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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리커버 에디션)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절판
읽은 날 : 2024. 1. 28
‘후일담 소설’ 이라는 게 하나의 장르가 되던 시기가 있었다. 학생운동의 전통(?)이 1996년 여름 연대항쟁(연대사태?)로 장렬하게 막을 내리고, 음, 이 표현에 대해서는 여러 재론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그 이후로도 학생 운동은 꽤 격렬하게 이어졌으니까-내가 체감하는 것은 그때가 꺾이는 시점이다. 1998년 IMF라는 국가부도 사태가 이어지면서 세상이 변하고 대학생도 변했다.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고 ‘내가 철들어 간다는 것이 제 한몸의 평안을 위해 세상에 적당히 길드는 거라면 내 결코 철들지 않겠다(새시대 청춘송가 中)’던 대학생들이 각자도생을 위해 공장이 아닌 노량진 고시원으로 스며들고 더 이상은 ‘다쓰현(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이니 뭐니 하는 책이 대학가 신입생의 필독 금서(아, 필독 금서라니. 이 웃긴 표현이라니.)가 아니게 된 시절과 맞물려 그 후일담 소설들은 주로 여성 필자에 의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설가 공지영도 그 시절에는 ‘후일담 소설’의 선봉장이었다. 그래서 이 후일담 소설들은 엄청난 비난 공세에 직면하기도 한다. 학생운동의 경험을 팔아먹는다는. ‘후일담 소설’은 가장 쉽고도 명쾌하고 명료한 비난이었다, 그 시절에.
권여선의 첫 번째 소설은 그 즈음에 나온다. 1996년, 제2회 상상문학상의 수상작이자 권여선의 데뷔작 『푸르른 틈새』는 그 뛰어난 솜씨에도 불구하고 후일담 소설의 멍에를 쓰고 권여선을 그렇고 그런 후일담 작가의 하나로 만들어 버렸다. 권여선으로서는 몹시 억울할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딱히 억울할 일도 아닌 게 그 이후로도 권여선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격렬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이었거나(『토우의 집』) 그 사람의 자녀(『레가토』)였으니까. 이쯤되면 아마도 권여선 본인이 그 학생운동의 한가운데 있던 사람이 아니었나 싶기도. 1965년생, 서울대 국문과 출신. 이러면 응, 그래 그럴만도. 싶다.
이 뜻하지 않은 한계 속에서 그 한계를 뛰어넘어 후일담 소설? 그게 뭔데? 라고 말하게 만드는 지점이 권여선의 힘이다.
이제는 후일담 소설을 쓰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후일담 소설에 대한 논의도 거의 없다. ‘후일담 소설’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들여다보는 권여선의 소설은 와, 이렇게 좋은 글을 써 내는 훌륭한 작가가 있구나 감탄하게 만든다. 진짜로 글 하나 끝장나게 잘 쓰는 작가다. 제 경배를 받으소서, 작가님.
평론가 김병익은 2007년 출간된 박완서의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 해설에서 ‘노년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내가 말하는 노년문학은 그냥 작가가 노년이라는 것, 혹은 단순히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노인이라는 것 이상의 것으로, 노인이기에 가능한 원숙한 세계인식, 삶에 대한 중후한 감수성, 이것들에 따르는 지혜와 관용과 이해의 정서가 품어져있는 작품 세계를 드러낼 경우를 말한다. 우리에게 이런 노년문학의 성립이 어려웠던 것은 전쟁과 가난으로 작가들이 장수하지 못하거나 조로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략
그들은 아마도 삶의 현장에서 부닥치는 치열한 행동이나 미숙한 연령들이 보이는 위험한 정열과는 다른 형태의 삶과 내면을 가지고 있으며, 그럼에도 그들도 분명 보편적인 인간다움을 누려야 할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아야 할 삶인 것이다.
김병익 해설 <험한 세상, 그리움으로 돌아가기> 박완서, 『친절한 복희씨』, 문학과 지성사, 2007, p.285-286
65년생 권여선은 2024년 현재, 환갑이 가까울 쉰 아홉 고개에 올랐다. 요즘 시세(?)로 결코 노년이라 할 수 없는 나이이니 이 소설집을 노년문학의 한 장르로 받아들이자는 말은 아니고, 작가와 함께 나이 먹어가는 주인공의 내면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일곱편의 작품이 실린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50대 중후반의, 한때 격렬했던 시대를 살아냈던 이 시대의 중년들이다. 김병익이 말한 ‘미숙한 연령들이 보이는 위험한 정열’의 시기를 거치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나이의 사람들.
“죽음을 가깝게 느꼈고 미래를 생각하는 일에 죄의식을 느꼈”(<기억의 왈츠>p.209)던 이십대를 보낸 주인공은 우연히 동생부부와 함께 찾아간 교외의 국수집에서 과거의 기억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최소한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그 처참한 비열함이라든가 차디찬 무심함을 어느 정도 가공”(<기억의 왈츠>p.230)했던 기억의 진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권여선에게 감탄하는 지점이 이곳이다. 세상에. 글을 어쩌면 이렇게 설득력 있게 잘 쓸까. 좋은 작품은 독자의 내면에 깊이 간직해 둔, 독자 본인도 간직해 둔줄 몰라 잊었던 기억을 건드린다.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 해 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이게 대체 뭐지, 그때의 내 감정이 어땠지하는 것을 가만가만 언어로 가지런히 풀어내 소설의 이야기에 기대어 나의 이야기를 정돈할 수 있게 해 준다.
사귀던 남자친구로부터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10년간 써 온 일기장을 받고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물, 과장된 연기만 하도록 태엽 감긴 무無”(p.235) 였던 주인공은 그 일기장 선물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미숙한 20대의 사랑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주인공이 남자친구 경서를 그 당시에 사랑했는가 아닌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내가 지키는 줄도 모르고 결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무내용이다. 아무것도 없는 개미굴 같은 폐광을 절대 굴착당하지 않으려고 철통같이 지켜내려 했던 그때의 내 헛된 결사성”(p.236)이다.
이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결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무내용, 아무것도 없는 개미굴.’ 20대의 정열을 다 바쳐 지키고자 했던 것이 50대가 되어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는 개미굴의 무내용이라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내 속은 그렇게 텅 비어있었는데.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인문대 깃발을 흔들며 행진하던 늘씬한 아가씨”(<무구>p.145)이자 4학년 1학기 때 학교를 그만두고 현장으로 가서 거기서 만난 사람과 결혼을 할 정도로 시대정신에 투철했던 현수는 딸 둘을 키우는 뚱뚱한 중년 여자가 되어 아마도 사기꾼에 가까울 시골 기획 부동산의 사무실에 앉아있는 여자가 되었다. 친구 남편의 정체에 관해 주인공 소미는 성격이나 버릇보다 학출일지 노출일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 마당에도, 이 지경에도 말이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던 길재 선생의 시조가 황당하게 떠올랐다. 세상이 바뀌었을까. 대통령이 바뀌고 고작 2년 만에, 인걸이 없다고 산천은 인걸이 없던 그 시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야말로 의구하게. 토지는 무구하다더니.
이렇게 글을 쓰면 이 책이 무슨,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에 대한 회한을 읊은 책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권여선은 이미, 후일담 소설과 무관한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는 작가다. 언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고 문장력과 구성력이 탁월하다. 무엇 하나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정말로 뛰어난 작가다. 작품이 작가를 반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권여선의 주인공들이 일정 부분 권여선을 닮을 수 밖에 없으니 20대의 치열함이 학생운동으로 드러났을 뿐, 권여선이 말하는 것은 세월이 흘렀고, 사람이 어떻게 변화해 가느냐, 또는 변하지 않느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권여선의 소설이 정말로 빼어나다는 사실. 그러니까 나는 이 리뷰를 처음부터 끝까지 권여선 찬양을 하려는 목적으로 쓰고 있다. 다시한번, 저의 경배를 받으세요, 작가님. 작가님 글 진짜 최고예요.
뭐 별로 궁금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1996년 연대사태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자 한총련 대변인이었던 박병언씨(군? 님?)는 변호사가 되었다. 이걸 왜 알려주냐고? 그냥... 진짜 말 그대로 그냥. 난 가끔 누군가의 후일담이 궁금하기도 하더라고. 그때 그 사람은 지금 뭘하나. 하는. 혹시 나처럼 궁금한 사람 있을까 봐. 이게 뭐 어쨌다가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