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최대 볼거리는 분장쇼다. 휴 그랜트가 1인 6역이나 했나? 아니, 저 사람이 수잔 서랜든이었어? 배두나 같은데... 톰 행크스가 틀림없어.  할 베리가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등등 6종류의 다른 시간대의 인물들로 나오는 주인공들을 확인하는 재미가 솔솔하다. 1849년에서부터 2321년 까지의 6가지 사건을 다룬 이 영화의 흐름은 시간의 순서대로 흐르지 않기 때문에 종잡을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이들의 탁월한 분장 솜씨를 확인하는 것은 줄거리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엔딩 자막이 오르며 나오는 보너스 장면을 통해 놀라는 기쁨을 누리면 될 것이다.
 
2. 500년이라는 시간동안 주인공들은 환생을 통해 거듭된 만남을 갖는다. 다만 영화가 헷갈렸던 것은 같은 모습으로 환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배역을 통해 환생을 쫓아가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대신 감독은 별똥별 모양의 점을 통해 한 인물의 궤적을 따라갈 수 있도록 배려해놓았다. 이것은 마치 환생이 똑같은 인생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반대로 예를 들어 톰 행크스라는 배역을 통해 환생을 쫓아가다보면 그의 변화된 심상을 확인할 수도 있다. 욕망에 가득찬 의사에서 점차 남을 생각할 줄 알게된 박사, 그리고 사랑에 성공한 남자로. 이렇게 쫓아가는 것은 인과응보라는 관점에서 옳은 선택일 수도 있겠다.
 
3. 2144년 네오 서울의 모습은 워쇼스키 감독의 전작 <메트릭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일랜드와 메트릭스, 토탈리콜을 합쳐놓은 듯한 내용. 다른 시대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어디선가 본듯한 것들의 뒤섞임이라는 인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3시간이 안되는 러닝타임에 6시대의 사건들, 즉 1시대당 45분 정도의 러닝타임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셈이다. 45분 정도면 충분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6가지 사건 중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감동을 주는 이야기는 없는듯하다. 물론 이것이 서로 연결된 구조임을 감안해 전체 맥락에서 보더라도 이야기는 그다지 재미가 없다.
 
4. 환생 또는 죽음이란, 문을 닫고 새로운 문을 여는 것이라는 생각이 영화의 핵심 테제라고 본다. 그리고 그 새로운 문을 열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 주는 신비, 또는 행복이라 하겠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다른 이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착한 일을 전생에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나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내세로도 이어진다는 것이 영화가 말하고 싶어한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내세가 보다 나은 세상이 되려면 경계 앞에서 두려워 주춤하지 말고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노예해방운동, 핵발전소를 둘러싼 오일기업의 비리 파헤치기, 클론들의 인권운동, 외계 종족과의 교류 등등. 세상은 누군가의 용기로 더 나아진 것이다. 그 용기는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동반자가 있을 때 더욱 힘을 발휘한다.
 
5. 소음과 소리, 음악의 구별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렸다고 말하는 주인공. 일체유심조를 떠올리게 만드는 단어들과 카르마와 환생을 말하는 것이 불교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불교는 환생의 고리를 끊는 것이 목표다. 되풀이 되는 인생이란 고통의 연속이며, 이것은 집착이 낳은 것이기에, 8정도를 통해 그 집착을 없애면 환생의 고리가 끊어지고 열반의 세계로 간다는 것. 그런데 영화는 열반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되풀이되는 현생이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이란 나를 따스하게 안아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래서 영화는 해피엔딩의 동화로 끝난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힘쓴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해진다는. 그러나 감동은 없다. 다만 인생은 혼자가 아니라는, 또는 아니여야만 한다는 위로를 가슴 속에 쓸쓸히 담아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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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년 전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원작 소설인 <파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대충 내용은 생각나지만 책을 읽고 나서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을 받았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당시 적어놓았던 소감을 들춰보니 희망과 공포라는 두 글자에 매료되어 있었다. 지옥의 끝에서라도 미소를 잃지 않으려는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을 산산히 부서뜨릴 수 있는 공포감으로부터 벗어나기.

그럼 이번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나서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영화의 줄거리는 소설과 똑같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경영하던 한 가족이 파산 위기에 처하자 캐나다로 이민을 결심한다. 하지만 캐나다로 떠나던 화물선은 푹풍우를 만나 침몰하고 구명보트 위엔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벵골 호랑이, 그리고 주인공인 파이가 타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다른 동물들은 먹이 사슬에 따라 죽어가고 호랑이와 파이만 남는다. 이 둘은 227일간 바다 위에서 공존하게 된다. 파이는 이윽고 멕시코 해안에 닿아 살아남게 된다. 하지만 일본 선박회사는 배가 침몰한 이유를 알고자 하고 파이는 자신의 생존에 대한 또다른 이야기를 전해준다. 상식적으로 이해될만한 스토리로 말이다. 소설에선 이 부분이 가장 충격적이었던 같은데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일거라 믿는다.

아무튼 소설과 흡사한 이야기 덕분에 영화를 본 소감 또한 별반 다르진 않았다. 삶에 대한 의지, 즉 희망을 끝끝내 지켜내야 한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또하나 덧붙여져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믿음에 대한 태도다.

파이는 어렸을 적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차례로 믿게된다. 게다가 어른이 된 지금은 유대교를 가르치는 강사다. 어떻게 여러가지 종교를 믿으면서도 내적인 갈등이나 혼돈에 빠지지 않았을까. 그건 모두가 나에게 똑같이 생명을 주신 신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파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이런 밑바탕을 전제로 들으면 달라진다.

파이가 난파한 화물선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라는 사실은 하나다. 하지만 그것의 이야기는 희망으로 가득찬 벵골 호랑이와의 공존을 말하는 것과 절망과 공포감, 끔찍함으로 이루어진 사람들간의 살육으로 이루어진 것 두가지가 있다. 이 두가지 이야기 모두 사실일 수 있다. 이 세상엔 잔인한 살인자들도 존재하고 한없이 베푸는 성인들도 존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두 이야기 만큼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는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 있다. 당신이 어떤 이야기를 믿는지에 따라서 말이다. 결국 태어나서 죽는다는 사실은 매 한가지나 우린 희망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도 절망이라는 좌절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오직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가 문제다. 두 이야기를 모두 믿는다 해도 결국 선택은 내려져야 한다. 파이는 희망을 선택했고 믿었다. 희망을 선택한다고 해서 삶이 순탄한 것은 아니다. 벵골 호랑이와 단 둘이서 망망대해를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희망이 삶을 쉽게 이끌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살만한 것으로는 만들어줄련지 모른다. 반대로 절망감에 쌓인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 것인지 상상해보라. 자, 그럼,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가.

 

2. 영화는 물의 향연이다. 바다가 얼마나 예쁜지, 생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3D를 통해 몽환적으로 보여준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3D 영화가 하늘을 배경으로 하거나, 앞뒤로의 움직임을 사실적 입체감으로 표현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마치 하늘 위에서 날고 있는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깊은 바다에 비친 별들 위로 지나가는 보트의 모습, 투명한 바다 속 해파리들의 유영과 고래의 등장, 고요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잔잔한 바다의 모습 등, 움직임이 극히 자제된 영상들이 3D를 통해 신비감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투명함이 주는 깊이감. 3D의 또다른 매력이다. 그리고 이 신비함이 영화의 주제라 할 수 있는 희망을 밝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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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1-07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을 읽진 않았는데 이 영화는 꼭 3D로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안 감독이기도 하구요.^^

하루살이 2013-01-08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반엔 조금 지루한 면도 있지만, 바다를 보여주는 풍경은 꿈속을 여행하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3D로 볼만한 작품으로 강추입니다.
 

1. <호빗 뜻밖의 여정>은 <반지의 제왕>시리즈 이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배긴스와 골룸의 만남, 그리고 절대반지를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 출발은 고향집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던 빌보 배긴스를 간달프가 찾아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난쟁이족들의 잃어버린 에레보르 왕국을 되찾는 원정대에 합류할 것을 제안받은 것이다. 하지만 배긴스는 망설인다. 땀내나고 더럽고 춥고 배고픈, 그리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모험을 나선다는 게 내키지 않은 것이다. 누구나 모험을 꿈꿀것이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집을 떠나기를 결정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모험이 아니라 여행조차도-물론 관광이 아니라- 선뜻 마음을 굳히고 실행하기엔 엉덩이가 무거운 법이니까. 일단 슬리퍼를 신고 집안에 들어와 누워있으면 다시 운동화를 갈아신는다는 건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지 않던가. 온기와 편안함, 평온함 등등을 모두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긴스도 그랬다. 결코 떠나지 않을것 같았다. 그러나 배긴스는 모험을 선택했다.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운동화로 갈아신은 것이다.

모험이 주는 불편함을 알면서도 어째서 배긴스는 길을 나선 것일까. 모험은 바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 그것은 모험을 통해 탄생한다. 그것은 새로운 만남을 통해 만들어진다. 낯섬과 만남, 그리고 이야기란 바로 젊음이다. 길을 나서야 비로소 변할 수 있다. 나이든 이들에겐 부담인 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나이란 물리적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슬리퍼를 신고자 하는 마음이 나이듦이요, 운동화를 신고 길을 나서는 마음이 바로 젊음인 것이다. 배긴스는 젊어지고자 한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여정은 뜻밖의 여정이 됐다.

한편 에레보르 왕국을 되찾고자 하는 난쟁이들도 피난으로부터 겨우 구축한 안정된 삶을 버리고 모험을 떠났다. 그런데 이들의 모험은 고향집-잃어버린 왕국-을 찾기 위한 것이다. 즉 슬리퍼를 신기 위해 운동화를 신은 것이다. 운동화를 신고 평생을 걸어갈 순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달콤한 꿈나라로 인도할 침대와 방안을 돌아다닐 슬리퍼도 필요한 것이다. 운동화와 슬리퍼. 그것은 어느 하나가 내 발에 항상 신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갈아신을 수 있어야만 한다. 문제는 그것을 갈아신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의 여부일뿐.

 

2. <호빗>의 이야기 진행은 다소 느린 편이다. 초반엔 마치 엿가락 늘인 것처럼 축축 처지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중간 중간 보여주는 액션장면은 정신을 바짝 들게 만든다. <반지의 제왕>시리즈가 주었던 충격만큼은 아니지만 3D로 무장함으로써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특히 48프레임의 화질은 마치 LED TV로 HD급 화질을 보는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런 고화질은 때론 너무 사실적이어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듯하다. 특히 풀샷으로 찍힌 질주 장면들-평원에서의 토끼 썰매- 은  이것이 그래픽장면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으로 다가오는 입체감과 눈앞에서 멀어져 가는 입체감을 동시에 선사함으로써 3D의 깊이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 감탄한다. 앞으로 또 얼마나 발전된 촬영기법을 다음 시리즈에 담아낼지 자뭇 기대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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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가 된 이후 007 영화는 극장에서 보고 있다. 그의 맨몸 액션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서다. 이번 스카이폴 또한 그의 액션을 기대했다. 그런데 이제 갓(?) 44세인 그가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테이큰의 리암 니슨이나 익스펜더블 속의 액션 영웅들의 나이는 환갑이 기본이다) 아날로그적인 그의 액션이 아날로그를 찬양한 이번 영화 속에서 아날로그를 말아먹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1. 노장은 죽지 않는다

이번 007 스카이폴은 세대교체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나이 먹는게 죄가 아님을 선포한 영화다. 나이는 단지 숫자라는 CF카피를 영화로 표현한 것이다.

시대가 변해가니 첩보국도 불필요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고, 국장 M 또한 판단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받기 시작했으며, 제임스 본드 또한 죽어서도 살아나지만 체력적인 문제로 현장근무에서 떠나야 하는건 아닌가 염려되기 시작했다. 이는 오륙도를 지나 사오정, 삼팔선이 일상화된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젠 영국은 물론 전세계에 퍼진 구조조정의 칼날이 도처에 번득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의 본드는 체력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죽음에서 부활해 어려운 문제를 깨끗하게 정리해버린다. 나이 들었다고 무시하지 말라는 투다. 경륜, 연륜이라는 장점뿐만이 아니라 열정이 살아있다면 그 누구도 본드를 현장에서 내칠 수 없다고 말한다. 

감독의 이런 시선은 영화 곳곳에서 과거로의 회귀를 통해 강조된다. 007의 큰 재미중 하나였던 신무기 대신 과거 골동품에 가까운 총기가 달린 자동차가 나오고, 본드의 어린 시절이 담긴 고향이 주무대로 등장한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옛것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M은 자동차를 보며 농담을 건네고, 본드는 고향집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럼에도 이 둘은 영화 속에서 본드를 살려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반대로 신무기 개발팀의 박사는 앳된 젊은이다. 본드는 백발의 박사가 아닌 젊은이가 개발팀에 있는 것이 흡족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발명한 송신기로 목숨을 구한다. 또한 본드를 도와주는 여자 파트너는 현장근무를 택하지 않고 본드의 충고를 받아들여 사무직을 선택한다. 젊으면 현장에서, 나이들면 사무실에서. 이런 고정관념이 첩보국 안에서 다 깨져버린다. 결국 나이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본드는 말하고 있는듯하다.

 

2. 그러나 그의 액션은 너무 나이가 들어버려 안타까울 지경이다. 맨몸으로 부딪히고 깨지는 액션은 약해지고 화력만이 거세졌다. 파르쿠르(야마카시)를 연상시키는 화려함 대신 무기를 선택한 것이다. 영화 초반 잠깐 비쳐진 액션, 그리고 중후반 이퀄리브리엄을 연상시키는 그림자 액션이 잠깐 눈에 들어올 뿐,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종반의 액션은 과거로 회귀함으로써 다니엘 크레이그의 재능을 썩혀버리고 말았다.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는 그저 휙 던져진 칼 한자루가 전부였다. 나이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007스카이폴의 이야기는 그의 액션과 화답하지 못하고 돈만 쏟아붓는 안타까운 풍경을 자아냈다.

본 시리즈도 맷 데이먼이 빠지자 액션이 빛을 잃기 시작하더니 다니엘 크레이그 마저도 몸을 사리다니 너무 아쉽다. 이젠 이런 류의 액션은 테이큰 시리즈만 남은 건가. 애시당초 디지털로 무장된 액션이 아니라면 화력은 잠시 낮춰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익스펜더블의 노장들이 아쉬울 것 없이 퍼붓는 그런 화력은 그저 애처로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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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남녀 3명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혁명가의 연인>은 24년 전 소피 마르소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반가운 영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혁명의 진행과정에 참여한 두 청년이 시민권이나 자유, 평등과 같은 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때문이었다는 감독의 시선은 무척 솔직해보인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어릴적 형제같이 지냈던 세 남녀가 프랑스혁명 당시 뿔뿔히 흩어진다. 오렐은 미국으로, 타르깽은 파리로, 셀린느(소피 마르소)는 고향에 남아 대부인 백작의 글라이더 작업을 돕는다. 4년이 지나 공화주의자로 변신한 타르깽은 고향에 돌아와 군대를 징집하고 공화정 정치를 펼치고자 한다. 그리고 셀린느에게 아이들 교육을 맡긴다. 원래 셀린느는 오렐을 좋아하며 긴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마침 오렐도 고향으로 돌아오고, 셀린느와 타르깽의 관계를 오해한다. 그래서 공화정과 반대인 왕정파에 몸을 담는다. 하지만 이내 혁명으로 야기된 전쟁의 참혹함에 고개를 돌리고 셀린느의 변치않는 사랑을 확인하며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타르깽은 셀린느를 차지하고자 연적 오렐을 죽이고자 했으나 오히려 셀린느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영화 속에서 타르깽은 시민의 보편적 권리와 자유를 내세우며 무단정치를 펼치는데 이는 셀린느에 대한 가질 수 없는 사랑때문이었으며, 오렐이 잠시 왕정파에 몸담았던 것 또한 사랑의 배신이 준 아픔을 복수하고자 함이었다. 혁명이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진 전쟁의 밑바탕엔 사랑과 배신, 복수라는 감정이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감독의 이런 시선은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탄 자동차가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이라는 마크 뷰캐넌의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처럼 명쾌해 보인다. 그리고 일견 이런 시선이 거대 담론들보다 피부에 와닿기도 하다.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밑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개인적 감정과 감정들이 물고기처럼 부단히 헤엄치고 있지 않았겠는가. 그것을 인정하는 시선이 솔직해 마음에 와 닿는다는 이야기다.

 

한편 영화속에서 오렐이 혁명으로 피폐해진 고향 풍경을 보면서 "웃고 떠드는 시대는 가고 근엄한 연설가의 시대가 온 것인가"며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웃고 떠드는 시대는 귀족 계층의 몇몇 소수만이 누렸던 특권이었을 테지만, 아무래도 이 말이 가슴에 비수를 꽂는듯 아프게 다가온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또는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며 근엄한 연설가처럼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둘러보게 된 것이다.

 

웃고 떠드는 시대는 진정 가버렸을까. 혁명의 시대엔 웃고 떠드는 것이 마땅치 않은 일일까. 오늘 하루하루가 웃고 떠드는 시대가 되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진짜 혁명의 길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꼭 구태여 혁명이라는 말도 필요없다. 그저 하루하루가 웃고 떠드는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슨무슨 푸어로 시름받는 세상이 살만한 세상으로 바뀌는 그 과정의 길에서도 엄숙함보단 웃고 떠들 수 있는 명쾌함이 함께 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이번 대선이 축제의 장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과한 욕심이 아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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