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쳇바퀴 삼아 살아가는 아그들아.

봄은 벌써 돌아갈 채비를 하려 화려한 나들이옷을 챙겨 입었구나.

매화꽃이 피었나 싶었는데 어느새 개나리꽃이 만개하고, 진달래가 물이 한참 올랐다.

아마 2,3일 안으로 벚꽃이 피지 않을까 싶다.

내가 꽃구경하러 여러군데 돌아다녀봤지만 남산만한데도 찾기 힘들더라.

시간도 없고 돈도 없는 친구들은 새겨듣거라.

이번 주말이면 봄은 떠나간 겨울 여인을 찾아 서울을 비울것이니, 잠깐만 짬을 내어 배웅해주거라.

주말이 지나면 떠나간 빈자리의 쓸쓸함만 보일터이니 꼭 이번 주말안으로 봄여인을 만나라.

생애 봄날을 맞듯이 그 여인을 맞이하거라.

그리고 네가 발디디고 있는 그 곳에 그 떠나는 자의 향기를 전해주거라.

 

봄은 보아야 봄이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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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11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04-1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의 어원은 정말로 봄은 아닐까 상상해봅니다.ㅋㅋ

소리샘 2005-04-22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을 보는 눈에 봄이 깃들고 봄을 느끼는 마음에 봄이 온다죠?
보이는 것마다 봄이네요..^^
봄산을 지나 봄기운 잔뜩 품고 걸어 내려온 봄바람이 부드럽습니다.
남산의 봄도..지금은 여린잎들과 한창이겠죠?

하루살이 2005-04-2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새~ 옷 갈아입었어요.
 

설날이라고 내려온 집. 나이 먹은 아들을 반기는 어머니의 표정은 여전히 밝다. 모든 것을 알릴 수 없는 아들의 처지와는 상관없이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걱정만 앞선다. 물론 이 걱정은 순전히 아들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명절때면 꼭 그 걱정의 무게를 더하는 결혼앞에서 아들은 변명거리만을 찾는다.

함박웃음 속에서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한숨소리를 뒤로 하고 욕실로 들어간다. 그 때 문득 눈에 들어온 빨래판. 원래 4각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모서리가 닳고 닳아 둥글어지고 얇아진 모습에 시선을 뺏긴다. 문득 세탁기의 텃세에 제 할일 못하고 서 있던 나의 자취집 빨래판의 잘 생긴 모습이 떠올랐다. 이렇게 빨래판이 닳을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손길이 닿았을까? 어머니의 힘에 실린 손길이 몇천번 아니 몇십만번 거쳐야지만 비로소 그 모습을 갖췄을 빨래판을 대하니, 순간 웬지 모를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 그렇게 닳아빠진 빨래판만큼이나 어머니의 뼈도 닳아빠져나갔을 것이다. 손목 어깨 허리의 뼈가 욱신거릴 때까지 계속되었을 그 몸짓이 눈에 선하다. 세탁기보다는 직접 손으로 빨아서 건네주신 속옷을 입으면서 어머니의 체온을 느껴본다.

고향이란 아마 이런 것인가보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본다. 그저 명절이면 어김없이 와야만 했던, 지겹고 힘든 고속도로 속의 차안이 먼저 떠오르곤 했었던 고향이었지만, 이젠 아마도 빨래판이 떠오를듯 싶다. 집안 곳곳 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이 없는 곳. 이제 고향은 나에게 어머니의 손때로 다가온다. 닳아버린 뼈를 원상태로 돌릴 순 없겠지만 어머니의 마음 만큼은 조금이라도 닳지 않도록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뻐근해져 온다. 고향에서 아무 생각없이 푹 쉬다 마침내 서울로 돌아와 빨래판을 물끄러미 한번 쳐다본다. 고놈 참 허여니 뺀질맞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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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2-1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또...짠해지고...
하루살이님 서재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와야 한다니까요....정말...

하루살이 2005-02-14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한 살 더 먹어가니 눈물 한 방울 더 늡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중엔 오토마톤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오토마톤이라는 것은 마치 자동판매기처럼 우리 몸이 기억하고 있는 무의식적 행동들을 가르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자전거 타기나 자동차 운전을 배운 뒤, 자전거 또는 자동차를 운전할 때 우리는 전혀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 못한채 페달을 밟거나 핸들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렇게 운전해야 한다는 의식적인 상태없이 몸은 알아서 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체득된 기술들로 인해 이젠 자전거를 타면서 또는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그 이외의 다른 행동들을 쉽게 행할 수 있게 된다. 즉 운전하면서 대화를 나눈다거나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인다거나 등등.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확대할 수 있는 영역이 생겨난다고 한다. 즉 학습 등을 통해서 오토마톤의 영역을 넓혀가고 배운것이 오토마톤, 즉 무의식에 가깝도록 체득된 후에는 또 다른 것들을 배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오토마톤이라는 부분을 읽다보니 문득 바로 이 지점이 명상이 끼어들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토마톤의 영역, 즉 무의식적인 행동들을 의식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바로 명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말이다. 숨쉬는 것, 걷는 것 등 의식하지 못하고 행해지는 것들을 찬찬히 바라보며 마음 속에 새기다 보면 참 신비롭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하게 생각되던 것들이 당연시 여겨지지 않음으로써 주는 그 신비로움이 주는 충격은 참 신선하다. 그리고 바로 그 신선한 충격이 행복감을 가져다 준다. 즉 정체성의 확대라는 지식에 대한 욕구가 즐거움을 주듯, 명상 또한 확대보다는 기존의 것에 대한 깊은 시선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듯하다.

따라서 우리가 오토마톤의 영역을 넓히는 것과 함께 오토마톤의 영역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그랬을 때 진정한 자아에 대한 정체성의 확립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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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1-26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의식적인 행동들을 의식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바로 명상...

님의 이런 통찰은 하루 아침에 이뤄진게 아니겠죠...
또..감탄하다가...갑니다~

하루살이 2005-01-2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천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를 또한 무의식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경지에 올라야 그래도 명상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무의식적 명상은 오토마톤과는 다른 것이겠죠? ^^
 

몇일전 그냥 할일없이(하릴없이?) 드러누워 TV 리모콘을 눌러댑니다.  어디에다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화면은 제 마음마냥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손을 놓은 것이 프라이드라는 격투기장면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격투기는 보지않고 그냥 돌려버렸는데 오늘은 왠지 그냥 놓아두고 봅니다. 몸 속에 잠자고 있던 피가 들끓었던 탓이었을까요? 피가 터지는 그 장면들이 너무 재미있더군요. 시간 가는줄 모르고 계속 봅니다. 미들급의 최강자, 더 이상 같은 체급에서 상대가 없는 절대 강자가 헤비급과 맞붙습니다. 헤비급의 펀치는 그야말로 스쳐도 다운이더군요. 누워 있는 상대를 향해 발길질을 할 때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맙니다. 다행히도 쓰러져있던 미들급 선수는 잽싸게 피했습니다. 만약에 그 발길질이 제대로 들어갔더라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격투기의 매력은 아무래도 한 순간의 장면 때문입니다. 아무리 핀치에 몰리더라도 딱 한방의 필살기가 적중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이 뒤바뀌어버립니다.  마치 야구의 9회 역전 만루포처럼 말이죠. 럭키펀치 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것은 정말 땀이 가져다 준 실력입니다. 상대방을 넉다운 시키는 펀치는 그야말로 찰나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찰나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만들어줍니다. 찰나를 위해 그 찰나를 연습합니다. 반복되는 찰나는 영원같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영원을 집어삼켜서야 찰나는 빛을 발합니다. 주먹이든 발이든 칼이든, 무예의 절정은 바로 그 찰나를 위해서입니다. (올림픽 때 문대성의 발차기도 바로 그 찰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찰나에 온 마음을 뺏긴다는 것입니다. 찰나가 발하는 빛에 눈이 멀것 같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말을 잃습니다. 이런 찰나는 무도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테지요. 악기의 소리가, 물감의 색감이, 빛의 아름다움 등등이 모두 자신만의 어떤 찰나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찰나를 위한 영원같은 반복. 사람들은 그 지겨움에 치를 떱니다. 치를 떠는 순간 찰나는 도망갑니다. 도망가는 찰나를 잡는 것은 오직 시간뿐입니다. 저도 찰나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 스스로가 깜짝 놀랄 그 찰나를 위해서, 영원을 가두어두렵니다. 치를 떠는 고통을 감내하고, 기필코 찰나를 얻고자 합니다. 부디 찬란히 빛날 찰나를...

 

사족 : 우리네 삶도 오직 한 찰나를 위해서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찰나란 죽음 직전에 맞는 그 순간일까요? 빛나는 찰나를 위해 우리는 죽음의 연습을 영겁의 시간동안 해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 어떤 찰나가 있을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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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1-12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멋진 글입니다... 찰나....얼마나 짧은 순간이던가요... 부디 찬란히 빛날 찰나를...



추천 열번 할 수 있음 열번 하고 싶지만...아쉽게도 한번 뿐...

하루살이 2005-01-12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너무 너무 황송. 님도 아름다운 찰나를 선물로 가지세요^^
 

영화 [공공의 적2] 예고편에선 법보다 앞서는 돈을 얼핏 볼 수 있다. 현실에선 어떤가? 법을 쫓아가기 전에 많은 사람들은 힘없이 쓰러져간다. 그것이 돈이 부족해서인지, 권력이 부족해서인지, 완력이 부족해서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아무튼 그 모든 것을 뭉퉁그려 힘이라 표현하고 싶다. 힘이 없으면 쓰러진다. 그냥 픽하고 고꾸라진다.

약자의 편에 서 있기를 바라는 법은 공평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아직도 힘에 대한 짝사랑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절실히 느끼는 그 힘에 대한 동경. 약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목구멍을 죄어 오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목을 내놓는다. 차라리 우리의 목을 쳐라. 살려두고자 한다면 우리가 살아갈 힘도 같이 주라. 그러나 외면당한다. 그래도 끝끝내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지렁이의 꿈틀거림이다. 잡초의 몸부림이다.

그래서 살아남는다면 그곳엔 새 태양이 떠오를 것인가? 그래서 죽는다면 그대로 끝일 것인가? 억울해서 못 살겠다. 억울해서 꼭 살아야겠다. 너 죽고 나 죽자, 아니, 너도 한번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보아라.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느껴봐라. 세상은 어찌하여 그토록 무심한가? 힘 있는 자의 어리숙한 자기변명에 많은 이들의 꿈이 사그러든다. 삶이 쪼그란든다. 그래 어쩌자고 그대들은 그토록 대담한가? 하나 더하기 하나가 하나 이상이 되지 못하더라도 힘없는 자들이여, 제발 뭉칠지어라. 하나 더하기 열이 비록 둘밖에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두려워 말자. 하나만으로 못한 그 무엇을 둘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발 스스로 목을 내놓진 말자. 그 목에선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을 너도 알고 나도 안다. 그 뜨거운 피를 한바가지 토해내도록 목청을 돋구어라. 입으로 토하라. 부디 스스로 목을 내놓진 말자. 꼬리를 자르고 도망쳐 목숨을 부지하는 도마뱀이 되지는 말자.

나약한 자의 푸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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