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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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 2024. 1. 21

 

어린왕자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생떽쥐베리는 모든 것은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마침내 완성된다는 말을 했다. 대표작을 꼽을 수 없을만큼 모든 소설이 다 대표작이 될 소설가 스티븐 킹은 초고에서 10%를 덜어내는 것이 자기 글의 수정 목표라고도 했다. 모든 좋은 글은 덧붙여 쓰는 것이 아니라 쓴 것을 삭제하는 데서 완성되는 모양이다.

 

김연수의 단편집 두 권을 연달아 읽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이 책. 전작이 전형적인 단편소설집(8편이 실렸다)이라면 이번 책은 무려 20편의 짧은 엽편 소설을 모았다. 책 말미에 붙어있는 작가의 말대로라면 가파도의 창작 레지던시에 머물던 중에 제주도 대정읍의 작은 서점에서 낭독회를 열었고(창작 레지던시에 묵던 작가들의 의무였단다), 그때의 경험 이후 소설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산문보다는 소설을 더 많이 쓰게 됐다. 강연회보다는 막 지은 짧은 소설을 읽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낭독회를 더 자주 하게 됐다’(p.297) 고 한다. 짧으면 십분, 길면 한 시간이 넘도록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다.

 

그렇게 가볍지 않은 내용들을 담고 있음에도 소설집은 경쾌하게 넘어간다. 주변부의 서술들을 깍아낼 수 있을만큼 쳐 낸 뒤 더 이상 뺄 것이 없을것 같은 글들이다. 기승전결이 명확한 글도 있지만 전개의 어느 한 부분만을 뚝 잘라낸 것 같은 글도 있고, 결말 없이 절정에서 느닷없이 툭 끝나버린 것 같은 글도 있다. 그 이후는 당신의 상상에 맡깁니다, 하듯. 그야말로 소설을 읽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것에 적합한 글이다.

 

마치 스타카토 같다. 음표 위에 점을 뚝뚝 찍어 끊어 노래하는. 앞 뒤 음표와 상관없이 단독자로 존재하는 음. 그럼에도 소설은 전체적으로 다정하다. 그 다정함 덕분에 단독자로 존재하는 음 하나 하나가 어울려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든다.

 

글쓰기는 인식이며, 인식은 창조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 말한 것도 다정함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이유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p.113)

 

소설과 산문을 혼동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아마도 2020년 봄-여름으로 넘어가던 어느 무렵에 연수씨는 여든이 넘은 어머니를 잃은 것 같다. 소설집의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았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어머니를 잃은 중년 아들의 사모곡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아픔을 의연하게 바라보고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을 다정하게 위로하려는 것으로 읽혔다. , 그참 저참 나 스스로도 위로를 하고 말이다. 세상에는 내가 죽고 난 뒤에도 너무나 많은 여름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내가 죽은 뒤에도 그럴진대 어머니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통조림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사실 겉에 붙은 라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누군가에 대해 말할 때도 그의 본성이 아니라 드러난 태도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과거는 밀봉된 채 선반 뒤에 올려놓은 통조림과 같아. 그래서 우리는 라벨만 보며 얘기하는 거지. 하지만 거기 통조림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p.78-79)

 

작가에 대해, 그 작품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대지만, 실은 우리가 통조림에 대해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작가의 작품을 읽을 뿐, 그 작가의 내면에 가 닿지는 못한다. 짐작만 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연수씨, 다정한 작품 고마워요.


어머니를 잃은 이후에 쓴 소설이라 그런가 실존과 인식에 관한 글들이 많았다. 삶과 죽음, 살아있음과 인지에 관한 생각을 해 볼만한 그런 글. 여전히 그의 문재는 빛을 발하고.

 

우리가 감각 하는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크거나 절대적으로 작은 것이 없어. 멀고 가까운 것만 있는 거야. 그러니 어떤 대상의 크기는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 있어. 그 위치가 우리의 의지를 뜻해.

<풍화에 대하여> p.137

 

누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떤 별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예요.”

<거기 까만 부분에> p.238

 

아마도 세월호 희생자에 관한 이야기이지 싶었던 <거기 까만 부분에> 라는 소설은 아름다웠다. 김연수만이 써 낼수 있는 글이라는 생각도 했고,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울지 않고, 찡그리지 않고, 회피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읽은 세월호 관련 글이기도 했다.

 

고등학생 시진이가 죽었다. 엄마는 시진이가 남긴 흔적을 찾으려 애쓰다 어느날 시진이를 수목장 한 나무 앞에 놓인 주희가 쓴 편지를 발견한다. 거기에 시진이의 사진 이야기가 있었고, 엄마는 그 사진을 주희에게서 얻었다. 하지만 거기에 시진이는 없다. 그저 새까만 부분만 있을 뿐. 그러나 주희는 그 새까만 부분에 있는 시진이를 볼 수 있다.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있는 것, 누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비단 별만일까.

 

한번 깨어나게 되면 제 쪽으로는 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렇게 마른 상태에 대해 알게 되죠. 그러면 이전까지의 삶이 젖은 상태였다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되고요. 마른 상태일 때의 저는 생각을 믿지 않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플롯으로만 보입니다. 기승전결, 모든 일들은 어떤 결론으로 향하는 과정이지요.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다만 안심과 침묵만 남습니다.”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 p. 105

 

아내의 의료과실로 인한 죽음으로 인해 공황장애를 겪게 된 코메디언 신기철의 이야기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슬픔과 울음도 진실이고 이야기 속에 있다는 것도 진실이다. 이야기는 끝이 있는 거니까. 그 이야기에 젖지 않고 들어가는 것, 그것이 그 상실을 겪고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인 거다.

 

리뷰를 쓰면서 생각했다. 연수씨, 당신 어머니를 잃고 참 많이 힘들었구나. 이제는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서 보이지 않으나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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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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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 2023. 12. 22

 

헤밍웨이의 여섯 단어로 유명한 소설이 있다. 이것이 실화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도 있고, 이 소설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한 이야기도 분분하지만, 그 여섯 단어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풍성하고 여운이 길다.

헤밍웨이는 수식어를 배제한 짧은 문장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인데(소설가 김훈은 그의 문장을 뼈다귀만으로 이루어진 문장이라 평한 바 있다.) 영미문학사에서 그러한 문장을 구사한 최초의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래서일까, 다른 작가들 및 평론가들과 10단어 미만의 단어로 소설을 써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내기를 했고, 그는 여섯 단어의 소설을 써 내어 그 내기에 이겼다고 한다.(다른 버전으로는 친구와 술자리에서 6단어 만으로 사람들을 울릴 수 있는가에 대해 내기를 했고, 헤밍웨이는 냅킨에 이 짧은 소설을 써서 친구를 울렸다고)

 

그 여섯 단어의 소설이 이것이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이 여섯 단어, 세 줄의 문장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위력적이다. 무엇도 서술하고 있지 않음으로 되려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다. 임신을 기다리며 아이의 신발을 구입하는 부부의 설레임, 임신이 된 것을 알았을 때 아기 신발을 선물 받았을 기쁨, 아이는 사산되었을 수도, 태어났지만 신발을 신을 필요가 있을 때가 되기 전에 죽었을 수도 있다. 아이의 신발을 팔아야만 할 만큼 가난한 부부였을 수도 있고, 단지 집안에 남아있는 아이의 흔적을 견딜 수 없지만 차마 버리지는 못하여 누군가에게 파는 것일 수도 있다.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엄마 또는 아빠,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상대방은 싸웠을까, 그로 인해 관계가 멀어졌을 수도, 같은 아픔을 공유하면서 그 관계가 더 밀착되었을 수도. 무엇을 상상하건 독자의 자유이고 각자의 상황으로 이 문장을 풀어내면서 우리 안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절제의 힘이다.

 

지난 연말에 클레어 키건의 소설 두 권을 연달아 읽었다. 맡겨진 소녀이처럼 사소한 것들. 사실 맡겨진 소녀가 나왔을 때 만 해도 딱히 읽을 생각이 없었는데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시끄러울 정도로 여기저기서 말을 해 댔다. 뭐라더라. 출간 8일 만에 조선일보 올해의 책으로 선정이 되었다던가. 알라딘의 광고 문구였다. 아니 대체 뭐 어떤 소설이길래 이렇게들 시끄러운가 싶어 두 권을 함께 구입했고 연달아 읽었다.

 

맡겨진 소녀를 읽는 내내 황순원의 <소나기>를 생각했다. 아마 책 날개에 있던 출간 이래로 교과과정에 줄곧 포함되어 아일랜드에서는 모두가 읽는 소설로 자리잡았다는 문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 교과서에 실릴만한 깔끔하고 단정하게 잘 쓴 소설이네. 마치 <소나기>처럼. 뺄 곳 하나 없고 덧붙일 것 하나 없이 완전하고 완결된 매끈한 소설. 절제된 묘사와 풍부한 은유. 마지막 장면의 중의성은 압권이었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다산책방, 2023, p.98

 

내가 경고한 가 나를 안고 있는 킨셀라 아저씨라면 아빠가 오고 있으니 이만 당신의 감정을 추스르라는 말일 것이다. 너와 나의 감정을 나의 생물학적 아빠에게 들키지 말고 오롯이 당신과 나의 비밀로 간직하자는 이야기. 그리고 두 번째 부른 아빠는 킨셀라 아저씨에게 들려주는 호칭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나의 진짜아빠. 라는.

 

내가 경고한 가 우리-나와 나를 안고 있는 킨셀라 아저씨-에게 다가오고 있는 나의 생물학적 아빠라면 잠시 그곳에 멈추라는 경고일 것이다. 나를 안고 있는 이 사람과 내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니 그곳에 멈추라는. 그리고 두 번째 부르는 아빠는 킨셀라 아저씨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나의 생물학적 아빠가 오고 있으니 감정을 추스르자고.

 

작가는 이 중의성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장면을 열어 둘 뿐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독자의 상상에 맡김으로써 이 장면의 이야기를 훨씬 풍성하게 만들어 낸다. 내가 경고한 가 누구냐에 따라 아빠를 부르는 어조는 전혀 달라질 것이다. 이것을 음성으로 듣지 못하고 문자로만 읽기에 독자는 그 어조를 마음껏 상상해 낼 수 있다. 나와 킨셀라 아저씨와 아빠의 표정이 묘사되지 않았기에 더욱 풍부해진다. 경고하는 아빠와 부르는 아빠라니. , 이 작가 천재로세.

 

이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전작만큼 서술을 절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제목 그대로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만을 하는 것으로 거대한 중심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오히려 부각시키는 효과를 얻는다.

 

주인공 빌 펄롱은 부유한 미망인 미시즈 윌슨의 집 가정부로 일하던 열여섯살 엄마의 미혼자녀로 태어난다. ‘펄롱 엄마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가족들은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미시즈 윌슨은 엄마를 해고하지 않고 계속 그 집에 지내며 일할 수 있게 해 줬다. 펄롱이 태어난 날, 아침에 엄마를 병원에 데려가고 또 둘을 함께 집으로 데려온 사람도 미시즈 윌슨이었다.’(p.15-16) 가족은 펄롱의 엄마를 버리지만 미시즈 윌슨은 그 모자를 거둔다. 그렇다고 뭐 엄청난 선행을 베푼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일자리와 잘 곳을 제공했을 뿐. 미시즈 윌슨의 덕에 그럭저럭 잘 자라 지금은 아내도 있고 딸도 다섯이나 둔 가장이 되었다. 그래서 펄롱은 자신의 친부가 누구인가 하는 거대하고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두고 안전하게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p.22)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p.24) 사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빈 주먹으로 태어나 최악의 환경에서 그래도 안정된 직장과 직업, 아내와 다섯 딸을 둔 안정을 일궈낸 소시민 빌 펄롱은 현재 자신이 얼마나 안정되어 있는지 알고 있고 이 안정이 사실은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 위에 있는지도 알기에 더욱 조심하며 살려 한다. 그럼에도 그는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p.44) 버섯 공장에서 일하던 때의 반복된 일상에 가슴이 쿵 내려 앉았던 기억을 아내와 공유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욕구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의 그러한 소시민적 일상의 반복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은 크리스마스 즈음 방문하게 된 수녀원에서 만난 소녀들 때문이다. 아마도 그에게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들었을. 어머니가 받았던 미시즈 윌슨의 건조하지만 차갑지 않았던 호의와 돌봄이 그 소녀들에게는 없었다. 그는 드디어 어리석은 욕구를 참지 못하고 아내 아일린에게 그 소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만 아일린은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 아일린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p.55) 라고.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고, 당신은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p.57)이었던 미시즈 윌슨이 아니니까. 그리고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아일린과 비슷할 것이다. 식당의 미시즈 케호가 그렇듯. “정말 열심히 살아서여기까지 온 빌 펄롱을 그녀는 열심히 일깨운다. “그곳하고 세인트 마거릿 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 뿐이라고.”(p.106)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 쉽게 일어난다는 말의 구체화 버전이다. 네가 조금만 잘못한다면 네 딸들은 세인트 마거릿 학교가 아니라 수녀원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그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 뿐이라고.

 

그러나 펄롱은 끝내 수녀원 소녀를 외면하지 못했다. 크리스마스의 저녁, 수녀원 소녀 세라를 구해 집으로 데리고 오던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p. 119-120)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을 했던 그는 그제야 드디어 알게 되는 것이다. 미시즈 윌슨이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

 

극소의 세계와 극대의 세계는 닿아있다. 미시즈 윌슨의 그토록 사소한 것들이 진짜로 사소한 것들이었을까. 한 인간을 구하는 것은 한 세계를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p.121)는 말로 이 소설은 끝이 나지만 아마도 펄롱의 그 순진한 마음과 믿음은 쉽게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와 수도원 사이의 담장이 펄롱의 삶 안에서 유지될 수 있었을지에 대해 자신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결말이 따뜻하게 읽히는 것은 미시즈 윌슨이, 네드가, 미시스 케호가 보여주는 사소한 것들의 역설이 펄롱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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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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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하게 되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by 무라카미 하루키

 

읽은 날 : 2024. 1. 19

 

내가 처음으로 읽은 하루키의 소설은 해적판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대학 1학년 때의 일이다. 1987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 소설은 1988년 한국에서 무려 세 개의 출판사에서 판권계약 없이(!!!) 해적판으로 번역 출간되었고, (다행히 1989년 문학사상사에서 정식 판권 계약을 하고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을 달고 정발되기는 한다.) 내가 읽은 것은 그 해적판 중의 한권이었다.

 

그때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이었고, 집에 내려갔다가 다시 서울로 복귀하기 전에 큰집에 들러 인사를 하러 간 참이었다. 큰집에 갔는데 인사를 드릴 큰아버지도 큰어머니도 계시지 않았고, 기다렸다 인사를 드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어른을 기다리면서 그 책을 읽은 거였다. 점심때는 지난 이른 오후 시간에 책을 잡았고, 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어른들은 귀가하지 않았다. 책이 끝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렇게 어두웠는데 내가 어떻게 책을 읽었지 싶게 어둑신한 방에서 망연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하루키는 해거름의 작가라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날 큰집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서울로 복귀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날 그 집에서 읽은 하루키의 책, 그 제목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니, 너무 세련됐잖아!

 

그 뒤, 하루키가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 작가가 되었음에도 나는 딱히 하루키를 찾아 읽지 않았다. 다른 좋은 소설도 많았으니까. 그랬던 나를 하루키 월드로 끌어들인 책은 2003년 출간된 해변의 카프카였다. 하루키의 작품치고는 별로 반응이 없었던(또는 좋지 않았던) 작품이었다는데, 나는 열광하며 읽었다. 가출 소년 카프카가 머물던 고무라 기념 도서관의 존재 때문에.

 

그래서 나는 이 책이 해변의 카프카의 연장 선상에서 읽혔다.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스핀오프가 아니라. 이계의 도서관이라니. 아니, 도서관이라는 이계라니 너무 매력적이잖아. 생각하면서. (작가 후기에서 카프카 이야기가 나올 것을 기대했는데 전혀 아니어서 조금 슬프기도)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p.11)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이어지는 열여섯, 열일곱 소년과 소녀의 달달한 연애담은 소설의 제목에 나오는 불확실한 벽에 둘러싸인 도시가 아마도 이 어린 연인이 만들어 낸 완결되고도 고립된 둘만의 세상이겠구나 상상하게 만들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길고 긴 편지를 주고 받는 어린 연인이 만나서 구축하는 이상향 같은. 그러나 하루키는 하루키답게, 그 예상을 깨부순다.

 

이 실제 세계’(p.18)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그 도시에는 실제 세계의 가 상실하는 열여섯의 가 있다. ‘그곳에서 시간은 의미가 없.’(p.703)한자리에 머물러 있’(p.737). 그 도시를 알려준 것은 열여섯의 이고 너와 함께 그 도시를 만들어 나간 것은 열일곱의 이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 M**이자 원래의 가 그렇듯. 너와 나는 열여섯 열일곱 때 만든 그 도시에 열여섯 열일곱의 모습으로 남게 된다.

 

언젠가 밤하늘에 떠 있는, 아니, 보이는 별들 중 많은 수가 실제로는 별의 생명을 다하여 이미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보는 건 몇십 몇백만 광년을 달려온 별의 빛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멍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분명 내 눈 앞에서 반짝이고 있는 저 별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미 사라진 별이라고? 저렇게 반짝이고 있는데 이미 없다고? 존재와 무존재가 엉망으로 뒤섞이던 느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어떤 행동도, 백만광년 떨어진 별의 외계인은 내 존재가 이미 사라진 뒤의 백만광년뒤에 볼텐데, 그럼 나는 백만광년을 사는 것인가. 하는 생각. 삶은 뭐고 죽음은 뭔가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인가 나는 백만광년을 달려 온 이미 사라진 별의 빛을 보고 있는데 그럼 저 별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현실은 하나만이 아니다. 현실이란 몇 개의 선택지 가운데 내가 스스로 골라잡아야 하는 것이다.’(p.725-726)라는 설명으로 하루키는 그 도시와 이 실제 세계, 열일곱의 나와 마흔다섯의 내가 동시에 분리 중첩되는 것을 설명해 낸다. 아니, 명확하게 분리시킨다. 실제세계의 는 열일곱의 나를 열여섯의 너와 함께 둘이 만든 도시에 남겨두고 실제세계로 돌아오기로 한다. 도대체 얼마만한 사랑이면 그 나이의 나를 뚝 잘라서까지 둘만의 완결된 세계에 남겨두고 싶어질까.

 

열여섯의 너를 잃은 는 불완전해진다. 그렇게 열일곱 이후 이 세상을 사는 내내 어딘가 한군데가 상실된 채로 이 세상을 겉돌며 살아간다. 그것은 어떻게해도 메꾸어지지 않는 상실이다. 끝내 열일곱의 나를 떼 내어 열여섯의 너를 다시 만나게 해 주고서야 완전해지는 그런 삶. 열일곱의 나와 분리되어 실제세계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쓸쓸해지는 것이 아니라 뭔가 안도감이 들었다. 이 세상에, 여러개의 현실중에 적어도 두 개의 현실에서 행복한 두 사람이 있겠구나 하는. 열여섯의 너와 만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의미없는 도시에서 영원히 나이 먹지 않고 살아갈 열일곱의 , 드디어 열여섯의 너를 상실한 아픔을 가진 열일곱의 나와 분리되어 아마도 커피숍 그녀와 행복할 마흔다섯의 둘 다 이제는 행복하겠구나, 하는 안도감.

 

다들 무언가를, 누군가를 원해요. 원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p.568)라는 나의 고백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해졌겠구나 하는 안도. 그렇게 안도하고 나니 뜻밖에 이 소설이 참 따뜻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문득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기묘한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을 계속 읽게 하는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의 소설은 본디 이렇게 따뜻하였구나, 하는 깨달음.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도서관, 이계의 도서관이든 도서관이라는 이계든.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아마 어디에도.(p.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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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01-20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 너무 반가워요. 저는 아직 <해변의 카프카>는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 책 도서관 이야기가 정말 좋았어요. 저는 마지막 장 덮으면서 하루키 나이를 계산하고 그가 장편을 한 권 더 쓸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하더라고요. 참 따뜻한 책이죠. 대학교 1학년 때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셨다니, 부럽네요. 저는 삼십 대 후반에 읽었답니다. ㅋㅋ 이게 하루키의 책은 딱 읽어줘야 하는 시기가 있는데 놓쳐 버린 것 같아 아쉬워요. 딱 그 나이의 감성이 있는데...

아시마 2024-01-21 03:44   좋아요 0 | URL
노르웨이의 숲은 대학 1학년 때 읽었지만 과연 그때 제가 그 책을 제대로 읽을만한 정신적인 수준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듭니다. 하하하. 전 그 뒤로 그 책을 몇 번 더 반복해 읽었는데, 매번 새로운 걸 발견하며 좋더라고요. 나와 함께 나이먹어가는 책 중에 하나예요, 저 한테는. 하루키가 어느 연령대의 말랑한 정신에 특화된 작가라는 점엔 저도 동의하는데, ㅎ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의 하루키와 30대의 하루키, 40대의 하루키는(독자 나이 기준이에요, 작가 나이가 아니라.ㅋㅋ 하루키는 별로 나이를 먹지 않는 작가죠.) 각자 다른 맛이 있는 것 같아요. (아. 그 측면에서 블랑카님은 20대의 하루키를 놓친 셈이시군요. 하하하) 어느 나이에 읽어도 그 나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 있어요. 좋은 작가죠.

<해변의 카프카> 저는 하루키 책 중 가장 좋았던 책인데, ㅎㅎ 별로 평이 좋진 않더라고요. ㅋㅋㅋ 전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아직 안 읽었습니다. 책장에 꽂아두고 언젠간 읽으리라 노려만 보고 있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꺼내 읽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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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러들럼 지음, 최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시대가 한참이나 지난, 구시대 스파이의 멋진 활약. ㅎㅎ 소설의 현재성이란 것에 관해 생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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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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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 2023. 8. 23

 

요즘은 각종 지식을 전달하는 유투버들을 지식소매상이라고 설명하는가 보다. 내가 아는 한 지식소매상이라는 희한한 명칭을 처음 쓴 사람은 유시민 작가다. 한때 정치인과 방송인이었다가 노무현(여전히 아픈 이름)의 그림자이자 호위기사로 꼽혔던, 문재인 정부 어용지식인을 자처하며 정치 외곽에서 문재인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모습으로 2008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명함에 새겼던 직함 지식소매상이 되었다.

 

나는 물론 순혈의 노무현 빠순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외치는 바 당연히 문재인 조국도 유시민과 함께 내 유구한 빠질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이유가 좀 다르다. 노무현을 기본에 깔고서 문재인과 조국을 추종하는 농반 진반의 제 1 이유는 잘;;; 생겨서 라면, 유시민을 추종하는 제1이유는 글을 잘 쓰기 때문이다. 이건 진담 100%

 

유시민이 지식소매상이라는 말을 처음 들고 나왔을 때, 사람들이 다들 대체 지식소매상이 뭔가요, 라는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단어 자체가 당시 꽤 오랜 화두였다. 지식을 만드는 사람(제조자, 창조자)이 있고, 그 지식의 도매상은 전공자들에게 그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라면 소매상은 일반인들이 그 지식을 어떻게든 알아먹고 소화시킬 수 있도록 전달해 주는 사람이라고 그 옛날 유시민의 말을 주워들은 기억으로 대충 재구성해 본다.(전적으로 내 기억에 의한 재구성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음 주의)

 

날카로운 논설, 단단한 논리 구조로 유명한 유시민이지만 뜻밖에도(뜻밖이 아닐 수도) 유시민은 비유와 유추에 매우 능하다. 비유 중에서도 대유법(제유법+환유법)을 기가 막히게 사용한다. 유추법 사용은 식상한 표현이지만,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할 만큼 탁월하다. 유시민의 이러한 능력이 원조 지식소매상이 될 수 있게하는 원동력이었다.

 

본래 비유는 표현하려는 사물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국문학자 구인환 선생이 말하고 있다. 유추법은 같은 종류의 것 또는 비슷한 것에 기초하여 다른 사물을 미루어 추측하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이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물이나 현상, 지식에 빗대어 최소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쪼개어 설명해 주는 것. 우리가 글쓰기에서 비유나 유추를 사용하는 이유다. 여기에 덧붙여 유시민의 가장 탁월한 능력 중 하나는 요약 정리다. 전체를 아울러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낼 수 있어야 요약을 잘 할 수 있다. 유시민은 이걸 잘한다.

 

글 쓰는 문과 남자유시민은 인문학만 공부해서는 온전한 교양인이 될 수 없다는 생각”(p.8)에 과학책을 읽기 시작했고, 이 책은 그 결과물의 모음집이다. 그는 이 책을 과학을 소재로 한 인문학 잡담’(p.9) 이라고 말하며 책의 서문을 연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인문학의 표준 질문이다. 그러나 인문학 지식만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먼저 살펴야 할 다른 질문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 이것은 과학의 질문이다. 묻고 대답하는 사유의 주체를 철학적 자아라고 하자. 철학적 자아는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인 몸에 깃들어 있다. 나를 알려면 몸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일반 명제로 확장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과학의 질문은 인문학의 질문에 선행한다. 인문학은 과학의 토대를 갖추어야 온전해진다.’

p. 47

 

이 부분에서 유시민 찬양에 온몸을 바쳤다.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이렇게나 명료하게 정리해내다니. 문과가 과학을 알아야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낼 줄 아는 아, 이 똘똘이 스머프.

 

이후 유시민은 뇌과학을 거쳐 생물학 화학 물리학을 지나 뿌리로 회귀하듯 수학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가 서문에서 말했듯 중요한 과학의 사실과 이론을 쉽고 정확하게 설명할 능력이 없으니 흥미롭게 본 사실, 내게 지적 자극과 정서적 감동을 준 이론, 인간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내 생각을 교정해 준 정보를 골라 나름의 해석을 얹었을 뿐’(p.9)인 글인데(, 이 너무 명확한 자기 인식이라 과공비례라는 말조차 못하게 되는, 또 한번, 이 똘똘이 스머프야.) 무지하게 재미있다. 유시민의 사유는 과학을 시작으로 역사와 종교와 인문학과 언어학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복잡한 이론을 딱 일반인의 수준으로 쉽게 풀어낸다. 어떻게 이런 글을 써 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여전히 나에게 유시민은 단순한 작가가 아니다. 단순한 개인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나에게 유시민은 언제나 노무현과 연관되는 이름이며 그래서 늘, 아프다. 그가 해맑게 웃고 있어도 그저 아프다. 2009년의 523일에 멈춰있는 이름이기도 하다. 애틋하고 아픈 손가락이라 어떤 글이든 가산점을 얹어주리 맘먹고 보게 되는 이름이기도 한데, 실제론 가산점을 얹을 수가 없다. 이미 그 글 자체로 만점이라.

 

유시민이 지식소매상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세상에 크게 외친 책.


2023.9.21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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