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나이트>를 찍었던 크리스터퍼 놀란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영화를 봤다. 하지만 대 실망이다. 아주 평범한 블로버스터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전작이 주던 감동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기껏 준비한 것이 소설 <바람의 화원>같은 반전과 풍뎅이를 닮은 더 배트라는 전투기 뿐이었다. 도덕적, 윤리적 딜레마를 안겨주며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여과없이 드러내보였던 조커라는 캐릭터를 대신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는 악당을 쳐부수고 말겠다는 영웅과 아버지의 뜻을 받들겠다는 악당,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악당2라는 지극히 평범한 캐릭터들의 치고받기다. 조커같은 입체적인 캐릭터는 없다. 이것이 밋밋해서인지 감독은 희망의 두 가지 성격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고리타분한 이야기이지 않는가.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나온 절망과 희망을 대하는 두가지 태도라고나 할까. 희망은 절망의 친구이기도 하고, 절망의 그물을 뚫고 나오는 꽃이기도 하다는.

또한 악당이 말하는 혁명이라는 것도 너무 유치하다. 상위 1%는 무조건 악이고, 그렇기에 그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세력은 무조건 처분해야 한다는 것. 그것도 즉석 재판으로 말이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곳에서 혼돈이 어떻게 발생하고, 그것이 어떻게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다. 그저 분노의 발산만 있을 뿐이다. 물론 이 분노는 주인공들을 움직이는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분노의 격돌로 도시가 파괴되는 모습만이 영화가 돈을 쏟아부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 뭐 이런 볼거리라도 있어야지...

새로운 배트맨의 탄생을 예고하는 마지막 장면은 놀란 감독의 배트맨은 끝났을지 모르나 이어지는 속편은 계속될 것이라는 암시같다. 하기야 놀란 감독도 교체될 때가 됐긴 됐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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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기억이 아니라 행동으로 말한다.

 

영화 <토탈 리콜>-23년 만에 리메이크 되어 8월중 개봉한다-중에 한 박사가 주인공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에게 건넨 말이다. 주인공이 평범한 노동자인지 첩보원인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을 때, 기억에만 의존하지 말라는 '사탕발림'이었다.

가끔씩 오래된 영화를 다시 보곤 한다. 예전엔 그냥 지나쳤지만 지금은 관심을 받게 되는 장면을 만나게 되는 기쁨 때문이다. 또는 예전의 그 감동을 다시 한번 느끼거나.

어쨋든 20여년 만에 다시 보게된 <토탈 리콜>에선 위의 대사가 가슴에 와 닿았다. 정체성이란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기억의 집합체일지 모른다. 과거의 수많은 내가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됐다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들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는가. 스필버그 감독의 <A.I>에서는 로봇에게 기억을 심어주자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이니 기억이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부터 시작해 재패니메이션 <공각기동대> 등등 수많은 SF영화 속에선 이렇게 기억과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그 기억이 조작된 것이라면 진짜 나란 누구일까. 이런 고민은 공상이나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들을 보면 우리의 기억이란 것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일어난 사건은 똑같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사람들마다 다 다르다. 마치 일본영화 <라쇼몬>처럼 말이다. 즉 기억의 조작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뇌가 진화한 방식이기도 하다. 기억은 정확한 재생이 아니라 특정 정보를 얻고자 할 때 제공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형되어 저장된 것이 바로 우리의 기억인 것이다. 어렸을 적의 소중한 추억 중 실제로 일어난 일은 별로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남에게서 들었거나 영화, TV,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한 것을 섞어서 자신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추억을 스스로 조작하는 것은 현재와 관련이 있다. 자신의 어떤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자신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행동인 것이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영화 <토탈 리콜>에선 그렇게 말한 박사가 죽게 된다. 주인공을 속이려한 긴장 탓에 땀방울을 흘렸기 때문이다.

어쨋든 기억이란 정확한 재생이 아니라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유동적이라는 점에서 매트릭스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가상공간 속에서 살아가다 현실과 맞닿은 곳에서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영화 <매트릭스>의 키아누 리브스가 선택한 알약에 따라 다른 세상이 펼쳐지듯 우리에게 나타난다. 즉 우리는 선택이라는 행동을 통해 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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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다. 갑자기 총에 맞아 죽다니. SBS월화드라마 <패션왕>의 결말 얘기다. 강영걸이 죽는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누가 죽인건지 가늠할 수도 없으니 이유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래도 곰곰히 생각해봤다. 단순히 비극을 위해 치닫은 결말이 아니라면 무슨 의도라도 있을텐데.

 

그때 문득 떠올랐다. 1960년 알랑 드롱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가. 혹시 강영걸은 리플리 증후군-상류 사회를 꿈꾸다 현실과 상상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 상태.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주인공 톰 리플리의 이름에서 따왔다-에 걸린 불나방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정재혁을 꿈꾸다 그를 흉내내고 결국 파멸로 끝을 맺은 것은 아닐까.

 

패션왕이 초반에 매력적으로 다가왔던건 개인적으로 자수성가라는 주제 때문이었다. 홍대 앞 노점상에서 시작해 동대문을 거쳐 세계 4대 패션쇼에 이름을 올린 최범석 디자이너라는 '기적같은' 이야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중반 드라마는 대기업을 상징하는 정재혁과 강영걸의 싸움으로 진로를 바꾼듯 싶었다. 그래, 뭐 이런 이야기도 괜찮을 것 같았다. 대기업 프렌들리 대한민국에서 중소기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보여주는 것도 말이다. 그런데 잠깐의 성공이라는 달콤함을 맛본 강영걸이 갑자기 바뀐다. 욕망과 복수에만 사로잡힌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 후반 강영걸을 연기한 유아인의 얼굴은 내내 찡그리는 표정 뿐이다. 알 수 없는 사이 리플리가 된 것이다.

 

10%가 아니라 단 1%로 치닫는 상류층과 대다수의 하류층으로 나뉘어 버린 현재의 대한민국. 그 1%에 대한 욕망이 대한민국을 굴러가게 만드는 힘일지도 모른다. '대박'이라는 단어가 일상에서 뒤틀린 언어가 되어버린 것도 혹시 이것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 욕망은 끝내 불발이 되고 만다. 강영걸의 죽음처럼. 난데없는 드라마의 결말은 혹시 이런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허망한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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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맥박은 다시 정상범위 안으로 돌아왔다. 아내의 눈물은 그제서야 그쳤다. 그러나 그 눈물 자국이 채 마르기도 전에 수축이 찾아왔다. 수축이야 계속 있어왔지만 불규칙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빈도도 적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사흘전 병원에 입원할 때처럼 진통이 시작된 것이다. 6~7분 마다 찾아오던 수축은 어느새 4분 마다 진행됐다. 수축 억제제도 더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양수나 태반 쪽에 감염이 있었는가 보다. 의사는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젠 하늘에 맡겨야 할 순간인가. 더이상 욕심을 부리는 건 아이에게도 아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조용히 아내의 손을 잡았다. 1~2 시간 이었지만 그만큼 더 버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작이라는 말 보다는 엄청이라는 말이 어울릴 시간이었을 것이다. "힘내"라는 말 밖에는 건넬 말이 없었다. 손을 잡아주는 것 말고는 사랑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실은 내게도 용기가 필요했다. 앞으로 어떤 상황들과 맞닥뜨려야 할지 두려웠다. 하지만 잠시 미래를 미리 생각하는건 접어두기로 했다. 그 모든 생각들은 기우로 그칠 것임을 알고 있기에. 아내의 손을 통해 나도 새로운 기운을 낸다.

아내는 수술실로 향했다. 수술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수술실 너머로 멀어져가는 아내의 침상을 바라보며 기도를 했다. "부디 굽어 살펴주소소. 지금 이순간 아내와 아이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소소."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같은 층에 있는 신생아 중환자실과 임산부 병실 앞을 서성거렸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다가가 확인했다. 이렇게 반복하기를 1시간이 조금 넘었을까. 작은 아기를 실은 인큐베이터가 나타나 쏜살같이 신생아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정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우리 아기임을 알아챘다. 2초 정도 스쳐지나간 아기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가슴이 아팠다. 그때 수술이 끝났다는 휴대폰 문자가 왔다. 하지만 마취가 풀릴 때까진 시간이 더 필요했다. 1초 1초가 너무 더디다. 요즘 나에게 있어 시간은 바이러스에 걸린 컴퓨터같다.  

1시간을 더 넘게 기다린 끝에 아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퉁퉁 부어 오른 얼굴을 보니 너무 안쓰럽다. 10여 년 전 어머니가 수술을 받은 후 마취가 잘 깨지 않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는데...  

아내는 아이의 상태를 궁금해했다. 안아주기는 커녕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중환자실로 이동해 버린 아이. 아빠인 나로선 탯줄조차 끊어주지 못했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인공 엄마 뱃속과 다름없는 인큐베이터와 친해져야 할 아이. 그 아이의 모습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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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10-06-0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힘 낼게요.
 

프리허그라는 캠페인이 있다. free hugs라고 쓴 피켓을 들고 포옹을 원하는 사람들을 안아주는 운동이다. 안아준다는 행위를 통해 따뜻함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온정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작은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림의 오른쪽 밑부분에선 두 명의 병사가 진한 포옹을 나누고 있다.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온 사람과 그를 애타게 기다렸을 사람의 마음이 포옹 하나로 모두 표현됐다. 이 포옹의 감격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왼쪽에 그려진 다치고 피흘려 죽어가는 병사들이다.  

현대사회는 하루하루가 전쟁이라고 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프리허그는 그래서 그 하루하루를 살아남았다는 위로의 포옹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편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쓰러져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포옹조차 불가능한... 하지만 그들마저도 끌어안겠다는 것이 프리허그 운동일 것이다. 과연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그 꿈이 실현될 날이 올까. 일단 내 옆에 있는 사람부터 '꼬옥~'.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잘 살아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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