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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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지 않고도 칼을 씻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화자>138쪽

개인적으론, 바로 이 문장이 단편을 모은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대신 물로 씻는다는 뜻으로서가 아니라, 손을 베이지 않고 손으로 칼을 씻기 위해선 물의 힘을 빌려 적당한 힘 조절과 칼날과의 거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의미로서 말이다. 즉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상처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선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관심을 적절하게 두어야 한다고 읽혀진다는 것이다. 마치 서로 다가가면 가시에 찔리기 때문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고슴도치의 사랑 마냥.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말이 없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그녀가 잠못드는 이유가 있다><사랑의 인사><노크하지 않는 집> 등등, 속으로 생각하되, 밖으로 내뱉는 말은 소설 속에서 찾기 힘들다. 상처를 줄까봐, 또는 상처를 받을까봐 겁내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을 주고 받음으로써 발생하는 타인과의 벽사이에 틈새가 생길까 부담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관계성에서 나를 찾기보다는 홀로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 쉬울듯 보여서일테다.

나를 규정짓는 것은 내가 편의점에서 소비하는 것들로 특징지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이 소비하는 패턴과 다를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거나.,원룸에 사는 여성이 다른 방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문을 열어본 순간 자신의 방과 똑같은 모습을 발견한데서 오는 충격이 이 소설을 다 읽고도 굉장히 큰 여운으로 남는다.  내가 소비하는 것이 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결코 가당치 않음을 보여준다. 나만의 독특한 자아 정체성은 한번에 사라져버린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속에서 대량인간이 탄생된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왜 이리 태연한 것일까?

그것은 이미 베이지 않고 칼 씻는 법을 터득한 덕분이다.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삶을 평온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지만, 타인이 나와 그다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는 또 가까운 거리. 그래서 내게 이 소설은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가늘게 떨고 있다. 자신만의 껍데기에 갇혀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서로 소통할 것인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을 것인지. 솔직히 책을 덮고 나서도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 지 혼란스럽다. <노크하지 않는 집>의 주인공처럼 나와  똑같은 누군가를 마주치지 않을까 공포스러울 따름이다. (왠지 소설을 읽다 박민규를 떠올렸다. 근데 웃음의 색깔이  다소 차이가 난다. 그 차이가 바로 희망의 농도차이라고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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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5-09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쾌한 문체를 쓴 오렌지 맛 나는 젊은 작가죠?
전 포스트잇으로 방안 가득 붙여놓았던 장면이 인상 깊어요.
박민규는 읽지 않았으니 이래저래 비교는 무리군요,,

하루살이 2006-05-10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러고 보니 파닥파닥 거리는 포스트잇. 종이 물고기가 머리속에 그려지네요.
이 단편은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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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비주류다. 아니, 세상이 양극화되어가고 있다고 하니, 머지않아 대부분 하류인생으로 전락할 것이므로 오히려 주류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주류란 힘의 역할에서 주류가 아니라, 다수라는 입장에서  껍데기만 주류인 주류다.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체제로부터 완전히 빗겨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혹 빗겨가고 싶어하더라도 책 속의 단편 <코리안 스텐더즈>의 KS크롭서클 마냥 자신의 처지를 비아냥 거리게 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될지도 모른다.

현실이 행복하지 않은 이들이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순응과 전복, 양자택일만을 강요했던 사회가 다양성을 확보함으로써 소설 속 인물들, 또는 현실 속 인물들의 삶의 방식도 가지각색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행복해보이는 것은 주인공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다. 이들은 체제에 순응함으로써 부를 얻는다. 자본주의에서 부는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들이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행복할 것처럼 보인다. 그럼 그 부의 길에서 한발짝 벗어나 있는 주인공들은 어떤가?

푸쉬맨,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겨우 꾸려가는 고딩, 관같은 고시원에서 숨죽이며 살아야하는 대학생, 너구리 오락을 알게 됨으로써 현실과 멀어진 인턴사원, 시외 유원지에서 오리 보트 아르바이트를 하는 취업 재수생 등등은 삶의 행복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 그간의 장편과 달리 압축되어진 단편을 읽으면서는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없어 당혹스럽다. 아직도 소설 읽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 탓이리라. 느닷없이 만나게 되는 황당한 상황들,. 지하철 역의 기린이나, 사방에서 나타나는 왕오징어, 헤드락을 거는 헐크 호건 등등은 물론이거니와 갑작스레 끝을 맺는 소설의 전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채지 못하겠다.

다만 엉뚱한 사건들로 인해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누구인지도 모를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고정된 길로만 걸어간 것은 아니었는가 돌아보게 만든다. 당혹스러움은 평상과 어긋나면서 생긴다. 그리고 그 당혹은 현실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이대로의 삶을 지양하게 만듬으로써 당혹은 자신의 역할을 해낸다. 지양된 삶이 더 나은 삶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평상이 그대로 진행된다면 결코 행복은 맛볼 수 없으리라는 것은 안다. 따라서 당혹은 불행이라는 늪을 자각하게 만듬으로써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 당혹은 소설 속에선 외부로부터 주어지지만, 그것을 읽는 독자는 소설이 주는  당혹감과 함께 현실에서 당혹을 만들어보고 싶은 유혹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당혹은 혹시 사고를 일으키고 싶은 일탈의 강렬한 욕망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사고 한번 쳐보자.(라고 생각하면서도 말만 그렇다. 언제쯤 질러 보련지...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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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6-05-05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쎄... 왜 소심한걸까요. 저도...
 
라라피포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노마드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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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책이라고 혹시 본 기억이 있을련지 모르겠다. 장정일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가 영화화 되었을때 길거리에서 팔던 성과 관련된 책들이 묘한 커버를 하고 진열되던 장면을 얼핏 떠올려도 될 것이다. 이 책은 마치 빨간책을 읽는 듯한 흥분을 제공한다. 표지를 한번 보아라. 마침 불그스름하지 않는가? (묘하게도)

32살의 프리랜서 남자 기자 스기야마 히로시, 명문대 출신이지만 대인공포증을 지니고 있다. 말이 프리랜서지 입에 풀칠도 겨우 하는 뚱뚱하고 못난 사람이다. 삶의 유일한 낙이라면 부실공사로 지어진 건물의 위층에서 들려오는 야릇한 성관계 소리. 보다 더 잘듣기 위해 생계비를 걱정해야 할 판에 도청기를 사버린다.

여자를 등쳐먹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23살의 남자 건달 구리노 겐지, 카바레 클럽 스카우트 맨이다. 지나가는 여자를 설득해 카바레 또는 안마사, 나중엔 에로 비디오 주인공으로 스카우트해 커미션을 챙기며 살아간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자들을 설득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소설 속에서는 의외로 많은 여성들이 미끼를 쉽게 문다. 어느날 수동적인 여자를 만나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에로 비디오까지 출연시키게 되지만, 그저 상품으로 여겨야 할 그녀에게 애정이 생겼음을 알게된다.

권태로운 일상에서 탈출해 에로 배우로 거듭난 43살의 아줌마 사토 요시에. 평범한 주부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남편과도 딸과도 대화를 나눈지 오래고, 매일매일이 무료하다. 어느날 에로배우에 스카우트 된 이후 성에 눈을 뜨게 된다. 오직 성적 쾌락만을 누리고 싶어하며, 다른 일엔 작은 관심조차 없다. 집은 온통 쓰레기로 가득 차 있지만, 남편도 딸도 그리고 자신도 무신경이다.

남의 말을 절대로 거절 못하는 소심남 26세의 아오야나기 고이치. 노래방 아르바이트 생이다. 원룸 옆방에서 들려오는 텔레비젼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만 항의 한번 못하고, 집에 찾아오는 방문 판매객의 험한 얼굴에 찍소리 한번 못하고 물품을 구입한다. 맞은 편집에서 들려오는 개짖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 서 있던 어느날 이름없는 협박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분노를 터뜨릴 곳을 찾지 못하던 그는 개짖는 집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마음 먹는다.

한때는 순수한 문학청년이었던 대머리 52살 아저씨 사이고지 게이지로. 관능소설가다.  젊었을적 유명한 신인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3류 출판사에 3류 관능소설을 쓰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아무 걱정없지만, 자괴감이 크다. 그러는 한편으론 소설을 쓴다는 핑계로 원조교제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경찰에 덜미를 잡히고 도망쳐 노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오히려 노숙자 신세가 마음 편하다고 느끼며 잘 적응한다.

폭탄이라 불리는 못생긴 뚱땡이 28살 여자 다마키 사유리. 테이프 리라이터다. 관능소설을 녹음한 것을 타이핑해서 글자로 옮겨적는 일을 한다. 하지만 수입원은 다른데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일에 자신감을 느끼며, 삶의 희망을 품는다. 그 다른 일은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인지라 밝힐 수는 없다. 어찌보면 반전일 수도 있겠다.

소설은 이 6명의 주인공을 각각 한 章으로 해서 그들의 시선으로 사건을 펼쳐간다. 6명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얽혀있거나 관계되어져 있는데, 소위 끼리끼리 논다라는 표현을 써도 괜찮을듯 싶다. 인생의 패배자 또는 3류 떨거지들의 축제인 이 소설은 책 표지의 "인생 뭐 있어?"라는 말을 되뇌이게 만든다. 관음증 환자마냥, 욕망을 좇는 부나비마냥, 한판 멋들어지게 놀고 마음가는대로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물론 폼나지도, 부럽지도 않은 삶이지만, 그게 대수는 아니다. 그렇게 욕망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보면 삶은 어느새 끝자락에 도달해 있을지도 모른다. 밑바닥이든 구름 위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욕망을 충족시키다 보면, 또는 욕망을 좇다보면 어느새 인생을 지나가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주인공들 행복한걸까? 반대로 욕망을 벗어버린 관세음보살의 미소는 행복한 미소일까? 쾌락과 충족, 그런 후 다가오는 게 허무함만이 아니라면 미래를 계산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미래에 저당잡힌 현대인들에게 현실의 욕망에 충실한 밑바닥 인생들을 보고 있자니,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욕망의 유보냐, 충족이냐로만 따진다면 당장의 충족이 좋을테이고, 유보를 통해 그 욕망의 크기가 훨씬 커진다면 지금 당장에 만족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욕망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는 인생들에겐 그때그때 황홀감을 느끼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든 미래든 그 욕망이라는 것을 벗어버린다면, 아니 욕망이 아니라 나라는 자아를 벗어던진다면, 과연 어떨까? 소설을 읽으며, 한편으론 밑바닥 인생도 없고 구름 위 인생도 없는 깨달음의 관음상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개인적으론 이래저래, 다 쉽지 않으니, 제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다. 욕망에 충실하지도, 그렇다고 미래를 담보하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나를 깨뜨리는 깨우침도 얻지 못하니, 이게 바로 현대인의 자화상일까? 치여 사느니 즐겨보겠다는 것도 성격이 되야 가능하다. 그래도 소설 속 인물들은 구질구질하지만 그 욕망에 충실하다. 때론 자신들의 분노를 드러내지 못하는 억압상태에 있거나, 스스로 이성적이라면서 행동을 자제하기도 하면서도 자신이 누리고자 하는 욕망을 꿈꾼다. 하지만 그 이면엔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이라는 타인에 대한 깔봄이 감추어져 있다는 점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있을성 싶다. 욕망의 충족은 힘의 우위를 전제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소설 속에 감추어진 또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떡하나, 힘에 대한 알러지가 있는 나는 차라리 관음상의 미소를 배워야만 하겠지.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러한 욕망아닌 욕망이라도 꿈꾸어야 할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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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3-19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게끔 쓰셨습니다.

하루살이 2006-03-19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에서의 3류와 1류, 또는 야설과 순수의 경계선은 어디일지 생각해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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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첫 날 일간지에 앞으로 없어질 것 같은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미래학자가 예측한 내용이 소개된 것이 기억난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일부일처제였는데, 최근 조용남이 공개적으로 애인을 두자는 인터뷰와 일맥상통한다고 보여진다. 이 소설은 일부일처나 애인을 뛰어넘어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를 주장한다. 나의 아내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또 결혼하는 사태. 즉 1명의 아내에 2명의 남편이라는 신가족제도의 탄생을 소설은 진중하면서도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아내를 사랑하게 된 시점에서부터 아이가 태어나기까지의 전 과정을 축구와 빗대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설정은 경이롭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경쾌한 문체에 통쾌한 웃음까지 선사하니, 그야말로 재미 만점이다.

만약 축구를 좋아한다면 더욱 이 책을 놓쳐서는 안될듯 싶다. 축구에 대한 상식과 어떻게 보면 하잘것 없는 스타들의 인터뷰들이 소설 속 이야기 적재적소에 배치됨으로써 축구도 사랑이나 가족 이야기도 그 효과가 배가된다. 예를 들면 팀이 2부리그로 떨어졌음에도 팀을 옮기지 않았던 바티스투타를 그라운드의 로맨티스트로 묘사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거기에 빗대기도 한다. 그리고 남편이 둘인 상황을 투톱의 공격 형태를 지닌 포진도로 풀어내기도 하는데, 그 맞장구가 너무 절묘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소설은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현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지켜가고 있는 제도들이나 관습이 얼마나 우리를 얽매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극한의 예시로 보인다.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정의가 영화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고, 그것을 당연시여기며 마지막 희망을 가족에게 걸었던 사람들에겐 엄청난 충격일수도 있겠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가족이 구성되고, 그것이 어떤 심리적 기제를 가지고 진행되며, 현실 속에서 가능하도록 작동될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조마조마하다. 특히 주인공인 첫 남편의 심리가 어떤 식으로 혁명적 제도의 변화에 수긍해가는지 지켜보는 것 또한 재미있다.

'대한민국 남자로서 축구를 현재까지 싫어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축구를 좋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니 축구를 좋아하려 노력하지 말라.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생에 손해볼 것은 없으니까'라는 단상은 어느새 아내의 또다른 남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있다.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이 있을까, 없다. 그 사람을 좋아하려 노력하지 말자. 그 사람을 싫어한다고 해서 인생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테니까 '라는 식의 비꼼은 소설을 유쾌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의 이 단언이 점차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일부일처제라는 가족 제도 그대로 완벽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한때 세상을 풍미했던 애인두기는 아마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능력있는 사람으로 대변될 것이다. 바람 피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바람 피우는 것을 들키지 말라라는 식의 교훈이 떠도는 현실을 보면 과연 일부일처제가 무엇 때문에 지켜져오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만도 하다.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또는 누구의 행복을 위해서 그것이 정착되어졌는지, 또는 그 제도와 현실간에 얼마나 괴리가 있는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우리는 타성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꼭 가족제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한번쯤 그것이 왜 당연한 것인지 의문을 가져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만약, 당연한 그것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나에게 괴로움을 준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말미암아 행복하다면, 그저 불온한 상상을 통해 심리적 일탈의 재미만을 느끼는 것도 괜찮을듯 싶다. 이러나 저러나 이 소설 읽기는 당신에게 웃음을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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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동서 미스터리 북스 52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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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회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마쓰모토의 대표작 2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점과 선><제로의 초점> 두 작품은 3,40년 전쯤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데, 심증이 가는 범인의 완벽한 알리바이를 깨뜨려가는 재미가 그만이다. 다만 그 알리바이라는 것들이 지금-여기서 지금이란 세월이 흘러가버린 현재 상황- 돌이켜보면 그다지 기발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시간이 주는 퇴색을 맛본다는 것이 아쉽다. 마치 바둑을 배울때 다음 수도 보이지 않던 것이 조금 실력을 쌓아보면 3,4수 앞이 보이는 것처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3,40년 전의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들이 일상화 되어 버린 생활 속에서 자주 대하는 것들이라 알리바이의 허점을 다분히 눈치 챌 수 있다는 것이다.

<점과 선>의 경우에는 정사로 보여지는 남녀 2구의 시체를 둘러싸고 미하라라는 형사가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분명 범인이 확실시되는데,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어, 그것의 허점을 찾아내려는 주인공의 치열함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이 소설에서는 사건의 해결이 선입견의 불식으로부터 비롯된다. 즉 선이란 점과 점의 연결상태인데, 사람들은 그 점들과 별개로 선을 만들어버린다는 것. 점을 선으로 이해하는 선입견이 사건의 해결을 가로막고 있으며, 범인은 이 선입견을 철저하게 이용한다.

<제로의 초점>은 갓 결혼한 여자 데이꼬가 갑작스레 실종된 남편을 찾는 이야기다. 남편과 연계된 사람들이 차례대로 독살되고, 범인이라 여겼던 인물도 죽음을 맞이하는 통에 범인을 가려내는게 쉽지않다. 범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범인의 심리가 자세히 그려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동정하게 된다는 점이 이 소설을 읽는 숨은 재미가  아닐까 싶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현재의 교통, 통신 수단을 생각해본다면 사건 자체가 보다 쉽게 처리될 수도 있을듯하지만, 그것은 조금 감안해서 읽어야 할 부분이다. 전화가 귀한 시절 연락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현재에선 상상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이런 점이 소설의 재미를 조금 떨어뜨리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 책의 최대 장점은 역시 사회추리소설이라는 장르 속에 있다.

범행의 동기가 개인적 연유라기 보다는 사회적 문제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 책의 무게를 묵직하게 만든다. 특히 <제로의 초점>은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시대의 희생자가 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사회적 폭력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개인을 들여다보게 된다. 물론 사회적 문제라는 것 또한 개인적 문제를 도외시하곤 생각할 수 없지만, 또 개인의 문제를 사회의 문제로 치부해버릴 수 있는 약점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점과 선>은 사회적 권력이 품고 있는 치부와 힘의 악용을 엿볼 수 있어 보다 더 직접적이다. 추리 소설이 개인적 사건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그 뒤에 감추어진 조직과 사회의 폭력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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