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수차례 죽음과 마주친다.
하지만 나무가 얼어 죽거나 풀을 뽑으면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진 않는다. 반면 도로 위에 '로드킬' 당한 동물들을 보면 죽음이 떠오르고, 안타까움이 인다. 하지만 그 안타까움은 잠깐일 뿐, 자동차가 도로 위를 지나가듯 그 감정도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자신이 직접 한 번이라도 쓰다듬었거나, 먹이를 주었던 상대의 죽음은 허전함을 넘어 슬픔의 감정이 솟구친다. 만약 그 상대가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훨씬 커진다.
이렇게 죽음 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차이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식물과 동물, 사람의 차이는 아무래도 유전자적 유사성의 정도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유전자와 가까운 상대에게 감정의 변화도 커지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하지만, 유전자의 닮은 비율이 비슷한 경우에도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차이가 발생한다. 같은 동물이 죽었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고양이의 경우 로드킬을 당한 고양이 보다는 지나치며 자주 보았던, 먹이라도 한 번 주었던 고양이의 죽음을 더 슬퍼한다. 그 차이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차이를 설명하는 단어가 바로 정情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정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 정이 넘치는 사람도 있고, 정이 부족한 사람도 있다. 여하튼 우린 서로 정을 주고받는다. 정을 더 많이 주는 대상이 있기도 하고, 정을 많이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주고받기는 하지만 정은 좀처럼 계산되지 않는다. 딱 이만큼 만 정을 주어야지, 또는 받은 만큼만 주어야지 같이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간혹 정에 휘둘리기도 한다. 이렇게 통제되지 않는 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휘둘리지 않는 선에서 풍성하면 좋겠다. 죽음 앞에 너무나 무덤덤해지지 않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