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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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역사교사인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는 어느날 동료교사로부터 비디오 한편을 소개받는다. 그 비디오를 보면서 테르툴리아노는 깜짝 놀라게 된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5년전 콧수염까지. 단순히 닮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똑같다니... 그래서 교사는 이 배우가 나온 영화를 모두 섭렵한다. 그리고 영화사에 거짓 편지를 써서 주소를 알아낸 후 이 배우를 만나고자 한다. 그리고 만나게 된 두 사람. 말 그대로 도플갱어. 실제로 DNA가 똑같을 확률이 50억분의 1이라니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으란 법은 없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닥친 인생의 격동...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결말에 이르면 정말로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소설을 읽으면서 납득하지 못했던 점은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해서 왜 꼭 만나봐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였다. 그저 놀라고 신기해하며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일까? 이것을 그럭저럭 무시하고 읽어간다면 소설은 종반부로 접어들수록 흥미진진해진다. 원본과 복사본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속 인물들이 누가 먼저 태어났는가에 집착하는 이유는 자신이 원본이고 싶어하는 욕망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삶이 원본과 복사본이 차이가 없는 디지털 시대다. 어느새 디지털 마인드로 무장되어져 있다. 내가 복사본이라고 해서 달라질 건 또 무엇일까? 지금까지 SF 영화들이 집착했던 자아 정체성의 문제에서 나의 기원에 대한 접근은 이제 더이상 중요한 문제는 아닐성 싶다. 재패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의문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정체성을 기억에서 찾기 때문일 것이다. 어쨋든 복사본이 복사본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의 삶이 꼭 복사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삶 자체는 그에게 있어 원본이지 않을까?

소설은 이 부분보다 오히려 정체성의 문제를 외관으로 돌린다. 두 주인공이 왕과 거지처럼 서로 모습을 뒤바꾸기 위해서 한 것은 옷을 바꿔입는 것이다. 옷을 바꿔입는 것만으로 둘은 완벽하게 서로의 자리를 차지한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극적 반전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완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었다. 그리고 그 옷을 바꿔입은 행위 하나만으로 자신의 과거 삶을 통째로 바꾸기도 한다. 이것은 옷이 날개라는 말로써도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군복을 입고 예비군이 됐을때의 행동변화나 과감한 옷차림으로 변했을때의 자신감 등등 외관이 자신의 성격도 바꿔주는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옷을 바꿔입는 것만으로 정체성이 완전히 흔들릴 수 있을까

소설은 정체성이라는 문제보다 오히려 마지막 부분의 극적인 사건 전개때문에 흥미로울 뿐이다. 정체성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문제를 옮겨가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의 해답이 정체성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면 삶은 보다 다양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으로 책장을 덮었다. 나는 나를 무엇 또는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짓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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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0-20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얼굴이 지극히 평범한 이유때문인지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말을
수없이 듣습니다. 개성적이지 못한 외모때문에 화딱지가 났던 시절도 있지만
외모에 거의 신경을 끄고 사는 지금은 평범한 얼굴에 만족해요
그런데 정말, 누군가 저와 똑같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땐 어쩔까..난감합니다.
정체성에 관한 괴로운 일에 시달릴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나는 나죠!^^

하루살이 2006-10-20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나는 그냥 나일뿐이죠. 무엇이라 정의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냥 나!!!
 
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윤덕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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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여기서 개인적이라는 것은 이기적이라거나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식으로 인해 소동이 일어날 것이며 그 소동으로부터 개인은 결코 자유로울수 없다는 점에서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무슨 일을 할지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지의 표현으로서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인지는 도대체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결코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나간 사람들에 의해 해꼬지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며, 누군가의 손에 잡혀 집밖으로 휩쓸려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종말의 바보>라는 이 소설은 내일이 아니라 8년 후에 지구가 소행성에 부딪혀 종말을 맞게 된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지는 한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5년간 살인, 강도, 방화, 자살 등등 혼돈기를 맞이하다가 지금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상태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해가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노아의 방주를 찾아 어디선가 분명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며 지푸라기라도 잡을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망루를 지어 해일이 어떻게 도시를 삼키는지를 구경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으며, 가족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복수를 꿈꾸는 사람도 있으며, 그저 묵묵히 자신이 해 오던 일을 꿋꿋하게 계속 해 가는 사람들도 있다. 종말의 소식을 전혀 알지 못하고 나중에 알게 되면서 당황해하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칩거에 들어갔다 세상으로 나온 소녀, 자살을 꿈꾸는 자 등 다양한 인생군상이 시선을 끈다.

소설이 말하고 싶은 것이야, "어떻게든 살아" "처절하게 치열하게 살아"라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다. 아니, 맨 처음 스피노자의 구절처럼 당장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자세로 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갖는 힘은 단순히 그런 메시지의 전달이 아니라 그 메시지에 수긍하도록 만든다는데 있다. 개인적으로 8가지 이야기 중 가장 기억하고 싶은 것은 '강철의 킥복서'다.

"나에바, 내일 죽을 거라는 말을 들으면 어쩔 거야?" 배우가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했다. "다르지 않겠죠." 나에바 씨의 대답은 냉담했다. "다르지 않다니, 어쩔 건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로킥과 레프트 훅밖에 없으니까요" 배우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고 한다. "그건 연습 얘기잖아. 아니, 내일 죽는데 그런 걸 한다고?" "내일 죽는다고 삶의 방식이 바뀝니까?" 글자들이라서 상상할수밖에 없지만 나에바 씨의 말투는 정중했을 게 틀림없다. "지금 당신 삶의 방식은 얼마나 살 생각으로 선택한 방식입니까?"(210쪽)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211쪽)

내가 언제 죽을 지를 안다면 삶의 방식이 바뀔까? 흔히들 말하는 예상 수명이라는 것이 있다. 그 예상 수명에 맞추어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하며 살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 죽음은 일상 속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죽음은 나의 삶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아니 죽음 그 자체를 생각조차 않으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암과 같은 시한부 판정을 받으면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자살하면 안 되는 이유 따위, 내가 알게 뭐냐, 멍청아! 아무튼, 절대, 죽으면 안 되는 거야. 이 녀석아, 쭈뼛쭈뼛 인생의 산을 올라와서는, 힘들고 무섭고 피곤하니 처음 왔던 길로 슬슬 돌아가볼까, 할 수는 없는거야" "난, 오를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니까요" "대체 뭐냐, 넌? 난, 지금 올라가서 어떻게 하자, 따위를 말하는게 아냐. 오를 수 있을 때까지 오르라고 명령하는 거야. 그리고 말이다, 아나 다 올라가면 말이다, 정상에서의 경치는 틀림없이 각별할 거야"(316쪽)

경치가 각별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른다. 시지푸스가 끊임없이 산을 오르고 또 오르듯이 살아간다는 것이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 경치를 구경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손을 놓아버리면 시지푸스는 바위에 깔려 죽을 것이다. 손을 놓을 수는 없다. "살아가는 건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소설 속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하루하루를 후회없이 살아가는 것, 아니 후회없이라는 말을 지워도 괜찮다.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일일지도 모른다. <종말의 바보>는 살아간다는 것의 위대함을 말해주는듯 하다. 이 소설은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한다. 강철의 킥복서가 오늘도 무수한 발차기 연습을 하듯이. 소설의 끝장을 덮으면 아릿한 심정과 함께 삶에 대한 애착이 무한정 솟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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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9-24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운 잔잔한 작품이었습니다.

하루살이 2006-09-25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지금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 같아요.
 
플리커 스타일 - 카가미 키미히코에게 어울리는 살인
사토 유야 지음, 주진언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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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계 상인 메피스토 상을 수상했다는 문구보다도 가족 유괴 살인 오컬트 강간 감금 등의 말이 뇌리에 깊이 박히는 자극적인 소설이다. 그리고 정말 자극적인, 그것도 형이하학적(?) 자극이 가득한 책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꽤나 형이상학적(?)이다.

여동생이 납치 강간을 당한 후 자살을 하게된다. 평소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상한 가족의 피를 경멸하며, 누나의 장례식 등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주인공은 느닷없이 찾아온 한 인물로 인해 엉뚱한 복수극을 꾸민다. 여동생을 강간한 중년 남자들의 딸과 손녀를 납치해 감금시킨다는 것.

소설을 이루는 또 하나의 줄기는 나이프 잭이라는 연쇄살인범이다. 소녀들만을 대상으로 목에 나이프를 찔러 죽이는 살인범. 하지만 그 피살자들의 얼굴은 공포로 떨고 있거나 도망치려하지 않고, 오히려 평온한 모습이다. 이 연쇄살인범의 범죄행각은 남자 주인공의 여자친구의 눈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는 초현실적 양태를 띤다.

소설의 두 줄기는 따로 진행되다가 결론 부분에 이르러 하나의 이야기로 집약된다. 일본의 전설 또는 신화를 바탕으로 한, 또는 그것을 소재로 한 소설은 오컬트적이기 보다는 편협함으로 가득차 있는듯 여겨진다. 하지만 또한 굉장히 솔직한 고백들로 가득차 있기도 하다.

감정이니 인격이니 하는 것들이 인간을 얽어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건 것은 쉽게 다시 쓸 수 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녀석이 일반적으로 바보라 불리는 종족. 인격을 쉽게 한가지로 뭉뚱그리려 하기 때문에 남의 입장이 보이지 않는다. (92~93쪽)

하지만, 인생을 의미나 부가가치로 장식해서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뭐, 환상을 부정하는 것은 고양이를 죽이는 것보다 쉽지만, 쉽다고 해서 부정하기만 하는 것도 또 넌센스니까.(108쪽)

누군가가 누군가를 무의식중에 상처 주고 상처받는 것이 이 현상세계라는 것. 그것은 자명한 이치다.(164쪽)

토도 유미에도 미쿠니 아키코도 형도 왜 이렇게까지 의미에 집착하는 걸까? 그 집착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의미가 있는 것 자체가 필연인 것인가... 아니, 속지않아. 난 속지 않을거야. 속을 수 없어.(207쪽)

인생이 의미를 가져야 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하게 여겨지는 도덕이자, 진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생각들이 고정관념화 되어 오히려 당사자를 얽어맬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지 않을까. 정말 하루하루 근근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인생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 의미를 찾는 과정마저도 삶의 엄청난 무게가 될지도 모른다.

자신의 감정이 수시로 변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일관된 모습으로 치장하거나 일관된 척 하는 위선에서 벗어난다면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의 폭도 넓어지지 않을까 싶다.

나도 누나도 케토인도, 자기 중심적인 이유로 사람을 죽였다. 아니, 따지고 보면, 어떤 살인 동기도 자기 중심적인 것이다. 비록 그것에 어떤 명분이나 사명이 있다 해도 개인의 사고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돈을 위해, 종교를 위해, 가족을 위해, 자유를 위해, 세계를 위해... 뭐라고 하든 최종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것.(376쪽)

소설을 읽으며 가장 동감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요 소재인 살인에 대한 단상이 이토록 강렬할 수는 없다. 어떤 명분으로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절감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ㅇㅇㅇ를 위해서 누군가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 일이다.

그러나 소설의 강렬함은 순정에 대한 집착, 예지 능력과 같은 초현실적 세계에 대한 동경, 나나 우리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배타적 또는 공격적 성향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위험해 보이기도 하다. 소설이 이런 것들에 대한 거부를 말하고 싶었다고 애써 생각하며, 이런 전제들에 대해 그냥 무심코 지나치기 보다는 한번쯤 그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할듯 싶다. 인생이 의미를 꼭 가져야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소설의 전제가 되는 소재들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타인에게 어떤 폐해를 끼칠 수 있는 정신적 무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때론 책의 의미를 뒤져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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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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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은지 열흘도 넘은 것 같다. 줄거리조차도 가물가물하다. 그럼에도 리뷰를 쓰겠다고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는건 왠지 어떻게 해서든 책을 읽었던 당시의 기분을 다시 기억하고픈 욕망때문이리라. 하지만 이 욕망이 부질없음을 나는 잘 안다. 떠오르려 떠오르려 해도 끝내 떠오르지 않을 단상들.

소설을 쓴 지은이가 나와 동년배이다보니 아무래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쉽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여성이라 심리묘사에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무래도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성적 차이를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는가보다. 남녀를 따지지 않고 소설 속 주인공들이 쉽게 동화가 된다.

최근 한겨례21이라는 주간지에서 <서른 다섯, 물음표 위에 서다>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와 맥락이 같다고 보여진다. 결혼을 해야 할 것인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 일을 추진할 것인지, 노후는 어떻게 될 것인지, 돈을 번다는 것과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 사이에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서 심하게 갈팡질팡 하는 세대. 물론 20대 중후반을 포함해 40대 들도 비슷한 고민을 품고 있겠지만, 어쨌든 동년배의 작가가 기술하는 인물들은 내 주위에서 누군가를 하나 데려다놓고 글로 묘사해놓으면 얼추 비슷한 상황으로 전개가 가능할 것이다.

그만큼, 이 시대를 살아가는 30대 청춘(?)들의 삶을 투명하게 내비치고 있다. 기억나지 않는 소설을 떠오르려 애쓰기 보단 밑줄 그은 부분을 되돌아보며 소설을 반추해보기로 한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그렇게 말한 시인은 최승자다.(13쪽)

문자메시지는 참 고마운 도구다. 전화 통화의 어색한 침묵과 말줄임표의 곤혹을 감당하기 싫을때 더없이 유용하다.(21쪽)

모든 고백은 이기적이다.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고백을 할 때, 그에게 진심을 알리고 싶다는 갈망보다 제 마음의 짐을 덜고 싶다는 욕심이 더 클지도 모른다.(106쪽)

인생을 소모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관계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사랑에 몸을 던지나 보다. 순간의 충만함. 꽉 찬 것 같은 시간을 위하여.(140쪽)

혓바닥을 놀려 진심의 조각을 입 밖으로 밀어내는 순간. 진심은 진심이 아닌 것으로 변한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다만 의외의 곳에서 그 책임 없는 말들의 유령과 조우했을 때 받게 되는 고약한 느낌에 대하여 더듬더듬 기억할 수 있을 따름이다. (204쪽)

어떤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섭도록 이기적일뿐더러 자기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215쪽)

뭘 하더라도 상처는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겠니?(286쪽)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확고부동한 線이라는 것이 있다. 선을 밟는 행위는 반칙이다. 선을 밟거나 선을 넘다가 걸리면 찍 소리도 못하고 금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가야 한다. 그런데 때론 정말 궁금하다. 그것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404쪽)

예측 불가능한 인생을 사는 것은, 오로지 나뿐인가.

길들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다.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가장 먼저 도착하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타지는 않을 것이다. (441쪽)

음 밑줄 그은 것들을 죽 연결하다보니 책의 내용이 얼핏 생각난다. 인생을 소모하는 듯한 느낌. 부유하는 듯한 삶. 닻이 되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고 생각하는 순간 이건 거짓이라는 생각. 아무튼 분명 나도 먼저 도착하는 버스에 올라타지 않도록 졸지 말아야 하겠다. 내 삶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내가 올라탄 버스가 그 목적지로 가는지도 알 수 없겠지만, 무턱대고는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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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9-10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책 읽고 후딱 써야지 한참있다가는 리뷰 못 올려요.
일단 올리고 나면 다시 읽지도 말아야하죠. 아유, 머리 아퍼지거든요^^
어쨌거나 버스는 이왕 탔습니다. 잘못 된 길로 가면 언능 내려서 바꿔 타야죠
그렇게 몇 번은 가는 길. 나중에는 목적지에 도달할 즈음이면 졸고 있겠죠?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저도 이 작가의 글은 감칠맛 나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하루살이 2006-09-10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아탈 시기가 왔다는 것은 아는데, 내려서기는 커녕 벨을 누르는 것조차 주저하고 있으니... 음, 차비가 다 떨어진건가? 호주머니를 들쳐보니 그래도 차비 정도는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죠? 언제, 호주머니에 깊이 박아둔 손을 꺼내 버스의 벨을 누르게 될지. 멈춰서서 새로운 길로 떠날지, 또는 누군가와 함께 동행할 수 있을지 궁금할 뿐입니다.

2006-09-10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6-09-1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실 필요까진 없는데...
혹시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추워서 떠시는건 아닌가요?^^
어차피 인생은 혼자서 걸어가는 길 아니었던가요ㅠㅠ
 
파일럿 피쉬
오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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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피쉬란 수조 속에서 키울 물고기들의 가장 알맞은 생태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먼저 키웠다가 치워버리는 물고기를 말한다. 약효를 검증하기 위해 사용되는 실험대상물인 마루타를 닮았다.

소설은 주인공인 나(야마자키)에게 19년만에 걸려온 옛 애인 유키코의 전화로부터 시작한다. 한번 만나서 스티커 사진 한번 찍어보자는 엉뚱한 제안. 소설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둘이 만나는 과정부터 현재까지를 이야기한다. 야마자키가 에로잡지의 편집자 일을 맡게 되면서 알게 된 사와이 씨와 풍속 아가씨 가나 짱, 그리고 사고로 숨진 와타나베와 그 가족들, 현재 야마자키의 애인인 나나미, 그리고 유키코의 남편과 그의 내연녀 등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져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만남과 이별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예상치 못한 시간에 다가온다. (인연은 억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보다)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조차 회의한다. 지금의 행복이 타당한 거지, 내가 자격이 있는건지, 이것이 행복인지,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그래서 끝끝내 행복은 행복 그 자체로 행복하지 못하게 된다. 행복은 바로 그 감성 자체임을 깨달을 때는 이미 감성은 메말라있고, 오직 나는 기억만으로 살아간다. 지금 현재라는 것도 그 기억으로 유지되고, 그 기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누군가 행복을 가르쳐준 파일럿 피쉬의 역할을 해준다 해도 시간은 점차 그 완벽했던 환경마저 무너뜨린다. 그러나 또한 기억은 과거로의 복귀를 가능케함으로써 감성조차 기억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감성이 아니라 기억일뿐...

소설은 애달프다. 옛 애인과의 재회와 이별이 애타고, 에로잡지 편집인이었던 사와이씨가 죽음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회추하는 장면이 서글프며, 가나 짱의 존재는 설움이다. 그래도 소설이 따스한 것은 지금 현재의 나가 새로운 일을 계획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인연이 만들어준 사람과의 끈이 때론 압박하듯 조여오고, 때론 부드럽게 애무한다. 내가 누군가의 파일럿 피쉬가 될 지도 모르는 일이며, 누군가의 파일럿 피쉬 역할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깨끗한 수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조 속에서 헤엄쳐야 한다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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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8-25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조 청소는 번거롭더군요. 그렇다고 안하면 물고기가 죽죠.
헤엄 잘치는 요령도 중요하지만 수조 청소도 잘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은유리뷰에 팩트 숨긴 댓글을 답니다.
마치 하루살이님과 제가 선문답을 주고 받는 것 같군요^^

하루살이 2006-08-2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일럿 피쉬가 헤엄치는 것만으로도 깨끗한 수조가 탄생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때 개도 열심히 키웠는데 도저히 이별을 감당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함께 있는 것을 피하는 버릇 했더니... 기억이 삶을 지배하는가 봅니다.라고 쓰려했던 글이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은 무언가를 기르고 싶습니다.가 아니고 함께이고 싶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