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지금과 같은 문명을 이루게 된 것은 인간의 욕망 때문일 것이다. 다른 동물들처럼 배고픔을 해결했다고 먹는 것을 멈추지 않고,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피하면 그 뿐인 거처에 그치지 않고, 보다 더! 보다 더! 원하는 마음이 문명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문자를 만들고 소통을 하며 대규모의 집단을 구성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행동을 이끌어 온 것도 모두 욕망이 작동해서라고 보여진다. 특히 권력에 대한 욕망이 한계 없는 기본적인 욕구와 맞물리면서 인류는 현재에 이른 것이 아닐까 싶다. 만약 인간이라는 속성이 다른 동물들처럼 기본적인 (생존)욕구를 채우면 멈출 줄 알았다면, 권력욕이 작동할 수 있는 영향력도 그리 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멈출 줄 모르는 욕망과 욕구는 인간이 키우는 반려동물이나 가축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쳐, 소위 비만이라는 질병 등을 불러온다. 


이런 인간의 욕망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 색깔도 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생존에 대한 욕구와 권력욕을 넘어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욕망은 세분화되고 다양해지고 있다. 마인드 마이너 송길영은 빅데이터를 통해 이렇게 변해가는 욕망의 흐름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무엇에 대해 결핍을 느끼는지를 밝혀 준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고 하지만, 실은 사람의 욕망을 읽는 셈이다. 그는 이렇게 다양해진 욕망의 변화를 긍정하고, 이 욕망의 실현을 위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물론 그는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인의 욕망을 부정하거나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전제를 안고 있는 듯하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욕망은 돈을 많이 벌겠다거나, 유명해지겠다는 재산이나 권력 등을 얻는 수집에 대한 욕망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고 깊게 파고드는 성취하는 욕망이다. 그 욕망을 통해 재산이나 권력은 자연스레 따라올 수도 있다. 이런 욕망은 지금의 시대가 그만큼 세분화되었기에 가능한 욕망들이다. 예를 들면 커피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콜드브루와 더치커피 같은 추출법의 차이라든가, 아라비카, 로부스타, 수프리모, 블루마운틴 같은 원두의 종류 등등, 미세한 차이를 통한 맛의 차이에 민감하다. 커피에 대한 열정은 어떻게 하면 더 좋은-물론 개인에 따라 좋다라는 의미도 달라지겠지만- 커피를 선보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공부와 관찰, 실험 등으로 이어질 것이며, 이 좋은 커피에 대한 욕망이 타인에게 공감을 불러와 팬덤을 형성하고,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으로서의 의미까지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커피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겐 믹스커피를 먹든 인스턴트 커피를 먹든, 원두커피를 먹든 별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커피에 대한 욕망과 열정을 완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모두에게 동일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욕망이란 과거의 일일뿐, 이제 이런 거대 욕망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세분화된 욕망의 실현은 일종의 과시욕의 하나일 수도 있으며, 여전히 이것은 권력욕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겠다. 


한편으론 욕망의 세분화와 다양화는 먹고 사는 것 이외에 자신의 무가치함을 덜어내고자 하는 의미에 대한 욕망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그 의미에 대한 욕망을 자신이 이끌고 가는 것은 다행이지만, 그 욕망에 끄달린다면 인생은 괴로움으로 빠질 것이다. 의미나 가치가 사라져버리기에 말이다.(어찌보면 의미와 가치를 매기는 것이 바로 권력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욕망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이 필요해 보인다. 욕망에 끄달리지 않는 즉 집착하지 않는 욕망의 자세 말이다. 불교가 인생을 고해라고 여기는 원인으로 말하고 있는 그 '집착' 말이다. 욕망이 욕망임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 욕망에 끄달리지 않는 것. 이것이 기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현대인에게 욕망을 대하는 또 다른 삶의 길은 아닌 것인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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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올림픽 탁구 여자단식. 신유빈과 일본 히라노의 8강전. 세트 스코어 3-0으로 신유빈이 쉽게 끌고갔던 게임이 3-3까지 이어지고 마지막 7세트 마저도 10-10 듀스로 이어졌다. 정말 피 마르고 살 떠리는 순간. 신유빈의 애써 침착하려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다. 11-11로 다시 듀스. 연이어 두 점을 따야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상황. 신유빈은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게임에 임했고, 결국 13-11로 승리해 4강에 진출했다. 


이때 화면에 나오는 두 선수의 모습은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신유빈은 승리의 세리머니로 두 손을 번쩍 들고나서, 울컥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냈다. 히라노는 털썩 주저앉더니, 잠시 후 일어서면서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승자도 패자도 모두 눈물이 범벅이다. 


눈물은 모두 흘린다. 동물도 흘린다. 눈의 윤활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눈이 건조할 때면 눈물을 더 흘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정 눈물은 아직까지 인간에게서만 발견된다. 기뻐서 또는 슬퍼서, 놀라서, 무서워서 흘리는 눈물. 모두 공감을 얻기 위한 눈물이다. 눈물을 통해 나의 감정을 드러내고, 그것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정을 공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진정성을 드러냄으로써 정서적 전염을 불러온다. 그래서 감정 눈물은 일반 눈물보다 단백질과 호르몬이 더 풍부하다고 한다. 눈물은 사회적으로 진화해 온 인간만의 특성인 것이다.

그리고 신유빈과 히라노의 눈물은 왜 눈물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승자의 눈물도 패자의 눈물도 그들이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쏟아 왔는지를 알려주는 듯하여 함께 울컥한다. 인간은 눈물을 흘리는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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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비슷하고(한 살 차이) 커리어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두 사람. 21세기 남자 테니스를 이끌고 갔던 나달과 조코비치가 파리 올림픽에서 맞붙었다. 하지만 나달은 부상 이후 최고 기량을 되찾지 못하고 있고, 조코비치는 여전히 최고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나달은 세계 순위에서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지만 클레이 코트에서 강점이 있다는 것이 변수라면 변수라 할 수 있다. 


드디어 두 선수가 맞붙었고, 1세트는 6-1로 너무나 쉽게 조코비치의 승리로 끝났다. 이어진 2세트에서도 4-0까지 몰린 상황,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대로 조코비치의 손 쉬운 승리로 끝을 맺는가 싶었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나달이 한 점 한 점 쫓아가기 시작했다. 4-1에서 4-2, 그리고 4-3까지, 드디어 4-4 동점을 이루었다. 관중들은 긴 랠리가 이어지다 나달이 승리를 거머쥐면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실제 나달의 모국인 스페인을 응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언더독 효과'이지 않을까 싶다. 약자에 대한 응원. 그의 승리를 통해 실패를 수없이 맛보는 평범한 사람들이 성공에 대한 대리만족을 할 수 있다는 쾌감 말이다. 나달에 대한 응원은 더욱 거세어진다. 언더독의 반란은 성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조코비치의 승리로 경기는 마무리됐다. 조코비치는 나달에 대해 환호성을 지른 관중을 향해 자신에게도 응원을 보내라는 제스처를 보인다. 물론 승리를 거둔 조코비치에게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나달을 향한 응원을 거둘 수는 없다. 올림픽에서 볼 수 있는 멋진 경기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멋지고 감동적인 응원이 있었다. 현실에서는 도외시되거나 내팽개쳐지기 일쑤인 '언더독'들에게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응원의 박수를 보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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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베란다에서 키우던 바질 화분을 관찰하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불과 20센티미터의 차이로 햇빛을 더 많이 받은 화분이 그렇지 않은 화분보다 2배 이상 더 크게 자란 것이다. 이 단순한 관찰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성장과 발전 역시 외부 환경, 즉 햇빛의 양에 따라 크게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우리는 환경의 공정성, 즉 모든 사람이 골고루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이런 환경의 공정성은 사회가 건강하고 균형있게 발전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빠드리지 않아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다. 화분의 바질은 비슷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지만, 만약 그 개체의 특성에 차이가 있을 때 즉 어떤 개체는 훨씬 빨리 자라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고, 다른 개체는 성장이 더딘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반대로 햇빛을 골고루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면 어떻게 차등을 두어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답하기 이전에 먼저 공정성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봐야 할까 싶다. 공정성은 단순히 모든 사람이 똑같은 조건을 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각자가 필요로 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진정한 공정성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햇빛을 조금 더 받아야 하는 늦게 자라는 바질이 있다면, 그에게는 더 많은 햇빛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결국 결과의 평등을 목표로 하는 과정의 공정성이다.


그러나 공정성의 기준을 맞추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공정성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각자의 필요와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의 성장 속도와 필요를 고려해 환경을 조절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모두가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키가 빨리 자라는 유전자를 지닌 개체가 햇빛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쉬운 체제라 생각된다. 물론 숲이 형성되는 것처럼 햇빛을 더 많이 받으려는 행위가 키가 큰 나무를 만들고, 그 경쟁에서 뒤처진 개체는 차라리 그늘에서 잘 자라는 성질로 바뀌어 조화를 이루듯, 사회가 조화를 이룬다면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승자독식의 구조가 점점 더 강화되고, 승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대물림될 가능성이 크다면 이는 분명 공정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똑같이 햇빛을 받아 키가 큰 유전자의 바질이 키가 더 커진다면 이는 공정한 <능력주의>라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이 정말 공정한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개인적으론 공정성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결과에 큰 차이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사회에서 누구나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통해 성과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균형을 최소화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교육 분야에서 모든 학생이 같은 교육 기회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학습 속도가 다르거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학생이 있을 수 있다. 이들에게는 개별화 된 지원이 필요하며, 이는 단순히 같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는 결국 학생 개개인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개인의 필요를 고려한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공정성은 모든 사람이 같은 출발선을 갖도록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각자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햇빛을 조금 더 받은 바질이 더 크게 자랐던 것처럼, 사람도 각자의 외부 환경에 따라 성장의 차이를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사람이 골고루 햇빛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공정성을 정의하고 실현하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각자의 필요를 고려한 환경 조정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결과에 큰 차이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공정성의 척도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능력대로 살아 그 결과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오늘 조금 덜 자란 바질의 화분을 키가 훌쩍 커 버린 화분과 자리를 바꿔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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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24-06-27 0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질을 키우시면서 이런 사고로 확장되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제겐 그저 부러움 자체네요^^
 

고정관념이 생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적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문제를 풀기 위한 답을 정해 놓고 재빠르게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묘책을 찾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 것을 아끼는 것이다. 하지만 때론 고정관념이 편견이나 선입견이 되어,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고정관념은 꽤 무섭다. 


문이 뻑뻑해져서 열고 닫는 것이 힘들어지면, 자연스레 윤활유를 찾게 된다. 흔히 사용하는 것이 WD-40 같은 윤활제다. 집의 중문이 갑자기 뻑뻑해져 열고 닫는데 힘이 들었다. 그래서 당연히 기름칠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윤활제를 뿌려 주었다. 하지만 윤활제를 뿌리고 나서 2~3일 만 지나면 다시 문이 뻑뻑해졌다. 그러면 다시 윤활제를 뿌리고.... 그러다 갑자기 느끼게 된 건, 윤활제 효과가 이리 짧을 순 없다는 것. 분명 다른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문짝을 떼어보니 레일의 구슬이 살짝 보일 만큼 들어가 있었다. 이러면서 구슬이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문짝 하단과 레일이 부딪히며 움직였던 것. 둘의 마찰로 인해 문을 여닫는 것에 힘이 든 것이다. 윤활제로는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태.

 


레일의 구슬을 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해보고 살펴보니, 문 옆구리 양쪽에 나사못이 보였다. 나사못이 두 개나 있을 이유가 있을까? 그래서 이 중 위의 것을 살짝 살짝 돌려보니 구슬이 내려왔다. 아! 이거구나. 옆구리 양쪽 모두 나사못을 돌려 구슬을 충분히 내린 후 다시 문을 달았다. 그리고 문을 여는데, 웬걸 이렇게 스르륵 열릴 줄이야. 너무 쉽게 열리는 통에 문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이 문틈에 끼여 다칠 ^^; 정도였다. 구슬을 내리기 전 문을 열고 닫을 때의 힘을 쓰다가 순식간에 문이 열려서다. ㅋ 


고정관념! 참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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