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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양장) - 故 김영갑 선생 2주기 추모 특별 애장판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여행자가 되어 낯선 곳으로 떠돌다 카메라를 들고 풍경이나 사람들을 찍다보면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그 풍경의 일부만 보고 전체를 평가하려는 어리석음과 마주하기도 한다. 그 곳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에 그만 카메라를 숨긴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무리 관광지라지만 찰나의 풍경에 쉴 새 없이 인물들을 평면의 공간으로 가두어놓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 되었다. 그런 관광객으로서의 죄책감과 불편함을 벗어버리고 그는 제주도의 풍광에 자신을 녹여내기 위해 서울에서의 모든 삶을 청산하고 척박한 섬으로 뿌리내렸다.

파노라마 필름에(6x17) 그가 담아낸 제주도의 자연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제주도가 아닌 전혀 새로운 곳이었다. 섬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뭍의 사람이기에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들에게 그는 얼마나 분노를 느꼈을 것인가. 20년이 넘는 세월을 제주도에서 방황했지만 이방인으로 대하는 사람들때문에 말못할 서러움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눈에 익숙한 풍경이라도 그것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제주도의 아름다움은 특별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익숙한 풍경일지라도 새롭게 바라보려고 노력을 하기 때문입니다.
제 사진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제가 뭍의 것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눈에 익숙해진 풍경들을 대하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죠."  내 사진이 여느 사진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사진을 찍는 동기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p.128

사계절 제주도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사진작가로서의 열정과 신념이 고스란히 베어있는 이 책에는 내가 평소 관광지로만 가고 싶어했던 섬의 신비로움이 그려있다. 제주도하면 떠오르던 옥빛 바다와 쨍한 하늘, 노오란 유채꽃밭같은 찍어낸 듯 식상한 풍경은 이 책에는 없다. 대신 대자연의 손길과 바람이 쓰다듬은 비밀의 정원이 드러나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기상이 바뀌는 제주도의 궂은 날씨덕분에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더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제주의 자연은 비밀을 한꺼풀 벗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자연의 시간을 찍고 싶었던 것 같다. 순간을 놓치면 평생을 기다려도 다가오지 않을 때를 위해 수많은 필름을 감고 셔터를 눌렀다. 그가 제주도에서 발견한 화두는 느낄 수는 있으되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그의 사진들이 말해주고 있는데 구태여 어떤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가 제주도의 풍광을 통해 품었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은 비록 사진으로 보는 나같은 이들에게조차 가벼이할 수 없는 존경의 마음을 품게 했다. 끝없는 인내와 노력하는 자에게만 보여주는 제주도의 낯선 풍경은 그의 손을 통해 드러났지만 당시에 그가 느꼈을 환희는 고스란히 그의 것이 되었다. 일말의 아쉬움은 남았겠지만 루게릭병으로 인해 뼈마디만 드러낸 앙상한 몸으로 완성한 갤러리 두모악은 그와 우리에게 큰 의미를 부여했다. 병때문에 카메라를 들 수도 셔터를 누를 힘도 빼앗긴 그지만 그동안 렌즈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담아낸 제주도의 아름다움은 그에게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단순하고 느리게 살면서 깨달은 삶과 평화로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고 말한다. 이런 그가 어찌 병때문에 괴로웠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장 힘든 순간에 찾아오는 평화야말로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제주도의 자연만큼이나 숭고하게 보였다. 
 
물고기는 바다를 떠나 살지 못한다. 사람은 땅을 떠나 행복할 수 없다. 자연은 말없이 가르친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바위틈에 솟아나는 샘물을 보아라. 굳은 땅과 딱딱한 껍질을 뚫고 여린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아라. 살아 꿈틀거리는 망망대해를 보아라. 빗방울이 모여 개울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자연이 들려주는 소식에 귀 기울이면 삶이 보이고 세상이 보이고 내가 보인다. 이제 눈을 감고 자연의 소리를 들어라.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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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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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책을 읽다보면 수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그 곳에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 들뜬 기분이 되었다가, 갈 수 없는 내 처지때문에 한탄하기도 했다가 결국 모든 걸 체념하며 중간쯤 책을 덮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일부러 피하는 책이 여행책인데 이 책은 이번에 계획한 제주여행때문에 꼭 읽어야겠다 싶어 골랐다. 스쿠터 제주 여행을 계획했는데 하필이면 출발 당일이 장마가  확실하다는 날씨정보때문에 예약을 모두 취소해버렸다. 워낙 모험정신이 빈약하다보니 비오는 날 스쿠터까지타고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주도의 기상이 변덕스럽기가 죽끓 듯 한다지만 대놓고 장마가 온대서야 잔뜩 기대한 제주의 코발트빛 바다를 볼 수 없다면 여행자체가 무의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난 후 스쿠터에 미련이 남긴 했지만 올레길을 걸어봐야겠다는 마음이 앞서나갔다. 

걷다 보면 스스로 해답을 찾게 된다. 왼발과 오른발을 옮겨놓는 그 단순한 동작 사이에 어지럽게 엉킨 실타래를 푸는 실마리가 있다. 걷기는 마법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p.287

단순히 여행책이라기보다 저자 서명숙씨의 걷기예찬론이 구구절절 실린 책이다. 제주 올레길과 산티아고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달라진 사람들에 관한 얘기가 매우 흥미로웠다. 책에는 제주 올레길이 6코스까지만 실려있는데 '제주올레'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벌써 13코스까지 개장한 상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50대 아들을 둘이나 길러낸 아줌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의 추진력이 부러웠고 결단력이 존경스러웠다. 장마때문에 제주여행자체를 포기해버린 자신이 어찌나 부끄러워지던지. 제주가 고향이긴 하지만 서울로 올라와 산 세월이 길다보니 조금 데면 데면 해졌을 수도 있을텐데 제주 올레길을 만들며 그녀는 가슴속에 품었던 제주의 애정을 마음껏 드러냈다. 제주도가 우리나라라는 게 새삼 어찌나 자랑스럽고 감동이었던지. 아마 그녀도 간세다리(게으름뱅이)로 걸어다니며 제주의 아름다움을, 자연이 주는 기쁨을 혼자 간직하기엔 벅찼을 것이다.

걸어서 다녀보지 않고 그 곳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며 두 발로 발도장을 찍어야만 온전히 내 것이 된다는 그녀의 걷기예찬은 행복해보인다. 겨우 2박 3일 코스로 제주도의 겉만 핥아보려 했던 내 여행계획이 얼마나 한심스럽던지...맞다. 느리게 걸으면서 만나는 작은 들꽃, 나무, 바람의 속삭임을 들어보지 않고 그 곳을 다 안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녀가 산티아고를 걸으며 만났던 친구들을 통해 제대로 걷기의 배움을 제주도의 올레길로 전하고 있다. 크고 멋진 관광지보다 작고 아담한 제주의 돌담길을 걸을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 그건 제주도의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걷기의 행복.  책을 덮자 당장 어디로 떠나지 않더라도 바람이 부는 곳이라면 어디든 걷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공해로 찌든 가로수길이라도, 차들이 쌩쌩 달리는 육교길이라도 어디든 두 발로 도장을 찍을 수 있는 곳이라면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귓전을 맴돌던 휴대전화 벨소리가 어느 때부터인가 사라졌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과 연결된 플러그를 뽑아버린 채 나는 언플러그드 세계로 완전히 이동한 것이다. 자연만이 휴식을, 느림만이 평화를 줄 수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아가고 있었다.   -p.191

제주 올레길을 통해 변화한 보통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땐 그들의 기쁨이 내 것인양 공감하고 싶어졌다. 올레길을 표시한 파란 화살표가 마치 삶의 이정표처럼 느껴졌다. 그 길을 따라가다보면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무언가, 늘 불안해했던 미래, 두려워했던 앞일이 환하게 열릴 것만 같다. 장마로 미뤄두었던 제주의 그 길을 올해가 가기 전에 꼭 걸어봐야겠다. 단체관광으로 두 번이나 스치듯 지났던 제주도 여행을 제대로 해두고 싶다. 어느 여행지든 마찬가지지만 그 유래나 역사를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은 정말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다. 이 책에는 제주 올레길을 걸으면서 저자 자신도 몰랐던 제주도 지리의 유래와 전설을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어 올레여행을 하려는 사람에게 꽤 유용할 것 같다. 관광지를 여행하면서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짧은 여행의 일부지만 그들에겐 삶의 일부라는. 그래서 어디를 가든 가볍고 하찮게 볼 수 없게 되었다. 저자도 제주 걷기 여행을 통해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마음가짐을 가르쳐주고 있다.

분노는 옅어지고 그리움만 짙어진다. 미움은 사라지고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음만이 안타깝다.
강물 위에 띄운 종이배처럼 흘러갈 일에 왜 그리 마음 상하고 애를 끓였을까.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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