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황당해 보이는 설정과 어처구니없는 사건들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켤코 현실과 동떨어져있지는 않다. 결말의 궁금증이 영화를 끝까지 지켜보게 만들고, 주인공들의 행위가 메타포가 되어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2. 두 주인공은 오전엔 트럭으로 행상을 하지만, 오후에는 폭력조직의 뒷일을 처리해주는 사체처리일을 하고 있다. 어느날 자신들에게 일을 맡기던 폭력조직의 상무가 아이를 맡아달라고 한 후, 조직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면서 어이없게 유괴사건에 말려들게 된다.
3. "주어진 일에 감사하라" 창복 역을 맡은 유재명이 태인(유아인 분)에게 하는 말이다. 코로나19로 수많은 일들이 사라져버린 지금의 시기에 절묘하게 들어맞는 말로 보인다. 하지만 창복이 태인에게 건네 말인 즉슨 조직폭력배가 죽인 시체를 처리하는 일에 '근면 성실'하게 임하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론 영화 <소리도 없이>의 두 주인공의 직업과 일에 대한 사명감이 <분업>에 대한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사체처리라는 일 이외에도 어쩔수 없이 휘말리게 된 유괴사건도 아이를 돌보는 자, 부모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자, 흥정을 하는 자, 돈을 찾는 자가 따로 따로 있다.
인간은 수렵 채집 생활 때부터 분업을 해 왔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사냥에 나서고 여자는 아이를 돌보며 수렵을 주로 담당해 왔으니 말이다. 이 분업의 양상은 점점 잘게 쪼개어지더니 현대 자본주의에 들어와서는 최종 생산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분화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최종적으로 어떤 목적에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즉 영화 <소리도 없이>처럼 -물론 이렇게 노골적으로 못된 일임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 될 가능성을 언제든 품게 된 것이다.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의 생산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자각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그런 자각이 없으면 소리도 없이 우리는 타인의 목을 조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4. 유괴된 11세 소녀 초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부모가 몸값을 흥정한 탓이다. 초희의 부모는 3대 장손인 남동생이 집에 있기 때문에 초희가 집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초희의 부모는 몸값을 흥정해 낮출 수 있는데까지 낮추고자 한 것이다.
사람이 거래의 대상이 된 것은 오래다. 노예라는 제도는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존재했다. 아니, 문명의 발전은 노예를 기반으로 이루어져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인간은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왔고, 조금씩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듯이 보인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사람이 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단화가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그에 맞추어 몸값이 책정된다. 수단으로서의 인간에 맞추어 몸값이 정해지는 것이다. 마치 초희의 몸값이 흥정의 대상이 된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 흥정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평등은 찾아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