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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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분류하자면 사회추리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연금제도나 보험제도의 허점을 노린 범죄와, 소위 피라미드(네트워크 마케팅이라는 다른 이미지의 비슷한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궂이 이 용어를 쓴다 )라고 불리는 강압적인 판매방식, 마약과 관련된 사건 등등이 소설의 주된 소재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독자의 선입견을 깨뜨리는 반전때문에 이 소설을 기억해야 할 듯 싶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리뷰를 쓰는 것이 무척 어렵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다시 앞장을 들춰보는 경험을 하게되지 않을까 싶다. 속았다, 라는 생각보다는 무슨 이런 엉터리가 있어, 라는 생각으로 기어코 그 증거를 찾아보겠다고 말이다. 물론 이 책이 완벽하게 독자를 속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중간 중간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고, 한두장면 정도 번역이 이상하다 싶게 느껴지는 어색한 부분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건 번역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된후, 비로소 왜 그부분이 어색하게 느껴졌는지를 깨닫게 된다.

책이 이렇게 거의 완벽한 반전을 이루어낸 것은 독자의 선입견 덕분이다. 책은 구체적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책에 나타난 조그만 단서를 가지고 스스로 이미지를 구상한다. 그 구상은 순전히 선입견 때문으로, 그 선입견이 얼마나 확고부동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당혹감이 삶의 깨우침으로 다가선다.

아, 나이 들어감이 이렇게 설렐수가 있다니... 인생의 황금기는 바로 노년기라는 금언이 이처럼 다가온 경우도 없다. 젊음이 최고였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삶은 보다 풍족해진다. 미래는 현재를 담보로 아름다워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미래만큼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소설은 노년을 예찬하고, 나는 담보된 현재로부터 해방을 꿈꾼다. 예찬된 노년은 오히려 얼마나 우리가 현재를 잃고 살아가는지를 일깨워주기도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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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심판한다 - 마이크 해머 시리즈 1 밀리언셀러 클럽 30
미키 스필레인 지음, 박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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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도 분명 유행을 탄다. 하수도 문화의 대표격으로 불리던 B급 무비가,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걸출한 감독의 등장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런 조류는 어느덧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더 이상 B급 무비가 B급 무비로 취급받지 않게 됐다. 감각적이면서 자극적인, 본능에 보다 더 가까운 소재와 이야기들이, 고급스럽다거나 교양이라는 말로 감추었던 세상 속에서 환히 드러나면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보다 더 진실하다는 의미에서 재탄생된 이 B급이라는 용어는 어느새 문화 곳곳에 쓰여졌다. 이젠 자신을 B급으로 평가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것은 아마도 A가 주는 엘리트적 취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는 뜻으로도 읽혀질 수 있겠다.

<내가 심판한다>라는  이 추리 소설은 하드보일드다. 소위 B급이다. 이 소설이 1940년대에 쓰여진 것을 생각해보면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충격은 이미 1990년대 초 <원초적 본능>이라는 영화가 영상으로 이미 다 보여준 것이다. 마초적인 남자 주인공, 금발의 팜므파탈, 잔혹한 시체... 신선한 충격이었던 B는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 오락이 넘쳐나는 세상에 B만으로는 부족하다. B보다 더 강렬한 B플러스의 탄생을 기대하든가, 아니면 B 모양새를 갖춘 A의 진중함이 필요할듯 싶다. 그래서 <내가 심판한다>는 시대를 초월한 힘을 얻지 못하고,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누군가는 이 B급 소설 속에서 황금을 발견해낼지는 알 수 없다. 10년전 <원초적 본능>의 충격처럼, 또 다시 새로운 <원초적...>무엇인가를 캐낼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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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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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나서 개운함을 느껴본게 얼마만인가? 마치 스시를 먹고난 후의 깔끔한 느낌처럼 마음이 가볍다. 소설의 주제가 사형제도이고, 살인이 그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쾌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군더더기 없는 문체, 스피드한 사건 전개, 바로 깊숙히 밀고 들어가는 등장인물들의 심리,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관점이 잘 어울러진 덕분이라고 본다.

소설은 사형을 선고받은 감옥의 풍경에서부터 시작된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저승사자를 기다려야 하는 사형수들의 심리에서부터 독자의 시선을 꽉 사로잡는다. 소설 속의 사형수는 사카키바라 료. 그는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오토바이 사고로 사건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즉, 살인에 대한 기억이 없는채 잡혀들어갔고, 따라서 자신이 저질렀는지 알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 반성할 수도 없기에 개전의 정이라는 감형의 여지 또한 받을 수도 없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어느 순간 사카키바라는 살인이 일어났던 시간,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 언뜻 기억남으로써 자신의 무죄를 밝힐 기회를 만들어간다.

소설은 사형이라는 제도가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도 설득력있게 말하고 있다. 먼저 사형에 대한 기본적인 나의 생각을 밝히자면, 한마디로 반대다. 무슨 거창한 이론이나,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으나, 그 첫번째 이유론 재판이 잘못될 수 있다는,  인간의 실수를 인정한다는 전제 때문이다. 잘못된 증거나 증인으로 인한, 또는 거짓 강요 등으로 인한 고백 등등 판결은 언제든 잘못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형은 그러한 과정을 알고나서도 돌이킬 수 없는 결론을 내린다는 점에서 반대한다. 그리고 두번째는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에게 과연 새 인생을 살아갈 기회를 박탈해도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번째 이유는, 피살자와 관련된 사람들의 복수심을 어떻게 달랠 수 있는가, 그리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 같다.

아무튼 이런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 소설을 접했는데, 의외로 사형이라는 제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고, 쉽게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하기야, 몇 십명씩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희대의 살인범을 매스컴을 통해 바라보게 될때, 사람들은 쉽게 저런 놈은 죽여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니, 단순히 사형제도를 없애자고 말하기에는 이들을 설득하기엔 어려울듯 싶다.

소설은 상해치사로 2년을 감옥에서 보낸 미카미 준이치가, 가석방으로 풀려난 후 퇴직을 생각하고 있는 난고라는 교도관과  함께 사카키바라 료가 원통하게 죄를 뒤집어쓴 것을 밝히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원죄가 풀리는 결말의 물고 물리는 반전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소설은 사형이라는 판결과 그것이 진행되는 과정을 실제처럼 보여주는데, 이 과정이 법제도를 무시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그것에 대한 확인작업과 행정절차의 복잡성 때문에 사형이 집행되는 것이 늦어지고,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사형이 빨리 집행되는 아이러니는 제도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나카모리 검사가 10년전 내린 자신의 첫 사형구형이 잘못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난고와 준이치를 도와주는 장면에선, 사람은 자신의 의지나 생각과는 달리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에 서글퍼진다. 검사였기 때문에 사형을 구형했지만, 그가 다른 위치에 있었다면, 아마도 깃발을 들고 사형제도 반대를 외쳤을지도 모른다는 준이치의 생각은 개인과 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 위치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행동들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항상 돌이켜보아야만 할 것 같다.

또, 이 소설의 장점 중의 하나는 피해자의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가혹한 이중의 폭력을 그들에게 행사하는지를 알려준다. 즉, 피살자의 가족들에게 들이대는 카메라가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채 그들을 바라보며, 분노하고, 슬퍼한다. 또한 살해자 쪽에서도 그들의 가족이 밝혀지는 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일상생활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새로운 불행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알고싶은 욕구, 대중이 알아야 하는 권리 이전에 그것이 어떻게 폭력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소설은 사형제도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근원적으론 구치, 교도라는 제도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끔 만든다.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격리된채 소히 말하는 죄값을 치른 후 사회에 복귀했을 때, 얼마나 많은 재범이 이루어지는 가를 생각해보면 과연 교도소라는 제도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것인지 회의하게 만든다. 범죄에 대한 사회적 격리를 응보형으로 바라볼 것인가, 목적형으로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겠는데, 응보형으로 바라본다면 그 죄값을 격리를 겪음으로써 받은 것이니, 충분히 제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목적형으로 바라본다면, 즉 교정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재범률이 말해주듯 별 역할을 해내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순된 법제도와 집행과정, 효율성 없는 교도소 때문에 이들을 모두 없애자고 한다면 이것 또한 문제의 여지가 많다. 바로 복수의 연쇄성이 큰 문제로 다가올 수 있다. 응보의 문제에서, 개인적으로 복수를 감행해야 한다면, 그 끝은 어디일 것인가? 그리고 복수를 통해 과연 과거를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될 수 있을까? 복수는 어디까지 행해져야 한단 말인가? 등등.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처한 각자의 상황에서 여러 각도로 보여줌으로써 사형제도의 문제점과, 교도소의 역할 등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과장되지도 한쪽으로 치우쳐지지도 않음으로써, 그리고 한 가지 사건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영향력을 끼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이토로 재미있으면서도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줌과 동시에 자신의 주장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소설도 드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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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6-01-11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가 확 땡기는 걸요.
보관함으로~~

하루살이 2006-01-1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잡으면 순식간에 끝장을 보게 될거예요 ^^

푸른신기루 2006-03-09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리뷰 읽어놓고 딴지거는 것은 아닙니다만.. 스시라는 일본어보다는 초밥이라고 써주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네요

하루살이 2006-03-0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참 판단하기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한국의 비빔밥이 외국에 나가서 비빔밥으로 불리는게 나을지 각국의 언어로 토착화되는게 나을지 혼동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스파게티나 피자 등의 음식 등은 그대로 외래어를 쓰면서 유독 일본어에 대해서는 지독한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어쨋든, 초밥이라는 우리말이 어느 정도 일상화되어 있으니 초밥이라고 쓰는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충고 고맙습니다.

푸른신기루 2006-03-24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 그런 외래어들이 그대로 쓰이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스시의 경우 초밥이라고 쓰자고 주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전부터 써오던 '초밥'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이죠. 피자나 스파게티 등은 이미 너무도 익숙해져버려서 이제와서 '서양빈대떡'이나 '서양비빔국수'라고 부르자고 하면 우습기만 할 뿐 전혀 와닿지 않지 않겠어요? 이미 익숙해진 외래어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이 있는데도 외래어를 쓰지 말자는 것이지요 - 썼던 댓글들을 보다가 들러서 몇마디 남기고 갑니다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3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3
키류 미사오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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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딱지가 붙어 있는 동화책이라는게 도대체 뭘까?  궁금했다. 혹시 굉장히 야한 책일지도 모른다 (^^ )는 흥분된 속내를 감추고 책을 폈다. 그런데 이 책의 19세 딱지는 아무래도 잔인함에서 비롯된 것 같다. 동화책이라고 하기에는 섬뜩한 폭력과 핏내가 진하게 풍겨 나온다. 물론 이 장치는 동화책이 보여주는 파라다이스의 뒷면에 감추어진, 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기존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3권에는 빨간 모자, 빨간 구두, 돼지 죽이기 놀이, 성냥팔이 소녀, 살인의 성 이렇게 5편이 나와 있다. 빨간 모자의 경우에는 늑대가 바람둥이로 그려져 있고, 빨간 모자는 사생아로, 할머니는 고려장과 같은 내팽겨쳐진 노인으로 나타난다. 성냥팔이 소녀의 경우엔 원래의 캐릭터 그대로 순진하게 그려져 있으나, 그 반대의 악덕한 캐릭터 사드 후작을 만난다는 설정이 다르다. 이 책에선 통쾌한 여자들의 복수가 그려져 있는가 하면, 또한 여성들의 참을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장면도 그려져 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는, 실상 전복적인 사고보다는 굉장히 보수적 사고체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3권 속에 있는 5편의 동화 주인공들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니, 이들 모두가 결손가정이었다. 물론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일지도 모르고, 또는 오히려 자신의 무의식을 은연중에 드러낸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읽어가면서 계속 나를 괴롭히게 만든 생각은 이들이 행하는 행동들이 마치 어렸을적 행복하지 못했던 시절에 대한 복수심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여지는 연쇄살인범들의 가정 마냥, 불행했던 아동기로 폭력적 행위의 근원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말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는,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가족이야기로 들리고,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맹목적 복종에서 한 발 벗어날 수 있는 깨달음 보다는, 행복한 가족을 그 해법으로 찾아야만 할지도 모른다는, 알고보지 않아도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았나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나의 오독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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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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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는 2,30년 전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다.  이 가족은 대도시가 아닌 조그만 소도시 대학에서 히틀러학을 가르치는 아버지와 노인들에게 요가를 가르치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른 자식들( 이 부부는 결혼과 이혼을 여러번 거쳤기 때문에)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아이가 어른 같고 어른이 아이같기도 하며, 대화 중간 중간 라디오나 텔레비젼의 소음이 끼어들고(이게 바로 책의 제목 화이트 노이즈를 의미한다.) 수많은 브랜드 이름의 홍수들이 넘쳐난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쳐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설 전체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차 있다. 사건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유독가스를 실은 기차가 전복되면서 발생하는 소동, 그리고 어머니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기 위해 실험용 약물을 복용하면서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큰 얼개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야기보다는 주인공 각자의 행동양식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본질보다는 항상 이미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로 보여진다. 그것은 소설 전반부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가족은 미국에서 사진이 가장 많이 찍힌 헛간으로 유명한 관광명소를 찾아간다. 그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지만 실제로 그 헛간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 과정속에 드러나는 대화를 엿들어보면

"일단 이 헛간에 관한 표지판을 본 다음에는 헛간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여기 오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항복입니다. 우린 그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만 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해 과연 우리는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와의 관계성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주어진 정보와 이미지에 파묻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열네살짜리 아이와 아버지의 자동차 속 대화도 잠깐 들어볼까!

<오늘밤에 비가 올 거예요

지금 오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오늘밤이라고 했어요>

<지식은 컴퓨터에서 컴퓨터로 이동하지요. 그것은 매일 매순간 변하고 자라요.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해 실제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소설은 이런 생각의 현미경을 가지고 공포라는 감정을 들여다본다. 공포라는 것은 실제한다기 보다는 죽음이라는 이미지가 범람함으로써 쓸데 없이 비대해져버린 것이다. 그것은 마치 현대 우리의 삶에서 비만이 주는 공포로 말미암아 수많은 다이어트가 성행하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건강 정보들로 인해 나는 항상 어디가 아픈 사람이지 않는가 염려해야 하며, 잠재적 암 환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 또한 자신의 신체적 변화가 주는 직접적인 공포보다는, 검사에서 드러나는 수치로 인해 막연한 공포를 갖게 되고, 죽음이라는 감정이 발생하는 뇌의 작용을 억제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려하지만, 오히려 현실과 개념사이의 구분을 잊어버리는 부작용에 시달린다.

유독가스가 새어나옴으로써 더욱 아름다워진 석양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나 감성을 갖어야할지도 잘 모르는듯이 보여진다. 그것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 또한 매체를 통해 겪은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통해 배워야지만 가능한 것일련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본질보다는 이미지로 가득차 있다. 사람들은 그 이미지의 포장을 걷어내지 못하고, 또 설령 걷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다른 포장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쉽사리 본질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포장은 수많은 화이트노이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화이트노이즈 속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우리네 삶은 우울한 색깔로 뒤덮여 가고 있는듯만 하다.

소설은 결말부에 충격적 사건을 내놓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결로 믿음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믿음 또한 본질적 믿음이 아니라, 누군가 믿지 않으면 건재할 수 없다는 인식하에 믿는 척 함으로써 발생하는 믿음일 뿐이다. 즉 포장지를 걷어낸 것은 거짓 믿음이며, 이것 또한 또 다른 포장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결국 우리는 진짜 사물에 한발짝도 다가서지 못하고, 진실보다는 거짓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 서글프다. 살아간다는 것은 진실과 하등의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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