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가 뜨고 있다. <도가니>의 공유가 아니라 공유경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에어비앤비'나 '집카'와 같이 자신이 같고 있는 소유물을 타인과 나누어쓰는 경제행위가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 비해 아직 우리나라는 이 바람이 잔잔하긴 하지만 말이다. 김난도 교수는 정착유형의 사람들은 개인 소유욕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아마 그 영향 때문에 내 것을 남에게 빌려준다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공유경제는 금융위기 이후 그 기세를 더 올리고 있는 중이다. 아껴쓰는 차원을 넘어 이미 있는 것을 남들과 함께 향유함으로써 서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유경제의 출발은 빌려쓰는 사람은 적은 돈으로 똑같은 가치를 향유할 수 있다는 욕망에서, 빌려주는 사람은 가욋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에서 비롯됐다. 순전히 경제적 이득을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이 행위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의 차원을 뛰어넘는 색다른 경험을 가져다 준다고 한다. 기존의 소유경제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한 인간애에 감동받는 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공유경제가 힘을 얻고 또한 지속가능할 수 있는 힘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빌려쓰고 빌려주는 과정에서 인간적 접촉, 인간적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관계는 불교의 연기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세상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 말이다. 도법스님은 <지금, 당장>이라는 책에서 관계의 삶이 왜 좋은지 예를 들어보인다. 마치 공유경제를 이야기하는 것같다.

 

평소 한 사람의 한 달 생활비가 100만원이면 5인이 각자 살아가는 데, 5백만원이 들어갑니다. 만일 존재의 법칙에 따라 5인이 믿을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여 가족처럼 살면 어떨까요. 한 달에 3백만원이면 훨씬 풍요롭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각자 독립해서 산다고 하면, 따로따로 밥을 해먹어야 하니 밥솥을 5개 사야 합니다. 다른 살림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는 온통 내 것으로 만들고 쌓아놓아야만 문제가 해결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대단히 소모적입니다. 정말 우리가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은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의 회복입니다.

 

KBS시사기획 <창>에서도 실제로 공유경제를 통해 1년 생활비를 2천만원이나 아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공동주택에 공동 보모, 그리고 차 나누어 쓰기 등을 통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공유경제는 도법 스님의 말씀처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공유가 어려운 이유는 소유욕이 강하다는 측면 이외에도 이 신뢰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내것을 빌려간 사람이 그것을 망가뜨리거나, 훔쳐간다면 어떻게 하나?라는 의심이 공유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제도적 보완장치로 이러한 의심을 가라앉힐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 대 인간간의 관계에서 신뢰가 쌓여야만 완숙한 공유경제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공유경제를 통해 불교의 연기론이 존재의 진리임을 새삼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단 종교의 교리 차원을 넘어 인간이 인간이 믿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의 씨앗이 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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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음식

'맛있다'는 기준은 그야말로 상대적이다. 어떤 사람에겐 달콤한 것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느끼한 맛으로 여겨진다. 어떤 사람은 쓰다고 느끼지만 다른 이는 그 속에서 쌉싸름한 맛을 즐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맛집은 문전성시다. 맛있다고 소문이 나면 줄을 서서라도 그 맛 한번 구경하고픈 것이 인지상정이다. 배고픔을 달래는 음식이 아니라 즐기고픈 음식의 시대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맛집의 음식이 마냥 맛있는 것은 아니다. 서두에 이야기했지만 당연히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또는 대중적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맛들이 있다. 조미료가 탄생한 것도 어찌보면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감칠맛을 찾아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반대로 만화 <식객>에서 말하듯 감동을 주는 맛이란 바로 우리들 '어머니의 손맛'이기에 그 종류는 수백만가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에 한가지 더. 사람들이 원하는 입맛은 맛뿐만이 아니라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먹고싶은 것을 먹는 것이 건강에도 좋다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비타민C가 부족할 땐 신 것이 당기는 등 우리 몸은 그야말로 과학적이면서도 신비한 존재인 듯하다.

 

체인점 입맛

그런데 이런 맛의 작동이 심각한 오염수준에 다다랐다. 바로 패스트푸드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먹으면 오히려 병이 든다. 맛있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거의 지방과 당분 덩어리의 집합체다. 이런 입맛의 오염도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 바로 학교급식이다. 바로 유기농 식품들로 구성된 건강식단이 외면받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이 맛없다고 먹지 않는 것이다. 이 음식들이 학생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잔반통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그래서 한 방송국 9시 뉴스 취재진이 이들 학생들에게 같은 비용으로 고기나 튀김이 들어간 반찬이 더 있는 식단을 차려주었다. 훨씬 맛있어한다.

건강한 유기농 식단은 버려지고 패스트푸드류의 음식은 환영받는 현실. 바로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더군다나 유기농 식단은 비싸기 때문에 급식단가를 맞추기 힘들다는 어려움까지 있다. 유기농 식단은 단순히 건강한 먹을거리 이외에도 건강한 농촌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는 것을 이야기할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들 입맛을 이대로 놔두어야만 할까. 각자의 개성대로라면 상관없지만 체인점 입맛이지 않은가. 또한 그 입맛을 평생 유지한다면 머지않아 엄청난 의료비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학교와 유기농 농장간의 직거래를 통한 단가 낮추기, 유기농 식단을 맛있게 요리할 수 있는 레시피 개발. 이런 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일까. 뉴스에 비쳐진 아이들 입맛을 지켜보자니 입안에  씁쓸한 맛만이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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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스페셜 <끼니 반란>에서 소개된 간헐적 단식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1일1식의 열풍과 맞물려 가끔씩 단식을 해주는 것이 건강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귀가 솔깃해진 것이다. 이번 <끼니 반란>은 당연시 또는 상식이라 생각했던 하루 세끼라는 생각에 대해 의심 내지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그 가치를 높이 사고싶다. 이번 방송으로 인해 무엇을 먹느냐  또는 어떻게 먹느냐에 대한 관심에서 언제 먹느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그런데 건강을 위한 이런 다양한 먹는 방법들은 일견 단순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다. 바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를 살펴보면 그 해답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먹고 또한 가끔 고기를 먹었을 뿐이다

채식이냐 육식이냐, 생식이냐 화식이냐?  아직도 논란 중인 무엇을 먹을 것인가와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이어 이번엔 언제 먹을 것인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됐다. 그런데 인류가 진화해 온 길을 더듬어 보면 언제 어떻게 무엇을 먹어야 건강해 질 수 있는지를 선택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불의 발견이 크다. 특히 이 불을 통해 요리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뇌가 폭발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요리 본능>이라는 책을 보면 인류가 다른 영장류와 다른 진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을 불을 통한 요리로 보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생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불을 통한 요리라 하더라도 주로 우리는 곡류와 열매, 뿌리, 채소 등을 먹어왔다. 고기는 가끔, 정말 운수좋은 날 사냥에 성공했을 때나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사냥을 떠나는 남성들은 매끼니를 챙겨먹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푸짐하게 먹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즉 완전채식이 아닌 가끔씩 먹는 육식, 그리고 하루 한두끼의 식사가 인간이 걸어온 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하나 주목할 것은 채식이라 하더라도 지금처럼 기름을 많이 먹진 않았다는 것이다. 요리를 할 때 두르는 그 식물성 기름들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현재의 우리 몸은 바로 이런 식사 습관에 맞추어져 왔을 것이다. 그러니 현재 우리의 육류 위주 식습관과 하루 3끼 이상의 과다한 식사시간이 우리 몸을 아프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런 병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인 채식과 생식을 고집하는 것도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종교적인 이유나 신념에 의한 이유는 제외다. 건강상의 이유로 택했을 때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 옛적에 먹던 것과 지금의 것이 같을까

여기서 한가지 더 고려해봐야 할 것이 있다. 예전 사냥을 해서 먹던 고기와 지금 곡물을 먹고 자라는 고기가 같은 것일까? 하는 점이다. 흔히들 말하는 오메가 3와 오메가 6 성분비가 확연히 다르는 등 두 고기의 질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자연에서 자란 채소나 과일의 성분과 농약과 비료를 먹고 자란 식물들의 영양성분도 비교해봐야 할 점이다. 게다가 냉장기술의 발달로 장기간 보관이 가능해지고, 또한 계절을 잊고 나오는 음식들이 제철 노지에서 갓딴 자연식품들과 어떻게 다른지도 살펴봐야 한다.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채소와 과일들은 예전 우리 선조들이 먹던 것들보다 무기질, 비타민 등이 적게 함유되었을 가능성말이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현재 우리 인류가 자꾸 과식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 한편으론 다양한 채식이 가능해지면서 필수영양소를 대부분 섭취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굳이 육식을 해야 하는가도 고려해볼 문제다. 육식에 대한 탐닉이 공장식 축사로 이어지면서 생명경시와 환경오염을 부추기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풀을 먹이는 생태적 가축기르기로 극복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꼭 채식만이 건강하면서도 생태적 내지 도덕적 음식섭취법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끼니 반란>을 통해 우리의 관심사가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를 넘어 언제라는 시간이 개입된 건 틀림없어 보인다. 이 세 요소들은 개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가능할 것이다. 방송 말미 경고에도 나오듯 청소년이나 임산부의 경우엔 단식이 해가 될 수도 있는 문제다. 나의 처지에 맞추어 알맞은 방법을 찾되 우리 인류의 몸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를 생각해 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 

한편으론 먹는 방법이 개인의 건강을 넘어 인류의 건강에 대한 관심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바로 먹을거리를 얻는 방법에 대한 고민말이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는 알고 먹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동학이 말하듯 우리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고 그 고귀함을 이어가는 존재이지 않는가. 생명을 먹는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공산품마냥 생산되는 현재의 먹을거리에 대한 성찰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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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낫한 스님은 우리가 유기농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과일이나 채소를 가꾸는 농부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가꾸는 농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초제를 뿌려 잡초를 제거하는 관행농이 아니라 거름을 주며 풀 한포기포기마다 손길을 주는 유기농부처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려움이나 절망, 증오같은 감정을 애써 억누르거나 감추려할 필요는 없다. 또는 애써 그러한 감정들이 없는척, 태연한척 가장할 필요도 없다. 두려움, 절망, 증오, 화를 잘 다스려 거름으로 바꾸어 사랑이 피어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부정적이라 여기는 감정들도 바로 우리의 감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잘 달래고 쓰다듬고 안아주어 사랑의 거름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각이 중요하다. 호흡과 보행을 자각하는 수행을 통해 우리의 감정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쌓을 수 있다. 자각은 집중과 통찰로 이어져 결국 남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할 것이다.

그렇다. 사랑을 꽃피우려는 우리는 감정의 유기농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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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 프로그램이 TV의 대세가 된지 몇년이 흘렀다. 슬슬 이 프로그램들의 승패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특히 <K팝 스타>와 <위대한 탄생>은 개인적으로 그 선호도가 극명해졌다. 물론 이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시간대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프로그램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이미지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위대한 탄생>을 보고 있자면 잠이 슬슬 몰려온다. 참고 볼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래서 리모컨으로 전원 스위치를 누르고 잠을 청한다. 반면 <K팝 스타>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다른 일을 하다가도 TV앞으로 가게 된다. 너무 재미있어서다. 물론 이 둘에 대한 선호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호불호의 엇갈림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절박함이 꼭 최고인 것은 아니다

<위대한 탄생>을 보면 그 첫 시즌부터 마치 영웅담을 대하는 느낌이 든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잃지않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은 감동을 준다. 성공한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절박함'이 묻어나 있는 것이다. 절박하지 않고서는 즉,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정신으로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충고가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노래를 대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주먹을 쥐고 의지를 단단히 하는 결연한 자세를 떠올린다. 그래서 감동을 전해주지만, 가끔은 너무 부담스럽기도 하다. TV가 아니더라도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그런 절박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절박한데 TV속 인물들까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니 더 힘이 든다.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성공하는 모습을 통해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꿈속이나 몽상 속에 빠져보고 싶기도 하는 것이다. 지치고 힘든 현실을 잊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탄생>은 시즌이 진행될수록 그 진중함이 오히려 부담스럽게 작용하는 듯하다.

 

순수함으로 돌아가고 싶다

<K팝 스타>를 보는 것은 흥겹다. 대부분의 출연자들이 어린 나이라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한 것같다. 어리기 때문에 진중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절박함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겐 좌절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젊음이 있다. 그래서인지 절박함보다는 흥겨움이 묻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흥겨움이 TV를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는 듯하다. 손을 쫙 펴고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듯 훨훨 가벼운 마음으로 쳐다보게 만든다. 더군다나 이들의 노래는 꾸밈이 별로 없다. 원석을 보는듯하다. 솔직히 청자의 입장에서 정말 노래를 잘하는 것인지를 판별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이들의 노래에 귀가 쏠리는 것은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노래를 즐기는 것만큼 보는 이도 즐겁기 때문이다. 이들이 어떤 절박함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절박함이 진저리치도록 물리고 싶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부박할 순 없다. 절박하되 절박하지 않게, 즉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 것으로 절박함을 잊는 마음이 필요해 보인다. '난 절박해'라고 외치며 입을 앙다물고 주먹을 꽉 쥐기보다는, 손을 쫙 펴고 춤추고 웃는 가벼움이 마음을 끈다. 절박함이 웃음을 빼앗아가지 않도록 가끔은 꽉 쥔 주먹을 펴고 살고싶다. 보는 바위를 이기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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