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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매듭을 푸는 법 - 뒤엉킨 마음을 풀어야 삶도 풀린다
이소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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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엉킨 마음을 풀어야 삶도 풀린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일이 정작 자신의 일이 되면 쉽지 않은 일이 된다.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할 지 그저 헤매기만 할 뿐이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이지싶다. 살다보면 정말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공허감이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 슬며시 고개를 들 때가 있다. 우울과 슬픔, 분노와 좌절, 시기와 질투가 한 번 마음을 헤집고 가면 어느새 자신감은 사라지고 한없이 초라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결연해야 할 순간에 망설이게 되고, 나아가야 할 순간에 도망가게 되며, 외쳐야 할 순간에 침묵하게 되고, 떠나야 할 관계에 연연하게 된다. 허둥거리는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비극이다. 허둥거릴수록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듯 불안은 증폭되고 어긋난 관계는 더더욱 골이 깊어질 뿐이다. 사는 게 힘이 든다. 내적 고통은 자신의 환멸을 가져와 세상에서 자신을 로그아웃시키기도 한다. 결국 뒤엉킨 마음을 풀려면 마음 속 자신과 마주해야 할 것 같다. 용기를 내어 아프고 시린 '마음의 매듭'을 찾아 그 꼬여버린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매듭을 풀 수 있다. 마음 속 불안과 통증이 주는 소중한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매듭을 푸는 시작이다.

 

여러 가지 감정 중에서 가장 크게 마음을 흔드는 것은 불안이다. 현대 사회의 다변화와 다양화 속에서 내면의 불안이 더욱 깊어지면서, 흔들리는 마음의 해결책을 밖에서 찾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서 숨은 결정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마음 속 불안이다. (181쪽)

 

외로움의 덫은 마음 속 비밀과 수치심에서 나온다(40쪽). 마음을 들여다보면 불안에 맞닿아 있는 숨겨진 내적 갈등, 억압된 욕망, 현실에 대해 불완전한 판단을 내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울이나 불안, 공포 등의 심리적인 증상들은 마음 저편, 무의식이라고 하는 심리 영역에서 우리의 의식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이다. 칼 융은 이처럼 가라앉아 숨겨진 마음의 부분, 열등한 자신의 또 다른 인격 부분을 그림자라고 설명하면서 이를 '자기로부터의 소외'로 파악한다. 우리가 삶의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지키고자 하는 사회적 얼굴인 자신의 '페르소나'는 온전히 자신을 이루고 있는 전체가 아닌, 사회적인 적응 과정에서 필요한 일부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내적 성숙과 충만이 아닌 외적 기준을 향한 몸부림은 진정한 자기가 소외되는 불균형 상태가 되어버린다. 불편하고 불안하다. 이런 마음 속 불안에는 모두 이름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자기 내면을 향한 성찰의 요구다(208쪽). 문득 알 수 없는 불안으로 마음 한 가운데서 스산한 바람이 불 때, 어쩌면 내면의 자기 자신을 향한 진중한 두드림이 함께 들리지는 않는지 귀 기울여 보자는 책이 있으니 바로 이소영 정신과 전문의의 심리처방전 <마음의 매듭을 푸는 법>이다.

 

밝은 햇빛 아래에 나서면, 우리 모두의 뒤편에는 각자의 긴 그림자가 생긴다. 앞을 보고 있을 때에는 자신의 그림자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본래 자신의 일부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숨겨진 열등한 인격의 부분들이 융이 말한 심리적 의미의 그림자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부분들이 의식에서 배제되어 무의식에 존재하게 된다. 이 그림자는 비록 앞에 나서지는 않는 것 같지만, 무의식에 존재하며 현실 세계, 의식적인 자신의 다른 뒷면을 이룬다.
그림자는 무의식에 존재하므로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림자는 외부에 투사되어 바깥세상 다른 누군가에게서 그 존재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대상에게 투사된 그림자를 향해 부정적인 감장을 쏟아 붓게 된다.(46쪽)

 

대인관계에는 서로의 그림자가 뒤엉켜 있다. 불안한 세상, 불안한 관계. 그 속에는 각자의 마음속 그림자가 오롯이 투사되어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의 그림자는 어디로 향하는가?
책은 네 테마(마음 속 엉킨 관계를 풀다, 마음 속 맺힌 사랑을 풀다, 알 수 없는 내 마음을 풀다, 마음속 복잡한 세상의 매듭을 풀다)로 나누어 매듭풀기를 시도한다. 1장의 출발은 시기심이다. 오만, 질투, 탐욕이 사람을 마음을 태워버리는 세 가지 불꽃이라 했던가. 질투와 질시는 스스로 생각해도 참 밉살스러운, 내 자신도 자유롭지 못한 부정적인 감정이다. 시기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마주해야할 진실은 무얼까? 애써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정서적 기억의 파편, 한 번 깊이 박혀버린 트라우마도 알 수없는 불안과 분노의 원인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자신의 분노와 두려움에 마주할 수 있어야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야만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좀 더 진실한 모습으로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충분한 자기성찰을 통해 우선 자신을 돌보며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치유의 과정, 즉 자신을 용서가 우선임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배신의 굴레를 벗고, 자신의 삶 속으로 걸어가라. 거기에서 진정한 용서를 만나게 된다(66쪽)."

 

2장의 마음 속 맺힌 사랑에서 떠올린 것은 '건축학 개론'이다. 대학을 같이 나온 친구가 이 영화를 보라고 했지만 나는 외면했다. 대충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괜히 아련한 그리움에 눈이 촉촉해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워서……. 그 시절을 떠올리면 참으로 서툴고 연약하고 부끄러움이며, 미안하고도 고마운 첫사랑이다. 때론 보고 싶기도 하지만 일부러 찾아 만나야 할 이유는 없다. 그 기억과 존재만으로 첫사랑의 의미는 우리 삶에서 충분하다. 2장은 이렇게 사랑으로 인한 갈등과 안타까운 매듭을 풀려고 한다. 첫사랑, 불안한 사랑, 사랑이 어려운 사람들 등등 사랑에 집착하는 마음 속 함정에 빠진 이들에게 사랑의 참된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사랑이란 열망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이다(Octavio Paz)"지만, 사실 사랑에는 정답이 없다. 다만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자신이 자기를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오래 남을 뿐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을 안고 있는 젊은이들은 불안을 줄여 줄 것 같은 외적 조건들을 얻는데 더 열을 올린다. 그러다보면 정작 자신의 선택을 좌우하는 마음 속 불안의 실체를 알아채지 못한다. 또한 그 불안이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삶의 문제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불안에 직면하여 그 속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도 깨달을 겨를이 없다.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마음 속 불안을 없애 줄 완벽한 조건은 없다. 융은 한 사람이 갖는 인생의 의미는 그 사람 안에 있다고 했다. 인생의 모든 열쇠는 결국 자기 속에 있는 것이다. "마음이 활동을 쉴 때 달이 뜨고 바람이 불어오니, 인간세상이 반드시 고통의 바다인 것은 아니다(채근담)". 비록 불안을 전염시키는 사회이지만 그 속에서 나만의 지혜로운 필터가 필요하다. 힘들지만 살아있는 감정과 마주하여 가장 초라한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 세상으로 부터 로그아웃하여 내 마음속으로 로그인이 이루어지는 시간, 그 속에서 삶은 균형을 찾는다. 청춘을 지나온 사람들은 '불안하고 괴롭지 않은 20대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과 갈등은 불가피한 요소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불안 안에는 가능성의 희망도 함께 있음을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 생각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생략)……. 그렇다. 이 세상 상처 없는 사람 그 누가 있으랴. 하지만 우리나라는 OECD 평균자살률보다 148% 높은 '자살 공화국'이라 불리기도 한다. 불안에 사로잡힌 시선은 어느 새 어떤 희망이나 가능성도 부정하는 심리상태에 이르고, 그 절망의 끝에서 극단적 회피를 택하는 것이다. 자살의 비극은 절망 안의 불안, 단절의 그림자 속에서 일어난다. 불안과 우울함에 빠진 이에게 진심어린 관심과 진지한 대화로 다가간다면 그들이 삶에 대한 새로운 변화를 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이 책은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자기의 내면에서 생명의 싹을 들여다보게 한다. 저자는 전문의답게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현상을 인식하게 하여 무의식 속에 숨은 인생의 열쇠를 찾도록 유도한다. 내용 하나하나에 어떤 따스한 진정성이 전해져 공감을 참 많이 했다. 좋은 책이다. 고백컨데, 이 리뷰의 대부분은 이 책에 나오는 구절을 나름대로 재배열하여 느낌을 정리하였다. 그만큼 기억할만한, 밑줄 그어야할 대목이 많았다. 괜찮은, 느낌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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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
허허당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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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즈음인가? 모 신문에 허허당(虛虛堂)스님의 '백만동자' 그림 이야기가 기사화되었지요. 그 때 소개된 그림이 '화엄법계도'와 '생명의 축제'라는 그림이었는데, 전 '생명의 축제'에 푸욱~ 빠졌더랬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서핑을 통해 스님에 대해 알아보았고 스님의 그림세계에 조금은 알게되었습니다. 스님은 1978년 문득 깨달은 바 있어 붓을 잡기 시작하여 1983년 지리산 벽송사 방장선원에서 선수행과 함께 본격적인 선화작업을 하였고, 그 이듬 해 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꾸준히 선화전을 열고 계신다더군요. 그런데 이번에 예담에서 스님의 시화를 엮은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란 책이 나왔길래 손에 잡았습니다.


일단 그림에 대해 느낀 점을 보자면, 역시 '생명 축제'란 제목은 전부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생명 축제 시(始), 생명의 축제 자(慈)!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단풍진 가을 숲에 스린 생명의 기운이 도심의 허무로 가득찬 가슴을 빠르게 채웁니다. 왜 이 시리즈에 제가 공명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화엄법계도 또한 놀랍기만 합니다. 마치 점묘화나 그 옛날 타자기로 찍어낸 그래픽 같은 느낌도 나지만 유심히 바라보면 모두 동자상입니다. 백만동자가 뭔지 바로 알게 됩니다. 그저 감탄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동자로 가득찬 소녀나 아이들은 어째 두렵기도 합니다. 긴 목이 주는 시원함 보다는 기이함에 대한 두려움이 먼저 드는군요. 배경이 자연이면 수용되면서도 동자를 품은 그들은 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얼른 그 마음을 알아채기 힘듭니다.

 

생명의 축제 자(慈)

 생명 축제 시(始)

 

허허당(虛虛堂). 그 의미를 찾아보니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허허당, 비고 빈 집. 비워 사는 길, 부처도 진리도 일체 모든 것, 진리는 결코 내가 찾는다고 해서 찾아 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워 버리면 스스로 찾아온다. 드러난다. 텅 비어있으면 우주 만상이 이것이 진리다. 하고 내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어느 날 문득 깨달음에 스님 스스로 비워 사는 삶을 선택하면서 생긴 이름이라는 군요. 허허(이건 그냥 제가 웃는 의성어 입니다)~ ^^* 스님의 글(시라고 해야 하나요?)은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 <찾지 마라, 잃기 쉽다> <지금 그대는 무얼하고 노는가> <마음 감옥에서 나오니 눈이 떠지네> <마음이 헛헛할 때 허허하기> 이렇게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글이 첫 마당의 제목입니다. "불이 나면 꺼질 일만 남고 / 상처가 나면 아물 일만 남는다 /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 //"이렇게 단순한 듯한 삶의 깨달음이 스님의 감성으로 풀어져 나옵니다. 허황한 말의 유희가 아니라 자유로운 무애(無碍)의 삶에서 울려나오는 스님의 글인지라 꾸밈없이 순박한 진리가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쥐와 사자가 있군요. "항상 약자의 편에서 용기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 / 그 모습은 포효하는 사자와 같고 / 아무리 강자의 편에서 사자와 같이 어슬렁거려도 / 그 꼬라지는 쥐 꼬라지다. //" 참 명료하게 인간 속을 들여다봅니다. 말도 자란다는 글도 명쾌하게 묻습니다. "말도 자라고 글도 자란다 / 어떤 말은 한 송이 꽃처럼 자라고 / 어떤 글은 가시덤불처럼 자란다 / 오늘 그대가 한 말과 글은 / 어떤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가 //"... 불교에서 가장 큰 죄는 말로서 말을 함부로 하는 죄(口業)이라했던가요? 그래서 스님은 또 말합니다. "간혹 말을 하다 멈추는 순간 / 그 순간 마음이 깬다 / 언어도 생명인 까닭 / 말도 쉬어야 한다 // 묵언으로 마음을 보라는 그겠지요. 어째 글이 뒤로 넘어올수록 더 마음이 공감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러고 보니 글 제목의 의미가 조금은 눈에 보입니다. 사람의 삶에 관한 성찰을 전해주는 거군요. "지금 그대는 어쩌면 홀로 외롭고 쓸쓸한 길을 가며 / 혹 하늘을 보거나 먼 산을 바라보며 / 이유없는 존재의 슬픔과 고독을 느낄 수도 있으리 / 그러나 이 슬픔과 고독이야말로 참으로 그대가 / 인간다운 인간임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 그렇군요. 마음이 헛헛할 때 그냥 허허하면 되는거였군요.

 

(마왕이 되고싶은 아이, 비천상2)

부드러운 그림은 아니었지만, 글에는 꾸밈이 없어 화려하진 않지만 생명의 자유와 경건함이 숨어있음을 느꼈습니다. 스님은 "고되고 힘든 나날이지만 아이처럼 순수하고 재미나게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소녀와 아이들 그림을 많이 수록하였다는데, 안목 낮은 저는 조금 두려운 느낌의 그림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삶과 일치하는 스님의 글에서 맑은 바람 한 줄기를 느꼈습니다. 마음이 시원해지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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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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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내 자신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하드보일드 소설이나 공포스런 범죄 스릴러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아니, 전혀 안 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대의 뜨거운 피가 식어서일까? 비인간성에 의한 폭력과 노골적인 섹스 묘사, 사이코패스 등 악마 같은 인간들의 엽기가 자아내는 스릴러 등은 많이 부담스럽다. 추리소설은 일어난 살인사건에 감춰진 사실을 찾아가는 지적 게임의 하나이기에 자주 읽지만, 별 이유 없이 잔혹하게 인간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에 좇기거나 좇는 호러 스릴러 소설은 소름과 분노만 일 뿐 정신건강에 도움되는거라곤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가 스릴러 소설을 손에 들었다. <알렉스>란 책인데, 책 광고의 두어 가지 카피가 흥미를 자아냈다. 첫째, "<양들의 침묵>의 클래리스 스탈링 이래 가장 놀라운 여주인공의 탄생!"이란 카피였다. 소설보다 영화가 더 알려진 양들의 침묵은 역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중 가장 잔인한 영화를 꼽힌다. 평소 즐기지 않는 장르지만 이 책과 영화는 읽고 본지라 과연 <알렉스>가 비교할만한 책일련지 관심이 갔던 것이다. 둘째,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를 뛰어넘는 유럽 사회파 스릴러의 거장!" 이란 문구에도 마음이 끌렸다. 사회파 소설은 일단 내용이 있다. 살인자에게도 안타까운 이유가 있고 분노가 있다. 유럽추리소설 대상, 코냑페스티벌 신인상, 미스터리문학 애호가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과 묘하게 어울려 뭔가 있을 거라는 느낌과 함께 새로운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책을 읽게 한 것이다.

 

책은 530여 쪽,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체 구성(플롯)과 스케일은 확실히 신선하고 놀라웠다. 각각 별개의 내용과 결말인 듯 하면서도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마지막 한 장까지 교묘하게 짜여진 복선과 반전은 전 유럽 추리문학상을 휩쓸었다는 작가의 필력을 단번에 인정하게 하였다.
1부. 미모의 여성(알렉스)이 괴한에게 납치를 당한다. 무자비한 폭력과 함께 그녀는 알몸으로 조그만 나무상자에 갇혀 새장처럼 허공에 매달리게 된다. 꼼짝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공포. 나는 여기서 문성근이 연기했던 영화 <실종>이 오버랩 되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납치한 여인을 감금하고 고문하던 그 영화의 사이코패스. 알렉스는 죽음을 직감한다. 괴한은 경찰의 추격을 받고 다리 밑 고속도로 위로 떨어져 자살해 버린다. 범인은 사망했고 피해자를 구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건 해결에 나선 145cm의 단신 카미유 베르호벤 형사. 그는 너무나 사랑하던 임신한 아내가 납치되어 살해된 정신적 외상을 안고 있는데, 소설은 동종의 범죄를 맡게 하여 그의 내면 감정을 추적해 나간다. 소설은 이렇게 알렉스와 카미유의 시점에서 격자무늬를 짜듯이 교차되면서 펼쳐진다. 알렉스! 갇힌 그녀를 찾아온 것은 쥐 떼. 공포는 극대화되고 서스펜스 작렬이다. 우여곡절 끝에 경찰은 알렉스가 갇힌 곳을 찾았으나 알렉스는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고 없다. 도대체 어떻게 탈출한 것일까? 1부는 이렇게 암시와 복선, 그리고 의문을 남긴 채 막을 내린다.

 

2부. 앞서 납치의 공포로 연민을 자아낸 알렉스. 2부에서는 연약해 보이는 그녀가 저지르는 연쇄살인이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이를 좇는 카미유는 항상 뒤처지는 형국이다. 주로 알렉스에 초점을 맞춰 책을 읽게 되나, 카미유의 가족사와 관련한 내면흐름도 범상하지 않은 무게로 다가온다. 알렉스의 범행 방법은 일단 상대를 흉기로 내려쳐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후 입속에 다량의 고농축 아황산용액을 들어붓는다. 그녀는 살인현장에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크로스워드 퍼즐을 풀기도 하고 노트북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그녀는 남자를 유혹하지만 잠자리는 함께 하지 않는다. 섹스가 없는 유혹. 이런 알렉스를 추적하는 카미유는 황망하다. 경찰이 발견하기도 전에 스스로 탈출한 여자의 실체를 알고 보니 아황산으로 이미 세 명의 남자를 죽게 한 연쇄 살인범이라니…….그러고도 알렉스는 계속해서 트럭 운전사를 같은 방법으로 보내버린 후 그녀의 오빠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그녀는 자살을 한다. 카미유는 예기치 않게 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 한 가지를 불쑥 떠올린다. 아내 이렌의 시신과 태중에서 죽은 아기. 카미유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로 녹아내린다. 2부는 이렇게 암울한 비극과 절망과 상처가 흔들리는 촛불처럼 어지러이 난무한다.

 

3부. 알렉스의 일기장 등 소지품을 확보한 카미유는 알렉스의 오빠 토마스 바쇠르를 심문해 나간다. 만약 이 책이 알렉스의 자살로 허무하게 끝맺음 하였더라면 빼어난 감각과 심리묘사에도 불구하고 그저 평범한 B급 스릴러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이 3부로 인하여 이 책은 작가의 역량이 매우 유려하고 범상치 않음을 느끼게 한다. 알렉스가 왜 살인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어보이던 죽은 인물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사건의 전말이 치밀한 안배에 의해 충격적으로 하나씩 밝혀지며 놀라운 반전과 결말이 그려지고 있다. 2부까지 존재가 미미하게 느껴졌던 카미유 반장의 캐릭터가 엄청난 포스로 살아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이 사건을 통하여 그는 이렌의 죽음에서 생겨난 악령을 몰아냈을 뿐 아니라, 자기 예술세계에 빠져 자신을 방치했던 어머니에 대한 앙금도 씻어내게 된다. 트라우마의 상흔을 팽팽히 잡아당겨 힐링 코드 승화시키는 작가의 필력에서 단순 흥미꺼리 스릴러 장르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문학적 힘을 발견한다. 정말로 프랑스가 배출한 조세프 룰르타비유, 뤼팽, 메그레 경감 등 '로망 폴리시에 Roman Policier' 캐릭터 계보에 카미유 베르호벤의 이름을 추가하여도 될 만하다.

 

여러 스릴러 작품을 읽지 않아 서투른 평가일지 모르나 이쪽 장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작품, 상당히 괜찮다. 간결하고 명징하게 상황을 그려내면서도 생략을 통한 모호함을 섞어 독자 스스로 상상에 의해 작품을 재해석하도록 유도하는 기법이라든지, 격자식 교차서술로 사건의 추적과 감정의 흐름을 읽어내는 리듬이 마음에 들었다. 책의 말미에 참 괜찮은 구절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미덕은 진실이 아니라 바로 정의"라는 말이 와닿았다. 진실과 정의라... 이 <알렉스>는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 3부작' 시리즈 중 <세밀한 작업>에 이은 두 번째 작품으로, 작가의 최신작이자 국내 첫 출간작이라고 한다. "피에르 르메트르"란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작품이 나올 때마다 관심 가져봐야겠다. 의외로 마음에 든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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