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겨울 바람이 분다>는 타인의 행세를 하는 동명이인 오수(조인성)가 주인공이다.라고 말하기엔 오영(송혜교)의 역할이 크다. 당연히 오수와 오영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를 이끄는 이야기의 핵심은 오수의 사기적 행위다. 그런데 이 사기가 가능했던 것은 오영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감히 믿는 것과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오영은 오수에게 "너를 믿어도 돼?"냐고 묻고 오수는 "나 믿어도 돼"라고 답한다. 이 순간 둘은 진짜 오누이가 된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고들 한다.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고 그래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현실은 아느 만큼 보이기 마련이고 믿는대로 보이기도 한다. 오영이 가짜 오수를 믿는 순간 그녀는 진짜 오수를 보게 된 것이다. 가짜가 진짜로 되는 순간이다. 믿음은 이토록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들은 대부분 깨지고 만다. 믿는대로 보이기 마련인만큼 어느 순간 진실이 다가올 때 그 믿음의 장막이 걷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이 깨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믿음으로 유지하고 싶어했던 것은 바로 그 대상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의 또다른 표현이다. 필요할 때 항상 옆에 두고 싶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믿음이 깨지면 한없이 슬퍼지게 된다. 세상이 무너진듯 말이다. 기대고 의지할 버팀목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을 놓아버리는 게 나을까. 절대 깨지지 않을 믿음이라는 단호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나을까. 한번쯤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렇게 기대고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이었던가를. 그래서 홀로 서고 싶어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하는 것이다. 다만 믿음 대신 공감의 능력만을 남겨둔다면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리라. 홀로 있되 함께 하는 그런 삶이 가능할지 모르니까. 그런 '믿음'으로 살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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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공부하는 인간>을 방영중이다. 그런데 방송에서 말하고 있는 공부라는 것이 조금 요상하다. 공부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 또 학문이란 '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힘. 또는 그런 지식'이다. 즉 공부란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그런데 방송이 다루고 있는 것은 기술은 빠져 있다. 또한 익힌다는 부분, 그 중에서도 특히 몸을 통해 익히는 것도 제외되어 있다. 공부란 모름지기 문자를 통해 암기하고 토론하는 것으로만 비쳐진다. 그래서 당연히 문자가 갖는 속성이 바로 공부를 하는 이유로 변질되어 버린다.

 

2. 문자란 정보와 관련되어 있다. 현대 이전에는 문자를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었다. 특히 성경과 같이 종교적인 메시지를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정보를 제한하고 이것을 이용한다는 것은 곧 힘이었다. 공부란 곧 권력의 획득인 것이다. 2011년 방영됐던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과 정기준이 맞섰던 것도 바로 이때문이었다. 한글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문자를 접하고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면 사대부가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문자와 관련된 공부는 결국 힘에 대한 동경으로 표출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남들보다 위에 서기 위해 공부를 한다. 강남 대치동을 다니는 학생들의 인터뷰는 가히 충격을 넘어 경악이라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공부를 잘 하지 못하면 왕따당할거라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니 말이다.

 

3. 힘이란 개인을 위해 사용되면 독재가 되지만 남을 위해 사용한다면 호혜가 될 수 있다. 공부를 통한 힘의 획득은 가난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인도에서는 계급적 차별을 뛰어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지식을 이용해 타인에게 유용한 일도 가능하다. 중국의 아이들처럼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한국의 아이들은 안정된 직장을 갖기 위해 공부를 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직원이나 고위 공무원을 꿈꾸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럴싸한 가정을 꾸리고 무난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마저 갖게 만든다. 반면 유대인들은 신의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공부하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달라보이지만 결국 힘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닮아 있다.

 

4. 공부란 이런 것일까. 역사와 지역을 떠나 소위 상위계층에 대한 욕망이 공부를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냐는 소리다. TV 다큐멘터리 속 '공부하는 인간'은 이렇게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물론 그것을 바라보는 하버드대학생들만이 이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모양새다. 그들은 세계의 다양한 아이들이 이렇게 공부하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니까. 놀랐다는 것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정녕 힘에 대한 동경이나 욕망이 이끄는 것이 아닌 다른 공부란 없는 것일까. 바로 앎에 대한 호기심말이다. 그리고 그 호기심이 나와 세상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고, 그래서 삶을 알아가는 것. 앎과 삶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향한 공부 말이다. 그것은 꼭 문자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도 아닐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다르게 '공부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몹시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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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여비 2013-03-13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초등학교 2학년을 둔 학부모이자 일상과이상 출판사 대표입니다. 요새 이 방송을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해 성공만을 위해 공부하는 우리날가 학생들 모습이 슬프게 다가오는데요. 방송 출연자 릴리 마골린의 아버지인 힐 마골린 씨가 유대인의 공부법을 다룬 책을 냈습니다. 제목은 <공부하는 유대인>입니다.
 

꿈을 꾸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해 열정을 가지고 나아가라고 한다. 혹시 그 과정에서 좌절과 상처를 겪을지라도 굴하지 말고 전진하라고 한다. 그러면 꼭 꿈은 이루어진다고. 해피엔딩을 맞이할거라고. 미디어 속 멘토들은 그렇게 꿈을 건네준다. 그런데 정말 꿈은 인생의 묘약일까.

 

MBC 황금어장 <무릎팍 도사>에 성룡이 나왔다. 그의 진실된 모습과 꾸밈없는 유머, 겸손이 TV를 보는 내내 봄바람을 맞은 것처럼 온몸을 따듯하게 감싸왔다. 자신의 이름이 영화의 한 장르가 되어버린 사나이. 조 단위의 자산가. 또한 한없이 베푸는 자선가. 성룡은 소위 말하는 성공한 사람이다. 어릴 적 굶기를 밥먹듯 했기에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던 영화촬영장이 좋았다는 그. 과연 그는 이런 고난 속에서 지금과 같은 성공을 꿈꾸었을까. 그 꿈이 그를 이 길로 이끌고 왔을까. 아니다. 성룡은 말한다. 자신은 꿈이 없었다고. 뭐, 꿈이 없었다고? 이게 말이되나. 그렇다면 도대체 꿈을 꾸어야 성공할 것이라고 말하는듯한 우리 시대의 슬로건은 뭐란 말인가.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그의 책 '몸과 인문학'에서 꿈은 병이라고 말한다. 청춘들에게 꿈을 꾸라는 것은 우주의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막 언 땅을 뚫고 나온 새싹을에게 가을의 열매를 강요하는 격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꿈의 내용을 한번 들여다보자. 돈과 권력, 인기 같은 세속적 성공에 있지 않던가. 그래서 그는 가차없이 말하는 것이다. 꿈은 생명의 활동이 아니라 자본의 명령이라고.

그럼 어떻게 살란 말인가. 고미숙은 무엇이든 '되고싶음' 그 자체가 청춘이라고 한다. 꿈은 주변의 모든 것을 수단화하기에 괴로운 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나무의 목표가 열매가 아니듯, 나무가 잘 살다보니 열매가 달렸듯, 그렇게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살다 보니 어떤 성취를 이루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냐고? 보지 않았는가. 성룡이 해낸 일을.

 

성룡은 이제서야 꿈을 꾸고 있다고 한다. 청춘의 열정이 꺼져가는 환갑의 나이에 꿈이라니. 그런데 그 꿈이라는게 이거다. "세계 평화" 뭐라고? 세계 평화? 수퍼맨같은 만화 속 주인공들이나 몸을 바쳐 이루고싶어하는 그 세계 평화가 꿈이라는 것인가. 그렇다. 그의 꿈은 세계 평화란다. 세계를 돌아다보니 세상이 얼마나 많은 전쟁과 싸움 속에 있는지 지켜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꿈이라면 이런 꿈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 성공을 향한 청춘들의 꿈은 자신을 죽이는 독이 될 수 있지만, 남을 살리고 싶어하는 발원으로 이루어진 꿈은 세상을 치유하는 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꿈이라면 한번쯤 꿀만하지 않을까. 무릎팍 도사가 거듭 강조하듯 성룡은 진정한 '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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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2.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3.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 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5. 야훼께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6.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7. 당장 땅에 내려 가서 사람들이 쓰는 발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 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8.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 두었다. 9.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은 온 땅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성경 창세기 11장 1절부터 9절)

 

바벨탑과 두바이

성경 속 창세기에 나오는 야훼는 하나의 언어, 한 곳에서의 정착 즉 도시의 창조를 반대하고 인류를 흩어지게 만든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창세기 속 바벨탑은 하늘에 닿을만큼 높은 건물로서 이름을 날리고 사람을 모이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그런데 바벨탑과 같이 높은 건물에 대한 욕망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 나라 또는 도시의 부, 기업의 세, 힘의 상징이자 랜드마크(도시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특이성 있는 시설이나 건물을 말하며, 물리적, 가시적 특징이 시설물뿐만 아니라 개념적이고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추상적 공간까지도 포함)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또한 100층이 넘는 건물을 짓고 있는 중이다(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동북아트레이드타워로 65층에 305m에 달한다). 참고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할리파로 163층 828m에 이르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벨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 두바이와 가까운 현재 이라크에 있는 바빌론이다. 거의 평지에 가까운 사막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던 바벨탑은 높이가 91.5m일 것이라 여겨진다. 높이 249m인 63빌딩의 절반에 조금 못미치는 높이지만 당시로서는 하늘에 닿을듯한 위용을 자랑했을 것이다. 이 탑은 바빌론의 네부카드데자르 2세가 아버지의 염원을 이어받아 완성했다. 그는 당시 강대국이던 바빌론의 위상을 이 탑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내고 싶어했다. 바벨탑은 최소 3600만~7500만개의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찍어내고 쌓기 위해선 엄청난 재원이 필요했다. 당시 재원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전쟁이었다. 그는 지금의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까지 정복했다. 하지만 이런 영광도 기원전 482년 페르시아 침공으로 끝이 난다. 전쟁 중 감시탑으로 쓰일 수 있다는 이유로 바벨탑은 철저하게 파괴된다. 마치 세계 최고 빌딩을 지닌 두바이가 부동산 거품이 꺼져 휘청거리듯이 말이다.

 

증오의 시선

기원전 597년엔 바빌론 유수가 있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포로로 바빌론에 끌려갔다. 당시 바빌론은 15만명(로마 흥성기때 인구가 12만 정도였다)의 인구가 살고 있었던 최대 도시였다. 끌려간 유대인들은 도시를 지탱해주는 노예로 생활했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바빌론과 바벨탑은 놀라움이자 증오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바벨탑은 지구라트로서 꼭대기에는 마르둑신을 모시고 있었다. 신 중의 신이며 생존하고 있다고 여겨진 신이었다. 유대인들 눈에는 얼마나 마땅찮은 일이었겠는가. 창세기에 나타난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가 부정적으로 묘사되어진 것은 이런 역사적 경험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한때 북한이나 일본을 바라보던 시선도 옛날 유대인의 시선과 닮아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벨탑을 바라보는 유대인과 닮아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설령 미워하더라도 진짜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용감한 눈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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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무엇을 때려치우고 싶냐고? 그냥 살아가는 것 그 자체를 말이다. 그런데 왜 때려치우고 싶어질까. 그리고 어떤 때 그런 마음이 불쑥 솟아나는 걸까.

그래서 때려치우다라는 뜻을 곰곰히 생각해봤다. 때려서 치운다는 뜻일까. 다 박살내고 말끔히 치워버린다. 뭐, 이렇게 해석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까지의 나를 이뤄왔던 것,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고정관념을 다 때려서 박살을 내는 거다. 그리고 말끔하게 치워버리는 거다. 그럼 그 바탕 위에 새로운 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때려치우는 것이 얼마나 바라고 싶은 일인가.

그래서 때려치울련다. 날마다는 아니라 하더라도 가끔은 때려치울련다. 새롭게 태어나 보련다. 그럴려면 나를 때렸을 때 버틸 수 있는 맷집부터 키워야 할 일이다. 나를 깨뜨리는 것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맷집이란 바로 책일지도 모르겠다. 또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서 묻어나는 고귀한 생각들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철저히 무너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맷집부터 키울 일이다. 나를 때려 깨뜨리고 모조리 치워버렸는데 다시 새로운 나를 만들지 못한다면 그저 철저한 파괴로 끝날테니까. 결국 때려치운다는 것은 새로운 모습을 위한 전단계일 뿐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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