듄 신장판 1~6 세트 - 전6권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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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만든 스페이스 오페라 승리호가 꽤 화제다. 애초에 별로 볼 마음도 없었는데 영화평을 보니 더 볼 마음이 사라진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평이 가장 와 닿는다. “기술적 성취를 가리는 몰개성의 작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 공개 하루만에 전 세계 1위로 등극했다. 한국인들의 영화평은 별론데 세계에선 꽤 인기가 있나 보다. 스페이스 오페라 답다.

 

2015년 기준으로 세계 영화 시장의 규모는 383억 달러(한화 약 45조원). 나라별 순위를 보면 2017년 기준 북미 - 중국 일본이 1,2,3 위를 차지하고 영국과 인도에 이어 한국이 16억 달러로 6위를 차지하고 있다. 경제력으로는 우리나라도 꽤 높은 수위에 든다고 하니 그러려니 하지만, 인구수를 생각하면 이 민족, 영화를 참 좋아한다.

 

그런 한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장르가 있다. 스타워즈시리즈로 대표되는 스페이스 오페라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SF(Science Fiction, 과학 소설?)의 인기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바타겨울왕국에 이어 역대 외화 흥행 순위 세 번째를 기록한 인터스텔라의 한국내 인기는 어마어마 했다. 역시나 같은 SF 장르에 포함될 아바타도 그렇고, 한국 사람들 SF 무척 좋아한다.

 

물론 스타워즈도 국내 관객층, 매니아 층이 꽤 있다. 인기가 없는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스타워즈가 가지는 위상에 비하면 초라하다. 희한하게 인기가 없다. 마블이 만드는 히어로 시리즈에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민족이, SF를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유독 SF의 하위 장르인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 대해서는 평가가 박하다.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1940년대 처음 제시되는 개념으로 인터스텔라류의 우주 탐사 SF와는 달리, 이미 탐사가 끝나 뭔가 세계관이 정립되어 있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모험과 전쟁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굳이 한국말로 번역하면 우주 활극쯤 된다. 한국 사람들은 우주 탐사는 관심있게 지켜보지만,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정복전쟁에는 관심이 없나보다.

 

인간은 너무 거대한 것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좁디 좁은 한반도, 이 좁은 땅덩이 안에서 몇 개의 나라로 쪼개졌다가 통일하고 다시 쪼개지는 역사를 가진 한국인에게, 세계도 아닌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정복전쟁 이야기는 평균치 한국인의 상상력의 범주를 벗어나는 이야기여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하나의 대륙도 뭐 할 판에 한 행성을 식민지화 한다니. 으아. 이건 한국인이 접수하기엔 스케일이 너무도 큰 거지. 마블의 히어로 시리즈도 결국 배경으로 잡는 건 지구라는 걸 생각해 보면 왜 마블은 인기가 있었고 스타워즈는 별로였나 이해가 될 법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인들, ‘활극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장군의 아들시리즈는 몹시 예외적인 결과물이고, 미국에서 서부 활극이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금까지 몇몇 작품들이 제작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스타워즈가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북미(하긴 미국도 굳이 따지고 들면 식민지가 독립한 국가이긴 하다만,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전 세계를 배경으로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후손들이니.)나 영국, 일본 모두 세계를 배경으로 크게 놀아본 경험들이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어쨌든, 이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시조격이라 할 수 있는 소설 의 신장판이 나왔다. (사실 이 신장판이라는 말, 출판사에서 듄 신장판 신장판 하길래 쓰기는 한다만, 왜 굳이?) 프랭크 허버트가 미국에서 첫 출간한 것이 1965,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번역되어 출간된 2001년으로부터 정확히 20년이 지나 새로 내는 개정판이다.(듄의 미국내 인기와 상징성, 영화와 게임등의 2차 저작물등을 생각해 볼 때, 65년에 첫 출간 된 소설이 근 40년이 지나 번역되다니 한국에서의 스페이스 오페라, 인기가 없긴 정말 없나 보다.)

 

이야기의 첫 시작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햄릿 풍의 우아한 궁정극이다. 영지를 나누어주는 황제가 있고, 그 황제에게 받은 봉토를 다스리는 귀족이 있다. 물론 이 모든 직위는 혈통에 따라 세습된다. 이쯤되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계략에 의한 한 집안의 몰락과 힘겹게 살아남은 아들의 복수극이 펼쳐진다. 배경을 우주의 한 행성으로 옮겨놓았고, 특이한 능력들이 등장하지만 큰 틀은 비켜나지 않는다. 그러나 듄의 진정한 가치는 그 복수극이 완성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얼마전 나는 시리즈물(또는 대하 장편소설)의 성공 제1 요건에는 등장인물의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바, 길고 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독자를 붙잡아 두는 힘은 등장인물이 가진 매력이 거의 전부다. 1편 에서의 주인공 폴 무앗딥아트레이데스는 그런 시리즈 물 주인공다운 옹골찬 매력의 소유자다. 이 젊고(어리고), 전설 속의 퀴사츠 해더락일 가능성이 있고, 정의로운 아버지, 아름답고 현명한 어머니에게서 아름다운 외모와 정의로운 성품을 물려받은 공작가 후계자이자 불의한 자들에 의해 정당한 자리에서 내쫓기는 불쌍한 아이. 독자들은 그 아이가 겪는 고난에 깊은 동정을 느끼며 그의 행동을 응원하게 된다. 주인공과 나의 동일시가 일어나는 시점이다.

 

폴의 고난에 찬 복수극은 의외로 쉽게, 그리고 빨리(1000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를 빨리라고 볼 수 는 없지만, 전체 이야기로 보면 뭐.) 끝난다. 뭐야, 뭐가 이렇게 쉬워 싶게 폴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황제 위에 오른 폴과의 행복한 동일시는 끝이 난다. 폴은 말 그대로 전설 속의 퀴사츠 해더락이 맞았지만 나의 주인공이 그렇게 엄청나고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에 기뻐할 겨를도 없이 폴의 고뇌가 시작된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고뇌.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듄이라는 소설 그 자체의 매력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이 교체를 견딜수 있는자는 그 이후의 2부부터 6부까지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

 

2권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건국이 완료된 국가에서 흔히 드러나는 갈등 양상들이 우주 행성간에도 어김없이 나타나며 정복한 자, 정복당한 자, 승리한 자, 패배한 자, 차지한 자, 내쫓긴 자 각각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가운데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슬프게도 그 인물들이 죄다 별로 매력적이지가 않다. 제국은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궁정극 특유의 우아한 맛도 사라진다. 아아, 누구에게 마음을 의탁하여 이 소설을 읽어내리, 한탄하는 시점이다.

 

그러나 2권의 고비를 넘으면 3-6부까지는 일사천리로 읽힌다. 이 소설이 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SF인지 이해하게 되고, 칼 세이건의 찬사에 동의하게 된다. 이 소설은 뜻밖에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특히 초인의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인간을 조종하게 되는 문제에 대하여.

 

소설가 김연수는 에세이집 소설가의 일에서 시간의 압력을 견디고 먼 미래까지 읽히는 작품은 서가 두어 개 정도라고 말했다. 물론 김연수는 시간의 압력을 견디는 힘이 그 문장에 있다고 말을 했지만, 내가 주목한 건 시간의 압력을 견디고 살아남는 작품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 그 자체다. 65년에 첫 출간 된 이 책이 40년이 아니라 60여년의 압력을 견디고도 이렇게 살아남아 신장판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간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책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 읽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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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09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니까요. 이게요. 4300페이지라고요. ㅎㅎ
아 정말 고민중입니다. 세상에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은데 이리 두꺼운 책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

라로 2021-02-13 14:19   좋아요 0 | URL
거기다 아들이 쓴 것까지 있는 거 아시죠??^^;;

josée 2021-08-22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기 잘 읽었습니다👍

황목련 2021-12-2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배 공감합니다. 영화를 보고 원작을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2권 중반부터 책 놓고 고민중이었습니다. 힘내서 2권을 돌파해야겠군요.
 
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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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소, 스틸, 하지만 당신이 어떤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건 아니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이오. - P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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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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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정신을 죽인다. 두려움은 완전한 소멸을 초래하는 작은 죽음이다. 나는 두려움에 맞설 것이며 두려움이 나를 통과해서 지나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두려움이 지나가고 나면 나는 마음의 눈으로 그것이지나간 길을 살펴보리라. 두려움이 사라진 곳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남아 있으리라."
- 베네 게세리트의 기도문 - P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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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신장판 1~6 세트 - 전6권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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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한 잡담

프랭크 허버트의 듄 신장판이 나왔다고 떴길래 바로 주문했고 어제 받았다.

음. 음..... 당황스러워라. 이건 읽으라고 펴 낸 건지 책장에 근사하게 진열 해 두라고 펴 낸건지. 책 읽다 근육통오게 생겼다. 두툼한 책 좋아하는데 이건 좀 과하다. 어쩌라고 싶네. ㅠㅠ

씨앗을 뿌리는 사람 출판사에서 펴낸 톨킨의 Middle-Earth 전집 여섯권의 박스판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난감함이다. 아니 팔뚝힘 없는 사람은 책도 읽지 말란 말입니끄아~~~

이 책을 읽다 근육통이 오면 알라딘에 배상을 청구하냐 황금가지에 청구하냐.

어쨌든 듄이 왔다. 듄이다. 듄듄듄.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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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2-03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듄.. 아.. 책지름신 강림중...ㅜ

아시마 2021-02-03 12:29   좋아요 0 | URL
사요 사요 사요 사요!!!!!!! 듄이잖아요!!!!!

비연 2021-02-03 13:16   좋아요 0 | URL
아아.. 알라딘은 지름신 속출지역...ㅜ (이미 보관함에 푱..ㅠ)
 

1. 나는 대학 2학년 겨울에 잠실 롯데에서 일주일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과외를 제외한다면 평생에 걸쳐 내가 해 본 유일한 아르바이트다. 알바 사나흘차가 되었을 때 그곳의 3교대 청원 경찰의 대장(조장?)쯤 되는 이와 점심시간에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리저리 들리는 풍문으로 그는 20대 후반에 이미 애가 둘이나 있는 기혼남이었으며, 직업군인을 거쳐 그곳에서 일을 한다고 하였다. 묘하게 권위적인 태도의 그는 시혜를 베푸는 듯한 어조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몇 살이냐, (스물 한 살이요) 여기는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냐 (친구 따라서요) 등의 질문 끝에 남자친구는 있냐, 물었다.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남친이 있던 때라 , 공돌이랑 사귀고 있어요.”라 대답했더니 표정이 꽤나 기묘해졌다. 뭐랄까. 너도 참 안됐구나, 하는 표정. 잠깐의 침묵 끝에 그는 나름대로는 격려하는 어조로 말을 했다. “그래, 공장을 다니면 뭐 어때서, 남잔 돈만 잘 벌면 되지.” 이번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같은 한국어를 쓰고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을 처음으로 접한 거였다. ‘공돌이라는 말의 함의가 그와 나는 전혀 달랐다.

 














2. 사회학자 조은의 책 사당동 더하기 25를 읽게 된 계기는 그때의 나에게는 충격적이었던 그 기억 때문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이렇게 영세한 경우도 세금이 많이 나와요?” 물었다가 영세한 게 뭐예요?” 라는 질문을 받고 아차 했다얼마 전 덕주 씨 권투 시합 날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는데 덕주씨가 “‘김천을 가자고 해서 내가 “‘김천이 뭐냐?”고 물었다가 “‘김밥천국’ 모르세요?”라고 신기해할 때와 비슷했다오랫동안 알아 친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예기치 않은 순간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고 속한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깨우치고 만다.

 

조은사당동 더하기 25또 하나의 문화, 2012, p. 11

 

나도 모르는 새 강의실에서 쓰는 언어나 집안 식구들끼리 쓰는 단어들을 쉽게 말해 버리고 나면 질문이 들어오거나 대화가 중단되거나 했다예를 들면 영주씨에게 저녁 먹을 때 주로 화제가 뭐예요?”하고 물었을 때 우물쭈물하다가 화제가 뭔데요?”라고 되물어 오면 대체할 만한 쉬운 말을 생각해 내느라 멈칫거리게 된다.

 

조은사당동 더하기 25또 하나의 문화, 2012, p. 88

 

이 인터뷰는 2011년에 한 것이고, 영주씨는 73년생, 당시 38. 덕주씨는 79년생이니 당시 32세였다. 영세하다라는 단어와 화제라는 단어를 모르는 30대의 한국어 네이티브라니.


3. 소설가 조선희는 단편소설 <서울의 지붕 밑>에서 자신의 현실을 떠나 있는 것은 모두 판타지다. 우주전쟁뿐 아니다. 비참이나 남루도 그렇다.’ 라는 말로 동시대 같은 도시에 사는 전혀 다른 계층의 이질감을 묘사해 냈다. 대학을 나온 (아마도 전문직이나 교수쯤 될) K는 갑자기 결근을 한 파출부 정자 씨의 산동네 집을 찾아 간다. ‘서울에 30년 가가이 살아도 이런 동네는 처음이다. K의 가까운 친구나 친척 중에 산동네 꼭대기에 사는 사람은 없다.’라는 말로 K의 계층을 제시하고 거제도에서 자라 서울로 온 정자 씨는 35년의 생애에 거제도와 서울 외에는 가본 곳이 없었다. K는 정자 씨가 문맹이라는 데 처음 놀랐었고 그 다음엔 그가 그런데 부산은 어디 있어요?”하고 물었을 때 두 번째 놀랐다.’는 말로 정자씨의 계층을 제시한다. 그리고 한국사회가 좁아서 한두 사람 건너면 아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건 학연과 지연이 엮어내는 범주 안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 얘기다라는 말로 두 계층의 단절을 완벽하게 표현해 낸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누구나 자기 동네에 갇혀 살기는 마찬가지다울타리 바깥은 그저 책이나 신문이라는 종이 위에 건설된 판타지일 뿐이다.

(중략)

사라져버린 정자 씨 가족은 K의 상상력 밖에 있다서울의 지붕 밑이라 해도 K의 상식이 감히 미치지 못했던 것인데그 바깥으로 튕겨나갔다면 그곳은 대체 어떤 외계인가.

 

조선희, <서울의 지붕 밑>, 햇빛 찬란한 나날실천문학사, 2006, p. 116-117

 

공돌이라는 말의 함의가 다르고, ‘영세하다화제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성인 남자가 사는 곳, 그곳은 대체 어떤 외계인가.

 

4. 이 책은 사회학자 조은이 동국대 교수로 재직하던 1986년 유니세프의 연구비를 받아 <재개발 사업이 지역주민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는 프로젝트에서 출발하였다. 두명의 대학원생이 사당동 재개발 지역에 방을 얻어 입주까지 해 연구를 했고 그때 심층 연구 표적 사례 22 가구 중 한 가구인 정금선 할머니네를 25년간 추적 연구한 결과물이다. 정금선 할머니 가족의 이야기는 사당동 더하기 22라는 다큐멘터리로도 제작이 되었고 그 뒤로도 3년간 더 추적 관찰한 결과물이 이 책이다.

 

5.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은 식상할 정도로 유명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톨스토이안나 카레니나』 1, 연진희 역민음사, 2009, p. 13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을지 모르나 가난한 가정은 동일한 빈곤문화를 보여준다. 오스카 루이스가 1961산체스네 아이들에서 만들어 낸 이 빈곤문화는 미국 내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정치적 학문적 논쟁을 촉발했다고 사회학자 조은이 말하고 있으니까.

 



6. 빌 게이츠의 추천으로 유명해 진 책 힐빌리의 노래를 읽으며 끊임없이 조은의 책이 떠올랐다. 사당동(, 지금이야 그 사당동이 그 사당동이 아니지만)과 잭슨(또는 러스트 벨트)이 겹쳐졌고, 철거민과 힐빌리가 겹쳤다. 사당동 사람들은 시유지 땅 10평에 진흙집을 짓고 살고 잭슨의 사람들은 트레일러 파크, 정부 공급 주택, 작은 농장에 산다. 이 책의 저자 J. D. 밴스를 키워준 외조부모님은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친척들까지 포함해도 우리 집안에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사당동의 주민들은 대부분이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거나 중퇴했다. 정금선 할머니 집안에서도 1920년대생 정금선 할머니가 가장 학벌이 높아서 고등고녀 출신이다.

 

7.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쓴 힐빌리의 노래와 사회학자가 빈민을 관찰하고 쓴 사당동 더하기 25의 분위기는 같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조은의 관찰 대상인 정금선 할머니 집안의 사람들은 누구하나 대학을 나오지도, 고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밴스는 무려 예일 로스쿨을 나온 변호사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쓴다는데서 오는 냉정한 평가와 자신이 벗어난 그 개천에 대한 혐오가 밴스의 이야기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조은이 유지하려 노력하는 그 거리감이 밴스의 저술에는 없다. 밴스는 자신의 고향 잭슨을 떠나 해병대에서 보낸 4년을 통해 자신이 변화했음을 말한다. 그 해병대에서의 4년이 없었다면 밴스 역시 금선할머니의 손자 영주씨와 같은 사람이 되었을지도.

그래서 이 책이 조금 불편하다.

 

8. 빈민의 공통점은 종교에(정확히는 교회에) 의지하는 점인 것 같다.

 

아빠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제공했다알코올 중독자들에게는 공동체 모임을 지원함으로써 그들이 홀로 중독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했다임신부에게는 무료 숙소를 마련해주고직업교육과 육아 수업을 제공했다누군가 직장이 필요하면 교인이 직접 일자리를 마련해주거나 소개해줬다아빠가 재정난에 빠졌을 때도 교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몇 푼씩 모아 아빠의 가족에게 중고차를 사줬다나를 둘러싸고 있던 무너진 세상에서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종교는 신도들이 순조롭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다.

 

J. D. 밴스힐빌리의 노래흐름출판, 2017, p. 164

 

맨몸으로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기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할머니 가족을 통해 보면 교회로또 복권생명 보험인 듯하다금선 할머니는 평생을 교회에 의지하며 살았다사당동에 정착해서 교회에 마음을 붙이고 살았고 계 모임도 교인 중심으로 꾸렸다상계동으로 이사 온 뒤에도 교회는 사당동으로 갔다영주 씨 또한 교회가 의지처다야간 신학교 다니는 동안 낮에 일하면서 번 돈의 십일조는 교회에 냈고 약간 모은 돈은 모두 신학교 등록금에 소진했다전도사-부목사-담임목사에 이르는 목회자 길을 꿈꿨지만 전도사 자리도 얻지 못했다영주 씨는 지금도 일용직 노동자로 전전하지만 여전히 수입에서 십일조를 교회에 바치는 일은 꼭 지키려고 한다할머니가 아무리 어려운 살림에서도 십일조를 거른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조은사당동 더하기 25또 하나의 문화, 2012, p. 277-278

 

, 쓰고 보니, 쓰바. 미국 교회는 밴스가 살아가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줬는데 한국 교회는 이 가난한 가족에게서 십일조를 뜯어갔다. 천벌 받아라. 심지어 영주 씨가 다닌 야간 신학교는 무허가, 무인가 학교이기까지 했다. 너무한 거 아니니.

 

9. 가난은 꿈의 크기마저 축소시킨다. 인도 빈민가 출신 소년이 퀴즈쇼에서 우승을 하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에서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에게 가장 큰 꿈은 우리를 지배하는 사람처럼 되는 것이었다선생이 우리에게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비행기 조송사나 수상은행가나 배우가 되겠다고 대답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모두가 요리사나 청소부체육선생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그나마 용기있는 아이가 원장을 꿈꾸었다이처럼 소년원은 우리의 꿈까지 꺾어버렸다.

 

비카스 스와루프Q & A문학동네, 2009, p. 114

 

사당동 사람들의 꿈도 그러하다.

 

이들 계층에서 비교적 공부 잘하고 말썽 안 부리는 자녀를 둔 경우아들은 경찰이나 기능공딸은 간호사·공무원·유치원 교사 등을 꿈꾼다대체로 4년제 대학에 진학한 경우는 드물고 전문대에 가서 기능공이나 간호사 자격을 따거나 작은 회사의 회사원이 되면 자식 농사 잘 지었다고 말한다.

 

조은사당동 더하기 25또 하나의 문화, 2012, p. 160

 

이런 소박한 꿈의 결정판은 영주씨가 아들을 보고 하는 말이다. 영주씨의 아내 지지는 필리핀 출신의 결혼 이주 여성이다.

 

영주 씨는 지지 씨가 출산한 날꿈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아이가 선생님… 교수처럼 큰 그런 선생님 말고 영어 선생님이 되는 거라고 답했다지지 씨가 영어를 하기 때문에 아들 재성의 영어 교육에 힘이 될 거라고 많이 기대하고 있다.

 

조은사당동 더하기 25또 하나의 문화, 2012, p. 264-265

 

이걸 참.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영주 씨의 아들 재성이는 무려 2008년생이다. 선생님이라는 꿈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교수는 안 된다고 지레 선을 긋고 시작하는 그를 안타까워해야 하나 답답하다 해야 하나.

 



10. 가난 끝판왕은 인도에 있다. 이 책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인도 빈민가의 이야기다. 인도 빈민의 실상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인상적이지만 그보다 이 책은 소설적 재미가 넘쳐난다. 비카스 스와루프의 소설과는 또 다른 재미가. 둘 중 어느게 더 낫니. 라고 물으면 이 책을 택하겠다.

 

압둘의 정확한 나이는 제루니사도 몰랐다이번 사건이 있기 전까지 누가 장남이 몇 살이냐고 물으면 열 일곱 살이라고 대답했지만어쩌면 스물일곱 살일지도 몰랐다아이들 입에 먹을 걸 넣어주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그 아이들이 몇 살인지 기억할 여력이 없었다안나와디의 많은 어머니들이 그렇게 아이들을 키웠다.

 

캐서린 부안나와디의 아이들강수정 역반비, 2014, p. 195

 

자신이 낳은 아이의 생일은 커녕 나이조차 모르는 삶이라니.

 

11.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할수록 경제적 불평등은 커져 갈 것이고 상대적 박탈감도 커져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생각 조차, 나의 상상력의 한계였다. 조은이 관찰한 금선 할머니의 손자녀에게 집을 그려보라고 했을 때 그들이 그린 집의 방은 세 개였다. 심지어 영주 씨는 넓은 방이 2개가 있는 궁궐’ (p. 261) 이라는 표현까지 쓴다. 방이 두 갠 데 심지어 넓기 까지 하면 궁궐이란다. 영주 씨의 동생이자 덕주 씨의 누나인 은주 씨는(나와 동갑이다, 그녀는.) ‘지하 셋방이나 임대 아파트 외의 집은 텔레비전에서나 보았고 실제로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p. 249) 상대적 박탈감이고 나발이고 비교의 대상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

 

12. 우리말에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다. 가난의 가장 비참한 점은 그 희망없음에 있지 않을까. 물론 J.D 밴스처럼 스스로의 가난을 떨치고 일어나 계층이동에 성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냉철한 사회학자 조은은 후기에서 말한다.

 

한 번쯤 더 이 가족에 대한 다큐를 만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그러나 25년에 몇 년이 더해져도 같은 이야기를 쓰게 될지 모른다그 점이 두렵다. 25년이 더 더해져도 그럴지도 모른다.

 

조은사당동 더하기 25또 하나의 문화, 2012, p. 321

 

슬프다.

 

13. 동행류의 TV프로그램을 보면서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많다. 저렇게 사니 가난하지, 라는 힐난조의 말을 들은 적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남의 이야기 일 때는 그럴 수 있다. 이에 대해서도 조은은 아주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가난함의 경험은 그 가난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지만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활양식인 것이다.

 

조은사당동 더하기 25또 하나의 문화, 2012, p. 310

 

가난해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두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사니 가난하다, 라고 말을 한다.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다. 정확히는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는 악순환의 반복이 가난이다.

 

14. 생각해 볼 지점이 많은 책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겁나 재미있고 잘 읽히는 책들이다. 믿으시라. 특히 다른 책은 뭐 그럭저럭 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으니 재미있는게 당연하다 쳐도, 조은의 책은 사회학 보고서인데도 재미있다, 술술 읽힌다. 꼭 한번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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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0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고 있는데 고민의 지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가난해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두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사니 가난하다라는 말이 뭐가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어요. 역시 알라디너님들은 생각의 폭을 넓혀주시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

아시마 2021-02-03 20:47   좋아요 1 | URL
농촌 결혼이주여성들의 삶이 한참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잖아요.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에서 매매혼을 통해 한국으로 이주하는 여성들. 아버지뻘되는 남자와 살면서 그 남자의 어머니까지 봉양하는 와중에 고강도의 농촌 노동이 예비된 그 가난한 남자에게 왜 시집을 올까. 했더니 누가 그러더군요. 가난의 수준이 달라. 한국은 세탁기가 최신기종이냐 아니냐로 가난한 건데 그 나란 세탁기가 아예 없어. 그런 가난이야. 라고. 꽤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었어요. 그때 생각했죠. 가난을 내가 모른다고. 저도 뭐 그닥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 가난이란 거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근데 더 충격적이었던 지점이 가난한 사람들 역시 평범을 모른단 사실이었어요.
조은 교수는 덕주씨가 자긴 중산층 같다고 하는 말에 충격을 받는데(서민도 아니고 중산층이요) 그가 받은 충격만큼 저도 받았어요. 뭐랄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하지 싶어 난감한.
근데 이 이야기가 한세대 전도 아니고, 동남아 가난한 나라 얘기도 아니고 동시대 서울의, 나와 동년배의 사람들에게 현재 진행되는 얘기라는게 놀라웠어요. 진심으로.

저는 초중등 의무교육의 힘을 꽤 강하게 믿는 편인데, 새삼 알았네요. 그 교육조차 받지 않는 사람이 아직도 있단걸.

음... 조선희의 단편집은 아주 오래전에 읽었었는데, 그땐 이해한다 생각했던 구절들이, 오 나 전혀 이해 못하고 있었던 거군 하고 느끼게 된 놀라운 독서 경험이기도.

얄라알라 2021-02-0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 한 편에 이렇게 깊고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니!!!

얄라알라 2021-03-08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