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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7월 3주

피서철이라 소름돋을 만한 공포영화나 블록버스터도 좋겠지만 저는 조금 다른 생각입니다. 저처럼 뜨거운 서울에 딱 붙어있어야 한다면 영화를 통해 바다에 가는 것도 좋겠습니다.  바다가 서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 세 편입니다.  

1. <그랑블루> 

언제나 다시 봐도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 영화입니다. 화면의 크기가 어떻든 화면은 푸른 바다로 종종 가득찹니다. 자크가 자면서 악몽을 꾸는 장면조차도 설렙니다.  

자크의 절대 고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또 이해 못 할 것도 없습니다. 경쟁이나 타이틀만 좇는 인간보다는 드넓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돌고래한테 교감을 느끼는 게, 지친 심신으로 휴가를 가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2. <지중해>   

도시인의 삶은 종종 전쟁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여름에 기를 쓰고 휴가지로 고생스럽게 찾아가는 이유도 휴전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아등바등한 일상을 잠시 잊고 낯선 곳 혹은 잠시 스쳐가는 사물들한테서 여유를 찾고자 하는 욕구 때문입니다. <지중해>는 우리가 휴가지에서 가져야할 자세를 알려줍니다.  

불시착한 비행기도 지중해의 한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나른하고도 유쾌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인생 동동 거릴 게 뭐 있나, 케세라세라, 하는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3. <태양은 가득히>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마지막 반전에 놀랐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청년 알랭 들롱의 미모와 그의 몸짓과 제스처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넋 놓고 그의 움직임을 따라갔습니다. 아름다운 청년에 배경은 또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잔잔한 지중해를 가르는 태양빛에, 비록 화면이지만 눈이 부셔서 눈을 잠시 감아야했습니다. 이제는 너무나 알려진 이야기가 돼버려 처음 봤을 때처럼 긴장감은 없지만 여전히 여름하면 떠오르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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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은 푸코 책을 좀 들여다봤다. 책을 읽을 때 목적 의식이 있는 건 참 중요하다. 공부할 때면 뭔가 건질 게 없나 열심히 사냥(?)했겠지만 지금은 어떤 결과도 강요받고 있지 않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뽀대나게 말하면 독서의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고 사실대로 말하면 마음이 허해서 이책 저책 보는 척할 뿐이다.-_-; 

어쨌거나 푸코는 끊임없이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첫째, 잘 이해가 안 가서 푸코 책을 읽고 있노라면 슬프지만 내가 그럴듯한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둘째, 푸코는 기존 질서 밖으로 배제된 사람 혹은 질서에 관심을 두고 글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지식의 고고학>을 읽으면서 분노와 함께 좌절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먼저, 민음사 관계자들이 혹시라도 이 페이퍼를 본다면 부탁한다. 한자를 제발 한글로 바꿔주길, 간절히 부탁한다. 글도 난해한데 불쑥 의미없이 튀어나오는 한자라니....한자 세대가 아닌 사람한테 한자는 또 다른 외국어다.ㅠ.ㅠ 

푸코의 글쓰기 스타일이 난해한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번역이 좋고 나쁨을 말하고 싶진 않다. 번역이란게 얼마나 힘든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외국어와 우리말에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있어서 잘해야 본전이고 못하면 욕만 바가지로 먹는 일이다. 게다가 원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사람들한테는 아무리 허접한 번역도 고마울 수 있다. 원전 비교해가면서 어떤 문장을 지적하는 이들은, 왜 자신들이 직접 번역하지 않은 채 오역만 문제 삼는지 정말 이해 안 간다.  

그러니까 이 책이 완벽한 번역이길 원하지도 않고 오역을 잡아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건 번역어 용어에 대한 아쉬움이다. 역자인 이정우님도 서문에 밝혔듯이, 프랑스의 교육체계는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 모든 학제가 사유와 글쓰기로 수렴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한국은 주입식 교육 환경이다. 사유는 배제하고 요점정리 위주로 공부시키는 학제에서 아무리 고등교육을 받아도 철학에 접근하는 일이 우주탐험만큼이나 신기한 일처럼 여겨진다. 우주탐험은 일반인한테 어려워도 염원되고 독특한 체험처럼, 철학서들은 일반인한테는 우주탐험 같은 효과가 있다. 어렵지만 나는 한다, 라는..ㅎ  

그러나 왜 우리는 철학서가 전문가만을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나? 나는 학자들 때문이라고 믿는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학자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있나, 싶기도 하다. 일단 대학에 자리잡으면 연구 따위는 나몰라라...젊었을 때 혹은 박사학위 논문시절 얻은 지식 단계에서 멈춰서 이후에는 정년퇴직할 때까지 우려먹는다. (근면한 학자들께는 싸잡아 말해서 죄송하다) 그러니 번역서의 질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번역서들이 박사학위 논문 시절 공부하는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게다가 전공이 다른 학문간의 교류는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같은 원전에서 같은 단어도 철학전공자과 문학전공자 간에 우리말로 다르게 번역된다. 한 사상가의 책이 당연히 각기 다른 번역자가 번역되는 경우가 많은데 일반 독자가 접근하다보면 거의 미칠지경에 이른다. 우리말 자체도 생소한데(이건 우리말 개념과 외국어 개념에서 오는 간극 때문이니까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알고보면 같은 단어를 우리말로 다르게 번역했다. 그러니 한 사상가의 책을 우리말로 읽는 건 무의미하고 일반인은 더더욱 다가갈 수 없고 전공자의 전유물이되고 한국에서 철학은 고리타분한 영역이 돼버린다.  

이 책도 언설이라는 말이 discours라는 걸 알고는 기겁을 했다. 나는 담론이라고 기억하는 말이다. 언설적인은 discoursive고.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물론 이정우님이 담론이란 말 대신 언설을 사용한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나 미학 등 한 사상가의 책을 번역할 때는 나름 전문가인 번역자들이 모임을 만들어 서로 토론도 좀 하고 한 사상가가 쓴 같은 어휘는 우리말로 한 용어로 통일을 해서 혼동을 줄였으면 좋겠다. 이들이 안 그러면 출판사에서라도 적극 나서야한다. 아니면 적어도 푸코 가이드 사전 쯤 한 권 만들어서 푸코의 용어에 대해 각 전공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쭉 훑을 수 있도록 해 주던가. 그러고는 인문학은 죽었네...하는데 내 보기엔 인문학은 출판사랑 학자들이 죽였다.  

학자들이야 누가 어떤 용어를 잘못 사용했네, 하고 원전 대조해가면서 지적질하는 게 본업아닌가. 일반인한테도 이런 태도를 요구하는 건 터무니없다. 읽으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고 오역까지 찾아내야하는 수고까지 필요로 하는 책이라면 당연히 외면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솔직히 불어 원전을 찾아보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들게끔 만들었고 이런 페이퍼를 쓰게 만들었다. 이 책은 왜 푸코가 광기의 역사, 성의 역사 등 사histoire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에 대한 해제다. 역사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서술한다.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이어주는 단위들이 푸코만의 용어를 사용해서 기술한다. 이런 기본적이 용어에서 질린다면 개념과 전체론으로 나아갈 수 없다. 아니면 이해하는 문장만으로 오독이 필수이니 푸코의 사상에는 다가가지도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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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estjh 2013-02-1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설 담론 그런 케이스는 정말 뼈저리게 공감되는군요..... 저도 경험해봣는데 다른 개념인줄 알고 얼마나 헤멨던지.....옆에다 괄호로 원어라도 써놓고 사전처럼 뜻이 될 수 있는 목록 몇 개 만들면 될텐데....

넙치 2013-02-24 15:15   좋아요 0 | URL
<지식의 고고학>은 도저히 못 읽겠더라구요.ㅠ.ㅠ
푸코의 <말과 사물>은 출간 당시 프랑스인들이 해변으로 휴가가서 읽을 정도로 베스트셀러라고 하던데, 그런 분위기까진 못 만들어도 번역자들이 조금만 더 수고해준다면 일반 독자가 철학적 사유에 한 발 다가갈 수 있을텐데요...

ㅁㄴㅇㅎ 2014-09-28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번역자의 양심 : 내용을 100%이해한 후 번역할 것. 번역자도 이해못한 내용을 독자는 절대 이해못한다.
 

 

 

 

 

 

 

1.  

난 음반에는 말이 필요없으며 리뷰는 더더욱 필요없다, 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조이 디비전의 음반은, 자판을 두드리고 싶게 만든다. 모던 락하고는 깊이가 다르다. 모던 락이 대체로 기분을 업시켜 주는 효과가 있는데 조이 디비전의 곡들을 듣고 있노라면 끝없는 심연으로 끌려들어가는 기분이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전체적 사운드와 이따금씩 두드러지는 드럼과 기타소리, 그리고 이안 커티스의 목소리....빠른 비트 속에서 공명하는 우울은, 시월 볕의 밝기와 바람 세기와 묘하게 어울린다. 요즘..우울하다.

2. 

조이 디비전을 알게 된 건 <컨트롤>이란 영화를 통해서였다. 이안 커티스의 일대기를 담은 흑백영화다. 음악영화라는 게 다른 요소들이 후져도 음악 하나만으로 일단 기본 점수는 깔고 들어간다. 이 영화 역시 완성도가 뛰어나진 않지만 이안 커티스의 매력과 조이 디비전의 음악에 대한 찬사를 끌어내기에는 충분하다.   

 

3.  

재킷 표지를 한참 들여다봤다.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을 비디오 클립같기도 하고 트뤼포의 <쥘 앤 짐> 장면 같기도 하다. 아래쪽 여분이 많고(눈처럼 보이기도 한다) 위쪽에 피사체를 오밀조밀하게 몰아넣은 구도, 나도 한 번 따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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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든 역사든 사histroy라는 건 앞선 이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미 써 놓은 자료나 책을 읽고 저자의 관점을 따라가든 말든 그건 독자의 권리이자 몫이고. 나는 왜 그림 읽어주는 책들을 기웃거리는가?하고 알베르토 망구엘 에세이를 읽으면서 생각해봤다.  

흔히들 하는 말, 그림 속에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기 때문이지만 그런 것 말고도 그림 읽어주는 글에서는 에세이스트의 관점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전문사가histrorian가 아니면 모든 그림 읽어주는 책은 에세이다. 에세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고만고만하다. 간략한 시대배경, 화가의 안 알려진 사생활 등등.... 큰 차이는 이런 비슷한 정보를 지닌 저자들이 어떤 식으로 화가에게 접근했는가다.  

망구엘의 이 책은 1년 쯤 됐는데 읽기 쉽지 않았다. 먼저 화가들이 낯선데다(아는 작가라고는 피카소와 카라바지오 뿐이다-.-;;) 망구엘의 관점도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림 얘기로 일단 시작하고는 삼천포로 빠지고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하는 편이다. 색깔있는 에세이를 쓰려고 화가들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각각이 독립된 챕터로 분리시킬 수 있어서 두고두고 읽어봐야 할 거 같다.

*조앤 미첼, 로베르 캉팽, 티나 모도티, 라비니아 폰타다, 필록 세누스, 알레이자디뉴, 피터 아이젠만등이 목차에서 보이지만 많은 화가나 건축가, 조각가들의 작품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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