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의 관계술 - 허정과 무위로 속내를 위장하는 법 Wisdom Classic 5
김원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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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중국 고전의 바다에 빠져 헤어나질 못한 시기가 있었다. 한자가 쉬웠고 한문 해독이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천자문을 떼자 동몽선습, 그 다음 소학과 명심보감까지는 눈물의 맛을 본 덕분일 것이다. 그때 그랬더라면……. 경영학을 전공할 것이 아니라 한문학이나 중문학을 택했더라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대학 도서관에서 사서오경을 시작으로 무던히 읽어 내렸다. 그냥 끌렸다. 서양철학은 틈 없이 꽉 짜인 서술이 그저 어렵기만 하는데, 중국의 사상사는 여백으로 가득 차 있어 나의 느낌으로 채울 수 있어 좋았다. 이쯤에서 나의 성정이 정순하지 못함을 고백해야겠다. 지금 나이에 사서삼경을 읽는다면 아마도 삶의 길을 지적으로 풀어내는 중용과 대학에 가장 먼저 매료되었을 거라 본다만, 젊은 시절의 내겐 유학의 향기는 너무나 답답·갑갑·타분한 하기만 하였다. 자연스레 제자백가의 사상으로 마음이 돌아갔다. 그때에 한 눈에 반한 사상가가 한비자(韓非子)이다. 그의 정치이론은 매우 현실적이며 실천적으로 다가왔다. 경영자의 길을 꿈꾸던 그 때의 나에겐 리더로서 반드시 알아야할 지침이요 나침반과 같은 사상이었다.

 

2. 선거의 시즌이 본격적으로 도래하는 모양이다. 이 즈음이면 각종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온다. 이 중에는 제자백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제왕의 통치학과 2인자들의 처세에 관한 책들이 단연 눈길을 끌게 된다. 무엇보다 실제의 사례에서 오늘을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권분립에 의한 미국의 대통령제와는 달리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강력한 힘을 발하는 제왕적 대통령(위임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지금의 MB 대통령까지 막강한 파워로 자신의 의지대로 나라를 이끌어 갔다. 그런데 대부분 그 끝이 별로 였다. '민주'라는 이름을 누구나 다 존재의 이유로 들먹이지만 실제로는 약육강식의 지배 논리가 냉혹하게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사회에 발을 디딘 순간 우리는 직감한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추적자'가 인기 있었던 이유도 후흑한 리더들과 정치와 경제의 검은 커넥션이 그럴 수 있겠다는 개연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믿음이 상실한 시대에 과거의 대통령과 같은 분이 또 지도자가 된다면 마키아벨리나 한비자의 사상이 제격이다. 그러나 정말 민주적인 리더가 우리를 이끌게 된다면? 이런 마키아벨리나 한비자는 시대에 뒤떨어진, 똘마니 사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언제까지 불신과 독재의 리더에 맞는 사상을 받아들여야 할까? 생각할 게 많다.

 

3. 혼탁한 세상.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는 세상이라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배신도 해야 하고 때로는 잔인해져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이나, 법치(法)와 권세(勢) 및 술(術)로 신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한비자의 사상이 지금의 시대에도 정말 어울린다. 특히 한비자의 생각은 경쟁, 소유권, 이기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는 자본주의의 이념과 맞아 떨어지는 면이 많다. 한비자에 대해 서술한 내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한비는 법가사상의 3대 축이었던 상앙의 법(法, 군주가 제정한 성문법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법규), 신불해의 술(術, 수단을 말하는데 신하와 백성을 좌우하는 권술을 가리킴), 신도의 세(勢, 군주의 권세를 말하는데 군주에게 권세가 있어야만 법과 술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를 종합하여 '법치사상'을 집대성하였으며, 특히 스승인 순자에게서 배운 성악설을 바탕으로 철저히 이기적 존재인 인간세상을 선하게 만들려면 엄격한 법의 적용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군주는 이를 위해 수단과 도구로써 법, 술, 세를 잘 활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니 신자유주의시대의 강력한 제왕적 대통령제에서는 아직도 한비자의 법치사상에 리더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과연 인간 불신과 다양성을 무시하는 술수 중심의 통치술을 오늘에 인정할 수 있을련지…….

 

4. <한비자의 관계술>를 읽었다. '허정(虛靜)과 무위(無爲)로 속내를 위장하는 법'이란 부제에 이 책의 지향점이 숨어있는데, 그의 서문에 보면 기존의 한비자 관련 책들이 주로 권력론과 군주론을 다룬 측면이 강한 반면, 이 책은 인간관계론의 입장에서 다루고자 함을 밝히고 있다. 전체를 4장(나를 감추고 상대를 움직이는 술, 사람을 경계하며 조정하는 술, 가까운 곳부터 살피는 자기관리의 술, 현명한 불신으로 사람을 다루는 술)으로 나누어 춘추전국시대를 주축으로 시대를 종횡으로 넘나들면서 고전 속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일단 재미있고 흥미로운 사례에서 오늘을 유추할 수 있는 배움이 쏠쏠하다. 험한 경쟁의 사회에서 리더에게 찍히지 않고 모시려면, 또는 리더로서 부하에게 배신당하거나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꼭 읽어두어야 할 유용한 내용들이 많다는 거다. 인간불신의 철학, 비정한 리더십을 강조한 한비는 군주가 신하를 성악설의 관점에서 보아야만 한다고 했는데, 사실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틀린 현실이 아니지 않는가. 허정과 당위는 제나라 선왕이 당이자(唐易子)에게 새를 쏘아 잡는 일에 대해 묻는 고사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 말의 근본은 노자의 사상이다. 무위는 자연적인 상태에 맡기고 인위적인 것은 아무 것도 더하지 않음이요, 허는 진중함을 의미하며 반드시 정(靜)한 상태로 나타난다. 한비는 무위만이 사람 속을 엿볼 수 있는 수단이라 하였는데 이 책은 이런 허정과 무위에 초점을 맞추어 풀어나가고 있다.

 

군주가 신하를 조종하는 일곱 가지 기술(七術) : 신하들의 말을 사실인지 알아보는 것, 반드시 벌하여 위엄을 분명히 보이는 것, 상을 꼭 주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 일일이 말을 들어 부하를 살피는 것, 그럴 듯한 명령으로 속여 일을 시켜보는 것, 아는 것을 감추고 묻는 것, 거짓을 꾸미고 일을 뒤집는 것. 189쪽

 

5. 이 책은 엄청나게 많은 고사로 인해 정말 재미있게 읽히는 건 분명하지만, '소통'이 화두인 이 시대에 인간불신의 철학, 비정한 리더쉽을 강조하는 한비의 견해는 일견 한물 간 논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가만 보면 한비자에 호의적인 지인들이 많다. 냉엄한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는 한비의 논점이 이 시대에도 유효한 것은 부하의 충성심 따위가 얼마나 덧없는 것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상대의 충성에 기댈 것이 아니라 상대가 도저히 배신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카리스마의 사상이 야망의 남성들에겐 솔깃하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더불어 잘되는 리더가 되고자 하는 나에게 '허정과 무위로 나를 숨기는 것이 지략과 책략의 출발점'이라는 말은 이제 얕은 술수로만 여겨져 반감이 가지만, 가끔씩 동료들에게 뒤통수를 맞게 되면 한비자의 가르침이 깊이 와 닿는다. 부드러움과 민주적인 분위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이 책은 권위주의의 산물로 보일지 몰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경쟁의 사회에서는 무시하기 힘든 끌림이 있는 책이다. 특히 직계(Line)조직이 강한 직장인은 필독할만한 책이다. 신뢰보다 불신, 화합보다 경쟁, 정직과 성실 보다 권모술수가 앞서는 조직원은 정말 읽어야할 책이라고 본다. 나의 젊은 한 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게 했던 책 한비자. 세월이 흐를 만큼 흐른 오늘에 읽어도 괜찮기만 하다. 그런데 이번에 뽑히는 대통령은 어떤 유형의 리더일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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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줄에서 통찰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시詩적 생각법'
황인원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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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어렵다. 80년대의 서정적이면서도 함축적인 어감의 시는 언젠가 부터 보이지 않았다. 신춘문예의 당선작들도 난해하고 서걱거리는 글들로 지면을 채운다. 시가 꼭 서정적일 필요는 없지만 시인의 마음을 읽어낼 수가 없으니 시를 통해 느끼는 충만함과 감흥이 사라졌다. 자연스레 시집(詩集)은 멀어져 갔다. 90년대 이후 컴퓨터가 일상 속에 자리 잡으면서 시에 대한 관심은 더욱 희미해졌다. IT의 빠른 변화에 적응하느라 마음의 여유와 여백을 관조한다는 일은 점점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간간히 시집을 선물 받아 읽어보긴 했으나 두어 권을 빼고는 여전히 와 닿지 않았다. 간혹 서점에 들르면 관성에 의해 시집 코너에 발길을 옮겨보나 그다지 끌림은 없다. 이런 현상이 꼭 나만의 일은 아닌 모양이다. 한 인터넷서점의 조사에 의하면 자칭타칭 시인은 많아졌지만 시집 판매는 전체의 5%도 안된다고 한다. 시를 읽기보다는 씀으로써 위안을 느끼는 추세로 보는 분도 있다. 소수의 시인을 빼곤 자해하는 심리의 노출이나 사적 일기 수준에 머물다보니 '독자 없는 시인의 시대'라 한들 별로 틀린 말 같지 않다.


문자와 영상이 홍수처럼 떠도는 이 시대에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좋은 시는 인간의 감정과 여백미를 절제하고 농축한 사유의 결정체이기에, 인간을 인간답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본질의 문학이다. 그러기에 김연수 작가는 그의 책 <우리가 보낸 순간>에서 "하루 중 얼마간을 그런 시간으로 할애하면 내 인생은 약간 고귀해진다."고 하였으리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뭔가 임팩트가 약하다. 문학을 늘 가까이 하는 작가야 시를 읽음으로써 감정의 정화가 이루어지는 정도겠지만, 세파에 찌들리는 일상인에게 격조 높은 시는 자신의 본원적 문제에 귀착될 수 있다. 시 한 줄에서 찰나와 영겁을 오가는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정보화의 물결과 자본주의의 머니게임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기 힘든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때에 시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멀어진 영혼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된다. 그런데 여전히 시는 어렵고 난해하며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시인이라 하기 어렵다. 공감하는 독자가 없으면 그저 공허한 시인만의 '혼자 놀기'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좋은 시를 보고도 한 마음에 이해되지 않으면 바로 내치는 독자의 성급함도 문제라면 문제다.


《시 한 줄에서 통찰은 어떻게 시작되는가》라는 황인원 교수의 책은 조금 시각이 독특하다. 시를 통해 단순히 '감정의 대체적 정화'에 머물지 않고 경영학의 영역까지 그 활용적 접근을 시도한다. 작가의 변을 보니 대략 그 의도는 알겠는데 발상의 전환이 참 신선하다. 그는 독자들이 나이가 들수록 시를 안읽는 이유에 대해 국내 교육이 시의 표현법만 가르쳤지, '생각법'을 가르치지 않았다는데서 그 원인을 찾는다. 시는 상상력의 보고라고 할 수 있기에 고착화된 사고의 틀을 부수고 새로운 창의성을 얻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거다. 한마디로 "창조적 리더들은 시를 통한 생각법이 비즈니스 아이디어와 영감의 원천임을 안다"는 것인데 학문적 융합의 새로운 모델로 느껴지는 게 어찌 참신하지 않겠는가. 저자의 의도는 책의 목차에서 명료하게 나타난다. 기존의 시 감상법처럼 듣고(問) 보고(見), 깬(覺) 후, 한 단계 더 나아가 이를 잘 엮고(編) 행(動)하라는 거다. 시 한 줄을 다섯 가지 관점에서 나눠 관찰하고 생각하는 방법을 통해 통찰로 나아간다는 것은 '실용적 시 읽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새로운 생각의 힘을 시인들의 통찰법에서 찾고자 하는 시인의 생각이 사뭇 흥미롭다.


읽어나가다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만난다. 서정시인 박재삼 선생의 <천년의 바람>이다. 바람은 분다.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어제도 바람은 불었고 오늘도 바람은 분다. 그런데 '분다'는 행위가 천 년 전에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점을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246쪽). 작가는 시인의 남다른 관찰을 지적하며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것은 수없이 이뤄지는 연습을 통해 그 능력을 쌓는다고 설명한다. 바람은 천 년 전 장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지치지 않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플랫폼을 갖추지도 않았으면서 무작정 창조와 창의를 강조하며 단번에 통찰력을 키우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되묻는다. 그래서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다가 지쳐 포기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앞서 작가가 설명한 "관찰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며, 경청은 들리는 것을 듣는 게 아니라 들리지 않는 것까지 듣는 것이다(151쪽)"는 말이 반복하고 또 반복함에 의한 경지임을 자각하게 한다.
시를 일컬어 '뻔히 보임에도 보지 못하는 부분'을 드러내는 예술 장르(137쪽)라고 하는 의미를 알겠다. 이 책은 이렇게 시를 통해 독자들의 감각을 깨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여 지도록 '시적 생각법'을 이끌어 내고 있다. 창조와 혁신을 꿈꾸는 CEO들의 사고력과 기획력을 증진시킬련지는 모르겠으나 시에 대한 감상법을 키우기엔 제법 괜찮은 책이다.

 

천년의 바람 - 박재삼 -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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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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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다윗이 시온 요새를 점령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존재했다. 하지만 그곳은 도시가 아니라, 자그마한 산악 요새에 불과했다. 그 땅은 훗날 가나안, 유다, 유다왕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성지, 유대인들의 약속의 땅과 같은 수많은 이름을 갖게 된다. (53쪽)
예루살렘은 만인의 도시다. 예언자들과 교부들, 아브라함, 다윗왕, 예수 그리스도, 다윗왕, 그리고 무함마드가 이 도시의 초석을 놓았다. 아브라함의 종교들은 그곳에 태어났고, 심판의 날 세계가 종말을 맞이할 곳도 그곳이다. 예루살렘은 경전의 민족들에게 봉헌된 곳이며, 성서의 도시다. (10쪽)


예루살렘! 고교시절까지 나에게 예루살렘이란 도시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약속한 성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 당시 주일학교에서 이스라엘은 선한 하나님의 군사이며 팔레스타인을 포합한 아랍권은 악의 무리라는 설교를 여과 없이 들었기에 당연히 그러려니 했었다. 시편 77에 보면 '주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으니, 이스라엘과 아랍권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승리가 곧 하나님의 역사로 받아들여졌다. 대학에서 여러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이 아주 무서운 편견임을 깨달았다. 종교의 색채를 한 꺼풀만 벗겨내면 우리 사회가 미국의 관점에서 세계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어째서 이스라엘은 선하며 아랍권은 악이란 말인가? 이들의 싸움 이면에 존재하는 야훼의 유대·그리스도교와 알라의 이슬람교는 모두 '아브라함'이라는 동일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종교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선과 악의 나눔은 신의 의지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탐욕에 의한 것은 아닐련지…….


3천여년전 다윗왕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솔로몬 왕이 첫 성전을 건축한 이후 이스라엘 족속에겐 이곳이 영원한 노스탤지어가 되었겠지만, 약 2천여년전 로마제국에 의해 디아스포라(Diaspora)되고 난 이후 예루살렘은 이름도 알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바뀌었고, 이스라엘도 시리아-팔레스타인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으며, 이후 이 지역은 아랍권의 영향권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발원지이기도 하지만 이슬람교의 성지가 곳곳에 존재하는 성스러움의 상징적 도시가 되었다. 분명 영광만이 있어야할 도시이건만 현실은 전쟁과 파괴, 지배가 반복되는 통곡의 도시가 되고만 예루살렘.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몰락을 예언하며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다(마23:38, 눅19:44, 합2:11)"고 하셨는데, 로마군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몰락하면서 새로운 계시가 진실이라 믿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무함마드의 입장에서 성전의 파괴는 신이 유대인들에게서 축복을 거두어 이슬람에게 하사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었으니 비극의 씨앗은 결국 인간의 오도된 판단에 있다 하겠다.


예루살렘 전기 Jerusalem : The Biography》. 책 제목처럼 예루살렘 땅의 모든 역사를 들춰보는 장장 964쪽 짜리 책이다. 연대기적 서술이기는 하나 백과사전식 역사책 하고는 거리가 멀다. 이 도시를 둘러싼 갈등과 지배구조의 변화에 따라 유대교, 이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이란 종교적 키워드와, 십자군, 맘루크조, 오토만제국, 제국, 시온주의 등 역사 키워드 등 9부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는데, 좀 더 크게 보면 다윗, 예수, 십자군, 아랍-이스라엘 갈등의 시대를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객관적인 관점에서 있었던 사실만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독자를 이끌고 있다. 단순한 역사 나열이 아니라 시대의 삶과 지배욕망의 추이를 가감 없이 보여주기에 오히려 흥미로움이 더한다. 이스라엘이 '신과 씨름한 자'라는 뜻이라든가, 모세가 신의 본질을 물었을 때 '나는 있는 자다 I AM WHO I AM'라는 위엄서린 금기의 답변을 들어 YHWH(여기서 야훼가 되고 여호와가 된다)로 표기하되 그 이름 말하는 것을 금지하고 대신 아도나이(Adonai 주님) 또는 하심(HaShem 말할 수 없는 이름)등으로 사용한다고 하니 흥미롭기 짝이 없다. 마사다의 비극에 이르면 정말 유대인의 용기에 존경을 더하게 되며, 몽골군이 예루살렘까지 진출했다는 놀라운 사실과 이를 바이바르가 격퇴하였다는 이야기는 이슬람권 책에서 많이 읽었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최근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십자군이야기>가 제법 인기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읽어보질 않았다. 어느 정도 완성되어 가면 읽을 요량이다. 이 책에서는 십자군에 대해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결론적으로 십자군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 한 사람에게서 나온 생각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권력과 명성의 회복을 일생의 사명이라 여겨 1905년 클레르몽에서 유력자들과 일반 백성들을 모아놓고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묘교회를 해방시키자고 연설을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교황청을 부활시키기 위한 성전의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고 죄의 구속을 대가로 이교도 청산을 합리화 시켰다. 이는 무슬림 지하드를 그리스도교식으로 변형한 미증유의 방종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대한 대중적 숭배와 잘 들어맞았다. 종교적 광기의 시대, 기적의 증표 시대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도시였으며 최고의 성지인 동시에 천상의 왕국으로 여겨졌다(355쪽). 이 전쟁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쉽게 말해 십자군들은 전사인 동시에 순례자들로, 무엇보다 예루살렘의 성벽 위에서 구원을 얻을려는 신자들이었다. 언제나 종교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신의 뜻이다!"라고 외치지만 대학살의 이면은 백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인간의 탐욕인 것이다.


예루살렘에 가본 적이 없는 나로선 예루살렘! 하면 떠오르는 장소가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장소라는 이 벽은 이스라엘이 로마군에게 멸망되면서 유일하게 남은 성전의 일부라 한다. 2천년이 흘러도 그 때를 생각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유대인의 신앙적 성소이며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의 상징이지만,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는 바위 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에 속한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 통곡의 벽 광장을 지나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면 그 끝에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슬픔의 길)가 있다고 한다. 이 길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던 고난의 길이다. 영화 <벤허>에서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올라가는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이런 성스러운 곳이 오랜 분쟁으로 말 그대로 통곡과 갈등의 땅이 되었다는 것은 슬픈 인류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여 괜히 심란해 진다. 정말 '인간의 광기'말고는 어떻게 설명할 능력이 나에겐 없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영국이 독일 편에 선 터키를 견제하기 위해 당시 터키의 통치를 받고 있던 아랍인들을 부추겨 전쟁에 끌어들이는 내용을 알았었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국 건설을 약속하지만(1916년 맥마흔 서한), 이러한 약속을 시오니즘 운동을 펼치던 유태인에게도 똑같이 약속(1917년 밸푸어 선언)할 뿐만 아니라, 더욱 기막힌 것은 영국-프랑스가 밀약을 맺어(사이크스-피코 협약) 전쟁 후 팔레스타인을 둘이 나누어서 통치하자는 약속까지 해둔다. 약육강식의 세계 질서구도라지만 '위대한 아랍의 반란(Great Arab Revolt)'을 불러오는 냉소적인 배신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불행이 시작된다. 유대인들이 떠난 자리에서 1000년 넘게 터를 닦고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유대인의 자치지역' 건설. 전쟁은 필연적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서기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당한 이후 2000여년 만에 조국을 찾은 '독립전쟁' 이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몇천년 동안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유대인이 와서 자기 땅을 빼앗는 '침략전쟁' 아니겠는가. 우리의 우방이 미국이고 기독세력이 이 땅에 번성하고 있기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1,000년간 예루살렘은 배타적인 유대교 지역이었다. 400년간은 그리스도교 지역이었다. 1,300년간은 이슬람 지역이었다. 이들의 역사에서 필연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을까.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상황이다. 두 민족 간의 증오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지만 전혀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평화협정에 서명만 된다면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대통령 시몬 페레즈는 오슬로 협정 서문에서 "예루살렘은 두 국가의 수도가 될 것이며 아랍 교외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것, 유대교외는 이스라엘인들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매우 간단한 듯하지만 옛 도시의 성소가 문제다. 모두가 지신들의 성소들을 관할하려하니 쉽지 않은 난관이 있다. 그래서 국제위원회가 운영하는 비무장 상태의 바티칸처럼 관리하자는 안도 나와 있다. 현재 이스라엘의 강경 우파 네탄야후 수상이 이끄는 내각은 예루살렘분할에 반대할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에 대해서도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시각의 바탕은 자신감이다. 이스라엘의 국력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하다고 한다. 이럴 때 조금 양보하고 더불어 살려고 한다면 좋으련만,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도 예루살렘을 향한 끝없는 유대인의 욕망은 종내 성전산에서 적그리스도와 싸우는 아마겟돈 전쟁을 불러올 모양이다.


유대, 그리스도교에서는 천년왕국을 위한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땅에 더불어사는 평화가 왔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이 책이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이 예루살렘의 역사를 중립적이고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는데 동의한다. 예루살렘을 자신의 고향인 것처럼 생각하는 기독인들이나 중동의 화약고에 대한 저변 지식을 넓히고자 하는 이들은 이런 균형 잡힌 책 꼭 한번 읽어둘 필요가 있겠다.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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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오늘의 중국을 이끄는 힘 - 현대 중국의 중심에 선 2인자
이중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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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중국의 고대사에서 특출한 2인자(주공, 관중, 이사, 소하, 진평, 제갈량, 장거정)들을 소개한 책을 읽었다. 이들은 탁월한 지혜와 계략으로 개성 강한 군왕을 보좌하며 위대한 대업을 이룩해 낸 시대의 책사들이다. 모두 대단한 분들이지만 여기에 한 분만 더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꼽는다. 앞서 언급한 일곱 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도 남음이 있는 분이다. 50여 년 중국의 혁명에 헌신했고, 27년간 총리로 중국의 건국과 현대화에 이바지했던 저우언라이. 중국의 신화통신은 "마오(毛)가 없었으면 중국 공산혁명의 불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저우(周)가 없었다면 혁명은 재가 됐을 것이다"며 그를 애도했다. 만약 저우 총리가 없었다면? 나는 G2의 위상을 자랑하는 오늘의 중국은 없었을 거라고 단언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 : 사실에서 진리를 찾는다)와 온중구진(穩中求進 : 안정 속에서 전진한다) 정신을 실천하는 그가 있었기에 덩샤오핑(鄧小平)이 실용주의노선에 입각한 과감한 개방ㆍ개혁 조치를 단행할 수 있었고, 이후 장쩌민, 후진타오 등 실무현장경험이 풍부한 테크노크라트가 중국경제를 크게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지성과 통찰력, 인품과 정치적 수완까지 모두 갖춘 이런 최고의 리더가 중국 근현대사에 있었다는 것, 이념을 뛰어넘어 너무나 부럽다.


중국의 근현대사는 마오쩌둥-저우언라이-덩샤오핑으로 이어지는 건국 리더들의 이야기를 빼면 설명하기 힘들다. 흔히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길을 만든 것이 오늘의 중국혁명이라고 평한다. 마오쩌둥이 산이라면 저우언라이는 물이고, 덩샤오핑은 길이다. 마오는 중국 역사에 우뚝 솟은 산으로 그의 이념과 영도력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으며, 저우는 부드럽고 융통성 있는 정치로 강이 흐르듯 막힘이 없고, 덩은 중국을 부강한 나라로 인도하는 길과도 같은 인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마오가 지난 세기 확실하게 우뚝 솟은 존재임에는 틀림없지만 저우를 징검다리 삼아 덩샤오핑의 시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그에 대한 평가는 정말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은 문화혁명의 광풍에서 살아남은 저우언라이가 정치적 지향과 성격이 판이한 두 시대를 매개하는 역사적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냄으로써, 마오가 문화혁명으로 후퇴시킨 중국역사의 시계를 되돌려 개혁개방의 새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가히 강물처럼 유연한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공산혁명이란 배는 움직이지 않았을 거란 찬사를 들을만한 위대한 업적이다.


이번에 읽은 책은 『저우언라이, 오늘의 중국을 이끄는 힘』이다. 책의 띠지 카피를 보면 "지난 반세기, 중국은 마오쩌둥의 머릿속에 있었고, 저우언라이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중국의 히든 브레인 저우언라이, 세계를 넘보는 중국은 그의 손에서 시작되었다."라고 되어있다. 이전에 저우언라이 평전을 읽기도 했지만, 이 책도 저자 나름의 상당한 연구와 감각이 괜찮게 다가왔다. 중국공산당 통설에 의한 일반적인 업적이나 위대함을 부각시키기보다는 저우와 관련된 인물들의 행동양식이나 행태, 특성에 주목하여 풀어나가는 것이 과장되지 않고 가깝게 느껴졌다. 연대기를 기본으로 사안에 중점을 두어 서술해 나가는데 긴 서문이 인상적 이었다.

1장은 운명의 파트너 마오쩌둥과의 만남과 마오를 선택하고 추대한 인과(因果), 덩샤오핑을 통해 그가 그려낸 중국의 미래, 그의 죽음 등 개괄적 감상이 적혀있다. 2장은 코뮤니스트로서의 저우언라이를 살펴보는데, 시안사변으로 억류된 장제스를 만나 항일 국공합작을 이뤄내는 대목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손권과 담판, 조조군에 맞서 적벽대전을 치루는 이야기와 싱크로 100%니 언제 읽어도 흥미롭기만 하다. 3장은 중국 외교술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저우의 외교 업적을 조명하고 있다. 장제스와 마오의 충칭회담, 스탈린과의 모스크바 담판, 미국과의 핑퐁외교와 관련하여 저우의 기민한 외교술과 화술이 돋보인다. 이 장의 내용 중 중국 인공위성과 미사일의 대부인 첸쉐선(錢學森)박사와 중국 최초의 스텔스 전투기 젠-20을 만드는데 기여한 스창쉬(師昌緖)박사의 귀국에 저우가 관여한 대목은 박대통령 시절의 과학자 초빙과 오버랩 되었다.


4장의 문화혁명 10년. 이 광폭한 기간에 저우는 비서나 보좌관도 거느리지 못한 채 혼자서 시대의 역풍에 맞서야 했다. 이 기간 그의 좌우명이 "국궁진췌(鞠躬盡?) 사이후이(死而後已)"였다고 한다. 이 말은 제갈량의 후출사표(後出師表)가 원전으로 "삼가 공경스럽게 저의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할지니, 다만 죽은 뒤에나 그칠 따름입니다"라는 뜻이다. 목숨이 붙어있는한 신명을 다해 인민을 위하겠다는 비통한 절규에서 그의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이 기간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총리가 당직실에 두 명의 간사만 두고 24시간 일에 매달려야 했던 것이 문화혁명이었다. 저우는 인내의 달인이기도 했지만 시기포착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장칭(江靑 마오의 부인)과 4인방의 견제를 뚫고 덩샤오핑을 부총리로 복직시킴으로써 저우의 '4개 현대화 목표'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또한 문혁의 회오리 속에서도 미국대통령을 불러들여 대미 관계를 풀었고, 유엔에도 가입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무렵 저우는 소변에 비정상적 적혈구가 나타나면서 건강이 안좋아졌고, 마오쩌둥이 죽기 8개월 전인 1976년에 세상을 떴다.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몸보다 조국의 운명과 당의 미래를 걱정했던 저우언라이,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5장 '중국인 저우언라이, 혁명가 저우언라이'편은 그의 성장과정을 조명하고 있다. 이 장에서 "양탄일성과 저우언라이"에 대한 부분이 읽을 꺼리였다. '양탄'은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이며 '일성'은 미사일을 의미한다. 문혁으로 지식인들이 죽임을 당할 때 저우는 '보호 명단'을 만들어 한 무리의 과학자들을 보호한다. 이 중 로켓 전문가 투서우어(屠守鍔)는 중국 첫 대륙간탄도탄과 '장정-2호'로켓의 설계사이며 뒷날 유도탄 '비어 飛魚'를 성공시킨 사람이다. 중국의 양탄일성 개발에 핵심역할을 했던 녜룽전(??臻)은 이 모든 공을 저우언라이에게 돌리고 있다. 핵무기 개발을 넘어서서 항공우주산업 분야까지 중국의 군사적 약진 중심에 저우언라이 총리의 방향제시와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는 대목을 읽노라니 "나는 공산주의자이기 전에 중국인이다"라고 말했던 그의 애국충성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


2011년 6월,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저우의 <육무 六無 : 여섯 가지가 없음>를 기사화 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사불유회(死不留灰) : 저우 총리는 죽어 뼛가루도 남기지 않았다. 둘째, 생이무후(生而無後) : 생전에 후손도 두지 않았다. 셋째, 관이부현(官而不顯) : 관직에 있으면서 스스로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넷째, 당이불사(黨而不私) : 당 사업을 하면서 사조직을 꾸리지 않았다. 다섯째, 노이무원(勞而無怨) : 고생을 하면서도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끝으로 사불유언(死不留言) : 유언을 남기지 않아 정치풍파를 막았다는 내용인데 이런 육무(六無)의 지도자를 가졌기에 중국은 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로 이어지면서 강력한 중국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공산당 창립 90주년 기념식에서 후진타오는 중국 공산당의 업적으로 신민주주의혁명, 사회주의 혁명, 개혁개방을 들었는데, 저우는 신민주주의혁명의 1등 전도사이자 중국사회주의 혁명의 1등 공신이다. 개혁개방 정책도 그의 유훈이라고 보면 공산중국 건설에 있어 사실상의 주역이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언론들은 그가 숨졌을 때 부부의 저축액이 5,100위안(한화 65만원)이 전부였다며 청빈한 무산자의 삶을 칭송했다.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인물로 중국의 독립과 번영, 소박하게는 '인민'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불굴의 열정 그리고 애국심, 지분보다는 역할을, 권력보다는 임무를 더 중요시 여긴 저우언라이.


중국의 현대사에서 극과 극의 대립과 협상, 그 현장에 늘 그가 있었다. 그는 설득과 협력, 단합과 화해를 지향하는 스타일이었다(83쪽). 역사학자인 화이트는 그를 금세기 공산주의운동이 낳은 가장 탁월하면서 가장 비정한 인물이며, 그러면서도 따뜻한 가슴, 거역하기 힘든 인간미,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예의바른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평했다. 어쨌거나 그가 그렸던 밑그림을 덩샤오핑이 다듬고 빛깔을 얹혀 도광양회(韜光養晦)와 대국굴기(大國堀起)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오늘의 G2 중국을 만들었다. 인격과 품격, 격조와 역사적 업적, 이 모든 것을 두루 갖춘 저우언라이. 중국 인민은 저우가 있어 더 없는 행운이요 축복이었다고 한다.
저우를 통해 우리의 3부요인을 들여다 보면 어떠한가? 다 그런건 아니지만 국민 보기를 우습게 여기는 듯한, 자기영달만을 위해 위만 바라보는 듯한 불편한 느낌이 먼저 든다. 우리 정치는 안정과 변화 사이에서 많이 흔들리고 있다. 그 누가 균형과 조화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갈 것인가? 과연 우리에겐 겸허하고 겸손하게 간절히 다가오는 리더가 있기나 한가? 저우와 같은 지도자의 덕목을 갖춘 지도자가 있는지 당최 난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책을 우리의 학생들이 많이 읽었으면 한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 어떠한 마음가짐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앞으로 저우언라이와 같은 인재들이 많이 나타나 '그가 있어 행복했다'는 찬사를 보내는 날이 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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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트림 머니 - 전 세계 부를 쥐고 흔드는 위험한 괴물
사트야지트 다스 지음, 이진원 옮김 / 알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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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세계경제를 뒤흔든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Sub-prime Mortgage Loan) 사태와 리먼 브라더스 파산의 여파는 아직 진행형이다. 최근의 남유럽 국가(PIIGS :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남부의 돼지들이란 뜻) 재정 위기도 서브프라임 사태의 연장선상에서 민간의 부채가 공공으로 이전되며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혹자들은 이런 일련의 현상을 두고 자본주의의 종말(Demise of capitalism)이라고도 한다. 경각성 발언이었겠지만 프리드만의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3.0'의 위기임에는 틀림없다. 지난 해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거센 외침도 바로 지금까지의 탐욕과 부패에 찌든 카지노 자본주의(casino capitalism)에 대한 개혁 요구의 목소리였다. 이런 위기에 대한 반성으로 ‘자본주의 4.0’(Capitalism 4.0)이라하여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 즉 앞으로는 빈곤층을 보듬는 따뜻한 자본주의로 그 패러다임 진화를 모색하고 있다니 또 한 번 속아보는 거다.


서브프라임 문제는 경제학자들에겐 살판 난 기회이기도 했다. 비록 금융 위기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지만 이를 진단분석하고 대안을 내놓는 것 또한 학자들의 몫이니 여러 책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내가 읽은 대부분 책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문제의 원인은 자본주의의 탐욕과 모럴해저드(Moral Hazard)이다. High Risk, High Return! 고위험 고수익! 선진금융기법이란 미명아래 위험요소를 모두 제거했다는 착각. 위험을 분산하면 분산할수록 제로에 가까워진다는 이상한 논리로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단기고수익 파생상품. 위험 변동성이 큰데도 높은 수익률을 노리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돈(헤지펀드). 자본주의의 근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은 탐욕으로 인해 거품을 만들어내고 그 거품의 끝은 실체 없는 추락이다. 그런데 많은 책들이 이러한 위기의 원인을 현상에 입각해 명쾌하게 다루고 있으나, 보다 근원적으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깔끔하게 설명한 책은 보질 못했다.


이번에 읽은 <익스트림 머니 Extreme Money>도 여느 책과 같이 '서브프라임'으로 풀어나간다. 서브프라임! 이 단어는 불행한 개인들에게 제공되는 믿기 힘들 정도로 낮은 이자의 모기지 대출을 뜻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길거리로 나앉게 만든 은행과 브로커들의 기만적이면서 냉소적인 영업 관행의 동의어(7쪽)이다. 저자는 우리가 돈을 수단으로 하는 놀랍고 위험한 게임들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하며, 익스트림 머니라는 단어로 그 위험을 경고 _ 익스트림 머니는 핵심이 사라진 현실이다. 즉 이는 실재하는 것들의 금전적인 그림자다 _ 한다. 이 책의 서문 '휴브리스(Hubris)'는 그리스어로 신의 영역까지 침범할 정도의 오만을 뜻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휴브리스는 신이나 법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행동을 묘사할 때 쓰이는데, 신의 보복(Nemesis)을 불러와 인간들의 필연적인 파멸로 끝난다. 저자는 인류가 사회와 경제를 잘 돌아가게 만드는 윤활유로서의 돈을 그 자체로 중요한 것으로 오인(돈의 숭배)함으로써 현대판 휴브리스가 재연되고 있다고 서문을 열어나간다.


인류가 창조한 돈과 금융. 1부의 <신뢰>편은 돈의 본질에 대해 다루고 있다. 20세기의 인류는 "돈은 우리 시대의 하느님이다(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말)"며 돈의 신봉자들이 되었다. 개인의 삶은 금융화(화폐화)하였고, 이는 조작화(Manipulation)와 그 형제격인 착취화(Exploitations)가 생길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비와 부를 추구하고, 금융인들은 금융공학이란 이름 아래 헤지펀드, 사모펀드, 새로운 파생상품 및 구조화 투자상품 등등, 돈에 대한 사회적 개념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새로운 프로젝트를 개발해 나간다. 이제 돈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었다. 세계적인 돈의 흐름은 극단적 수준까지 레버리지를 확대한 전통적인 은행들의 존립 기반이 되었다. 돈이 전 세계로 흘러들어가 자산 가치를 끌어올림으로써 부에 대한 착시와 더불어 개인의 삶과 기업, 도시와 전체 국가들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지만, 금융위기가 터지자 지금까지 경제, 비즈니스,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는 돈의 힘이 크게 고평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똑같은 양의 돈이 여기저기 빠르게 움직였을 뿐 가용 가능한 돈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작았던 것이다.


사실 1부까지는 짤막한 단상들이 이어져 그저 그랬다. 2부의 <시장 근본주의>에 접어들면서 보다 경제적 관점으로 파고든다. 1980년대 후반이 되자 시카고학파의 신자유주의가 경제사상의 주류가 되고, 주식보다 채권을 더 저렴하게 발행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레버리지와 사모펀드(LBO Leveraged Buyouts) 거래가 확대된다. 여기부터는 경제관련 상식이 없으면 조금 지겹고 머리 아픈 내용들이 이어지는데, 경제에 관련 있는 독자라면 정신이 맑아지면서 집중하게 될 것이다. 부채를 더 많은 부채로 자르고 써는데 필요한 요리법이라 할 수 있는 증권화! 증권화의 열쇠는 여러 투자자들 사이에서 위험을 분산시키는 능력이다. 이런 과정에서 각종 파생상품이 생겨나지만 알고 보면 투자자에게 위험이나 레버리지를 속이는 현란한 몸치장에 불과할 뿐이다. 종국에는 금융에 종사하는 그들 자신마저 속아 넘어가게 되고 결국 금융위기라는 이름으로 그 정체를 드러낸다. 파생상품의 위험은 이미 우리나라 기업들도 경험한 바 있다. 2008년, 환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파생금융상품 키코(KIKO, Knock-In Knock-Out) 통화옵션계약을 했던 중소기업들이 흑자도산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것이다.


부채를 사용해 높은 성장률을 달성한 신경제가 오래갈리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품이 터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누구도 대비하지 않았다. 부채 시대의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대완화(Great Moderation, 안정적 성장)와 골디락스 경제(Goldilocks Economy, 고성장에도 불구하고 물가 상승압력이 없는 상태)라는 가짜 즐거움이 무너진 것이 금융위기였던 것이다. 동시에 탈출하려던 트레이더들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빌린 돈으로 산 똑같은 증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유동성은 한 순간에 사라졌고 공포에 질린 금융시장의 위기는 빠르게 실물경제로 확산되어 세계경제 위기로 이어졌다. 세계 중앙은행과 정부는 보톡스 경제학을 받아들여 엄청난 양의 유동성을 투입하여 위기가 불황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데는 일단 성공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미국의 모기지 대출시장은 여전히 불안하고, 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 등 '클럽메드(Club Med)'의 채무위기는 현재 진행형이며, 중국 경제 역시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경착륙 우려가 지속되고 있다. 저자의 결론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위험한 우상에 대한 성찰은 계속돼야 한다"는 것과, "익스트림 머니는 경제를 오염 시킨다"는 것이다.


이 책은 돈을 창조한 인간이 이제 돈의 지배를 받게 된 본질을 꿰뚫고 있다. 인간의 탐욕이 어떻게 금융시스템에 녹아들었는지, 위험한 머니게임이 어떻게 투자자를 농락하는지, 현대사회와 금융에 얽힌 이야기를 전문가로서의 혜안과 풍부한 경험으로 풀어놓는다. 조금은 익숙하지 않는 소테마식 편집이 읽는 처음 읽을땐 어색했지만 읽을수록 저자의 초고수의 통찰력에 매료되었다. 다만,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의 대안에 대해선 언급이 미약하다. 이 분야는 또 다른 관점이 필요하겠지. 사실 자본주의 4.0의 개념은 대략 잡힌다. 하지만 그 방법론에서 우파와 좌파의 해법은 각각 길을 달리한다. 우파는 시장에 맡기자(하이에크 자유주의)고 하고 좌파는 국가에 그 힘을 실어줘야 한다(케인지언 사민주의)고 주장한다. 어떤 방법이던 시장의 탐욕을 견제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인간의 탐욕과 금융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잣대가 될 수 있는 역작 임에 틀림없다. 비 경제인에겐 어렵고 재미없는 책이겠지만, 이쪽 계통의 독자에겐 또 다른 개념의 금융비판서로 필독을 권해본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 중에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주식과 관련해 조언한 내용과 조금 상징적인 다른 내용 하나를 소개하면서 마무리를 해야겠다.

 

10월은 주식에 투자하기에 특별히 위험한 달 중의 하나다. 다른 위험한 달들로는 7월, 1월, 9월, 4월, 11월, 5월, 3월, 6월, 12월, 8월, 그리고 2월이 있다. (26쪽)

 

한 투자자가 LTCM은 어떻게 낮은 위험을 가지고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지를 묻자 숄즈는 "당신 같은 바보들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거칠게 말했다.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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