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의 진이 패배를 상정하고서 행해지는 전법은 아닐 것이다. 배수의 진이라는 것도 승리를 위한 고육책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파업 66일.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노사관계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 결국 업무복귀를 선택했다. 파업 잠정중단이라는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배수의 진이랄 수 있는 이 전법이 의도한 효과를 전혀 거두지 못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그저 진을 치고 있는 군사들만이 죽음으로 내몰릴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실리를 거두기 위한 방편으로서 배수의 물을 건너기로 했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익사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직을 재정비하고 다시 싸우기 위해선 물러날데가 없는 바로 그 적의 아가리로 들어가야 한다.

사람들은 들어가면 무너진다고 걱정한다. 간신히 버텨오던 단결력이 사라질 것이라고. 사측의 회유가 거세어지고, 온갖 비열한 방법을 동원할 것이라고. 지금까지 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인 온갖 회책을 꾸며대면서 말이다. 하지만 난 걱정하지 말자고 했다. 내가 나 자신을 믿고, 그 믿음만큼 동료들을 믿는다면 우리가 흔들릴 이유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돈 몇푼에 시작한 싸움이었다면 흔들리고 무너지겠지만 경영진의 무능과 부도덕,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한 직원들의 목치기에 대항해 싸운 대의를 가지고 있는한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내 몸뚱아리 펀하자고 내 마음을 거스린다는 것은 있을수 없다.

이제 물을 건넜다. 조직을 배신하고 사측에 복귀한 사람들과도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 생활은 분명 예전과 갖지 않다. 모든 것이 혼돈이다. 그러나 다시 배수의 진을 칠 각오로 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내가 언제 불의에 직면해 행동으로 저항해본적이 있던가? 이제 바로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부조리한 상황마저 외면한다면 난 어디서 고개를 들고서 살 수 있을것인가? 떳떳하게 살아갈 것인지, 부유하게 살아갈 것인지. 세상은 만만치 않음을 또한번 느끼며 언젠가 다시 내 뒤에 거대한 바다를 두고서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에 정면으로 대할 수 있는 용기를 얻어가리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5-08-30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08-30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그 얻음과 잃음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이번 주 파업 프로그램 중엔 자원봉사 활동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대학교때 농촌봉사활동을 제외하곤 사회에 나와서 자원봉사를 경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가 봉사활동을 간 곳은 고덕에 있는 우성원이라는 곳으로, 장애인 철인 3종 선수등으로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나는 그곳에서 주로 중증 자폐증세가 있는 사람들이 거처하고 있는 요양원 방과 화장실을 청소하고, 오후엔 식당을 깨끗이 하는 일을 했다. 물론 내가 지금 거처하고 있는 자취방보다 훨씬 깨끗한 곳을 쓸고 닦다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청소를 끝내고 잠깐 짬을 내 아저씨 한분과 공 주고받기를 했는데, 난처하게도 그 놀이를 언제 어떻게 끝내야할지 몰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다가와 한숨 놓긴 했다.^^

자원봉사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남다른 것 같진 않은데, 자원봉사를 하기전 원장님께서 하신 일장연설의 한 대목이 가슴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원장님께서는 이 곳에 기거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신연령이 잘해야 5살 정도라면서 그들을 대하는 어려움을 토로하시기도 했는데, 화재의 위험성이나, 집을 잃고 헤매는 통에 찾아 다녀야 하는 일 등을 늘어놓으셨다. 그리고 그 중 가슴 속에 남은 에피소드 하나. 운동회를 열어 100미터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이게 좀처럼 끝을 맺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원생들이 50미터 쯤 달리다, 먼저 간 사람이 갑자기 자리에 우뚝 서서 뒤에오는 원생을 기다려 같이 걸어들어온다는 것이다. 이래가지고서는 좀처럼 운동회가 흥겨울 수가 없다는 말씀에 나는 오히려 내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사람사는 꼴이 이런 모양도 갖춰야지 하면서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모양새는 너도 나도 그 100미터를 빨리 가겠다고 아우성이다. 때로는 뒤에서 잡아채기도 하고, 앞에서 발을 걸기도 하고, 또는 남은 아무 상관없이 그저 앞만 보며 뛰어가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먼저 가겠다는 아수라. 앞에 가던 사람들이 멈추어서 함께 가겠다고 손을 내민다면, 그 모습은 어떨까? 물론, 100미터 신기록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들도 있어야 제 맛일것이다. 누군가는 그 신기록을 향해 몇천 킬로미터를 훈련하고, 멋진 달리기의 표본을 보여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1등을 할 수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신기록을 달성할 수도 없다. 그러나 자신만의 기록을 갈아치울수 있을련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신기록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통해 달기기의 자세와 주법 등을 새로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달릴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모두들 달리라고 강요하는 듯 하다. 그래서 왠지, 달리기를 멈추고서 뒤어 오는 사람들과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었다는 원생들을 통해 경쟁이 아닌 다른 삶의 모습을 배울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때로는 고독하게 자신의 100미터를 향해 뛰어가면서도, 때로는 잠시 멈추어서서 손을 맞잡고 걸어도 가는 세상이 될 수 있었으면... 그리고, 그런 세상을 향해 과감히 멈추어설 필요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의 이 파업이 바로 그 멈추어섬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파업 19일째 잠이 몰려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 파업 선포식을 가졌다. 대학교 때 배운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피부로 직접 다가오는 순간이다. 정리해고라는 칼날에 저항해서 노동자가 기껏 가지고 있는 무기는 파업밖에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

왜 정리해고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도 없이, 그저 회사가 어렵다는 핑계와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만을 계속 할뿐 경영상의 어려움을 증명할 자료도, 시기적으로 왜 이렇게 서두를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설명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조조정 이후 회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청사진도 없이 그저 칼날에 목을 내 놓으라고 한다.

구조조정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가 아니다. 회사가 외부 환경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또는 사회 변동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서 기업체가 할수없이 몸무게를 줄이거나, 다른 사업으로 변경해야지만 살아남는 경우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도마뱀의 꼬리를 자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은 단순히 도마뱀의 꼬리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도마뱀의 머리를 잘라내는 격이다. 머리를 자르고서도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경영자였다라고 생각하니 어찌보면 지금과 같은 어려움이 닥쳐온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노조원들이 파업을 결정했을때 조금은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90%에 육박하는 파업찬성에 먼저 놀라기도 했지만, (이것은 분명 부도덕한 경영자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후배들의 목을 쳐낸 것을 지켜본 선배들의 애정이 함께 녹아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 과연 평상시 모래알처럼 보이던 동료들이 한마음이 되어 뭉칠수 있을것인가 내심 불안했다. 하지만 오늘 선포식을 지켜보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파업이 장기회되고, 사측이 어떤 비열한 방법을 동원할지 모르지만, 오늘과 같이 한마음이 된다면 아무 걱정없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됐다.

개인적으로는 지금 당장이라도 회사를 떠난다고 해서 먹을 것 걱정을 할 처지도 아니고,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의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른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기에 이것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길도 놓여져 있다.(물론 그 길도 쉽지 않다. 몇년의 피땀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파업을 결정하기 전 희망퇴직이라는 불순한 의도의 회사 방침에 순응해 떠날수는 없었다. 이대로 회사를 떠난다면 난 지금 이후의 내 삶에서 얼마나 떳떳하게 살 수 있을까 자문해보고 또 자문해봤다.

자기들끼리만 살아보겠다고 노동자들의 목을 아무 거리낌없이 치고 있는 그들의 강심장에 비수를 꽂지 아니하고서는 내가 진정 꿈꾸는 세상살이를 해낼 수 있는 명분을 지닐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 힘들고 외롭고  포기하고픈 길을 선택했다는 것을 안다. 솔직히 이 파업이 어떻게 진행될지 두려움도 크다. 하지만 내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내 인생의 다시 오지 못할 투쟁이라 생각하니 자뭇 격양되기도 하다. 이 싸움이 승리로 끝날지 패하게 될지 모르겠으나, 마지막까지 나에게 정정당당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닐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5월 18일은 또 다시 지나갔다. 1980년 당시 국민학교 2학년. 광주에 있었지만 기억나는 것은 안타깝게도 아무 것도 없다. 정말로 신기하게도 그 기간동안의 기억은 백지상태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간혹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단기간의 기억만을 잃어버린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어머니를 통해서 듣기로는 휴교가 내려진 학교 운동장에서 군인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내 머릿속에는 1980년 5월이 없으니...

지금 떠올려보건대 국민학교 내내 5월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 친구들끼리 간혹 당시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마치 자신들이 모험소설 속의 주인공인마냥, 무엇을 보았는지 자랑하느라 떠들썩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이때부터 어느 정도 5월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회 속에서 허용되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광주라는 동네는 생각보다 조그맣다. 5.18의 최종 격전지 도청까지 대부분 30분 이내면 걸어서 당도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주요 건물들과 주택단지가 몰려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아이들의 목격담은 그것이 아이들만의 과장이 섞여들었다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생생함이 전달됐었다. 한 친구는 도로를 점령하고 달려가는 장갑차 얘기를 했고, 어떤 아이는 자신의 집 담장을 넘어 들어선 대학생을 숨겨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리따운 여고생의 잘려진 젖가슴 얘기도 있었으며, 끔찍한 피의 냄새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정말 아무 것도 머리속에서 끄집어낼게 없었다.

광주는 나에게 그저 백지였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와서 사정은 달라졌다. 대학교 면접 때부터 이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자네는 집에서 무슨 신문을 보는가? 한겨례를 봅니다. 그래, 어디보자, 음, 광주출신이군. 대화는 마치 정해놓은 답을 그저 읽어나가는 것처럼 진행됐다. 이 때부터 사실은 광주라는 라벨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 다른 의미로 다가서고 있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을 의식했기에 내가 바라본 5.18은 조금 삐뚤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경상도에서 올라온 동기나 선후배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네가 광주 출신이었냐? 난 광주출신이라면 모두 과격한 줄 알았는데... 라거나 마치 북한사람들을 머리에 뿔난 도깨비로 교육시켰던 반공교육과 똑같이 광주 사람들도 괴물, 도깨비로 생각한(정말이다. 이렇게 생각한 후배들도 있었다) 사람들 속에서 살기도 했다. 지금도 경상도에 살고 계시는 우리네 아버지 세대들은 김대중 씨를 빨갱이라 부르길 서슴지 않고, 전라도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고 계신다. 5.18은 그래서 민주화의 진보이기 전에, 분단이 가져다주는 슬픔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부닥쳤던 사람들로부터 비껴가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나, 맨 처음 영웅으로 비쳤던 광주의 모습이 점차 나의 가슴 속에서 탈색해가기 시작했다. 특히 군대를 다녀온 이후 유격훈련이라는 것을 받고나서는 광주시민들의 분노가 다르게 다가오기도 했다. 유격훈련 중엔 동지애를 키운다는 이름하에 편을 갈라서 진흙 웅덩이에서 적을 밀어내는 잠깐의 휴식같은 훈련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놀이 아닌 놀이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좀전까지 옆에서 같이 땀 흘리던 동료가 적으로 편이 갈린 순간 머릿속은 온통 그들을 밀어내야 할 하나의 물건일뿐으로 여긴다. 오직 우리 편을 위해 모든 것이 동원된다. 젖먹던 힘까지 알아서 쥐어짜 나오게 된다. 아마도 진 편에 대한 가혹한 얼차려를 피하기 위한 본능이 작동된 탓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광주시민들의 항거가 이와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총탄아래 쓰러져가는 옆사람을 보면서 점차 이성을 잃고, 오직 적과 아군으로 나뉜 속에서 아군을 지키고 적을 무너뜨리겠다는 본능만으로 뭉쳐진 집단으로 말이다. 그것을 어떤 숭고함으로 미화시킬 필요는 없는것 아니냐는 자조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직도 광주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순진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가 아직도 광주를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크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광주 사람들이 왜 그렇게 똘똘 뭉쳤을수밖에 없었는가를 이제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버티고 있으면, 민주주의 국가의 대표격인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 우리나라 곳곳의 지식인과 민중들이 함께 호응해 올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생존이나 분노의 본능이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으로 그렇게 저항했음을 비로소 깨우친다. 마지막 도청에서의 항거는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음을, 그리고 그 죽음은 열려진 생의 길을 저버리고 택한 숭고한 길이었음을 비로소 알게됐다. 끝까지 버텨보겠다는 오기나, 동지의 죽음을 같이하겠다는 맹목적 동지애를 뛰어넘은 오직 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는 경건함에서 비롯된 죽음이었음을.

그런데 난 왜 그토록 그들이 숭고한 영웅으로 남기보다는 본능에, 감정에 움직이는 인간으로 보여지길 간절히 원했던가? 그리고 왜 이제서야 내가 보이지 않는 두려움의 껍데기를 벗고 그들을 제대로 지켜볼 수 있게된 걸까? 세상이 변해서일까? 내가 변한 것일까?

한편으론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떨쳐버리고 싶었던 광주라는 이름을 이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듯 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마지막 구절이 비로소 절절하게 다가온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그래서 나의 부끄러움은 더욱 커져간다. 이제 이 부끄러움을 어찌 벗으리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서울을 쳇바퀴 삼아 살아가는 아그들아.

봄은 벌써 돌아갈 채비를 하려 화려한 나들이옷을 챙겨 입었구나.

매화꽃이 피었나 싶었는데 어느새 개나리꽃이 만개하고, 진달래가 물이 한참 올랐다.

아마 2,3일 안으로 벚꽃이 피지 않을까 싶다.

내가 꽃구경하러 여러군데 돌아다녀봤지만 남산만한데도 찾기 힘들더라.

시간도 없고 돈도 없는 친구들은 새겨듣거라.

이번 주말이면 봄은 떠나간 겨울 여인을 찾아 서울을 비울것이니, 잠깐만 짬을 내어 배웅해주거라.

주말이 지나면 떠나간 빈자리의 쓸쓸함만 보일터이니 꼭 이번 주말안으로 봄여인을 만나라.

생애 봄날을 맞듯이 그 여인을 맞이하거라.

그리고 네가 발디디고 있는 그 곳에 그 떠나는 자의 향기를 전해주거라.

 

봄은 보아야 봄이더구나.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5-04-11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04-1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의 어원은 정말로 봄은 아닐까 상상해봅니다.ㅋㅋ

소리샘 2005-04-22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을 보는 눈에 봄이 깃들고 봄을 느끼는 마음에 봄이 온다죠?
보이는 것마다 봄이네요..^^
봄산을 지나 봄기운 잔뜩 품고 걸어 내려온 봄바람이 부드럽습니다.
남산의 봄도..지금은 여린잎들과 한창이겠죠?

하루살이 2005-04-2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새~ 옷 갈아입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