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소녀 - 소설로 읽는 사랑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이정순 옮김 / 현암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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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소설은 15세된 게오르그라는 소년이 11년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마치 대화하듯 써내려간 글이다. 아버지의 편지는 액자소설 형식으로 들어가 있고, 그것에 대한 감정, 느낌 등을 아들인 게오르그가 덧붙여 써내려가는 글은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다. 사는게 우울하다거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사람들일지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삶과 사랑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볼 것 같다. 눈물을 펑펑 흘리는 감동보다는 눈시울이 잠깐 젖는 잔잔함, 폭소보다는 입가에 얇은 미소를 띠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아버지의 편지는 당신이 20대 초반이었을적, 운명이라 여기게된 오렌지 소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전차 안에서 마주친 오렌지를 가득 담은 종이봉투를 들고 있는 소녀.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이미 아버지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한채 헤어진 그. 다시 그 소녀를 만나기 위해 갖은 추측과 상상을 해대기 시작한다. 오렌지를 그렇게 가득히 산 것은 극지방을 여행하기 위한 비상식량일것이라거나, 대가족에게 쥬스를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라거나 등등. 그리고 다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전차를 연신 타보기도 하고, 오렌지를 그렇게 살만한 곳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이 자주 가는 카페에서 마주친 그녀. 이번에도 그 만남은 짧은 한마디만을 나눈채 끝난다. 아, 그리고 또 얼마나 수많은 상상 속에서 행복하면서도 괴로운 재회를 기다리던가!

오렌지 소녀에 대한 정체를 여기서 밝힐 필요는 없을듯하다. 다만 운명이라고 생각되었던 만남들이 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애타게 찾아헤맸기 때문에 가능했다라는 것에 어떤 거룩함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자식에게 남겨주고자 했던 것들을 통해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삶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갖게 만든다.

자연이 기적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거라. 세계가 동화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란 말이다. 그걸 꿰뚫어보지 못하는 사람은 동화가 끝날 무렵에 가서야 겨우 알게 될지도 모르지.(161쪽)

우리는 누구도 알지못하는 어떤 커다란 동화속에 함께 살고 있는 거라고. 우리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어떤 세계에서 춤추고 놀이하며 수다떨고 웃으며 살아간다고, 이 춤과 이 놀이는 삶의 음악이라고 너에게 얘기해주었단다.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그 음악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172쪽)

허블 망원경을 통해 우주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알게되는 과학적 지식들이 신화적 세상을 망가뜨릴 수는 없다.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지식으로 세상을 분리하고 뜯어본다고 해서 자연의 그 신비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과학자의 눈 보다는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풍부한 감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아들에게 바랬다. 비록, 이별이라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얼마나 신비로우며 살만한 곳인가를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서 차분히 전한다. 아버지는 이별도 고통도 없이 그저 영원한 존재로 남을 것인지, 이별을 기약해야 하지만 사랑을 할 수 있는 한정된 삶을 살 것인지의 선택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이 행복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아들에게도 선택해보라고 한다.

게오르그는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나서 한츰 성숙해진다. 새아버지에 대해 더욱 애정을 갖고, 어머니를 보다 온전히 이해하고, 짝사랑했던 바이올린 소녀에게 고백할 것임을...

청소년만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메마른 가슴을 촉촉히 적셔주는, 아름다운 사랑과 삶의 철학이 담긴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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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2005-04-26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하루살이님이 퍼올리신 글들이 마음에 많이 와닿습니다. 물론 하루살이님의 글도.. 그래서 추천 한방 했답니다. 흐흐~

하루살이 2005-04-28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은 못되더라도 시인의 눈은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icaru 2005-04-2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별도 고통도 없이 그저 영원한 존재로 남을 것인지, 이별을 기약해야 하지만 사랑을 할 수 있는 한정된 삶을 살 것인지의 선택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이 행복했음을 고백한다. ...

눈물을 펑펑 흘리는 감동보다는 눈시울이 잠깐 젖는 잔잔함, 폭소보다는 입가에 얇은 미소를 띠게 만드는 그런 책이, 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이거 아닙니까... ! 별 다섯이라... 유심히 읽다가 갑니다 ^^

하루살이 2005-04-28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뜻하지 않게 발견하는 보물가운데 하나랍니다.
 
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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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여자다. 한 여자는 기쁨, 정열, 삶이 그녀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모험들을 맛보길 갈망하고, 다른 한 여자는 진부한 일상, 가족적인 삶, 계획하고 완수할 수 있는 자잘한 행위들의 노예가 되기를 갈망한다. 나는 한 몸 속에 살면서 서로 싸우는 주부이자 창녀다.(198쪽)

모험은 항상 위험하다. 새롭되 위험하지 않다면 모험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 위험은 정열이라는 파도를 만나 좌초당한다. 정열은 모험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라는 순풍을 제공한다. 그래서 도달하는 곳은 신세계다. 자신이 항상 꿈꾸어 오던 신세계. 비록 그곳이 생각만큼 안온하지 않더라도, 욕망을 좇아 끝내 도달한 곳이기에 아름답다. 

주인공 마리아는 브라질의 시골서 휴양지로 잠깐의 모험을 떠난다. 혼자이기에 두렵지만 이내 발걸음을 내디딘다.

원죄는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이 느낀 마음의 동요를 아담과 나누어 가지고 싶어한 데에 있다.(271쪽)

끝내 외로운 존재가 사람이다. 결국에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혼자다. 가정과 사회라는 안락한 품은 평온함과 안락함을 주지만 노예의 삶이기도 하다.(그러나 또한 얼마나 달콤한가?) 마리아는 자신에게 닥쳐온 유혹의 끈을 잡는다. 나이트클럽 댄서로 스위스로 날아가는 그녀. 그녀는 제네바에서 창녀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분명 선택이다. 어찌할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다. 그 생활 속에서 마리아는 사랑과 삶에 대해 하나둘 배워나간다. 남자들 또는 여자들의 하루라는 것이 단지 성생활에 소비되는 11분을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 속에서 세상을 깨우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쾌락의 추구가 아니라 중요한 모든것에 대한 포기라는 사실만 알아둬요. (262쪽)

이것은 그녀가 사랑하게 되는 화가 랄프의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책을 읽는 나에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다. 누군가 때문에 또는 무엇 ‹š문에 라는 이유를 달고서 포기하는 것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나의 현재요, 사람들의 현재가 아닐까?

욕망은, 당신이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예요.(209쪽)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상상한다는 것을. 상상마저 허락하지 않는 삶을 누가 강요했는가? 현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상상은 몽상이다. 상상은 실현되어질 수 있는 욕구의 극한점을 보여준다. 욕구에 충실한 삶은 상상을 현실로 만든다. 그 욕구들을 억압하는 사회에서 많은 이들은 주부로서의 삶을 택한다. 창녀는 손가락질 받는다. 손가락질 받는다는 것은 혼자 동떨어져 있음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은 두려움으로 다가선다. 당당한 창녀 선언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뭐, 그렇다고 문제될게 있겠는가마는..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엔 두려움이 크게 자리잡고 있음을...) 그러나 간혹 욕구를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상상을 펼쳐야 하지 않을까? 외로워도 슬퍼도 상상의 나래는 꺽이지 않을 것임을 당신도 알고 있지 않는가! 때론 슬픈 주부가 아니라 아름다운 창녀이고 싶은게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까?

자, 슬슬 모험을 떠나보자. 이 커다란 세상에 오직 나 하나와 마주쳐보자. 나의 상상을 향해서 길을 그려보자. 그 길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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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2005-04-22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삶을 주부와 창녀로 이분한 사람은 또한 남자가 아닐까요? 저도 이 책을 읽어봤지만 남자들의 삶은 그런 식의 이분법을 쓰지 않거든요. 그냥 남자일 뿐.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분화가 되지 못했는지만 느껴집니다. 현재의 이와 같은 이분법을 돌파할 수 있는 출구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성 스스로 이와 같은 이분법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살이 2005-04-24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저는 성적인 개념에서 이 문장을 바라보진 않았는데, 그렇게도 보여지겠군요. 이분법은 그 경계의 명확한 구분을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만 여겨집니다. 꼭 그렇게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세상에 어디있겠냐고 생각하면서도 사고의 편의성을 위해 그런 과감한 간략화의 잘못을 저지르곤 하죠. 주부와 창녀는 그냥 안주와 모험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걸 남자로 비유하자면 회사인과 백수, 아, 이건 어딘가 조금 모자란듯 하고, 글쎄 뭐가 좋을까요? 왕과 기사. 으~ 이것도 지금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져 보이고. 그러고 보니 남자라는 것이 여자를 모두 포함하는 그 무엇으로 지금껏 정의되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구, 쩝. 암튼 지안님의 속내를 잘 알아듣겠습니다.

클레어 2005-04-2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시비를 거는 글은 아니었습니다만 혹시나 언짢으셨으면 지안이 삐딱한 탓이라 여겨주십시오..(흐흐~ 어물쩡 넘어가기..^^;;) 요즘 아이들 책(동화도 그렇고 만화도 그렇고..)을 많이 읽고 있는데, 소년만화 속에 보이는 '성장'이라는 화두를 살펴보자면 세상과의 투쟁, 관계 맺기가 남자주인공을 주체로 세우면서 이루어지는데 비해, 여자아이들의 만화의 경우에는 남자친구에게 여성으로 어필되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더군요. 그 속내를 좀 더 짚어보자면 여성은 남성을 이용해서 세상을 돌파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잘난 남성들에게 어필이 되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즉, 여자 아이들의 세상관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체득한 것이라기 보다는 남성을 통해 얻게 되는 식으로 되더군요. 하루살이님께서 지적하신 주부와 창녀에 대한 개념은 그런면에서 아주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주부'와 '창녀'...안주와 모험... 여성들이 세상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그만큼 협소하다보니 '창녀'처럼 많은 남성들을 상대하는 여성들일수록 남성들로 많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얻게 되고 그와 같은 모험(?)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진다고 할 수 있겠고, '주부'의 경우는 한 남성에서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다보니 세상을 보는 눈이 한정되는데 비해 세상으로부터의 비난 등으로 부터는 자신을 보호하면서 안전한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의 삶이 더 분화가 되고 남성들을 통해 뭔가를 얻는 대리만족 지향의 생각에서 벗어나 세상과 직접 소통하고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성장과정을 거친다면, '창녀'라는 이미지가 세상을 알아가기 위한 모험이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주부'가 '편안한 안주'라는 이미지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거구요. 왜 하루살이님 서재에서 제가 이렇게나 긴 글을 쓰는 것일까요? 아마도 하루살이님이 좋아서 일겁니다. (또 놀러올께요..흐흐)

하루살이 2005-04-25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짢기는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아아~ 언어라는 것의 한계성을 절감합니다. 흑흑. 주부와 창녀라기 보다는 가족과 일탈 이렇게 정의할게요. 그리고 님의 말씀에 백번 동감합니다. 아마도 만화가나 동화작가의 대부분이 남성인 탓도 있을 겁니다.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는 사회의 밑거름은 어렸을적 교육부터 주어진다고 봅니다. 장애인에 대한 대우 또한 마찬가지라고 보여지네요. 장애우들이 일반 학교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이니... 성역할이나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한 포용력을 자연스레 배울 수 있는 곳이 학교였으면 좋겠습니다. 조기유학에 눈이 먼 현실이 안타까울뿐입니다.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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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세상은 운명처럼 돌아간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 내가 여기 이곳에 있는 이유가 운명때문이라고 말이다. 나의 의지로 선택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이곳에 앉아있는 것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때면 이제부턴 소설 속 양치기 소년을 생각해보아야겠다. 자신의 마음 속 보물을 찾아 피라미드로 떠난 양치기 소년말이다.

우리들, 인간의 마음은 그 보물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아. 사람들이 보물을 더이상 찾으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불행히도, 자기 앞에 그려진 자아의 신화와 행복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 사람들 대부분은 이 세상을 험난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세상은 험난한 것으로 변하는 거야.(214쪽)

하루중 나를 생각하며 지낸 시간은 얼마나 되던가? 나는 온데간데 없고, 항상 그 자리엔 일과 근심뿐이다. 행여나 마음 한 구석에 꿈이라는 보물을 아직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돈, 명예, 인간관계, 힘 따위의 핑계로 묻어버린다. 더군다나 그 꿈이 오직 자신의 신화이외에 아무 의미도 없다고 느껴질때엔 더욱 깊숙히 숨겨둔다.

자아의 신화보다는 남들이 팝콘 장수와 양치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린거지.(49쪽)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보물을 찾아나서는 발목을 잡아채는 것은 두려움이다.

꿈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하나, 실패하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세(230쪽)

이상하게도 일이 꼬일때가 있다. 반면 이상하게도 무엇인가 자꾸 기회를 제공하는 경우가 있다. 평소에 생각해왔던 그 무엇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 같은 그 무엇을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다. 이것을 소설은 표지라고 한다. 자신의 보물찾기를 도와주는 표지. 그것은 현실에 눈을 똑바로 떴을 때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표지를 보았을때 두려움 없이 길을 나서야 한다.

비밀은 바로 현재에 있네.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면, 현재를 더욱 나아지게 할 수 있지.(172쪽)

표지를 보려면 현실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 나를 찾아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나이지, 운명이 아님을 알아채야 한다. 책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당장에라도 배낭을 짊어지고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드는. 마음이 또 일렁인다.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는 이미 죽어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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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4-23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나이지, 운명이 아니다....
저는 요즘 이게 헷갈린단 말입죠...

하루살이 2005-04-24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운명도 내가 있어야지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어찌할 수 없는 흐름속에 파묻힌다거나, 어쩌다보니 어떤 곳에 서 있는 저를 바라보면서 운명을 떠올리곤 하지만 그 운명이라는 것, 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의지를 운명이라고 생각해보면 편하지 않을까요? 저도 잘은 못하지만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저 운명이 나의 의지다.
 
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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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마치 높고 날카로운 삶의 비명과 같다. 아름다운 것들은 처음부터 조용히 자신을 묻고 숨어 살 수 없다. (중간생략) 사람이 아름다움을 염원하고 추구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아룸다움 그 자체,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이 그저 받아들이기에 족한 절대의 가치.

미실은 <화랑세기>전반부에 등장하는 여성이다. 신라시대의 정치권을 쥐락펴락했던 색공지신(色供之臣ㅡ 임금에게 몸을 바치는 공양을 통해 임금의 신체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는 신하정도로 해석할수 있지 않을까)이다. 3대에 걸쳐 임금을 공양하면서 실질적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통일의 의지를 갖었다기 보다는 그로 인한 정치적 흐름이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여성의 권력에 대한 상위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주체적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을듯 하지만)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오직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미실은 경국지색의 미녀.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사랑에 실패(정작 그녀는 한번도 자신의 사랑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노라고 고백하지만)하기도 하고, 권력투쟁에 휘말려들기도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만 정말로 이것은 오직 아룸다움에 대한 노래다. 그녀가 권력을 얻은 것도 오직 아름다웠기에 가능한 것이요, 힘든 삶을 살았던 것도 오직 아름다움으로 인한 자초다.

박애란 위선이거나 몽매에 불과했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이미 세상은 불공평했다. 나고 살고 죽는 모든 일에서 그러했다. 어쩌면 천지를 주관하는 신명까지도 아름답고 추하고 행복하고 불행한 일에 지극히 편벽되이 권력을 행사하기 마련이었다. 

이 시대의 삶은 아직 지금과 같은 도덕과 금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름다움이 갖는 힘을 이용해 주위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삶을 영위한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지언정, 그 아름다움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자유뿐이다.

자신의 마음이 흐르는대로, 몸이 움직이는 대로 사는 삶이 그녀를 권력의 중추자리로 옮겨놓았다. 오직 이것은 아름다움 덕분이다. 아름답지 않은 미실이었다면 결단코 불가능한 일이다. 즉 아름다움이 바로 힘의 원천이다. 여성으로서라고 단정지어 주체적 삶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오직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팜므파탈과 다르다. 아름답지만 남자를 파괴한다거나, 권력을 파괴하는 악의 성질이 아니라, 권력의 중심에 놓여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갖는다. 몰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황제들의 힘, 꺾이어진 첫사랑, 다시 찾아오는 사랑 등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미실에게 있어서 사랑의 완성이었을 뿐이다. 그 슬픔과 좌절과 희망과 사랑의 모든 감정이 녹녹지 않은 문장 속에서 삭풍에 메마르지 않는 솔과 같은 푸르디푸른 힘을 갖는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미실을 통해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찾아내는지도 모른다. 거리낌 없는 삶을 이루는 그녀의 꿋꿋한 걸음걸음을 찬앙해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아름다움을 전제로 한 것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도덕률도 싹트지 않는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마치 지금의 페미니즘-생태학자들이 주장하는 원시농경사회(우연인지도 모르지만 소설 속에서도 이런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쟁기와 소를 이용하는 경작법의 발명을 통해 생산량의 증가가 이루어졌다라는 부분은 이제 머지않아 미실과 같은 여성성이 사라지고 남성의 시대가 도래함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시 농경사회와 쟁기를 이용한 경작의 차이는 농사를 짓는데 있어 근력을 필요로 하는 힘의 시대, 즉 남성 호르몬을 직접적으로 필요한 시대로 돌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 대한 동경을 미실은 한 몸에 지니고 있는듯이 보인다. 따라서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그 무엇인가를 미실이 가지고 있다는 낭만적 생각을 품도록 만든다. 분명 그것은 일정부분 참이며, 여전히 우리가 아름다움을 거의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만큼 동의할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낭만적 이상주의에 가까운 모습으로 비쳐진다. 미실이 여자로서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라는 평가로 내려져서는 안될듯 싶다. (그녀처럼 살아갈 수 있는 시대를 바란다는 것은 여전히 황제와 백정의 구분이 있는 사회를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전히 전쟁이라는 잔혹한 힘의 투쟁의 한가운데 있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미실이 돋보인 것은 이러한 신분이라는 깨치지 못할 계급적 상황에서 맨 상위부분을 차지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제를 포함해 당시 힘의 원천은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은 好 不好중 호를 뜻하며, 이는 사람에 대한 引力이요, 따라서 권력을 품는다.

그러나 그녀가 나이를 먹어 이내 삶의 의미를 깨닫는 부분에서처럼, 행복은 권력을 쥐었다거나,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통제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마음(그녀는 죽음직전 해탈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의 이 모든 것을 함께 해 줄수 있었던 주위의 사람들, 죽음마저도 초탈한 사랑을 해준 설원, 그녀를 이해해준 황제들과 대비들 등등.

외모적 아름다움이 지고나서 주름살이 늘어나서야 비로서 미실은 참 행복을 깨우쳤다. 아룸다움은 힘이자 죄이므로 결코 행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있어 사람은 행복해야만 한다. 그래서 미실이 정녕 아름다움을 잃었을 때 비로서 아름다움을 찾았으며, 또 그때 비로서 행복의 의미를 깨우쳤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가 휘두른 아름다움의 힘에 눈이 멀어 그녀를 동경해서는 안될듯 싶다. 미실이 돋보인것은 금기와 도덕에 휘말리지 않고 권력의 중추에 서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해진 말년의 모습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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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3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03-23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근데 제가 욕심이 많은 건가요? 자주라니요!!! 너무나 오랜만이라 언제적 일이었는지 가물가물합니다. ^^
 
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고전의 매력은 그것이 끝없이 변주된다는데 있다.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복수에 대한 테마는 그리스 로마 신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갈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그 절정기를 맞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그 이후의 작품들은 몽테크리스토의 변주일뿐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기호학을 밑바탕으로 하고, 역사를 얼개로 해서 그려낸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은 움베프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현대적 의미의 고전으로 불릴만하다. <다빈치 코드>는 여러모로 보나 이 <장미의 이름>의 변주곡이다. 변주가 꼭 질의 낮음을 의미하거나 원본의 복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변주는 변주 자체로 훌륭한 음악이 될 수 있다. <다빈치 코드>또한 이런 훌륭한 변주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어진다.

<장미의 이름>이 엄숙함과 권위에 파묻힌 당대의 종교적 독선과 편견을 비극으로 표현하고,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희극으로 나타냈듯이, <다빈치 코드>는 예수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깨뜨리고, 새로운 충격을 가져다준다. 이것 또한 남자 중심으로 운영되던 종교적 권력에 대해 여성성을 드러냄으로써 편중된 힘에 대해 균형을 찾고자 한다. 따라서 여성성의 드러냄이 이 소설의 전체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드러냄은 기호학적 관점에서 수많은 예시를 통해 드러난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최후의 만찬'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다. 소설을 읽는 도중 정말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작가가 설명한 대로 일까 하는 궁금증에 잠시 책을 접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펴든다. 그리고 찾아보는 다빈치의 그림. 도판의 그림 자체가 워낙 희미해 그 진위 여부를 알 수 없지만, 얼핏 예수 오른편의 인물이 매우 여성스럽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순간 찾아오는 전율.

<다빈치 코드>는 같은 작가의 전작 <천사와 악마>보다는 조금 재미가 덜하긴 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다. 남성과 여성, 음과 양의 조화에 대한 추구,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감추어지고 왜곡되어지는가에 대한 관찰은 역사가 왜 승자의 기록인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퍼즐맞추기 식의 조롱 비슷한 다빈치의 장난등을 보면서, 다빈치를 그리는 작가의 시선이 정겹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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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5-02-28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작품의 반열에 오른 것 같습니다. '장미의 이름'은 이제 SF영화계의 '스타워즈'요, 갱스터 영화계의 '대부'가 된 듯 싶습니다. ^_^

하루살이 2005-02-28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영화 <장미의 이름>도 추리 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면 더할나위 없을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