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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멍청함과 뻔뻔함 그 사이의 어딘가 『82년생 김지영』by. 조남주
다시 읽은 날 : 2024. 9. 17 (추석맞이 독서였다.)
2016년에 처음 출간돼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관련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어진 이 책을, 한참 붐이 일 때 한번 슥 읽고 그냥 던져두었었다. 내용은 둘째치고, 그냥, 올드했다는 기억만 남아있다. 나는 개별성을 가지지 못하는 주인공을 좋아하지 않는다. 김지영이어도 이지영이어도 김지현이어도 되는 주인공을 가진 소설은 선동이 된다. 물론 누군가는 써야 하는 소설이고 누군가는 읽어야 하는 소설이라는 점에서는 동의한다. 나름의 가치도 있다. 다만. 다만. 나는 쫌. 인 거다.
그런이유로 애초 읽을 생각이 전혀 없던 이 소설을 읽은 건 방송국 다큐프로그램 때문이었다. SBS 였나. 80년대생의 진짜 지영씨 몇 명을 모아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소설의 이야기가 정말 보편성을 획득하는가, 우리 사회가 정말 그러한가에 대한 탐색을 하는 다큐였는데 거기서 몹시 신선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같은 80년대생이고, 같은 여자고, 같은 지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가정 내 남녀차별이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진짜로 그런 경험을 한다고요?라고 눈이 동그래지는 그녀(그녀도 남자 형제가 있다)를 보며, 음, 이제 나도 한번 읽어볼 때가 되었어. 라며 처음 읽은 게 그때였다.
결혼 후 첫 명절이 설이었다. 두 번째 명절인 추석에는 첫애를 출산한 직후여서 명절을(정확히는 시댁 친정 양가 방문을) 패스했고, 세 번째 명절인 이듬해 설까지도 남편은 멀쩡히 나와 함께 시댁에 머물렀다. 그리고 네 번째 명절이었던 2007년의 추석이었다. 시댁에 도착한 저녁, 남편은 ‘친구 잠깐 만나고 올게’, 라고 말하더니 휙 나가버렸다. 내가 뭐가 어찌된 일인지 파악할 새도 없었다. 그 잠깐이 밤 12시가 넘은 시간인지 몰랐지, 나는. 아마도 그 이전 두 번의 설은 새신부이거나 아직도 너무 어린 아이가 딸린 나를 나름대로는 배려했던 모양이었다.
훗날 알게 된 거지만 결혼 전 남편의 본가 방문 패턴은 늘 그런 식이었다. 명절 전날이든 전전날이든 내려가서 집에는 얼굴만 휙 비춘 뒤,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 밤새 놀고 새벽에 들어가서는 자고, 다음날 밥 먹고 서울로 돌아가기. 미혼이거나 마누라를 홀로 시댁에 음식 하러 보낸 친구의 집에 모여 카드치고 노는 거다. 미혼인 것들이 그렇게 노는 거야 내 상관할 바는 아니고, 지 마누라 지 조상 제사상 음식 만들라고 지 집에 보내고도 지는 안가고 앉아 고등학교 동창들이랑 카드나 치고 앉은 그놈도 내 상관할 바 아니지만, 내 서방이 나를 지부모집에 혼자 버려두고 친구랑 노는 것, 이건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버버 이게 뭐지? 하고 있는데 남편은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인지가 전혀 없었고(마누라가 짜증이 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잘못하는 건 아니다는 기적의 논리였더라고.), 시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아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전혀 없고, 따라서 며느리인 내가 화를 낸다거나 황당해한다거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며느리는 시댁에서 애 보며 놀면되고, 아들은 간만에 내려와서 친구 만나서 놀면 되니 그분들 기준에서는 잘못된 일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결혼 후 네 번째 명절이 지나갔다. 새벽 두 시에 들어 온 남편은 본인이 나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 해맑은 태도에 나 역시 말 없이 넘어갔다. 뭐 어쨌든 그 당시엔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설마 그게 반복될 일인 줄은 모르고 말이다.
다섯 번째 명절인 2008년의 설이었다. 여전히 남편의 패턴을 모르고 있던 나는 설마 이번에도 나갈까 했는데 역시 이번 명절에도 남편은 저녁을 먹고는 홀연히 일어섰다. 친구 만나고 올게. 그리고는 새벽 네 시에 돌아왔다. 와. 사람이 눈이 돌아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실감을 했다. 사람이 너무 비현실적인 일을 당하면 화가 나기에 앞서 이 일이 무슨 일인가, 대체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상황을 돌아보게 된다. 토끼굴에 빠진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면 외눈박이 나라에 홀로 떨어진 두눈박이이거나. 그곳에선 남편의 행동이 너무나 당연해서 화를 낸들 나만 미친년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제야 반쯤은 짐작을 했다. 이게 남편의 명절 패턴이었구나, 하는 걸.
여섯 번째 명절인 2008년의 추석이 되었다. 나는 둘째를 임신한 임신부였다. 내려가는 길에 남편에게 물었다. “너 이번에도 나갈 거니?” 남편은 “글쎄.” 라며 대답을 미뤘다. 간다는 확답이 나오기 전에는 가네 마네로 싸울 일도 없으리라는 나름의 계산기를 두드린 대답이었다. 어차피 나갈 거 싸우고 나가기도 귀찮았을 거고, 남편이나 나나 싸움 앞에서 회피하는 성격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도 여전히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너 마고 나왔지. 나 마여고 나왔어. 내 친구도 여기 널리고 깔렸다. 너 친구 만나러 나가면 나도 친구 만나러 나갔다 올게.”
시댁에 도착했고, 점심을 먹었고, 쉬는데 남편이 또 친구 만나러 ‘잠깐’ 나갔다 올게. 했다. 그 썩을 놈의 잠깐. 나는 손을 내밀며 평온하게 말했다. “그래, 나갈 거면 차 키는 주고 나가라, 차는 내가 쓰게.” 남편은 내가 그만한 배짱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순순히 차 키를 내게 넘겼다. 그 차 키를 받고 잠깐 애를 돌보는 사이 남편은 시댁에서 종적을 감췄다. 시어머니에게 물었더니 친구 만나러 나갔단다. 그 길로 애를 안고 일어섰다. “어머님, 저도 친구 만나러 나갔다가 아범 들어올 때 같이 들어오겠습니다.”
그때 시댁에는 시부모님 두 분과 시아주버님 내외와 아직 어린 시조카가 있었다. 뜨악해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손윗 동서만이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얼굴로 잘 다녀와 동서. 했다.) 사람들을 뒤로 하고 그 길로 15분 거리의 친정으로 휙 가 버렸다. 친정 대문 앞에 차를 주차하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때가 4시쯤이었는데, 6시까지 들어 갈테니 가지 말고 시댁 있으란다. 상큼하게 답문자 날려줬다. ‘엄마집 앞 주차 중이야. 같이 들어가야 하니 들어갈 때 문자 남겨.’
엄마는 남편도 없이 혼자, 임신한 몸으로 큰애까지 달고, 예상보다 하루 일찍 도착한 나를 보고 놀랐지만, 이러저러해서 왔다고 설명하니 ‘잘했다.’ 딱 한 마디 하셨다.
엄마한테 맛있는 거 얻어먹으며 애랑 친정에 뒹구는 해피한 시간은 금방 갔다. 헉! 하고 시계를 보니 7시. 폰을 들어보니 남편은 6시 45분에 시댁에 들어간다는 문자를 남겨놓은 상태였다. 부랴부랴 시댁으로 복귀했더니 다들 앉아서 저녁을 먹고 있더라고. 아 진짜 치사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한테 밥 차려내라 안 한 거니 됐지 뭐. 게다가 난 친정에서 이미 거하게 먹고 온 상태라. 해사하게 웃어주며 말했다. “저는 밥을 먹고 와서요. 방에서 쉴게요.”
평온을 가장하고 있던 나의 속내는 그거였다. 내가 이혼을 했으면 했지 매번의 명절마다 이 꼴 보고는 안 산다고.
그날 저녁, 다음날 아침까지 손윗동서를 제외한 시댁의 모든 사람들은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시어머니가 사과를 깎아 나한테(임신한 나한테!) 먹어보라 말도 안 하고 아들에게(그 명절마다 기어나가던-이건 그냥 나가는 거 아니고 기어나가는 거 맞음- 아들에게!)만 갖다 바치는 걸 본 덕에 지금도 나는 사과를 볼 때마다 그 유치한 왕따놀이가 떠올라 웃는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나야 아쉬울 거 없어서 애 보고 동서랑 수다 떨다 점심을 먹고 일어섰다. 친정을 가자고 했더니 남편도 시모도 기가 질린 얼굴을 했다. 아니 그럼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잘못을 했어도 그렇지) 친정도 못가고 시댁에서 이 왕따를 당하며 벌을 서야 하느냐고. 남편은 시모의 눈치를 보더니 대뜸 나에게 다짐을 두듯 말했다. 내일 일찍 올라갈 거라고(그해 추석이 아마 뒤로 연휴가 길었던가 그랬다.) 그러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친정으로 넘어가는 차 안에서 우리 부부는 결혼 이후 처음으로 싸웠다. 남편은 자기가 뭘 그리 잘못한 거냐는 말로 시작했다. 그래서 여전히 산뜻하게 대답을 해 줬다.
“니가 잘못한 게 없으면 나도 잘못한 게 없지. 근데 넌 왜 차를 세우고 이러고 있지?”
남편의 말은 구구절절 이어졌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간 친구들과 지방에 남은 친구들이 만날 수 있는 때가 명절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내가 아는 친구(그러니까 서울로 올라가 서울에 자리잡은 친구들 말이다.)들도 다 그렇게 한단다. 내게 익숙한 이름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전날 했던 말을 또 했다. “니가 마고 나왔지. 내가 마여고 나왔어. 나도 여기 친구 많아, 여보.”
남편은 캄캄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다시, 처가에 가면 자길 처가에 버려두고 친구를 만나러 나가라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자긴 절대 불평하지 않겠다나.
“일 년에 며칠이나 엄마 얼굴 본다고 그 시간까지 잘라 친구 만나러 나가니.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친구를 왜 굳이 명절에 봐. 니 엄마는 왜 넌 안 봐도 되고 나는 봐야하는 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는 나 좋지 너 안좋아. 나 보고 싶지 너 안보고 싶다고. 널 혼자 처가에 버려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우리 엄마에게.”
남편은 다시 한번 주저리주저리 어제 뿐 아니라 지난 명절에도 지지난 명절에도 5년 전 명절에도 10년 전 명절에도, 20살 이후의 모든 명절에 동일한 시간을 보냈음을 말했다.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친구들도 다 그런다고. 그저 한숨이 나왔다. 지가 뭘 잘못했는 지도 모르고 지 마누라 마음이 어땠을지도 모르고 아니 이건 뭐 다수가 범죄를 저지르다보면 그게 범죄인지도 모르게 된다더니, 너도 나도 하다보니 뭐가 잘못인지도 모르는 딱, 그짝이었다.
조용히 말했다. 사실 싸울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내가 결혼을 말할 때 너한테 말했지. 난 못된 놈 하고는 살아도 멍청한 놈하고는 안 산다고.”
남편은 대꾸가 없었다. 여전히 조분조분 말했다.
“사람이 못되게 굴 수도 있지. 사람이니까, 사람은 원래 이기적인 거니까 잘못을 할 수도 있어. 그럼 얘기를 거기서부터 시작해야지. 잘못했으니까 그 대가로, 보상으로. 그렇게 나와야 대화가 되는 거지. 이게 잘못이다 아니다에 대한 합의부터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나는 못 해.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와. 이게 왜 잘못된 일인지를 내가 너에게 설명해야 해? 니가 잘못한 게 아니면 나도 잘못한 게 없어. 그럼 우린 더 말할 게 없지.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길래 처가 가는 길에 멈춰서 나 친정도 못 가게 이러고 있니?”
그 뒤 남편은 두 번 다시 명절에 나와 아이들을 놔두고 친구들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20년 결혼생활 동안 뒤집어보고 곱씹어봐도 내가 가장 잘 한 일은 그날 큰애를 들쳐 안고 친정으로 휙 가버린 일이다. 그리고 남편은 더 이상 멍청함을 가장한 뻔뻔한 짓을 ‘길게’ 하지는 않았다. 물론, 가끔은 한다. 그럴 때 나는 피식, 웃었다. 너 멍청하지 않은 거 알거든 하는 표정으로. 그럼 남편은 쪽 팔려서 그 뻔뻔한 짓을 더는 못했다. 내가 이 남자와 사는 가장 큰 이유는, 똑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일의 후폭풍은 어땠냐고? 시어머니는 똑똑한 사람이다. 본인의 아들이 그다지 잘한 행동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는 만큼의 똑똑함은 가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며느리가 그렇게 시댁에서 휙 가버릴 정도의 잘못을 아들이 한 건 아니라고 굳게 믿으셨다. 그리고 독하게 구는 마누라랑 사는 아들이 불쌍해서 나한테 그 시모다운 레파토리 1번 “남자들은 그럴 수 있지.”를 시전하셨다. 나는? 음, 시모와는 싸우지 않는다. 나와 동등한 수준의 교육을 받지 않은 분이니까. 인간평등, 남녀평등 사상은 놀랍게도 말이다, 교육의 산물이거든.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안나온 시모가 남자는 운운 하는 걸 나는 용납한다. 그러나 대학 나온 놈이 남자는 운운, 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남녀의 문제는, 대부분은 멍청함을 가장한 뻔뻔함에서 발생한다. 흔히 쓰는 말, 역지사지(易地思之). 쉽게들 하는 말이지만 이게 사실은 요즘으로 말하면 메타인지의 영역이고, 상상력의 영역이다. 나를 상대방의 입장에 놓고 상상해 보는 일, 쉬운 일 같지만 의외로 꽤 높은 사고수준을 요하는 일이다. 사고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은 역지사지를 하지 못한다. 진짜로, 진심으로 지능지수가 떨어져서 역지사지가 안 되는 사람들도 있다. 의외로 꽤 많다. (전체 인구의 15%가 경계성 지능인이라는 통계는 이미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가 아니고, 경계성 지능인이 아닌 다음에는 역지사지를 못한다면, 그건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거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은 맹자 사상의 핵심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돌아보고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인간은 이러한 수오지심을 타고 태어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하고, 남들이 좋은 사람으로 봐 주기를 바란다. 인간이란 본디 이기적인 존재여서, 나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때로 그건 옳기 만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옳고 그름은 분별하는데, 내가 옳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은 몰랐으면 좋겠고, 한걸음 더 나아가 나도 속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 수오지심 때문에 말이지. 그래서 뻔뻔해진다.
법률은 최소한의 도덕이다. 법률로 정해놓은 일은 내가 우기고 싶어도 이미 사회적 합의를 통해 그건 잘못이라고 못을 박아 놓았다. 이 말을 뒤집어서 말을 하자면, 법률로 정해져 있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도덕의 잣대를 뭉개고 우기고 싶어진다. 내가 뭘 잘못했어? 그럴 수 있지. 라고. 이 책, 지영씨의 시아버지가 그러는 것처럼.
대현이랑 수현이랑 우리 가족 다 같이 얼굴 보는 게 1년에 몇 번이나 된다고. 명절에 가족들하고 시간 보내는 게 그렇게 불만이냐? 그랬어?
(p. 18)
선은 단순하고 악은 복잡하다. 선과 악은 언제나 명징하다. 시집 간 내 딸이 친정에 왔으면, 시집 온 내 며느리도 이미 친정에 가 있거나 친정에 가는 길에 올랐어야 마땅하다. 그 어떤 경우라도 결혼한 시누이와 올케가 명절에 시댁(친정)에서 만나는 일은 비정상적인 일이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일을 옳지 않은 일, 악이라고 규정한다. 옳고 그름이 언제나 명징하게 나뉘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은 옳지 않은 일(악)을 옳은 일처럼 보이기 위해 온갖 잡다한 설명이 붙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본질(내 딸은 친정왔는데 며느리는 친정 못간)은 외면한 채 ‘명절에 가족들하고 시간 보내는’ 이라는 잡다한 이야기를 들이미는 정대현의 아버지는 이미 수오지심이 발동해 자신이 잘못했음을 알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잘못을 인정하기는 싫으니 뻔뻔함을 들고 나오는 것이다. 뻔뻔해지기 시작한 인간과는 대화하고 싶지가 않다. 본질은 절대 건드리지 않거든.
남편의 친구들에게(그리고 그 아내들에게도) 나는 한동안 꽤 화제의 인물이었다. 이런 저런 모임에서 만나게 되는 남편의 친구 아내들은 나에게 잘했다는 박수를 쳐 주는 것과 더불어, 남편의 친구들은 그래도 명절에 친구도 못만나게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냐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친구 만나지 못하게 한 적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떨떠름한 얼굴을 한다. 지들도 그 상황에서 며느리는 시부모랑 짝짝꿍하며 놀아주고 있어라, 라고 말하기는 쪽팔리거든. (참고로 말하자면, 내 남편이 빠졌지만 그 명절 모임은 여전히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아, 이 아이히만스러운 악의 평범성이라니. 한나 아렌트가 한국에 왔으면 참 할 말이 많을텐데.)
우리 법률은 시댁과 며느리의 관계를 선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남편이 죽으면 며느리는 시부모 부양의 책임이 없다. 애초에 며느리에게는 시부모 유산 상속권도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가족관계증명서에 등재도 되지 않는다. 선은 단순하고 악은 복잡하다니까. 아들이 부모와 놀아주지 않는다면 며느리가 시부모와 놀아줄 의무는 없는 거다.
나는 남의 딸이 내가 낳은 아들보다 더 반가운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핏줄이라는 건 무시무시한 인력과 척력을 가진 거거든. 나는 시부모님이 나보다 남편을 더 사랑하는 것을 인정하고 긍정한다. 울 엄마도 남편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나 역시도 시어머니보다 울 엄마가 더 좋거든. 가끔 남편에게 말해준다. “니가 울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내가 니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과 한치도 다르지 않아.” 처음 내가 그 말을 했을 때 남편은 “지금 싸우자는 거냐.” 고 물었다. 하하하. 모든 억지스런 짓거리는 동티가 나는 법이다. 아닌 건 아닌 거고 맞는 건 맞는 거다. 똘똘한 이 남자, 지금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문제는, 여자는 사해동포의 인류애를 처음부터 남자 두 배의 용량으로 가지고 태어났을 거라고 믿는, 또는 그래야한다고 강요하는 남성위주의 사고에서 발생한다. 여자니까, 라는 말은 그들에게 언제나 유효하다. 어떠한 의무와 붙어있는 남자니까 라는 말에는 길길이 날뛰는 남자일수록 그러한 불합리한 사고는 더욱 강력하다. 그러나 3000년 전 맹자가 말한 그 수오지심 말이다, 수오지심. 사실은 알거든. 3000년전에도 이미 알고 있었거든. 그때부터 계속계속, 알고 있거든. 잘못한다는 거. 그런데 멍청한 척하는 가면을 쓰고 뻔뻔해지는 거다.
아, 참 갈 길이 멀다. 나는 멍청한 인간을 혐오한다.
2024. 9. 18 by ash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