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초에 된 서리가 내렸다. 평년보다 최소 열흘에서 보름 정도는 일찍 찾아온 탓에 아직 거두지 못했던 작물들이 모두 피해를 보았다. 밭을 휘~ 둘러보니 맷돌호박 서너 개가 멀쩡해 보였다. 아직 다 익지 않아서 따지 못했던 것인데, 하는 수 없이 이것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꼭지를 땄다. 


수확한 맷돌호박을 집 안에 들여놓았다. 지금 상태로도 찌개 등에 넣어 요리해 먹을 수 있지만, 좀 더 후숙시킬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 달 여가 지나, 맷돌호박이 노랗게 익어갔다. 그런데 어디선가 큼큼한 냄새가 난다. 

아뿔싸! 맷돌호박 하나에서 물이 줄줄 흘러나와 있다. 곪은 것이다.



겉으론 멀쩡해 보였지만 된서리를 맞고 곪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용케 버티다가 점점 호박이 익어가면서 끝내 터져버린 것이다. 눈밭에 터진 호박을 던져놓으니 껍질이 깨지면서 물이 줄줄 흐른다.


올해는 처음으로 위내시경을 받았다. 계속 조영술만 받다가 몸이 불편해서 이번에 내시경을 받은 것이다. 처음 받는 내시경이 거북하고 아픈 탓에 눈물까지 찔끔.ㅜㅜ 다음에 또 받으라고 하면 살짝 겁이 날 지경이다. 아무튼 내시경을 받은 후 위 사진을 들여다보니 주름이 잡히고 핏줄이 터진 부분이 보인다. 위축성 위염이란다. 내시경을 하면서 조직을 떼어내 조직 검사를 맡겼다. 다행히 헬리코박터균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 몸 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상처가 있는지, 건강한 지를 알 수가 없다. 꼭 몸 만이 아닐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속이 뭉그러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버티다 버티다 끝내 곪아 터진 맷돌호박처럼 말이다. 그러니 겉으로 괜찮아 보일지언정, 함부로 된서리 같은 대접을 하는 건 위험해 보인다. 타인에게 친절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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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22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타인에게 친절해야 하는 이유 공감되어요.

하루살이 2021-12-23 09:4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고맙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건강이 최고죠!^^
 

이 맘 때쯤이면 몸이 아파온다. 매년 겪는 일이지만 올해는 더 심하다. '차라리...'라며 별의 별 생각을 갖게 만든다. '인생은 고해'라고 하는데, 몸이 주는 고통으로 말미암은 정신적 고통이 내가 인생의 한 복판에 있음을 실감케 한다. 그야말로 고통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그 살아있음은 온전히 홀로 느껴진다. 


거울신경세포의 유무와 상관없이 인간은 공감의 능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가며 살아왔다. 감정은 이런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지극히 중요한 요소라 여겨진다. 나 혼자 있으면서 슬퍼할 이유가 있겠는가. 나 혼자서 기뻐 날 뛸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고통은 어떠한가. 물론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면, 그 고통을 덜어내고자 하는 연민의 감정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의 감지 여부를 떠나 고통은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다. 고통을 짊어지고 가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 이외 아무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불교의 깨우침은 고통의 소멸이라 생각한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이 지옥 속을 나는 왜 이리 되풀이하는 것일까. 그 고통이 가르치는 것을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주는 신호. 고통! 올해는 기필코 고통으로부터 배움을 얻어 깨우침의 근처라도 서성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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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유혹이다. 벌과 나비를 비롯해 자신의 꽃가루를 수정시켜줄 생물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화려한 색을 자랑하거나 향긋한 냄새를 풍긴다. 

그렇기에 자가수분을 하는 식물들은 궂이 꽃을 화려하게 피어낼 이유가 없다. 아니, 꽃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수수한 꽃의 백미는 벼꽃이다. 



마치 하얀 가루가 묻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벼꽃의 수술이다. 암술은 벼 껍질 안에 있다. 벼꽃은 단 하루만 핀다. 그것도 주로 10시~2시 사이에. 한 볏대의 이삭 전체에서 꽃이 피는 기간은 3~5일이다. 이 시기를 놓치면 벼꽃을 구경하기는 힘들다. 


이 벼꽃이 자가수분을 통해 수정이 된 것이 쌀이 되어 우리 밥상에 오른다.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쌀 하나하나가 모두 꽃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한 끼 식사를 통해 그 많은 꽃들을 삼킨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꽃이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내는 그 꽃들이 논에서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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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과 함께 농사를 짓다보면 풀을 대하는 방식이 크게 두 가지가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바로 풀 베기와 풀 뽑기다. 


풀 베기는 말 그대로 낫이나 예취기를 이용해 풀을 잘라내는 것이다. 풀 베기는 보통 풀 하나 하나를 잘라내지 않는다. 풀 무더기를 자른다. 속도전이다. 쭉쭉 쳐 내려간다. 뭉텅이로 잘려 나가는 풀들은 마치 사람이 상처를 입을 때 흘리는 피에서 냄새가 나듯 풀 잘린 냄새가 난다. 어떤 풀을 베든 그 냄새는 비슷비슷하다. 마치 어떤 사람의 피 냄새든 모두 비슷하듯 말이다. 


하지만 풀을 뽑는 것은 다르다. 풀을 뭉텅이로 잡고서 뽑으려고 하면 잘 뽑히지 않는다. 하나 하나 손으로 움켜쥐어야 한다. 풀 하나 하나를 손으로 잡다보니 손아귀 안의 풀이 어떤 풀인지를 알게 된다. 이름을 모르더라도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특성이 있는지가 눈에 보이고 손에 감각되어진다. 즉 풀을 뽑으면 그 풀이 손에 느껴져 새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뿌리채 뽑히며 내뿜는 냄새는 피비린내 같은 풀냄새가 아니라 풀 고유의 향이 난다. 풀 저마다의 향을 내뿜는 것이다. 


베어진 풀은 다시 자라난다. 우리가 상처를 받고 피를 흘려도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뽑혀진 풀은 뿌리에 흙을 머금은채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도 언젠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만 풀이 자신의 향을 세상에 내뿜고 사라지듯, 우리는 나만의 향을 뿜어내고 돌아갈 것인지 모를 일이다. 풀이 뿌리를 흙에 내리듯, 우리는 온 몸에 나의 향기를 쌓아가야 한다. 그래야 흙으로 돌아갈 때 나의 향이 드러날 것이다. 다른 누구와도 똑같은 향이 아닌 나만의 향을 갖는 일은 오늘 하루 온몸으로 내가 행한 것들로 이루어진다. 흙으로 돌아가는 그날, 세상을 향해 내뿜을 그 향이 아름답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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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장터 거리에 제비가 날아다닌다. 한 두 마리 귀한 모습이 아니라 그야말로 제비들의 도시다. 



전혀 과장하지 않고 상점마다 최소 제비집이 한 개 씩은 지어져 있다. 



자주가는 식당의 제비집에는 새끼가 다섯 마리나 주둥아리를 벌리며 둥지에서 꼼지락 거린다. 



어미는 쉴 새 없이 먹이를 잡아다 새끼 입에 넣어준다. 둥지 바로 앞에 사람이 있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새끼들에게 다가가 먹이를 준다. 다른 새라면 사람을 피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사람이 사라진 후에 둥지로 가거나, 사람을 내쫓으려고 난리법석을 떨텐데 말이다. 그러고보니 둥지도 사람들 눈에 탁 뜨이도록 지어놓았다. 시장의 상인들도 제비가 있든 없든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새다. 


제비 보는 것이 귀하다고 하는 소식조차도 최근엔 접하지 못했다. 제비가 있고 없고는 이제 문제거리조차 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아마도 몇 년 째 꾸준히 찾아오는 이 제비들이 무척 다정스럽다. 제비 소식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처럼 멸종되어가는 생물들에 대한 관심도 점차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그래선 안된다고 이 제비들이 말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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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6-03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에 사는 전 제비 본지 백만 년은 넘은 거 같습니다. 과장 아닙니다. ^^

하루살이 2021-06-04 13:07   좋아요 0 | URL
북다이제스터님, ㅋ 50년 전 서울에선 제비가 많이 돌아다녔다는데....
정말이지 도심에선 제비 보는 게 힘들겠죠.
잠깐만 교외로 나가 흙냄새라도 한 번 제대로 맡아보신다면 좋을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