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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의 소설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먼저 어려운 어휘나 난해한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어떤 독자라도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소설의 소재도 특별하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사건은 그의 손을 통해 소설로 태어난다. 하지만 그의 소설이 쉽고 재미있기 때문에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쉽고, 재미있는 소재를 가지고 현대사회의 가족문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소외 문제 등 그 누구보다 진지한 주제를 이끌어내는 것은 그의 소설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이다.
그의 신작 소설은 남북 분단에 기인한 간첩문제를 소재로 했다. 북한출신의 김성환은 대학을 졸업하고 간첩교육을 받은 후 남한에 김기영이라는 이름으로 침투한다. 얼마간 그는 간첩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다. 하지만 북한에 있는 그의 상사가 사라짐에 따라 그도 더 이상 명령을 받지 못하는 '끈 떨어진'스파이로 살아가게 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는 남한에서 부인과 딸이 있으며 자그마한 회사도 운영하고 있는 평범한 중년남성으로 살아간다. 더 이상 북한에서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던 어느 날 그는 갑작스럽게 귀환명령을 받는다. 남은 시간은 하루, 그는 많은 고민과 선택을 요구받으며 단 하루 동안 그가 살아온 수십 년을 인생을 뒤돌아본다.
소설이 하루 만에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는 점에서 먼저 독자의 눈길을 끈다. 시간 단위로 나뉘어 있는 구성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독자 자신도 화자의 움직임을 바짝 따라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간이 굉장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움직임과 생각도 놓칠 수 없다. 게다가 주인공은 쫓기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 극단의 불안상태에 있기 때문에 긴장감은 극에 달한다.
주인공의 불안정한 상태는 소설의 막바지까지 유지되기 때문에 독자는 책을 읽으며 추리소설에서나 느낄 만한 궁금증과 긴장을 느끼게 된다. 과연 그가 받은 지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독자는 김기영과 함께 고민하고 선택하며 소설에 빠져들게 된다. 김영하 소설의 커다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적 재미'는 <빛의 제국>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빛의 제국>이 독자에게 긴장감과 재미를 가져다주는 이유는 비단 구성과 문체가 훌륭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 김기영이 겪고 있는 문제가 한반도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을 분단된 조국의 문제와 그에 따른 혼란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많은 부분 분단 상황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북한은 우리를 적화통일하려고 하는 주적이라는 교육을 끊임없이 받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같은 얼굴과 언어를 사용하는 도와주어야 할 '한민족'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 '의식화'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북한은 한때는 대한민국을 대신할 유일한 대안이었으며 이상향이었다. 지금도 그런 허상은 사라졌지만 북한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반이성적인 북한에 대한 이해와 갈등을 벌이며 살아가고 있다. 김기영이라는 인물은 북한으로 돌아갈 것인가, 이곳에 남을 것인가, 그곳에서 찾을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환원시켜 독자들의 갈등을 대신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있잖아, 아주 오래, 십 년 혹은 심지어 이십 년씩 장기 공연하는 연극들 있잖아. 형은 그런 연극에 너무 오래 출연해서 자기가 원래 누구였는지를 잊어버린 사람 같아. 낮에는 어떻게 살든지 간에, 밤에는 그 배역으로 사는 사람. 그러다보니 낮의 삶보다 밤의 삶이 더 일관성이 있는 거야. 왜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보면 주인공 대신 늙어가는 그림 있잖아? 원래 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난 모르겠어. 그렇지만 형은 이 배역을 너무 잘 소화한 나머지, 이제 배역과 구별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어. 그 초상화가 진짜면 도리언 그레이가 가짜인 것처럼 형도 이세계의 형이 진짜 형일 거야. 원래의 자기는 잊어버려." - p. 290.
북한과 남한사이에서 갈등하는 김기영의 고민은 결국 어느 쪽에서의 삶이 진짜 삶이었는가하는 문제로 돌아간다. 북한은 자신의 학창시절과 궁극적으로 남한에 온 이유를 제공한 곳이다. 그곳에는 그의 고향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남한은 공작을 위해 내려왔지만 이미 부인과 사랑스런 딸이 있으며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회사가 있는 곳이다. 인생의 전반기를 북한에서 살았다면 남한은 인생의 후반을 살아온 곳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그가 가진 기억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짜로 살았다고 생각한 남한에서의 삶도 그의 기억이 되어 김기영이라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가 있을 것이고,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빛의 제국>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인 분단과 그에 따른 한 인간의 상처를 건드리고 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작가는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인간의 정체성 문제와 삶을 구성하는 인생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