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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변해간 것은 무엇일까?

눈물이 많아지고, 웃음은 글쎄? 줄어든 것도 같고 오히려 늘어난 것도 같고

짝사랑이라는 것도 해본지가 오래니(포기라는 것을 빨리 할줄 아는 법을 배웠다고나 할까) 사랑이라는 감정은 메말라 가는 것 같기도 하고, 가슴 두근거림은 사라졌다 하지만 예쁜 여자들 보면 힐끔거리는 것은 오히려 더 많아진 것 같기도 하고......

깊은 잠을 잘 못드는 날이 많아지고, 주위에 친구들은 손으로 꼽게 됐으며...

 

영화 [고독이 몸부림칠 때]는 소위 원로배우들의 잔치다. 주현, 송재호, 선우용녀, 이무송 등등 우리가 익히 떠올리는 그들의 이미지들을 그대로 살려 영화의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어촌 마을에 갑자기 찾아든 할머니, 앙숙인 동네 친구, 노총각의 성정체성 등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얽히고 설킨 관계가 영화가 끝날 무렵 말끔히 풀려가는 과정이 상쾌하다. 선입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들에 대한 이미지가 영화를 이끌어가는 한 축이 되어준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인생을 더 잘 안다거나 희노애락을 잘 조절할 수 있는것 같지는 않다. 친구끼리 싸우고, 꿈 때문에 놀래거나, 사랑에 주저하는 모습들이 영락없는 10대와 똑같다. 연륜이라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손쉽게 만들어주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에게 희노애락이 있는한 인생은 끝나지 않는 기복을 보여줄 뿐이다.

그저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가면서 쉽게 놀라거나 쉽게 흥분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그저 그럴듯한 세상처럼 보일지라도 그 세상은 언제나 새롭기에 결코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세상이 호락호락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원로들의 깊은 연기를 보며 허허 웃듯이 그렇게 살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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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영(한여름)은 혹시 바수밀다(인도의 창녀-그녀와 자고나면 사람들은 모두 불교신자가 되었다고 전해짐)였는지도 모른다.

"그냥 섹스만 하면 너무 삭막하잖아"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원조교제라는 것을 하지만 아무런 죄의식-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몸뚱아리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팔겠다는데 누가 욕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이들을 이용해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람들을 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이야기 하기엔 몸이라는 것이 너무 성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물론 이때의 성스러움은 단순히 숫처녀/숫총각의 의미와 같은 정절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영혼을 담기만한 육체로서의 의미가 아니라는 점에서 성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성과 속의 구분이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하나의 제제로서 다가올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런 죄의식 자체는 없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 없이 얼굴가득 미소를 띠우며 즐겁게 행한다. 그에게 있어 원조교제는 단순히 성을 파는 것이 아니라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죽어갈때에도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 여진이 그녀의 미소를 이해하지 못하고 죄의식에 괴로워한다.

 

2. 가장의 자살

여진(곽지민)의 씻김굿(재영의 원조교제 상대였던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섹스를 나누고 다시 돈을 돌려주는)은 재영을 이해하게 만든다. 그가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지를... 하지만 그것이 재영이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재영이였든 여진이였든 그 대상자체가 어떤 특정인물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그들에겐 따뜻한 품이 그리웠을 뿐이다.

여진의 아버지 영기(이얼)는 딸의 행동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 씻김굿의 대상자들을 응징한다. 그 응징은 폭력으로 이루어진다. 힘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 있는 형사 영기는 폭력을 통해 딸을 구원하려 한다. 하지만 그 폭력은 외로운 한 가장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고2 딸을 둔 그 가장은 영기의 무단 가택침입과 뺨세례를 말없이 받아들이고 끝내 아파트에서 몸을 떨어뜨린다. 가족들 앞에서 그렇게 무참히도 쓰러져버린 가장이라는 멍에를 벗어버리는 순간이다. 이 여리디 여린 남자는 그 가장이라는 굴레가 얼마나 무거웠으면 여진을 찾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는 여진에게서 필경 구원을 얻었으리라. 분명 그는 바수밀다를 만났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바수밀다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바수밀다를 만난 사람들도 용서하지 않는다. 벗어나는 길은 그래서

자살이었다. 끝내 구원을 얻지 못하리니...

 

3. 혼자서라도 가라

눈물로 자신의 죄를 씻겨낸-난 그녀가 원조교제를 했다는 죄가 아니라 재영을 죄인으로 생각했었다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여진을 아버지는 강가로 데려간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동차를 혼자 운전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자신의 죄값을 치르러 떠난다. 그녀는 아버지를 쫓아 자동차를 몬다. 그러나 차는 웅덩이에 빠져 벗어나지 못한다. 인생은 그렇게 자동차를 모는 법을 배운뒤 혼자서 길을 떠나야 한다. 비록 그 길이 진흙탕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럴때 때론 누군가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기를,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기를 우리는 바란다. 자신을 구원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잠시 어깨만 빌려달라는 것이다. 그 가녀린 어깨가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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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영화에 원작이 있다면 분명 무협만화였을 것이다.  맹인검객의 단칼에 베어버리는 검술과 그에 맞설만한 떠돌이 무사의 칼솜씨, 그리고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자 게이샤로 본모습을 감춘 아이들 등 모두 만화속에서나 나올법한 캐릭터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끌고 가는 이야기 또한 만화와 무척 닮아있다.

하지만 이것이 기타노 다케시 영화임을 보여주는 트레이드 마크를 곳곳에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만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최근에 본 돌스는 이러한 트레이드 마크로부터 조금 벗어나 보인듯 하지만) 그리고 이런 특징이 할리우드의 영화와도 차별성을 갖는다. 무표정한 모습의 사람들. 아이들을 보면 갑자기 웃겨보겠다고 까꿍거리는 모습, 하지만 그 모습에 어른마냥 대하는 아이들. 평범한 사람들의 실수가 빚는 실소(정말 상상을 뛰어넘는다. 칼을 빼다 옆 사람을 베고, 잘못했다며 사과하면서 칼날이 주인을 향한다는 생각은 얼마나 귀여운(?) 그리고 섬뜩한(?) 상상인가) 등등.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장점은 흥겨움에 있다고 하겠다. 사람을 베면서 흩날리는 핏자국에 눈을 감고 싶기도 하겠지만- 이 피가 그래픽 처리됐음을 억지로(?) 보여주는것 같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탭댄스마냥 삶은 그렇게 즐거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농부들의 쟁기소리, 목수들의 망치소리 등에 맞춘 음악과 나막신으로 함께 춤추며 박자를 맞추는 모습에서, 우리의 일상 자체가 그들처럼 마치 음악을 연주하듯 살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자토이치처럼 악한들을 싸그리 없애주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들끼리 모여서 신나게 한번 탭댄스를 쳐본다는 상상만으로도 행복감이 밀려오지 않는가?

자, 잠시 모든 고민을 떨쳐버리고 신나게 탭댄스를 추자.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 소리도 그 탭댄스의 소리라 생각하며 모든 일상들이 그렇게 춤을 추도록 해보자. 물론 우리의 일상이 축제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단지 축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흥겹지 않은가? 내가 그 탭댄스의 박자를 못 맞추고 엇박자를 내더라도 누가 나에게 무어라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흥겨운 축제의 마당에서.


자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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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를 <친구>와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 그 소재의 비슷함과 사랑과 우정의 갈림길, 그리고 폭력...  추억을 팔아먹는다는 점에서 둘은 정말 닮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영화를 같은 부류로 취급하는 것은 반대다. 소설가 조정래씨가 말했듯이 소재의 반복에 딴지를 걸 필요는 없을법하다. 그것이 어떤 색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호 불호 또는 닮았다 다르다의 판단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말죽거리가 이전과는 다른 파격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사회와 조직이 주는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대항의 의미로서의 폭력이 이렇게 상쾌해본적은 없었던 것 같다.

권상우가 옥상에서 선도부와 그 무리들을 쌍절곤으로 후려칠 때 몇십년간 쌓여왔던 가슴속 체증이 싹 가시는듯했다. 교련 선생 앞에서 유리창을 깨뜨리며 내지르는 그 말 한마디는 정말 통쾌했다. 유리창을 깬다는 행위는 개인적으로 단순한 폭력의 상태 그 이상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싶다. 학교라는 감옥에서 그나마 숨을 쉴 수 있는 자유를 느끼려면 우리는 유리창을 열어제껴야 한다. 더욱 과격한 방법은 유리창을 없애버리는 것 아니겠는가? 난 얼마나 학창시절 이 유리창을 깨뜨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말죽거리의 최대 장점은 바로 이부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대한 폭력앞에서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폭력적일수밖에 없음을 영화는 감성적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비폭력을 외칠수 있겠지만 우리 마음속 솔직한 심정은 이소룡같은 힘을 길러 싸그리 박살내버리고 싶어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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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영화제목 외우기가 이다지도 힘든가?

아타나주아-빠른 사나이란 뜻의 이 사나이는 빙판을 벌거벗고 뛴다.

카메라는 이 사나이를 줄기차게 쫓아가고

신기하게도 우리나라의 검열을 통과해 모자이크도 컷팅도 없이

온전하게 우리의 시선에 와 박힌다.

그것은 결코 야하다는 성적 상상력을 주기보단

원시적 생명력을 느끼게 만든다.

원수, 사랑, 질투, 복수, 용서 등등

신화나 전설 민담 등에서 익히 들어온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그것이 새하얀 설원에서 펼쳐진다는 점에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국적인 느낌의 북극.

그곳에서도 생명의 박동은 힘차게 뛰고 있음을.

인자하지 못한 자연(도덕경의 한 구절)이 있기에

생명은 그다지도 위대해 보이는지도 모른다.

역경은 결코 우리를 제압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연의 품 속에 살기 위해 인자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았을때 자연은 생명마저도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용서란 바로 이 인자함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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