐울 꾸린 다음 한밤중에 예고 없이 조용히 빠져나갈 때 함께 싹트는 것이 아닐까 538쪽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우리는 용기를 통해 용서를 받음으로써 한 뼘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우린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을련지, 비겁한 행동을 변명하지 않을련지....... 사뭇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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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바위 - 영험한 오하쓰의 사건기록부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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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되어버린 실화에는 감추어진 것들이 많다. 필사의 과정에서도 수많은 오탈자로 뜻의 변화가 발생하는데 구전의 과정에선 오죽하겠는가. 특히 시대의 영웅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영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 덧붙여지는 것과 제외되는 것들로 인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일본 에도 시대 아코 무사 47명의 충혼에 대한 이야기는 <가나데혼 주신구라>라는 이름으로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사랑받는 작품이다. 자신들이 모시던 주군의 원한을 갚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충성심은 회자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발단이 된 사건에 대해선 정확하게 전해진 것이 없다. 오직 연극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추측될 뿐이다. 그러나 그런 추측들은 충성심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재료로 쓰일 수밖에 없다.  

소설 <흔들리는 바위>는 아코 무사들이 죽은 후 100년이 지난 시대를 배경으로 갑작스레 유아살해라는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발생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아살해와 아코 무사와의 관계가 도대체 이어질 것 같지 않지만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뜻밖의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  

유아살해라는 사건을 풀어나가는 인물은 오하쓰라는 처녀와 우쿄노스케라는 젊은이다. 오하쓰는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마음이 남아있는 곳에서 과거를 볼 수 있고, 사령 즉 유령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쿄노스케는 지금으로 말하면 수학에 재능을 가진 심약한 젊은이로 논리적 사고를 지니고 있다. 이 둘은 유령이 씌운 사람이 유아살해를 저지르고 있음을 알게되고 그 유령의 억울함이 아코 무사와 관련되어 있음을 밝힌다.  

책은 판타지와 추리, 활극이 잘 버무려져 읽는 재미를 줄 뿐만 아니라 진중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예외없는 절대명령으로 인한 희생, 집단에 따라야만 하는 개인의 희생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미야베 미유키는 아코 무사의 이야기의 발단이 한 무사의 정신착란으로 인해 벌어졌을 때를 상상하며 이야기를 끌고 간다.  

영토 안에서 칼부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명령이 정신착란 무사로 인해 어겨졌다. 무사는 할복을 명령받고, 칼부림의 대상이 됐던 무사 또한 피해를 입는다. 칼부림을 했던 무사가 정신착란이었음을 번주가 인정만 했더라도 상관 없지만, 그것을 묻어둠으로 인해 무사의 부하들은 할복한 주인을 위해 상대를 베어야만 한다. 그 시대는 그랬다. 이 부조리를 모른 사람이야 충절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겠지만 전후사정을 알고 난 무사들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영지 내에서 생명을 죽이는 일을 절대 금한 곳이 있었다. 명령 자체는 훌륭해 보인다. 그런데 들개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촌민을 구하기 위해 칼을 쓴 무사는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신분과 직장을 잃고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게 정당한 대우일까.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무사의 노력은 결국 억울함으로 인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절대권력을 지니고 있던 중세 시대에만 벌어지고 있는 일일까. 혹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법이나 명령으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공중파 방송에서 보여주는 시청자 칼럼이나 여러가지 고발 시사 프로그램들 속에서 우린 중세 못지않은 억울함을 마주치게 된다.  

그 영혼들을 어찌 위로할 수 있을까. 절대라는 단어의 척박함과 견고함이 망령이 되어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은 섬뜩해지는 세상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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