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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일기 - 세상 끝 서점을 비추는 365가지 그림자
숀 비텔 지음, 김마림 옮김 / 여름언덕 / 2021년 1월
평점 :
세상의 많은 애서가(愛書家)는 장서가(藏書家)와 독서가(讀書家)로 나뉜다. 보통은 독서가로 시작해 장서가로 진화해 가는 것 같다. 독서가가 장서가로 진화, 또는 변신하는 순간 그에게 책은 내용만큼이나 형식도 중요해진다. 같은 내용의 책을 판본, 또는 출판사별로 소유하거나, 초판에 집착하게 된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읽지 않을 것을 알면서 ‘소유’에 대한 욕망으로 사들이기도 한다. 이때부터 책은 독서의 대상이 아니라 콜렉팅의 대상이 된다.
콜렉팅의 대상이 된 책들이 꽂힌 책장을 보며 뿌듯해하는 장서가의 자아 뒤 저 깊은 곳에 숨은 독서가의 자아는 은근히 죄책감에 시달린다. 독서가에게 읽지 않은 책이란 해결하지 못한 숙제니까. 하지 않은 숙제가 저렇게 많이 쌓여있다니. 아아. 2017년 소설가 김영하는 이런, 잘못된 방향으로 진화한 애서가들을 위한 명쾌한 답을 내려 주었다.
“책은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거예요.”
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지식사전》 시즌 1, 제1화 통영편, 2017.6
아하, 이렇게 마음이 편해질 수가. 그치. 일단 사야 읽을 수 있으니 책을 산다는 행위는 산다가 아니라 읽다에 방점이 찍혀야 마땅하다. 소유하지 않은 책은 읽을 수도 없는 법, 결국 독서의 90%는 책을 사는 행위가 채우고 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럼 그럼. 결국 책을 산다는 것은 장서가로서의 자아도 독서가로서의 자아도 모두 만족시키는 아주 훌륭한 행위니까 앞으로도 가열차게 책을 사기로 한다.
독서가로 가는 길을 딱 한걸음 남겨둔 장서가들이 특별히 애호하는 장르가 있다. 이것은 아마 대부분의 장서가가 동일한 취향을 가졌음이 분명한바, 근 20여년 전 앤 패디먼 여사 역시 고백한 바가 있다.
나는 책에 대한 책은 안 사고는 못 배기는 성미다.
앤 패디먼, 『서재 결혼 시키기』, 정영목 역, 지호, 2001, p.191
이건 말이다. 옷 만들기를 한때의 취미로 가졌던 내가 패턴북과 각종 사진집(예를 들자면 스콧 슈만의 『사토리얼리스트』 같은)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패턴북에 있는 옷들을 모두 만들었느냐 하면, 아니요, 절대로요, 제가 그렇게 부지런할 리가요. 그 사진집의 패션을 응용해 옷을 만들었느냐 하면, 아니요, 절대로요, 제게 그럴 능력이 있을리가요. 그럼 왜 샀니 묻는다면, 아니 등반가 조지 말로리 경도 그랬잖습니까. “Because it’s there.” 그냥 있으니까 사는 겁니다, 제 취미니까요. 차와 산야초를 취미로 하는 언니의 집에 가면 차와 산야초 관련 책이 있는 것처럼, 책이 취미인 저희 집에 책에 대한 책이 있는 것이 이상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네네. 그럼요. 책에 관한 책은 누군가에게는 실용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패턴북이 누군가에게는 소장에만 의미 있는 책이 될 수 있듯이요. 실용과 비실용의 경계는 때때로 모호합니다.
나는 여전히 확신하거니와, 장서가를 자처하는 사람의 서가 한 코너는, 앤 패디먼의 표현대로라면 ‘자투리 책꽂이’ 와 같을 그 장소에 분명 책에 관한 책이 잔뜩 꽂혀 있을 거다. 우리집 역시 책에 관한 책만 모아둔 서가 코너가 있다. 책을 이용한 인테리어에 관한 책, 북까페 운영에 관한 책, 작가들의 서재를 탐방한 책, 작가들이 좋아하는 책을 소개한 글을 모아둔 책, 내게 있어 아직까지 이 분야 최고의 책은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이다. 책 이라는 소재를 제껴 두고라도 이 책은 무척 재미있는 책이므로, 읽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꼭 읽으시라.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새 책을 파는 서점보다 더 탐닉하게 될 곳이 있으리니 그게 중고서점이다. 이 중고서점의 매력은 독서가에서 장서가로의 진화가 진행될수록 점점더 높아진다.
종종 알라딘에서 책 구경을 한다. 친구가 의류 쇼핑몰 구경을 하듯, 딸이 빅히트 샵 구경을 하듯. 근데 언젠가부터 신간 소개보단 중고페이지를 더 많이 들어다보는 나를 발견한다. 중고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뒤쪽에 놓이는 게 가격이다. (그리고 요즘 알라딘 중고책은 그다지 싸지 않다.)
중고책은 여하한 이유로든 한번은 선택된 책이다. 그리고 나로서는 알지 못하는 이유로 그 사람의 서가에서 퇴출 된 책이다. 중고책의 목록을 보는 재미는 그런데 있다. 이 책은 무슨 이유로 간택되었고 무슨 이유로 퇴출 되었을까를 상상해 보는 재미. 뭔가 사연있는 냉궁의 후궁마마님 같지 않은가? 또, 나온 줄도 몰랐던 책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아닌 다음에야 신간 안내코너를 매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데 당연히 내가 아는 책보다 모르는 책이 훨씬 많다. 새로운 책이 출간되어 판매되다 잊히는 주기는 생각보다 매우 짧다. 그 짧은 찰나에 간택되었다가 퇴출되어 나온 책이 모이는 곳이 중고서점. 중고 목록을 들여다보다 어라 이런 책도 나왔었군, 이런 작가도 있었군 하는 발견을 종종 하게 된다. 나라면 절대로 사지 않았을 책이 누군가의 간택을 받았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매력을 장착하고 나오는 셈이다.
아직 초판을 찾는 수준의 장서가에는 도달하지 못하였으나, 나이를 먹어 그런가 새로운 책을 읽기 보다는 과거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싶을 때가 종종있다. 이건 책만 그런게 아니라 드라마도 그렇다.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예전에 봤던 드라마를 3-4번 이상 반복해 돌려본 게 몇 편이나 된다. 이게 나이를 먹으면 인지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데 싶어 슬프기도 하고. 하여튼, 이런 복고의 취향에도 중고서점은 딱 맞다. 이미 절판되어 버린, 과거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찾아서 읽는 재미. 굳이 어떤 책을 정해두고 중고 목록을 훑는 게 아니라 그냥 중고 목록을 훑다가, 과거 돈 없고 공간 없던 시절, 누군가에게 빌려서 읽었던 책을 발견하게 되면 얼른 장바구니에 담는다. 이미 읽었던 책을 소유에 대한 욕망만으로 사는 거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건 마치 헬렌 한프의 편지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읽어보지 않은 책을 사는 것은 제 원칙에 위배 되는 일이에요.
헬렌 한프, 『채링크로스 84번지』, 이민아 역, 궁리, 2004, p. 73
이 중고책과 중고서점 분야 관련 지금까지 ‘나에게’ 최고의 책은 헬렌 한프의 이 근사한 서간체 소설이다. 음, 실제로 주고받은 편지 모음이니 소설이라고 하면 안되겠다마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9년부터 1969년까지 20년간 미국 뉴욕시에 사는 가난한 무명작가 헬렌 한프와 영국 런던의 채링크로스가 84번지에 있는 중고서점인 <마크스서점>의 주인 및 직원과 그들의 가족이 주고 받은 편지를 모아놓은 이 책은 얇고 짧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정말 재미있다. 특히 세계대전 직후 완전히 황폐해진 영국 런던의 서점 직원과 그들의 가족에게, 본인은 가난하나 풍요한 미국에 사는 무명의 작가가 크리스마스며 부활절 선물로 보내는 음식물 소포에 관한 이야기는 꽤 맘을 울린다. 1951년 영국 런던에 도착한 음식물, 특히 고기!로 가득한 소포란 어떤 의미였을까. 당시 영국은 식량을 배급하고 있던 시기였다. 거 봐,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라니까.
이처럼, 나 역시 책에 관한 책은 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이고, 서가의 한 코너를 책에 관한 책으로 가득 채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들 중 내가 정말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책은 별로 없다. 좋아하는 것이기에 더 엄격해 지는 현상일 게다. 책에 관한 책이기에 소재빨로 무조건 중박(음... 음....)은 치지만 소재 때문이 아니라면 갖다 내버리고 싶은 책도 한 둘이 아니고, 실제로 몇 권은 알라딘을 통해 퇴출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 『서점일기』도 별 기대 없이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 책, 오호라, 의외로 재밌다. 기대치가 낮아서 그랬을까 더 재미있었다. 사실 ‘세상 끝 서점’을 소재로 한 책이나 책마을에 관한 책은 소설로도 논픽션으로도 너무 많이 나와있다. 그리고 감히 장담하건대, 그중 절반은 넘게 내가 읽었다. 이 책 너무 좋아, 권하고 싶은 책은 음. 음..... 음........... 너 책 좋아하니까 이 책 읽어보려면 읽어보든가. 수준의 책이 대부분이었다. 근데 이 책, 별로 기대도 없이 집어 들었고, 심지어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기체 형식을 택하고 있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서 나로서는 꽤 난해하다고 느껴지는 영국식 유머를 여기저기 끼얹어 놓은 이 책이 뜻밖에 재미있다. 놀라울만큼. 믿으시라, 나 책에 관한 책에 꽤 까다로운 장서가니까.
가끔 책방이란 곳은 무엇보다 디지털적인 삶을 강요하는 혹독하고 고된 현대의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평화롭고 조용한 휴양림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친구와 가족들이 예고도 없이, 이곳이 내 직장이란 사실도 개의치 않고 내 일을 방해하면서까지 쉬러 오는 게 아닐까.
손 비텔, 『서점일기』, 김마림 역, 여름언덕, 2021, p. 73
2001년 당시로는 유일하게 북타운으로 인정받은 위그타운에서 꽤 큰 규모의 ‘중고 책방’을 하고 있는 중고 책방 주인 숀 비텔의 2014년 2월부터 2015년 2월까지의 일기를 모아 만든 책이다. 이 일기를 읽어보면 중고 서점의 주인이 하는 일, 중고 책을 사 들이는 데 어떻게 어떤 사람에게 사 들이는지, 그 중고책을 팔 땐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파는지를 알게 된다. 뭐 내가 이걸 알고 싶었는지 묻는다면, 음, 약간은 알고 싶었다고 답하겠다. 북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그 와중에 연애도 하고 친구와 낚시도 다니고 자전거도 타고, 그야말로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다. 직원 니키와의 관계도 관계지만, 처음에는 약간 강박증 환자가 아니었을까 싶었던, 알고보니 굉장한 엘리트였던 디콘씨와의 관계나, 마지막에 밝혀지는 디콘씨의 병 등, 단순한 한 책방 주인의 일기가 은근히 다채롭고 재미있다.
나는 책에 대한 책은 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지만(이 말 이 페이퍼 안에서 벌써 세 번째 하고 있음을 내가 안다), 그리고 책에 관한 책은 어지간하면 그 소재빨 때문에 기본 점수를 따고 들어가지만, 진짜로 재미있어서 소개하고 싶은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 그 드문 책들 안에 이 책이 있다. 헬렌 한프의 책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읽으시라. 헬렌 한프의 책을 아직 읽지 않으셨다고? 그럼 헬렌 한프도 읽고 이 책도 읽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