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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피포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노마드북스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빨간책이라고 혹시 본 기억이 있을련지 모르겠다. 장정일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가 영화화 되었을때 길거리에서 팔던 성과 관련된 책들이 묘한 커버를 하고 진열되던 장면을 얼핏 떠올려도 될 것이다. 이 책은 마치 빨간책을 읽는 듯한 흥분을 제공한다. 표지를 한번 보아라. 마침 불그스름하지 않는가? (묘하게도)
32살의 프리랜서 남자 기자 스기야마 히로시, 명문대 출신이지만 대인공포증을 지니고 있다. 말이 프리랜서지 입에 풀칠도 겨우 하는 뚱뚱하고 못난 사람이다. 삶의 유일한 낙이라면 부실공사로 지어진 건물의 위층에서 들려오는 야릇한 성관계 소리. 보다 더 잘듣기 위해 생계비를 걱정해야 할 판에 도청기를 사버린다.
여자를 등쳐먹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23살의 남자 건달 구리노 겐지, 카바레 클럽 스카우트 맨이다. 지나가는 여자를 설득해 카바레 또는 안마사, 나중엔 에로 비디오 주인공으로 스카우트해 커미션을 챙기며 살아간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자들을 설득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소설 속에서는 의외로 많은 여성들이 미끼를 쉽게 문다. 어느날 수동적인 여자를 만나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에로 비디오까지 출연시키게 되지만, 그저 상품으로 여겨야 할 그녀에게 애정이 생겼음을 알게된다.
권태로운 일상에서 탈출해 에로 배우로 거듭난 43살의 아줌마 사토 요시에. 평범한 주부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남편과도 딸과도 대화를 나눈지 오래고, 매일매일이 무료하다. 어느날 에로배우에 스카우트 된 이후 성에 눈을 뜨게 된다. 오직 성적 쾌락만을 누리고 싶어하며, 다른 일엔 작은 관심조차 없다. 집은 온통 쓰레기로 가득 차 있지만, 남편도 딸도 그리고 자신도 무신경이다.
남의 말을 절대로 거절 못하는 소심남 26세의 아오야나기 고이치. 노래방 아르바이트 생이다. 원룸 옆방에서 들려오는 텔레비젼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만 항의 한번 못하고, 집에 찾아오는 방문 판매객의 험한 얼굴에 찍소리 한번 못하고 물품을 구입한다. 맞은 편집에서 들려오는 개짖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 서 있던 어느날 이름없는 협박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분노를 터뜨릴 곳을 찾지 못하던 그는 개짖는 집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마음 먹는다.
한때는 순수한 문학청년이었던 대머리 52살 아저씨 사이고지 게이지로. 관능소설가다. 젊었을적 유명한 신인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3류 출판사에 3류 관능소설을 쓰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아무 걱정없지만, 자괴감이 크다. 그러는 한편으론 소설을 쓴다는 핑계로 원조교제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경찰에 덜미를 잡히고 도망쳐 노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오히려 노숙자 신세가 마음 편하다고 느끼며 잘 적응한다.
폭탄이라 불리는 못생긴 뚱땡이 28살 여자 다마키 사유리. 테이프 리라이터다. 관능소설을 녹음한 것을 타이핑해서 글자로 옮겨적는 일을 한다. 하지만 수입원은 다른데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일에 자신감을 느끼며, 삶의 희망을 품는다. 그 다른 일은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인지라 밝힐 수는 없다. 어찌보면 반전일 수도 있겠다.
소설은 이 6명의 주인공을 각각 한 章으로 해서 그들의 시선으로 사건을 펼쳐간다. 6명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얽혀있거나 관계되어져 있는데, 소위 끼리끼리 논다라는 표현을 써도 괜찮을듯 싶다. 인생의 패배자 또는 3류 떨거지들의 축제인 이 소설은 책 표지의 "인생 뭐 있어?"라는 말을 되뇌이게 만든다. 관음증 환자마냥, 욕망을 좇는 부나비마냥, 한판 멋들어지게 놀고 마음가는대로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물론 폼나지도, 부럽지도 않은 삶이지만, 그게 대수는 아니다. 그렇게 욕망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보면 삶은 어느새 끝자락에 도달해 있을지도 모른다. 밑바닥이든 구름 위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욕망을 충족시키다 보면, 또는 욕망을 좇다보면 어느새 인생을 지나가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주인공들 행복한걸까? 반대로 욕망을 벗어버린 관세음보살의 미소는 행복한 미소일까? 쾌락과 충족, 그런 후 다가오는 게 허무함만이 아니라면 미래를 계산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미래에 저당잡힌 현대인들에게 현실의 욕망에 충실한 밑바닥 인생들을 보고 있자니,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욕망의 유보냐, 충족이냐로만 따진다면 당장의 충족이 좋을테이고, 유보를 통해 그 욕망의 크기가 훨씬 커진다면 지금 당장에 만족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욕망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는 인생들에겐 그때그때 황홀감을 느끼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든 미래든 그 욕망이라는 것을 벗어버린다면, 아니 욕망이 아니라 나라는 자아를 벗어던진다면, 과연 어떨까? 소설을 읽으며, 한편으론 밑바닥 인생도 없고 구름 위 인생도 없는 깨달음의 관음상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개인적으론 이래저래, 다 쉽지 않으니, 제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다. 욕망에 충실하지도, 그렇다고 미래를 담보하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나를 깨뜨리는 깨우침도 얻지 못하니, 이게 바로 현대인의 자화상일까? 치여 사느니 즐겨보겠다는 것도 성격이 되야 가능하다. 그래도 소설 속 인물들은 구질구질하지만 그 욕망에 충실하다. 때론 자신들의 분노를 드러내지 못하는 억압상태에 있거나, 스스로 이성적이라면서 행동을 자제하기도 하면서도 자신이 누리고자 하는 욕망을 꿈꾼다. 하지만 그 이면엔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이라는 타인에 대한 깔봄이 감추어져 있다는 점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있을성 싶다. 욕망의 충족은 힘의 우위를 전제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소설 속에 감추어진 또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떡하나, 힘에 대한 알러지가 있는 나는 차라리 관음상의 미소를 배워야만 하겠지.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러한 욕망아닌 욕망이라도 꿈꾸어야 할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