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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공의 적2] 예고편에선 법보다 앞서는 돈을 얼핏 볼 수 있다. 현실에선 어떤가? 법을 쫓아가기 전에 많은 사람들은 힘없이 쓰러져간다. 그것이 돈이 부족해서인지, 권력이 부족해서인지, 완력이 부족해서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아무튼 그 모든 것을 뭉퉁그려 힘이라 표현하고 싶다. 힘이 없으면 쓰러진다. 그냥 픽하고 고꾸라진다.

약자의 편에 서 있기를 바라는 법은 공평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아직도 힘에 대한 짝사랑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절실히 느끼는 그 힘에 대한 동경. 약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목구멍을 죄어 오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목을 내놓는다. 차라리 우리의 목을 쳐라. 살려두고자 한다면 우리가 살아갈 힘도 같이 주라. 그러나 외면당한다. 그래도 끝끝내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지렁이의 꿈틀거림이다. 잡초의 몸부림이다.

그래서 살아남는다면 그곳엔 새 태양이 떠오를 것인가? 그래서 죽는다면 그대로 끝일 것인가? 억울해서 못 살겠다. 억울해서 꼭 살아야겠다. 너 죽고 나 죽자, 아니, 너도 한번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보아라.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느껴봐라. 세상은 어찌하여 그토록 무심한가? 힘 있는 자의 어리숙한 자기변명에 많은 이들의 꿈이 사그러든다. 삶이 쪼그란든다. 그래 어쩌자고 그대들은 그토록 대담한가? 하나 더하기 하나가 하나 이상이 되지 못하더라도 힘없는 자들이여, 제발 뭉칠지어라. 하나 더하기 열이 비록 둘밖에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두려워 말자. 하나만으로 못한 그 무엇을 둘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발 스스로 목을 내놓진 말자. 그 목에선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을 너도 알고 나도 안다. 그 뜨거운 피를 한바가지 토해내도록 목청을 돋구어라. 입으로 토하라. 부디 스스로 목을 내놓진 말자. 꼬리를 자르고 도망쳐 목숨을 부지하는 도마뱀이 되지는 말자.

나약한 자의 푸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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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창사특집 <출가>를 우연찮게 봤다. 1개월간의 단기간 수련과정을 들여다본 프로그램이었다. 14세 아이부터 70 노인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 구분없이 도반으로 한데 모였다. 그들이 무슨 뜻으로 출가를 결정했는지는 모르나 수련의 마지막 날, 그들의 얼굴은 환했다. 오랜 고행을 끝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무엇인가를 깨우쳐가기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지만 밝은 얼굴은 아름답다.


수행과정을 지켜보던 중 가장 가슴뭉클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서로 부처되기]라는 수행이었다. 2명의 도반이 짝이 되어서 번갈아가며 한쪽은 부처가 되고 한쪽은 108번의 절을 행하는 수행자가 된다. 108배가 진행되는 동안 한쪽에선 절하는 자도 절을 받는 자도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는다.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눈시울이 뜨끈해진다. 무엇이 나의 가슴을 울렸을까?


브라운관을 통해 그 수행을 지켜보는 동안 나 또한 서로 부처되기의 한 도반이 되어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108배를 받는 부처의 입장에선 도대체 난 이 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이 사람은 왜 나에게 이토록 절실하게 절을 하고 있는가? 라는 상념이 떠나지 않는다. 반면, 108배를 행하는 입장에선 무엇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가? 부터 시작해서 나를 낮추는, 한없이 낮추는 이 절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 듯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특히 현대를 살아갈땐 자기를 드러내야만 한다. 내가 얼마나 잘 났는지 어떻게든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부처가 되고 보니 얼마나 내가 못난 존재인지를, 그리고 왜 한없이 나를 낮출수밖에 없는지를 깨닫게 된다. 세상에 부처 아닌 것이 없으며, 나 또한 부처임을 상기한다면 자비는 넘쳐날 것이다.


1개월간의 출가. 그들은 마음을 비우고 거울을 깨끗이 하고자 절문을 들어섰을진대 그 마음 속에 자비심을 가득 안고 돌아가는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도반의 출가의 의미. 그의 출가는 곧 실천이었다. 라는 자막은 이내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출가 졸업후 자원봉사를 지원한 그 도반은 출가의 첫 발을 내디딜때부터 이미 깨달음의 세계에 한발 내디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아우성쳐도 정막의 세계에 있던 사람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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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유 2004-11-29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부분만 잠깐 봤는데, 여운이 남는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아요. 님의 글도 그렇고요...

하루살이 2004-11-30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보 상자 속의 세상에서 때론 큰 배움을 얻기도 합니다.
 


MBC프로그램 중<공감>이란 것이 있다. 자주 보는 것은 아니지만 저번 주 금요일 우연히 보게된 <팔봉씨의 도전>편은 지금까지도 나를 오리무중에 빠지게 만들었다. 팔봉씨는 32살로 암벽등반에 푹 빠져있는 산악인이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막노동판에서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캐나다 북서쪽에 위치한 베핀섬 원정길에 나선다. 한국인 최초로 3명의 원정대가 험한 길을 나선 것이다. 죽음과 대면하며 오르는 암벽. 혹시나 찢어질까 안절부절하며 머무는 암벽위 텐트에서의 새우잠. 낙석으로부터의 위협. 암벽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미친 짓이다. 하지만 빠진다는 것이 바로 미친다는 것일터. 북한산 인수봉에서 시작한 팔봉씨의 중독을 십분 이해하며 프로그램을 지켜봤다.


그런데...


아직도 내 머리속에 맴돌고 있는 것은 그가 이 원정을 마치고 돌아와 느꼈다는 심정이다.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어요. 이젠 노후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대충 이런 뜻의 인터뷰.


모은 돈을 전부 투자해 다녀온 원정길에서 얻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노후대책이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노후대책이라고 해서 뭐 특별한게 있을까 싶지만 분명 팔봉씨에게 있어 이것은 삶의 커다란 변화일 것이라고 상상되어진다. 저축, 모은다는 행위가 오직 바위를 향한 그리움이었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 이번엔 방편이 아닌 하나의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그의 삶을 송두리채 바꿀 그 무엇이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암벽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되어지진 않지만.


그렇다면 그는 왜 느닷없이 그런 깨달음에 도달한 것일까? 암벽등반이라는 것이 항상 죽음과 직면한 스릴감을 맛보는 것일테지만 이번 원정에서의 경험은 그 극한을 경험했던 탓이었을까? 사신을 코 앞에서 만나고 헤어지니까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게 일어난 것이었을까? 내가 살 수 있는 한 오래오래 살겠다. 산다는 것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뭐, 이런 생각에 도달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내 돈을 전부 쏟아서 한번쯤 이런 경험을 했으니 다음에 또 한다고 해서 이번과 같은 감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는 자족적 판단때문일까?


정말로 묻고 싶다. 난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으니 말이다. 당신은 마치 현실만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깨달음은 어찌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까? 저는 그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을 제 머리로, 가슴으로 메꿀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도달한 깨달음입니까?


미루어 짐작컨대 살아있다는 것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일게라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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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댓글에 상처를 받는다. 특히 어떤 영화에 대해 개인적인 비판을 가한 글에는 무지막지한 글이 대롱대롱 달려있다. 건전한 비판이라면 좋겠지만 참 단순하게 산다. 차라리 대한늬우스나 보지 그러냐, 네가 그 영화를 몰라서 그런다, 제대로 그 이론을 알기나 하냐 등등의 글을 읽다보면 내가 왜 글을 올려서 이런 욕을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가끔씩은 정곡을 찌르는 비판에 뜨끔한 적도 있다. 아니 가끔이라고 표현해서는 안되겠다. 지금까지 딱 2번 그랬던 기억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서로 주고받는 글 속에서 공부를 하도록 부추기는 긴장을 가져와 좋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비난을 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만 하더라도 지금 내가 쓴 글에 대한 인상평가 정도에 이렇게 맘 상해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댓글을 그렇게 함부로 휘둘러대는 것은 어쩐지 쓴 웃음이 나오게 만든다. 그 댓글이 채찍이 되어 기존의 생각들을 재검토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면 좋을 것이다. 물론 마음 한 구석엔 쓰다듬고 안아주고 기특해하는 글만을 바라기도 할 터이지만 자극이 될 수 있는 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자기 안의 세상에만 갇혀 살겠다는 것밖엔 되지 않을터이니까. 그러나 글 쓴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글을 썼는지에 대해선 전혀 생각해보지 않고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흠집내기로만 생각하고 마치 상처를 주기 위해 단도를 휘두르듯 댓글을 써대는 건 왠지 무섭다. 

무시하면 되지 하면서도 쉽게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기도 한다. 마치 욕을 하고 싶었는데 잘 만났다 하면서 쏟아내는 글들에 기운이 꺾인다. 그러다가도 잠시 누군가가 응원하는 글을 보면 마치 100만 원군을 만나듯 기뻐한다. 나 원~. 진정해야 겠다.

내가 무엇에 이렇게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했다 미소를 띠웠다 하는지 곰곰히 들여다보자. 난 혹시 '나는 완전무결하다'거나 '그래도 썩 괜찮지' 하는 오만함에 빠져 있었던건 아니었을까? 나 또한 무자비한 칼날을 휘둘렀던 적은 없었을까? 그리고 비판을 혹 비난으로 오해하진 않았을까?

또 한번 글에 대한 무서움증에 걸린듯 싶다. 조심스럽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그랴는 심정으로 마냥 계속 써야 하겠지 하는 기분 저편에선 아직도 무서움이 또아리 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또 나을 병일테지만 그 상처는 잊지 말아야 하겠지. 다시 한번 나를 뒤돌아본다. 혹 글만이 아니라 내 삶도 오만함이 깃들어 있진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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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데이터에 이 책이 없어 페이페에 씁니다.

 

사드의 책은 지금 읽어도 충격적이다. 특히 이 책은 당신의 도덕성에 깊은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주인공 쥐스띤뜨는 사람들이 미덕이라 부르는 그것들을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행한다. 강간을 당하고 폭행을 당하고 목숨을 위협받지만 그의 미덕은 굴할지 모른다. 만약 이것이 사드의 책이 아니라 어린이를 위한 동화나 또는 동시대의 다른 소설가들의 책이었다면 분명 큰 복을 받았을 것이다. 어려움을 견뎌내면 행복이 찾아온다는 따뜻한 얘기 말이다. 하지만 사드에게서 그것을 바라지 마라. 오히려 주인공 쥐스띤뜨를 괴롭히던 많은 사람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예사로 여기는 외과의, 성에 집착하는 성직자들, 사기를 일삼는 귀족들 등등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오히려 인생이 잘 풀려나간다. 보다 높은 직위에 오르거나 많은 연금 혜택을 받는등 죄값을 받아야 할 그들이 행복하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되어질 수 없지만 그의 소설속에선 떳떳하게 자신의 행동을 설득한다.

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미덕은 그저 불행을 자초할 뿐이라는 역설, 그리고 선과 악은 제로섬이기에 굳이 악을 탓할 필요는 없다는 것, 또한 선이라는 것은 정해진 법률이나 도덕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기에 그것이 다른 사회, 다른 문명에서도 명백한 선일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에서 선은 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등등의 그들의 입을 통한 사드의 주장은 읽다보면 절로 수긍이 가게 만든다.

실제로 우리네 삶이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독립운동 유공자들은 가난을 대물림 받는 대신 일제 앞잡이로 나섰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손에 금을 들고서 떵떵 거리고 산다. 사람을 죽이고 맘대로 칼과 총을 휘두르며 독재의 쾌락을 즐기던 사람들 또한 아직도 그 위세가 여전하며, 세상을 위해 사회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사람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사필귀정이라는 이름하에 우리에게 강요되었던 선행은 실상 그 선행을 실행함으로써 얻는 마음의 평화나 또는 그것을 행해야지만 한다고 생각되어진 강박관념의 충족 그 이상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는다.

하지만 아직도 미덕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는 나로서는 모두가 미덕을 버렸을때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겁이 난다. 나를 가두고 있지만 때론 그것으로 인해 평안을 얻는다면 그것을 버릴 수 있을까? 물론 누군가가 그것을 악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게 이익을 챙기는 자들에게만큼은 미억을 발휘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익을 챙기는 자를 가르는 그 기준은 무엇일까?

선행도 악행도 그것이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라면 도대체 난 무엇을 택해야 한단 말인가? 사드는 아무래도 무정부주의자로서 인간은 어떻게든 그 질서를 회복했으리라 믿었던 것일까? 지금과 같은 국민을 위한 정부나 사회가 아니라면 개개인 스스로가 서로의 질서를 새로 만들고 부수고 만드는 작업을 계속해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더 나은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선 악덕도 미덕도 새로이 쓰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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