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통해 성실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시절이 지나면서 개미와 베짱이는 패러디되고, 베짱이처럼 사는 것을 선망하는 사회가 됐다. 개미처럼 죽어라 일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처럼 보여질 정도다. 이젠 게으름이 찬양되기도 한다. 그럼, 개미는 어떻게 해야 할까.

충남 당진에 사시는 정광영 선생님은 평생을 농부로 사신 분이다.
1970년대 가톨릭 농민회의 '한마음 한몸' 운동을 통해 생명에 대해 눈뜨면서 친환경 농사를 지으셨다....
1980년대 '농산물 제값 받기' 운동을 위해 영농일지를 써오셨다. 정부에 제시할 근거를 위해서였다.
지극한 성실함은 습관이 되어 현재까지도 유기농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영농일지 또한 계속이다. 허리가 아프고 관절 마디마디가 쑤신다고 하시면서도 말이다.
현재 71세인 정 선생님은 "내 인생에 후회는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개미의 후회없는 삶. 든든하다.
그런데 왜 마음 한 구석은 허전하고 씁쓸할까.
아마 개미가 애써 일군 성실함의 터전이 위태롭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관심 밖 세상이 되어버린지 오래고 고려장처럼 여겨지는 농촌에서 성실함은 그 빛을 잃고 있다. 베짱이 또한 실은 그 성실함이 뒷받침되어야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은 왜 그리도 쉽게 잊어버린 걸까.

베짱이를 꿈꾸는 또다른 벌레는 오늘도 '성실하게' 개미처럼 노래 연습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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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가면 흔히 접하는 풍경이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참 무단히도 빈다.
종이로, 돌로, 그리고 온몸으로...
'빌다'라는 뜻은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소원에 대한 갈망이라는 뜻과 함께
빌어 먹다라는 전혀 다른 뜻의 다른 단어가 있다....
그런데 '빌다'는 그야말로 빌어먹을 짓이다.
'오죽하면'의 또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다만 빌어먹고 나면 어쨋든 배가 부르듯
빌고 나면 어쨋든 속이 부른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위안 덕분에 맘은 편하다.
그러니 ...
빌고 있는 어머니들이여,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월악산 덕주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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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PR의 시대라는 말이 구석기 시대의 용어처럼 들리는 세상이다. 자기를 내세우는 정도를 넘어 자신을 사고파는 시대다. 예쁘고 잘나고 괜찮아 보여야지만 성공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미지가 넘쳐난다. 자칫 잘못하다보면 그 이미지에 치명적 손상을 입고 와르르 무너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미지 관리는 현대인의 필수다. 척 척 하는거다. 쿨한 척, 카리스마가 있는 척, 착한 척, 또는 반대로 나쁜 척도 한다. (나쁜 남자가 대세였을 땐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꾸미다보면 언젠가 실상이 들통나기 마련이다. 화장을 안한 척하는 메이크업도 결국 씻어야하는 순간이 오듯 말이다. (안씻고 버틸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자니 윤은 자신의 성공을 꾸미지 않는 자세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하기까지 가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영어를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거나, 파티장에 남들처럼 양복을 입지않고 한복을 입는 등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나를 온전한 그대로 보여줄 때 개성이 드러나고, 이 개성이 성공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밑바탕엔 나를 제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이 숨겨져 있다. 자니윤은 5분짜리 스탠딩코미디쇼를 위해 3개월을 공부했다고 한다. 노래실력, 유머감각을 스스로 타고났다고 자평하면서도 말이다. 100% 남을 웃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무대에 선다는 것이다. '척''척' 박사보다는 착실히 착실히 준비하는 '착''착' 박사인 셈이다. 이렇듯 개성은 꾸며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을 온전하게 표현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바야흐로 이제는 개성시대다. 알몸 그대로의 나가 주목받는 시대엔 이 알몸을 가꾸는데 힘을 써야할 모양이다. 알몸을 가리는 예쁜 옷을 모으기 보다는... 자니윤이 말하는 꾸미지 않음이란 바로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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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가 뜨고 있다. <도가니>의 공유가 아니라 공유경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에어비앤비'나 '집카'와 같이 자신이 같고 있는 소유물을 타인과 나누어쓰는 경제행위가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 비해 아직 우리나라는 이 바람이 잔잔하긴 하지만 말이다. 김난도 교수는 정착유형의 사람들은 개인 소유욕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아마 그 영향 때문에 내 것을 남에게 빌려준다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공유경제는 금융위기 이후 그 기세를 더 올리고 있는 중이다. 아껴쓰는 차원을 넘어 이미 있는 것을 남들과 함께 향유함으로써 서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유경제의 출발은 빌려쓰는 사람은 적은 돈으로 똑같은 가치를 향유할 수 있다는 욕망에서, 빌려주는 사람은 가욋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에서 비롯됐다. 순전히 경제적 이득을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이 행위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의 차원을 뛰어넘는 색다른 경험을 가져다 준다고 한다. 기존의 소유경제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한 인간애에 감동받는 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공유경제가 힘을 얻고 또한 지속가능할 수 있는 힘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빌려쓰고 빌려주는 과정에서 인간적 접촉, 인간적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관계는 불교의 연기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세상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 말이다. 도법스님은 <지금, 당장>이라는 책에서 관계의 삶이 왜 좋은지 예를 들어보인다. 마치 공유경제를 이야기하는 것같다.

 

평소 한 사람의 한 달 생활비가 100만원이면 5인이 각자 살아가는 데, 5백만원이 들어갑니다. 만일 존재의 법칙에 따라 5인이 믿을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여 가족처럼 살면 어떨까요. 한 달에 3백만원이면 훨씬 풍요롭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각자 독립해서 산다고 하면, 따로따로 밥을 해먹어야 하니 밥솥을 5개 사야 합니다. 다른 살림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는 온통 내 것으로 만들고 쌓아놓아야만 문제가 해결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대단히 소모적입니다. 정말 우리가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은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의 회복입니다.

 

KBS시사기획 <창>에서도 실제로 공유경제를 통해 1년 생활비를 2천만원이나 아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공동주택에 공동 보모, 그리고 차 나누어 쓰기 등을 통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공유경제는 도법 스님의 말씀처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공유가 어려운 이유는 소유욕이 강하다는 측면 이외에도 이 신뢰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내것을 빌려간 사람이 그것을 망가뜨리거나, 훔쳐간다면 어떻게 하나?라는 의심이 공유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제도적 보완장치로 이러한 의심을 가라앉힐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 대 인간간의 관계에서 신뢰가 쌓여야만 완숙한 공유경제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공유경제를 통해 불교의 연기론이 존재의 진리임을 새삼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단 종교의 교리 차원을 넘어 인간이 인간이 믿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의 씨앗이 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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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음식

'맛있다'는 기준은 그야말로 상대적이다. 어떤 사람에겐 달콤한 것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느끼한 맛으로 여겨진다. 어떤 사람은 쓰다고 느끼지만 다른 이는 그 속에서 쌉싸름한 맛을 즐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맛집은 문전성시다. 맛있다고 소문이 나면 줄을 서서라도 그 맛 한번 구경하고픈 것이 인지상정이다. 배고픔을 달래는 음식이 아니라 즐기고픈 음식의 시대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맛집의 음식이 마냥 맛있는 것은 아니다. 서두에 이야기했지만 당연히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또는 대중적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맛들이 있다. 조미료가 탄생한 것도 어찌보면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감칠맛을 찾아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반대로 만화 <식객>에서 말하듯 감동을 주는 맛이란 바로 우리들 '어머니의 손맛'이기에 그 종류는 수백만가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에 한가지 더. 사람들이 원하는 입맛은 맛뿐만이 아니라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먹고싶은 것을 먹는 것이 건강에도 좋다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비타민C가 부족할 땐 신 것이 당기는 등 우리 몸은 그야말로 과학적이면서도 신비한 존재인 듯하다.

 

체인점 입맛

그런데 이런 맛의 작동이 심각한 오염수준에 다다랐다. 바로 패스트푸드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먹으면 오히려 병이 든다. 맛있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거의 지방과 당분 덩어리의 집합체다. 이런 입맛의 오염도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 바로 학교급식이다. 바로 유기농 식품들로 구성된 건강식단이 외면받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이 맛없다고 먹지 않는 것이다. 이 음식들이 학생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잔반통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그래서 한 방송국 9시 뉴스 취재진이 이들 학생들에게 같은 비용으로 고기나 튀김이 들어간 반찬이 더 있는 식단을 차려주었다. 훨씬 맛있어한다.

건강한 유기농 식단은 버려지고 패스트푸드류의 음식은 환영받는 현실. 바로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더군다나 유기농 식단은 비싸기 때문에 급식단가를 맞추기 힘들다는 어려움까지 있다. 유기농 식단은 단순히 건강한 먹을거리 이외에도 건강한 농촌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는 것을 이야기할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들 입맛을 이대로 놔두어야만 할까. 각자의 개성대로라면 상관없지만 체인점 입맛이지 않은가. 또한 그 입맛을 평생 유지한다면 머지않아 엄청난 의료비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학교와 유기농 농장간의 직거래를 통한 단가 낮추기, 유기농 식단을 맛있게 요리할 수 있는 레시피 개발. 이런 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일까. 뉴스에 비쳐진 아이들 입맛을 지켜보자니 입안에  씁쓸한 맛만이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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