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정도 병원에 입원해 있던 날. 죽을지도 몰랐었다는 안도감 속엔 무엇인가 허무함이 밀려왔다. 병원 침상에서 누워있으면서 내 머리속에선 누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보고싶은 사람 하나 없다니... 이제 30을 갓 넘게 살아온 내 삶에 있어서 기억해 두고 싶은 사람 하나 없다는 것이 과연 내가 제대로 인생을 살아온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물론 부모님의 얼굴이 안떠오르는 것은 아니나 이건 내가 연락이 안되면 필경 걱정이 크시겠지 하는 염려였을뿐 보고싶다 라는 느낌과는 조금 달랐던듯 싶다.

반대로 내가 아는 그 누군가가 병원에 누워있으면서 과연 내 얼굴을 보고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것또한 99%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것은 병상이라는 곳이 나를 비관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일까?

예전부터 난 이렇게 생각해왔다. 내가 죽었을때 그냥 사람들이 무덤덤하게 보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도록 하자. 누군가가 애타게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지 말자. 그래 그냥 바람처럼 와서 이슬처럼 가버리자.

하지만 이젠 재고해봐야 하겠다. 이번 경험은 분명 나에게 있어 무엇인가 텅 비어있음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모든 것을 안을 수 있는 텅 빔이 아니라 허전함과 막막함을 느끼게 만드는 무중력 상태의 빈 상태. 무엇을 꼭 채워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 속에 나와 교류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후회가 스며든다. 사람이란 분명 혼자 길을 걸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도록 이렇게 아름답고 따뜻한 체온을 지닌 또 하나의 손을 주지 않았는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04-02-20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날의 사고가 님을 참 많이 성숙시켰나 봅니다.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진한 느낌이 전해져 오네요.
 

열흘전쯤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가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가드레일을 받고 다시 중앙분리대를 받는 순간까지 정신은 오히려 또렷했다. 하지만 고속도로 한 중앙차선에 반대방향으로 서 있는 차 속에서 앉아있는 순간엔 정말 죽음이라는 것이 몇센티미터 곁에서 지켜보고 서 있는듯했다. 뒤에서 쫓아오던 차들은 바로 옆으로 빠져나가고 나서도 계속되는 차들의 엄습. 밤 12시에 가까운데다 차의 밧데리가 나갔는지 헤드라이트도 약해져가니 누군가가 우리차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정말... 

다행히 10분후 레카차가 왔다. 아저씨 왈 '이거 목숨걸고 하는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아예 도로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을걸요' 이런, 난 그 속에서 10분을 버티고 서 있었는데.

차는 폐차처리되고 친구와 난 응급실로 실려가 종합검진을 받았다. 다행히 외상은 없었지만 허리와 목 그리고 머리가 어제와 다름을 알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입원과 정밀검진, 퇴원.

살아있음에 감사하며(글쎄 이걸 누구에게 감사드려야 할지 병원에 누워서 한참을 생각했지만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젠 제 2의 인생, 한번 더 사는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불연듯 든다.

하지만 

다시 회사로 출근하는 날.

난 여전히 똑같았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것인가 보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 마냥 발버둥쳐보지만, 그리고 혹 그 그물이 찢어져 다시 바다속으로 돌아갔을 때 물고기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헤엄치는 것 말고...

그러나 분명 무엇인가 달라져 있을게다. 바다는 그대로일지 모르나 내가 헤엄쳐 가려던 그 곳으로의 길이 달라져 있을지 모른다. 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런 작은 꿈틀거림을 느낀다. 그것이 큰 파동으로 다가와 파도를 일으키고 폭풍우를 몰고와 언젠가 나의 행로를 바꾸리라는 예감이 자꾸 든다. 다시 돌아온 바다는 예전보다 한결 투명해보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를 2004-02-19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큰일날 뻔 하셨군요.
다행입니다.

gracina 2004-02-24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돌아온 바다는 예전보다 한결 투명해보인다.'
이 말로 많은 것을 알 것만 같네요. 이 일을 뭐라할지...무척 힘드셨기에 돈 주고는 못 살 경험이라고 하기엔 (경험 없는 저로서는 건방진 말이나)그렇고. 삶을 보는 시각이 전과 달라지실 것 같아요. 이런 말 물어도 될지...사고 순간 어떤 것이 떠오르셨나요? 아니면 생각이나 이미지...실례의 말이라 생각 듭니다 _._ 인터뷰도 아니고. 죄송+궁금+다행

하루살이 2004-02-25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같은 것을 보면 죽음의 순간에 과거의 모든 영상들이 스쳐가던데, 저는 살려고 그랬던지 전혀 그런 영상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혹시 PAVV광고를 기억하시는지요, 자동차가 달리다 트럭과 부딪히기 전 미끄러지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장면을 실감나게 텔레비젼으로 보고 있는 그 광고 말입니다. 꼭 그것과 같았습니다. 눈속에 찍힌 광경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나중에 차가 한바퀴 반 돌고나서 멈췄을때 저에게 다가오던 차들의 공포는 이틀정도 잠을 못자게 만들기도 했지요. 마치 공포영화를 찍은듯한 기분이었죠.

gracina 2004-02-25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마치 스티븐 킹의 소설 속 장면같은걸요. 엄청난 일을 소설로 비유하여 죄송하지만 저 역시 한바퀴 반-한바퀴=반바퀴를 돌았던 기억은 생생합니다. 좁은 경사가 진 도로인데 살얼음 때문이었죠. 님처럼 사고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저는 '이제 죽었구나'뭐 이런 생각이 아니라 기분이 들었어요. 광고의 비유가 확 와 닿네요. 다시금 오싹하기도 하고 하여튼 우리모두 힘 냅시다. 힘! ^^ 답글 감사합니다~
 

가을, 도로위 나무 그림자는 심하게 흔들린다.

바람이 그리 심하게 불지 않는데 왜 그것은 그렇게도 거친 몸짓을 하는가

하늘을 쳐다본다.

가로등 옆 나뭇잎은 바싹 붙어있다.

조그만 움직임에도 그들 사이가 너무 가까운 탓에 그리도 크게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가깝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사소함마저도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

고슴도치의 사랑마냥 우리는 그렇게 거리를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휘청거리지 않고 서 있으려면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때론 우린 그렇게 휘청거리고 싶어하지 않은가? 마치 술에 취한듯이, 술에 취하고파 하듯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