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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 집을 나가다 - 가족 밖에서 꿈꾸는 새로운 삶 스물여덟 가지
언니네트워크 엮음 / 에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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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듬어진 잔디밭 위를 훌쩍 뛰어 오른 사뿐한 여자의 발걸음. 초록이 물든 스커트자락이 돋움에 풀썩이며 흔들리고, 그와 함게 잔디밭 저편의 하얀꽃을 피운 나뭇가지도 사정없이 휩쓸린다. 때론 안정적이고 때론 불안하게 기우는 가족이란 울타리를 가뿐하게 타넘은 스물여덟명 언니들의 도발적인 고백이 담긴 책이다. '독립'이란 말로 떳떳하게 타지에서 5년을 살아오며 여자들의 부러움과 남자들의 아니꼬움을 한 몸에 받아온 나에게 이 책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멀쩡한 집놔두고 친구랑 집나와서 삽니다!'... '왜??' 몇 번이나 그 의도를 되물어오는 이들에게 나는 뒷말을 흐리며 어영부영 대답을 회피했는데, 이 책을 읽은 후 내가 설명하지 못한 답답함을 한 방에 떨쳐버릴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꿈꿔왔기에 경제적으로 독립해산다는 사실에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1부에 나오는 그녀들처럼 끈끈한 혈육의 정이나 가족의 품을 떠나며 눈물흘리고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내겐 오로지 창창한 앞길만 있었고 핑크빛으로 물든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남들이 한번쯤 생각한 반전은 없었다. 나는 현재도 정말 잘 먹고, 잘 놀고, 잘 살고 있다. 가끔 손녀 볼 나이라며 가뭄에 콩나듯 통화하는 엄마가 하소연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엄마를 위해 결혼할 생각은 없으므로 소 귀에 경읽기다. 엄마도 내 확고함을 눈치챘는지 명절에 마주봐도 결혼얘기는 잘 하지 않으신다. 대신 혼자 외롭게 감당해야할 노후를 생각하라며 체념어린 대안들로 과년한 딸년의 마음을 휘젓곤 하신다. 그렇기에 스물여덟명의 신념이 자명한 나의 현실로 다가와 대책없이 솟아나던 마음의 잡초들을 뿌리뽑아 주었다. 

3부로 나뉘어 들려주는 이들의 이야기는 1부에서 가족들 곁에서 힘겹게 홀로서기를 시도하거나 이별을 준비하는 그녀들의 다양한 사연이 실려있다. 2부에서는 비혼으로 살아가는 그녀들에게 실제로 제기되는 문제들과 그에 맞서 대안을 찾고, 다양한 방식으로 비혼만의 현실적인 난관을 헤쳐가려는 굳은 의지와 노력이 엿보인다. 특히 비혼들이 가장 걱정하는 노후나 사후에 관한 리얼한 고찰과 실천이 담겨있어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준비에 놀라기도 했다. 아무리 혼자를 부르짖어도 인간이기에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공동체 생활이나 애완동물을 키우는 이야기는 크게 공감했다. 3부에서는 비혼이기에 감수해야하는 은근한 비난과 무시에도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쾌활한 인생살이로 좀 더 구체적인 희망의 모습을 비춘다.  

때론 당당하게 비혼을 외치는 언니에게도 한순간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무시무시한 근심이 있다. 내가 현실적으로 와닿았던 건 나이듦으로써 '의존적'이 될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심적으로 나약해져 누구에게 기대고 싶어진다거나 행여 팽팽한 긴장을 풀어버릴까 우려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언니들의 고백에 용기백배해서 나는 내 신념에 불을 지피고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끝까지 부채질해 줄 생각이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생활하며 서로의 의사를 존중하고 배려해주는 대안가족과 무덤까지 따라와 줄 수 있는 든든한 친구를 지원군으로 끊임없이 나를 발견하고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행복은 상대적이다. 결혼으로 행복을 찾은 사람에겐 결혼만큼 좋은 제도가 없겠지만, 결혼으로 불행해진 사람에겐 족쇄일 뿐이다.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한다면 해보고 후회하라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난 후회에 대해 회의적이고 30대 아직도 방황을 끝내지 못한, 어쩌면 방황하다 끝내 길을 잃을 지라도 나를 위해 살고 싶은 행복한 이기주의자다. 여전히 바람에 흔들림을 멈추지 못한 나와 같은 언니의 속마음엔 동병상련의 기쁨을 느꼈다. 집을 뛰쳐 나온 그녀들이 가장 몰매를 많이 맞는 과도기가 30대이다. 준비되지 않은 비혼에겐 10년 뒤의 미래도 불안하지만 나에겐 당장 중요한 30대의 현실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절실하다. 비혼자를 향한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 그리고 참견도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길 바래본다. 아직도 철들지 않았다며 혀를 쯧쯧 차더라도 한 번 생각해보라.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정말 행복한 지...속보이는 걱정이나 비꼬는 눈초리 대신 용기있는 그녀들의 선택에 쿨하게 박수쳐주자.

30대의 방황은 20대만큼 적나라하거나 당당하지 못한 채로, 모호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30대에 들어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만 가끔 그런 얘기가 나오곤 했다. 30대 중반이 되면 뭔가 안정되어 있을 것 같다는 얘긴 정말 뭘 모르고 하는 소리야. 진정한 질풍노도의 시기는 30대라고.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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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사과
기무라 아키노리, 이시카와 다쿠지 지음, 이영미 옮김, NHK '프로페셔널-프로의 방식'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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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보기 위해 마트에 가면 친환경인증을 한 제품들이 많다. 친환경제품 코너도 따로 있으며 가격이 보통 제품보다 비싸도 건강을 생각해 구입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사람들의 구매심리를 이용해 친환경스티커를 위조한다는 내용의 고발프로그램도 있었으니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웰빙바람이 거세다. 이렇듯 친환경제품들이 많아지다보니 사실 무비료,무농약으로 키운 사과라고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난 후 무농약 사과나무를 키운 기무라 아키노라씨가 얼마나 바보같고 지독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그의 노력과 좌절, 인내가 없었더라면 그야말로 자연이 키운 기적의 사과를 맛볼 수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기무라씨의 사과나무 이야기는 2006년 12월 NHK의 다큐멘터리에 소개되었다. 그 이후 시청자들 사이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기무라씨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해보자는 제작팀에 의해 논픽션 저자인 이시카와 다쿠지씨가 기무라씨의 인터뷰와 이론적인 설명을 덧붙여 완성했다. 눈물나게 맛있는데다 세포가 환호하며 심까지 먹어버리게 된다는 이 사과, 기무라씨를 통해 재현된 재배과정은 과연 기적이라 할 만했다. 사과는 일년에 12번 정해진 시기와 방법으로 농약을 뿌리지 않으면 제철에 수확하기가 힘들 정도로 농약없이는 키울 수 없는 작물이라고 한다. 그가 재배한 많은 채소와 벼들도 무농약 재배가 가능했지만, 사과나무만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6년이 넘는 시간동안 벌레를 잡고 거름을 주었던 그의 바보같은 노력과 끈기가 무색하게 말라 죽어갔다고 한다. 저자가 말하길 오늘날의 사과는 처음 발견된 캅카스 산맥의 작고 신맛이 강했던 사과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크고 단맛이 강하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먹는 사과는 농약을 쓰고 나서 개량된 품종들이라는 얘기다. 

사과는 농약에 크게 의존하는 현대 농업의 상징적 존재다. ...(중략)
사과 재배의 역사는 벌레나 병과의 절망적인 싸움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 전장에 비친 한 줄기 빛이 바로 농약이었다.    -p.38

이렇게 농약에 길들여진 사과나무를 농약없이 키우려는 기무라씨를 주변 농가 사람들은 당연히 미친놈 취급했으며 가족들까지 빈궁한 처지로 몰아가는 모습에 등을 돌렸다. 하지만 한 번 미치면 끝까지 해내고야마는 기무라씨 특유의 악착같은 근성으로 6년이란 시간을 버텼고 긴 시간동안 자신을 가장 원망해야할 가족들의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온갖 병충해로 잎을 떨구고 미친꽃을 피우며 한 알의 사과도 맺지 못한 채 죽어가는 사과나무를 보며 자살을 결심하게 된 기무라씨는 보름달이 형형한 밤에 이와키산을 오르게 된다. 밧줄을 잘못 던져 어둠을 바라보던 순간, 알알이 사과가 달린 사과나무의 환영을 보게 된다. 도토리나무를 보고도 사과나무라고 착각할만큼 그는 사과나무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다. 그렇지만 천우신조라고 그 순간을 통해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현재 기무라씨의 사과나무 밭에는 허리까지 오는 잡초와 풀들이 무성하다고 한다. 개구리가 뛰놀고 온갖 곤충과 동물이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과나무밭.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 오래전 캅카스 산맥에서 발견된 야생의 사과나무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짐작하게 만들 뿐이다. 그 나무에 맺힌 사과를 먹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는 사람들조차 멀고도 가까운 나라에 있는 나로서는 부럽기만 하다. 이가 다 빠진 채 사람좋은 웃음으로 사과나무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 책을 읽는 나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있는 꼬장꼬장한 농부 기무라씨의 노력이 기적의 사과맛만큼이나 눈물겹다. 그리고 자연에 순응하며 감사하고  자연을 지킬 줄 아는 한 농부의 진심어린 고백에 숙연해지고 만다. 

병이나 벌레 때문에 사과나무가 약해졌다고만 생각했다. 그것만 없애면 사과나무가 건강을 되찾을 거라고......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벌레나 병은 오히려 좋은 결과였다. 사과나무가 약해졌기 때문에 벌레와 병이 생긴 것이었다. 도토리나무 역시 해충이나 병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토록 건강한 것은 식물은 본래부터 농약 같은 게 없어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연의 본모습이다. 그런 강력한 자연의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과나무는 벌레와 병으로 고통받았던 것이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자연을 되찾아 주는 일이었다.    -p.159

그의 노력을 농업적 이론으로 뒷받침하고 쉽게 설명해주었던 저자 이시카와 다쿠지 덕분에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기무라씨의 상황을 볼 수 있었고 그의 행동에 따른 근거있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반복되는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사과나무를 향한 애정과 포기할 수 없는 신념으로 9년이 넘는 인고의 시간을 견딘 기무라씨의 성공스토리만큼 극적인 소재가 없었을텐데 최대한 과장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가 더 진솔하게 다가왔다. 일본에는 남의 이목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많은 분야의 장인들이 있다. 나무로 깎은 빗과 빗자루가 30만원이 넘는 가격에도 팔린다는 건 그만큼 그들의 정신을 높이사는 일본인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보가 되면 좋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기무라씨를 통해 내게 일어날 기적의 변화를 조금이라도 감지할 수 있길 바래 본다. 그리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무분별하게 개발되고 초토화될수록 자연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에게 더 혹독한 댓가를 요구한다는 걸 알아야 할 것 같다. 선과 악이 없는 자연의 순환논리에서 유일하게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들의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지도 깨닫게 된다. 필요한만큼만 거두고 자연으로 되돌려줄 줄 아는 옛사람들의 미덕이 그리워지는 현실이다. 썩지않는 기적의 사과가 이제 우리의 희망이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요청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사과나무 재배방법을 알려주고 자연농법을 설파한다고 한다. 자연이 보여준 진심을 몸소 체험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기적의 사과맛을 보고 아련한 향기를 맡았으면 좋겠다.

자연 속에서는 해충도 익충도 없다. 기무라 씨는 너무나 당연한 그 진리에 눈을 뜬 것이다. 인간이 해충이라 부르는 벌레가 있기 때문에 익충도 살아갈 수 있다.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있기 때문에 자연의 균형은 유지된다. 거기에 선악은 없다. 병이나 벌레의 극심한 창궐만 하더라도 균형을 회복하려는 자연의 활동이 아니던가.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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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상한 여직원의 판매일기
김선미 지음 / 리잼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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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 신선했다. 할인점에 입점해있는 판매직원으로 일하면서 저자가 몸소 체험한 할인점에서의 생활이 그대로 담겨있다. 얼마전까지도 유통업에 종사했던 일인으로서 구구절절 눈물날만큼 공감했다. 까대기친다(막일을 그렇게 부른다), 까인다, 매출이 인격이다 등등 유통업계에 일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전문용어(?)부터 그 사이에 암암리에 퍼진 룰까지, 읽는 내내 폭소하기도 했고 격하게 공감하기도 했다. 어느 직장이든 편한 곳이 있겠냐만은 판매나 유통업만큼 박봉이면서 스트레스가 심한 곳이 없다. 열악한 근무환경과 조건은 서비스업계의 3D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 눈물나게 고달프고 힘든 직장생활의 일들을 저자의 재치있는 글솜씨로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지나치게 가볍다 느낄 정도긴 하지만 언중유골이었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 한 달에 3,4번은 가게 되는 할인점의 뒷편에서 이렇듯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할인점의 얼굴만 마주하는 우리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가 없게 되는데,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기에 조금은 현실감있게 다가온다. 유통의 가장 말단사원인 판매사원이고보니 고객과 마주치는 일이 가장 많고, 마트 입점업체로서 매장담당에게 잘 보여야하며, 늘 어딘가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서비스 매니저때문에 불안해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직장의 먹이사슬처럼 살벌하게 느껴진다.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라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피튀기는 전시상황에서도 비장한 인간미를 지닌 동료들이 함께하기에 고통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면서도 버틸 수 있는 것은, 그 고생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에서 동료들은, 얼어붙은 찬 바다의 작은 구명정과 같다.    -p.65

비도덕적으로 생떼를 쓰며 환불을 요구하거나 직원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고, 소송을 걸고 있는 많은 고객들에 대한 에피소드도 간간히 나오는데 그럴 때보면 고객들에게도 강도높은 소비자교육이 뒷받침되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는 사람이 더 하다고 하듯이 이 책의 저자처럼 나 역시 식당이나 판매점,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에 가면 직원들의 서비스태도를 눈여겨보며 우리 회사에서는 절대 저렇게 하지 않는다는둥, 교육이 덜 됐다는 둥 절대 당사자에게는 하지 못할  말들을 동석한 친구에게 개탄하며 쏟아놓기도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직원들도 어딜가든 고객이 될 수 있다. 일을 하면서 느낀거라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하면서 나 또한 일명 진상이라 불리는 불량 고객이 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타인과 타인 사이의 신뢰는 중요하다. 하물며 금전이 오가는 인간 관계에서는 오죽하겠는가. 그런 관계에서 이해와 신뢰는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관계가 수직적으로 변하는 순간,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된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너무나 큰 재앙이다.
모든 직장이 그렇지만, 특히 우리의 경우에는 사람이 싫어지면 직장이 지옥으로 변한다.
직장생활에는 감동이 없다. 모든 것을 의무적으로 주고 받기 때문이다.
단, 하나 감동이 있다면 그건 바로, 월급이다.    -p.211

이건 정말 나의 이야기라며 무릎을 치던 순간들, 나는 적지 않은 직장 생활동안의 애환과 마주했다. 회사생활하면서도 참아온 소주생각이 났다. 작가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상사에 대한 욕과 고객흉으로 5톤 트럭의 호박씨를 까고 만리장성을 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난 정말 그 일이 싫지 않았다. 숨통을 죄어오는 매출압박과 경쟁사 직원을 질투하는만큼 경쟁사 상품을 사는 고객을 씹고, 누구든 고객님~이라고 부르며 아부하고, 디스플레이 변경과 재고조사로 날밤을 새는 일이 허다하지만 내가 해온 어떤 일보다 역동적이어서 좋았다. 그리고 고객입장에서는 장사꾼보다 사기꾼으로 단정해버려 억울할 때도 있지만 간혹 내가 권해준 상품을 사며 기뻐해주는 착한 고객들을 만날 때면 뿌듯해지곤 한다.

 세상에 하찮은 직업, 직장이란 어디에도 없다.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고뇌와 노력, 땀과 눈물이 있고 적재적소에서 가족을 위해서든, 자신을 위해서든 일하고 있다.  일을 한다는 건 산다는 것이라고 어떤 드라마의 주인공이 말했었다. 그래서 노동이란 신성한 것이다. 결말이 좀 거창해졌는데 나처럼 같은 업계에 종사해서 느끼는 공감말고도 할인점을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흥미롭게 볼 수 있다. 깨끗하고 산뜻한 할인점의 뒷편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의 표정이 내 직장동료의 모습인 듯 토닥여주고 싶은 심정이 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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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은 없다 - 2008 대표 에세이
김서령 외 41인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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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잘 읽히지 않는 장르의 책이었다. 난다 긴다하는 유명 작가들의 이름난 수필집도 내게는 왜 이렇게 쉽고 가볍게 느껴지던지. 항상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한 내게 그 책들은 무가치하다 지레짐작하게 만들었다. 그런 전문작가들이 오히려 수필의 질을 오염시켰던 것 같다. 한없이 가볍고 말랑 말랑한 문체와 빈약한 소재들에 파묻힌 신변잡기식 에세이에서 진중함을 찾았던 적은 없었다. 문학적으로 어떤 완성도를 요구하는 장르가 아니다보니 더 시시하다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약산은 없다, 42명의 엄선된 수필들은 나의 편협함과 옹졸함을 한없이 비웃어주며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글은 짧았지만 긴 소설을 읽는 것처럼 극적 긴장감과 깨달음의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약산은 없다, 물소 문진, 사랑이 사랑을 버리다, 천 개의 구슬, 앉을 수 없는 사람들이란 5가지 테마로 엮인 이 책은 다양한 공감과 감정, 의미를 전달한다. 조금 다른 주제로 묶긴 했지만 42가지의 이야기는 결국 사람사는 세상에 사람냄새 폴폴나는 글들이다.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작고 보잘것 없는 티끌같은 일상의 한 조각. 그 조각들을 섞고 끼워맞추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몇 개 남지 않은 수필에 아쉬워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개개인의 작은 이야기들이 모이고 얽힌 굵직한 대하소설 본 것 같기도 했다. 내용들이 워낙 짧고 단순하다고 생각해 단숨에 읽을 줄 알았는데, 몇 줄 되지 않은 문장을 되돌려가며 읽은 건 근래 이 책이 유일한 듯 싶다. 스치듯 가벼운 필치로 그린 대가들의 명작이란 이런 수필을 두고 하는 말같다. 과한 수식어같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만은 그들의 진정성이 전해졌다.


얼마 전 종용한 TV드라마의 마지막회에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남자 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한다. "반짝 반짝 빛나는 건 밤하늘에 빛나는 별만이 아니래요.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 그 존재만으로도 한 사람, 한 사람 반짝 반짝 빛나는 거래요." 난 이 책을 덮으며 삶을 재발견하게 해 준 42명의 수필가들이 누구보다 반짝 반짝 빛이 나 보였다. 별다른 굴곡없이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도 삶은 나름의 행복과 안식을 준다. 빈 자장면 그릇위에 올려진 신문지에서조차 의미를 발견하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줄 아는 이들. 그들을 통해 가볍지만은 않은 우리 삶과 인생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이들의 글을 읽다 보니 수필이라는 장르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가적 자존심과 기질을 가진 사람도 많고 무엇보다 수필에 자부심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 우리들은 지나치고 말았을 시간과 기억의 사각지대를 거닐며 생명을 불어넣고 잊지 않도록 흔적으로 남겨준 그들이 새삼 고마워졌다. 이 책은 내게 낮잠같은 휴식이었지만 긴 꿈을 꾼 듯 묘한 여운을 주었다. 계란 한 판의 아슬 아슬한 30대에 걸치고 보니 요즘들어 20대의 나라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책을 읽을 때마다 고민해보게 되는데 이 책도 그랬다. 그 때의 나라면 우습게 보았을 것 같다. 세상에는 나이를 먹어야지만 깨우칠 수 있는 일들이 훨씬 많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흘러 흘러서 수필판에까지 흘러들어왔어.
그냥 쉬어가려고, 그러다보면 다시 출발할 원기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계산을 한 거지.
처음엔 사소한 내 이야기만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위로를 받았어.
그런데 한 십 년 하다보니까 수필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거야.
수필의 위대성을 찾은 거지. 작은 이야기로 세상의 가장 큰 의미도 담아낼 수 있다는 사실.
그러자 여기가 바로 내가 안착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언제 우리 다시 만나리'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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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출근길
법륜스님 지음 / 김영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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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출근길, 제목만으로도 직장인들을 설레게 하는 말 같다. 혹은 아주 먼나라 사람의 일처럼 무심하거나.
매일 아침 힘겹게 눈을 뜨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어떤 즐거움도 나를 위한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직장인들에게 출근시간은 고된 노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하물며 행복하기 위해 출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법륜스님은 번뇌에 빠진 모든 중생(직장인)들을 구제하고자 이런 책을 쓴 듯 하다. 스님은 회사를 다니며 겪는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고민을 통해 자기 수행의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실업청년자들이 늘어나고 경제가 어려워지니 직장인들에게 직장생활은 예전보다 더 숨통을 조이는 곳이 되가고 있다.  몇해 전 IMF위기때 수많은 사람들이 명예퇴직을 강요당하고 감원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쓰디쓴 과거가 있다보니 현재 직장인들의 심정 또한 그때처럼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 위태위태할 것이다.  몇 십년만에 물가가 폭등하다보니 먹고 살기가 예전보다 빠듯해진 직장인들에게 회사 역시 그들을 보채고 닥달한다. 회사생활이 피곤해질 수 밖에 없다. 나 역시 그런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 지옥같은 곳을 뛰쳐나온 사람중에 하나이고보니 밥벌이를 위해 다시 회사에 들어가야하는건 당연한데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않다. 그런데 어디를 들어가도 나와 다른 사람들이 아웅다웅하고 회사는 이익을 위해 직원들을 쥐락펴락하는 곳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결국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면 나의 마음가짐을 바꾸라고 스님은 말씀하신다. 부처가 절에만 있는 것이냐 부처는 바로 내 마음안에 있는 것이라는 유명한 이야기처럼 지극히 불교적 방법이라고 여겼지만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은 한결 편안해지고 있었다.  
 

여러분이 정신을 차리고 잘 살펴보면 직장은 즐거운 곳도 아니고 괴로운 곳도 아니고 그냥 그곳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거기 가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그곳이 즐거운 곳이고, 거기서 나오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그곳이 지옥입니다. .....(중략) 그런데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나서 그곳은 즐거운 곳이 되기도 하고 괴로운 곳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나로부터 일어나는 것이지 직장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p.44
 

내 생각이 바뀌어야 직장생활이 즐거워질 것이고 그 직장으로 들어가기 위한 출근길의 발걸음이 즐거워질 것이라는 뻔히 알고 있음에도 행해지지 않는 이치를 스님은 수도 없이 강조하신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스님께서 직장인들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는 것에 성공했으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면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그 곳을 과감히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물론 그 말씀만 깊이 새겨 "안녕히 계십시오"를 남발해서는 안 되겠으나 난 그 한마디에서 큰 용기를 얻었다. 그 말을 꺼내기 전에 몇십 번, 몇백 번 고민하고 떳떳하게 자기수행을 해야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종종 회사생활을 하면서 자신이라는 존재를 잃어버리곤 한다. 돈에 얽매이다 보니 회사생활이 즐겁지 않고 즐겁지 않은 일을 매일 하다 보니 '사는 게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이지만 절박한 심정의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게 된다. 스님은 그에 대해 가장 중요한 해답을 주신다. "자신을 돈에 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똑같은 일을 해도 돈 내고 하면 놀이고, 돈 받고 하면 노동입니다. 우리는 노동 따로 하고 놀이 따로 합니다. 그런데 노동은 돈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돈의 노예라고 하지요. 인간은 돈도 필요하지만 자기 행위의 주체가 되면 즐거움이 생기고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 행위가 속박을 받으면 거기서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은 돈에 매여 있는 겁니다.   -p.84


책의 서문에서 스님은 직장에서의 삶과 자신의 행복한 삶이 별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괴리감을 맛보는 것이라고 하신다. 어차피 해야할 일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바꿔 즐겁게 함으로서 주변사람들에게까지 그런 행복바이러스를 전파해주면 회사생활이 편안해질 것이다. 그리고 하루 하루가 자신의 인생이라는 구절이 인상깊었다. 무의미하게 직장에 출근했던 오늘도 결국은 내 삶의 일부라는 걸 깨닫는다면 결코 헛되이 보내지는 않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하게 출근하고 싶다면 가장 중요한 이 사실을 먼저 깨우쳐야 할 것이다.


하루하루의 직장생활이 여러분 자신의 인생입니다. 지금 내 삶의 하나하나가 그대로 내 인생이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지금의 생활을 내 삶의 소중한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업무도 좀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절대 자신을 과대 선전하지 마십시오. 과대 선전하면 여러분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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