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목이 왜 '다니엘 블레이크'가 아니라 '나, 다니엘 블레이크'였을까. 제목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주인공 다니엘의 이 말 속에 그 궁금증이 풀렸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거요."

나란, 한 인간으로서의 나, 누구와도 똑같을 수 없는 나인 것이다.

 

영화는 이렇다. 성실한 목수 다니엘은 심장에 문제가 생겨 일을 할 수 없게된다. 우여곡절 끝에 질병수당을 신청하지만 거절당한다. 당장 입에 풀칠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실업급여를 신청하지만 이도 탈락. 이 과정에서 다니엘은 두 아이의 엄마이자 싱글맘인 케이티를 만나고 아낌없는 도움과 응원을 건넨다. 그리고 이웃에게도 다소 까칠하지만 친절을 베푸는 등 타인을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로 대우한다.   

 

인간적 삶을 최소한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하는 것이 복지제도라 할 것이다. 그 제도 속에서 개인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무임승차자다. 즉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 같은 사람들이 불로소득의 수단으로 그 제도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도는 이들을 견제할 방책을 만든다. 일종의 매뉴얼이 형성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매뉴얼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제도의 대상자를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매뉴얼의 일부분으로 여기는 순간 관료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 관료화의 벽에 막히는 순간 인간은 자존심을 잃는다. 

그래서 다니엘은 항거한다. 그 항거의 끝은 영화를 통해서 보기를 바라며, 우리가 마주대하고 있는 것이 한 인간임을 잊지말았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다시 다니엘의 말을 인용해본다.   

"우리에게도 잠시 기대어 쉴 바람이 필요하지."

 

그 바람은 인간이다.

 

ps. 켄 로치의 영화를 보면 꼭 논쟁이나 언쟁 장면이 나온다. 특별할 것도 없는 촬영과 편집이지만 날 것의 이미지를 통해 꼭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한마디 거들고 싶은 것이다. 그 한마디 거들고 싶은 욕망. 켄 로치는 그 욕망을 끄집어내 영화를 이끌어가는 듯싶다.

 

우리에게도 잠시 기대어 쉴 바람이 필요하지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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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스릴러2016.12.07.136분한국12세 관람가

감독 박정우

 

판도라는 재난영화다. 하지만 다른 재난영화와는 달리 그 목적이 뚜렷하다. 바로 원전에 대한 반대이다. 일반적인 재난영화들은 재난의 원인보다는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재난을 대처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욕망을 비추거나 반대로 거룩한? 인간성을 이야기함으로써 감동을 전달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터널>의 경우,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유로 생명을 경시하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전달한다. <부산행>은 좀비라는 재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인간군상들을 통해 전통적인 주제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해운대>도 어찌보면 비슷한 설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판도라도 희생정신이라는 감동의 포인트를 갖고 있다. 국가에게 헌신짝 취급받는 사람들이 국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통해 눈물샘을 자극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 영화의 주된 목적이 아니다. 영화는 재난의 원인에 집중한다. 바로 원전 그 자체이다. 영화 속 곳곳에서 원전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백문이 불여일견. 원전에 대한 반대를 귀로만 듣던 사람들에게 눈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효과를 키우고 싶어하는 목적이 보여진다. 재난에 대처하는 정부의 미성숙한 모습을 비판하는 것조차도 곁가지에 불과하다.

<판도라>가 영화이기에 원전을 찬성하는 쪽의 근거나 주장은 드러나있지 않고, 또 정밀하게 과학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허구와 감동이라는 치장을 하고 원전에 대한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원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추천, 그리고 원전을 찬성하는 사람들에겐 경각심을 일으키는 차원에서 추천한다.

ps. 그런데 왜 대한민국은 친환경 에너지보다 원전을 미래의 주 에너지로 정책을 삼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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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마을 다이어리

 

드라마, 가족2015.12.17.128분  일본  12세 관람가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세 자매가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어느 날 다른 곳에서 살고 있던 아버지의 부고가 날아왔다. 세 자매는 장례식에 참석해서 그들의 배다른 여동생을 만난다. 여동생은 아버지를 잃고 의붓어머니와 살게되는 처지에 놓였다. 세 자매는 여동생을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이 네 자매가 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 속에서 중요한 소재로 나오는 것 중에 하나가 매화나무다. 자매들의 집 정원에서 자라는 매화를 보며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손길이 가야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정말 정말 무척이나 손이 많이 간다. 작은 텃밭이라 하더라도 농사를 짓다보면 이래저래 손이 갈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것들과는 이렇게 손이 가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손을 타서는 안 된다. 손이 가는 것은 긍정의 힘이다. 손을 타는 것은 부정의 힘이다. 관심이 어리고 사랑이 넘치는 손이 가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넘치면 손을 타게 된다. 손이 가야 하는 대상이 스스로 해야 하는 몫이 있는 것이다. 이 몫을 빼앗을 정도로 손이 가면 손을 탄다. 아이도 작물도 손을 타면 시들시들해진다.

반대로 아예 손이 가지 않은 방치 상태는 상대를 제멋대로 만든다. 제멋에 사는 거야 괜찮지만 제멋대로 구는 것은 상대를 힘들게 만든다. 제멋이 참 멋이 되려면 제멋대로가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는 멋스러움을 갖추어야 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네 자매는 따듯한 손길을 가지고 각자 제멋을 가지면서도 멋스러움을 잃지 않는다. 손을 타지도 제멋대로 굴지도 않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에서 만나는듯하다. 세상이 어찌 손을 타지 않고 제멋대로 굴지 않을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내가 손길을 뻗친 그 대상들이 이 네 자매처럼 절로 손이 가고 싶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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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휴가 나오면 군복 입은 사람만 보이고, 아내가 임신하면 임신부만 보이고, 남자가 육아휴직 쓰면 평일에 아이 안고 있는 남자만 보이고......
현재 관심사에 따라 세상이 보이는 부분이 다르다.
그리고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극장 가서 영화 본다는 것은 꿈에도 불가능한 일.
그나마 케이블 TV로 늦게나마 쫓아갔던 영화도 반년 가까이 TV없이 살다보니 닭 쫓던 개보다 못하다. 그러던 차 이번 추석 연휴기간 고향에 있으면서 특선영화를 실컷 봤다. 예전 같으면 극장에서 다 봤을 영화들이었을텐데 이번에 정 반대다. 정말 하나도 본 것이 없다. 횡재한 거지 뭐.

그래서 본 영화들이 '도둑들' '댄싱 퀸' '마이 웨이' '베를린' 이다. 뭐, 영화평을 나불거리기엔 역부족이고... 그냥 기억에 남은 대사, 그것도 정확하지 않지만, 곱씹어 보고 싶다.

"도둑인데, 그럴 수 있지" -도둑들 중
"사람은 배신을 하거든" - 베를린 중

네 영화 모두 믿음과 배신으로 읽혔다. 인간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 그래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감하게 됐다는 도덕 교과서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왜' 배신하는가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믿음이 깨진 자의 아픔을 동감하고, 그것을 어떻게 표출하고 치유할 수 있을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역시 영화는 영화다. 믿음은 끝내 깨지지 않았고, 그것은 오해였을 뿐이다. 상처는 자연스레 아물고, 치유는 이미 이루어졌다. 오해가 아닌 자들은 영화관 밖에 서 있을 뿐이다. '사람은 배신한다'는 말을 곱씹으면서. '베를린'처럼 독약 주사도 총의 방아쇠도 당기지 못하면서. 그저 서 있을 뿐이다.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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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 또는 도덕성에 대한 고민은 예로부터 계속되어 왔다. 지금도 딱히 선천적 또는 후천적인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진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맹자나 루소의 성선설이나 순자, 마키아벨리, 홉스의 성악설을 비롯해 고자의 성무선악설 등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한 것들은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 간에 대부분 후천적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연쇄살인이나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 대한 평가 또는 판단은 사이코패스라는 용어를 만들어내며 유전성, 불변성을 그 특징으로 내세운다. 인격장애라는 것이 유전이라는 선천적 요소로 인한 것이며, 그것의 변화 가능성이 없다는 전제하에 우리의 인격도 어느 정도 유전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억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샴 쌍둥이나 일란성 쌍둥이도 그 성격에 현격한 차이를 지니는 경우가 있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가 지은 책 <개성의 탄생>에서는 왜 내가 유일한 나이며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리암 니슨이 주연한 영화 <언노운>은 <토탈 리콜>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언노운을 보기 전까진 토탈 리콜을 재패니메이션 <공각기동대>와 같이 나라는 정체성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언노운을 보면서 다른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라는 정체성 즉 기억이 바뀐다면 인격, 도덕성마저도 한꺼번에 바뀔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유전적 측면에서의 성격의 발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오로지 후천적 경험만이 셩격을 좌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영화가 직접적으로 이런 문제를 거론하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끝내 지울 수 없었던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스포일러 주의) 리암 니슨은 학술 대회 발표를 위해 아내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 온다. 하지만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는다. 몇일 후 기억을 되찾은 그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호텔을 찾는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리암 니슨이 자기라고 믿었던 남편이 버젓이 함께 있다. 누군가 자신의 행세를 하고 있다고 믿은 그는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결국 그가 테러를 저지르기 위해 자신의 행세를 하고 있었음을 알아챈다. 그리고 테러를 막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던 중 자신의 기억을 더욱 온전하게 되찾으며 자신 또한 테러범임을 자각한다. 가짜 행세를 하던 테러범은 자신이 실패했을 경우에 대비한 동료였던 것이다. 자, 그럼 지금부터가 문제다. 리암 니슨은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와 테러를 저질러야 하는가, 아니면 테러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진짜 자신이라 믿었던 선량한 학자로 돌아와 평화를 지켜내야 하는가. 영화는 후자를 택한다. 잔인함으로 가득했던 사람이 선량함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신한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이 이렇듯 후천적인 것이라면 사이코패스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함으로써 선량한 사람들로의 개조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비윤리적이며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는 있다. 영화 <클락워크 오렌지>에서는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성범죄자들에게 화학적 거세를 하는 것은 허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마무리를 지어보자. 예전엔 유전이라 하면 불변의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전의 발현성 여부는 환경과 연관되어져 있다. 유전이 모두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위치가 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문화, 교육 등을 통해 선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 사회의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디로 나아가고자 하는가. 인간성이라는 단어 마저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익이라는 거대한 그물에 갇혀 허우적 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나는 얼마만큼 지독하게 이기적인지를 자문해 볼 일이다. 자본주의라는 현대사회가 가르쳐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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