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문법 -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소준철 지음 / 푸른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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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사회학자 조은의 책 <사당동 더하기 25>를 기대하였는데. 음...... 그에 영영 못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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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은 기억이자 망각이야.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일단 한 번 몸에 배면 그 다음부터는 다시 되새길 필요가 사라지게 돼.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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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 않은 날이 더 많을 거야 - 삶에 서툰 나를 일으켜준 한마디
김지수 지음 / 흐름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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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불공평하다면 그건 모든 인간이 다르기 때문이며, 인생이 공평하다면 그건 사람들이 ‘자선‘과 ‘친절‘ 혹은 ‘자부심‘과 ‘용기로 그 형평을 맞추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건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절대적인 사실이 아니라, ‘공평하다는느낌‘ 그 자체에 있다. 그리고 ‘공평하다‘는 느낌은 훈련과 노력으로 가능하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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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집
김경해 지음 / 동아일보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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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겪은 모든 일은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는 그 위대한 말을 나는 절대적으로 믿는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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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누주드, 열살 이혼녀
누주드 무함마드 알리.델핀 미누이 지음, 문은실 옮김 / 바다출판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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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 중학교 때였나 <솔로몬의 딸>이라는 책을 읽었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로 제작되어 꽤 인기를 끌었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난 영화는 보지 않았고 소설만 읽었는데 20년도 더 옛날에 읽은 책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날 정도면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미국에서 이란인 남자 의사와 결혼해 살던 미국인 여성이 2주간의 방문으로 알고 남편의 고향인 이란에 간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방문이었는데 남편은 귀향이었던 것이 문제다. 미국에서는 20세기 말엽의 평범한 미국 남자처럼 행동하던 남편이 이란에 돌아가는 순간 전형적인(? 내가 아는 이슬람 남자들의 전형성이란 진짜 전형성 맞나. 그렇다면 좀 심한데.) 이란의 이슬람 남자가 된다. 미국인 아내의 외출을 금지하고 히잡을 강요한다. 주인공은 그것을 참고 견디다 어느날 딸을 데리고 이웃나라 터키의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한다. 그 탈주의 과정이 꽤나 스펙타클 했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문학으로 만나는(아라비안 나이트를 제외한다면) 이슬람과의 첫만남이었다. <솔로몬의 딸>에서 있었던 강제와 억압을 피해 탈주하는 여인의 이미지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2007년 소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서 변주되어 나타났다. 이번에는 이란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이다. 


라바니가 정권을 잡으면서 대법원은 이제 강경파 율법학자들로 채워졌다. 그들은 여자들에게 권한을 주었던 공산주의 시절의 법령을 폐지하고, 여자들에게 몸을 가리라고 명령하고 남자 친척 없이 여자들이 여행하는 걸 금지하고, 간통을 돌로 쳐 죽이는 엄격한 이슬람법에 기초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

"함시라, 당신은 여자가 달아나는 것이 범죄라는 것을 알고 있겠죠. 우리는 남편이 죽었다며 혼자 여행하는 여자들을 많이 봅니다. 사실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사실이 아니죠. 당신은 달아나는 것 때문에 감옥에 갇힐 수도 있어요. 그건 이해하겠죠?"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현대문학, 2007, p.350-359

나는 내 일생 중 5년을 이슬람 국가에서 산 적이 있다. 인구수로만 따진다면 최대의 이슬람 국가라는 인도네시아다. 그곳에서 이슬람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그다지 이슬람이 강하지 않은 곳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한국 음식 매니아를 자처하던 다인의 친구 엄마는 종종 돼지고기 요리를 주로 하던 한국 식당을 자신의 단골식당이라 말하기도 했으니까. 오히려 놀란 내가 어머, 거기 대부분 돼지고기인데? 라고 했더니 그녀는 짖궂게 윙크를 하며 킬킬 웃었다. 


재미있는 것은 가난한 사람(식모나 기사 말이다. 내가 접할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 봐야 그 정도지 뭐.)일수록 이슬람의 율령을 엄격하게 지키고 부유한 사람(주로 중국계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슬람교를 믿는. 인도네시안이지만 아이를 현지학교가 아닌 내 아이가 다니던 국제학교에 보내는 경제력을 가진)들은 대충, 헐렝하게 눙치고 들더라는 거. (사실 우리 식모 말고 거기서 사귄 내 친구 이슬람 여인들은 히잡도 쓰다 말다 했다. 식모만 기를 쓰고 쓰더라.)신기하고도 웃겼다. 그와는 별개로 가끔 마주치게 되는 부르카를 입은 여성들. 그녀들은 출입국 심사를 하는 곳에서도 여성이 하는 곳에서만 골라서 서고, 뒤집어 쓰고 있던 망토 같은 것으로 그 여성 심사원과 자신을 함께 가려 그 여성 외에는 누구도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만든 뒤에야 부르카를 열었다. 그런 장면, 여러번 봤다. 해외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여성들도 아프가니스탄인이면 그렇게 사나 보더라고. 


대체 뭐지, 이슬람이라는 이 종교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아프가니스탄 연작소설은 무척 재미있지만(천 개의 찬란한 태양, 연을 쫓는 아이, 그리고 산이 울렸다) 재미와는 별개로, 으아. 이슬람이란 종교는 대체 뭐지. 인간을 집단적으로 미치게 만드는 건가. 싶었다. 결국 국가의 발전과정에서 제정일치의 사회가 제정분리로 가는 것은 이성적이고 올바른 길이라고 다시한번 느끼게 만들기도 했고. 종교 원리주의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건가 싶고. 아, 할레드 호세이니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 망명한 뒤에야 이 소설들을 썼다. 


나는 종교의 본령을 마음의 평화라고 생각하는 쪽이어서. 이런식의 집단 광기는 굉장히 불편하다. 물론 이유야 있겠지. 여성 할례를 하고(슈퍼모델 와리스 디리의 책『사막의 꽃』에서 이 여성할례가 아주 자세히 묘사된다.) 눈조차 망사로 덮어버리는 부르카를 강요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거다. 인도네시안 친구에게 물으니 그것은 여성의 순결함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머리카락은 남편에게만 보일 수 있고 블라블라 설명하기는 했는데, 아니 머리카락과 순결이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번에도 그녀는 짖궂게 눈을 찡긋하며 전통이야! 했을 뿐. 그녀 스스로도 웃기다는 듯.(실제로 그녀는 잘 쓰고 다니지 않았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는 부르카가 아니라 머리카락만 가리는 히잡을 쓴다. 이슬람의 여성 얼굴 가리는 정도는 히잡:머리카락만 가림-니캅:눈만 내 놓음-부르카:눈 부위도 검은색 망사로 가림 순으로 심해지고, 여성의 의상에 대한 강제는 그 나라의 이슬람 원리주의의 척도로 보면 된다) 아니 왜 이런 짓을 하냐고. 대체. 


타 문화에 대한 존중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인권에 대한 압박과 연관되는 문화라면 과연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자꾸만 든다. 


이 책, 아홉살에 아버지의 강요로 인해 서른이 넘은 남자와 결혼을 하고, 열살도 되기 전에 성폭행에 노출되어야 했던 이 열살 이혼녀 누주드의 결혼도 아홉살 여인과 결혼한 마호메드에 의해 합리화 된다. 

"너무 어리다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아이샤와 결혼할 적에, 아이샤는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었다."

p. 61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와 결혼을 하면, 행복한 결혼 생활은 보장되는 것이다." 부족에 전해 내려오는 얘기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p. 85

설마. 진짜? 그 종교는 그렇게 가르친다고.


조혼의 풍습은 이슬람만의 것은 아니다. 몇백년전의 조선에도 있었고, 중국에도 있었다. 아직까지도 미개한(음, 어감이 별로군. 덜 개화한?) 중국의 어느 지역에서는 조혼풍습이 문제가 된다. 그럼에도 이슬람의 조혼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종교의 경전을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다. 마호멧(무함마드)이 아홉살짜리랑 결혼했으니. 라고. 음. 만약에 내가 이슬람 종교지도자라면 말이다. 그런 말을 하며 조혼을 정당화 하는 자의 입을 돌로 칠텐데. 종교를 이유로 부끄러운 짓을 정당화 하다니. 


나라 전체가 코로나19 방역으로 난리다. 이 와중에 돌올하게 문제를 일으키는 종교가 있다. 아주 시끄럽고 지겨워 죽겠다. 그야말로 "예수가 그러라고 시키드나." 묻고 싶어지게 만드는. 기독교인들 대체 왜 그러니. 라고 물으면 벌떼같이 댓글이 달린다. 일부 교인의 문제를 전체 종교로 치부하지 마세요. 라고. 아니 그 일부가 너무 많잖아. 기독교 왜 그러니 라는 말을 듣기 싫으면 그냥 내부에서 그러지 못하도록 말리면 된다.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그런 더러운 짓거리 하지 마세요, 라고 이야기 하면 된다. 일부라고 외치지 말고. 그리고 일부라기엔 너무 많다. 


몇몇 이슬람의 이름을 내세워 저질러지는 악행들에 대해 일부 이슬람만 그렇습니다, 이슬람은 평화로운 종교입니다. 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냥 안하게 말리면 된다. 이슬람 내부에서 자체 정화를 하려는 노력 없이 그들의 행위를 그냥 두면서, 일부 이슬람만 그렇습니다, 이슬람은 평화로운 종교입니다 라는 말은 좀, 음, 많이 웃긴다. 일부라기엔 너무 많은 자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 않나. 


그냥 좀, 답답해서 주저리 주저리 써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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