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의 파리 - 창조적 영혼을 위한 파리 감성 여행
에릭 메이슬 지음, 노지양 옮김 / 북노마드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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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2월에 분노 게이지 급상승해서 분노 수치를 낮추려고 2월 설 연휴 파리행 티켓을 예약했다. 4박6일이란 짧은 시간. 참 무모한 짓이지만 그 당시에는 최선책으로 보일 만큼 절박(?)했다. 왕복 24시간의 비행을 버텨낼 만큼의 그 무언가가 파리에 있나. 아니다. 파리가 아니어도 좋았을 것이다. 다만 휴식이 필요했을 뿐. 비행기 티켓 발권하고 또 일사천리로 일정을 짜고....잠시 설레임을 갖고. 여행책자 말고 이번에는 뭘 할까, 하고 도서관에 가서 파리에 관한 책 몇 권을 펼쳤다. 대부분이 쓰레기고(저자들한테는 미안하다) 그 쓰레기 중 좀 읽을만 하겠다 싶은 책이어서 빌려왔다.

 

다 읽고 나니 참 독특한 책이다. 처음에 가이드북인 줄 알았는데 읽다보면 글쓰기 책이다. 저자는 글을 쓰러 파리로 갈 것을 제안한다. 혹 하기도 하는데 읽다보면 저자가 파리와 사랑에 빠졌다. 파리와 사랑에 빠진 사람이란 공통점 이외에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일들이 나열된다. 게다가 파리에서 글을 쓰기 위해 체류하기 위한 실전 지침, 즉 구체적 경비마련까지도 제시한다. 역으로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원고료로 생활하기 힘든 작가일 확률이 높다. 즉 무명 작가일 것이다. 무명 작가는 왜 무명 작가로 남아있을까. 공감을 주는 글을 쓰지 못할 경우가 있을 것이고 또는 시대를 잘 못 타고난 작가일 경우일 수도 있다. 두 경우 모두 불행하기는 마찬가지일 테지만 전자가 더 비참할 것이다. 그런데 파리로 가라고 부추기면서 파리에 가서 책 한 권을 완성하는 상상을 하게 부추긴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팔자 좋았던 어느 해 여름, 두 달을 일정으로 새 노트북을 사서 뉴욕으로 글을 쓰러 떠났다. 돌이켜보면 핑계지만 출발 며칠 전에 새로 산 노트북만 있으면 꼭 글을 쓸 수 있을 거 같았다. 뉴욕이라는 공간도 새 노트북이란 매력적 도구도 글을 쓰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도 이런 말을 한다. 집에서 글을 쓰는 습관이 없다면 어디를 가도 글을 쓸 수 없다고. 빙고!

 

그러니 이 책은, 어저면 희망고문으로 주머니가 가벼운 무명 작가들을 두 번 울게 할 지도 모르겠다. 여행자한테 이 책은 더더욱 도움이 안 된다. 저자가 파리에 대한 갖는 흥분은 오롯이 전해져오는데  그 흥분이 자신만을 위한 것처럼 보여 굉장히 유아적 시선의 글처럼 보인다.

 

다만 한 가지 도움이 되는 말이 있다. 퇴고나 탈고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무조건 초고를 완성해라. 격하게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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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2-05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 박 6 일도, 엄청난 시간일 수 있다는 생각이듭니다. 시간은 상대적일 수 있으니, 결국 가진 자의 몫일 것 같습니다. 불어도 하시고, 파리는 익숙하셔서 소중한 시간이실 것 같아요. 넙치님.. 좀 쉬실 수 있는 시간이시길.. 바래봅니다..

넙치 2015-02-06 10:06   좋아요 0 | URL
이성을 잃었을 때 지른거라 이성이 돌아온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요.ㅠㅠ 근데 모두 환불불가라..ㅠㅠ 가서도 다녀와서도 엄청난 체력방전이 예상되서 설레임보다는 두려움이 더 지배적이에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걱정과 두려움은 사라질거라고 주문을 외워야죠. 아무튼 고맙습니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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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제일 주요한 기능은 묻혀있던 작가나 작품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해석만이 아니라 나아가 어떤 비평가의 글을 읽고 나면 그 작품 혹은 그 작가를 찾아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글이, 좋은 비평글이라고 믿는다. 신형철의 글은 바로 이런 면이 있다.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책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해석자다. 해석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해석은 기술이기 때문에 비평은 직업이 될 수 있다. (...) 해석자는 이미 완성돼 있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면서 전달한다. 그러므로 해석은 일종의 창조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지만, 잠재적 유에서 현실적 유를, 감각적 유에서 논리적 유를 창조해낼 수는 있다. (...) 해석으로 생산된 인식이 심오할 때 그 해석은 거구로 대상 작품을 심오한 것이 되게 한다. (...)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다. 작품을 '까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일이다. 해석은 인식의 산파술이다."

 

신형철 비평글이 두 권째인데 무척 재미있게 읽힌다. 그 이유는, 해석에 대한 저자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보통 비평글은, 그 작품을 읽거나 보지 않으면, 읽는데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다. 독자가 작품을 봤다는 가정하에서 쓰기도 하지만, 이런 가정 때문에 많은 독자들을 배제시키고 특정한 독자들만을 대상으로하는 게 비평글의 타고난 숙명이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신형철의 글은, 작품을 안 보고 안 읽어도  비평글 자체만으로도 읽는 재미가 있다. 그의 말대로 작품을 다시 쓰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럼 그는 어떻게 작품을 다시 쓰나? 비평글에서 감정적인 문장은 에세이처럼 느껴지기 쉽다. 그러나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감정이 배제되면 학술논문처럼 돼 버려 어떤 정보만을 전달하기 쉽다. 신형철은 논리와 감수성이 만나 화학반응을 일으키게 글을 쓴다. 이 역시 해석에 대한 저자의 태도 덕분인 거 같다. 수전 손택이 해석에 반대하며 "해석 대신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라고 했다. 즉 해석자한테 가장 필요한 게 작품에 대한 애정과 감수성인데 신형철의 글을 읽다보면 그가 가진 애정이 행간 사이에서 걸어나와 내게로 오는 거 같다.

 

이 책은 <씨네21>에 연재했던 글모음이다. 나도 대부분 봤던 영화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 과연 내가 그 영화를 본 게 맞나, 의심할 정도로 섬세하게 독해를 하고 있다. 나는 영화에 대한 애정어린 태도 보다는 '깔' 준비를 하고 영화를 봤었던 게 아닌가. 일차원적 관객이라는 자괴감이들기도 한다.

 

사람을 비롯한 세상 만물에 애정어린 시선을 가진 자의 온기가 더욱 필요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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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왜 부조리한가 - 경제학.철학.통계학.정치학으로 풀어낸 법의 모순
레오 카츠 지음, 이주만 옮김, 금태섭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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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달리 통계가 지닐 수 있는 허점에 관한 일반론이라 좀 실망했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다루는 딜레마 접근 방식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극단적인 딜레마 상황 설정에 반감이 드는 편이다. 극단적 상황을 설정해서 선택을 강요하는 이분법적 논리도 마음에 안 들고. 원제가 <Why the law is so perverse>다. perverse를 찾아보니 우리말로는 "삐딱한, 삐뚤어진" 영어로는 "Someone who is perverse deliberately does things that are unreasonable or that result in harm for themselves." 이다. 이 말을 보면 고의로 불합리적인 것을 하거나 해를 끼치는 것을 하는 사람이다. 아주 흥미로운데 결국 법은 입법시 처음부터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이란 역설로 들린다.

 

왜 그런가, 하는 이유를 밝히는 게 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겠지만 실제로 저자는 실망스런 접근법으로 다가간다. 가령 이런 거다. 선거에서 A, B가 출마했고 유권자의 선호도가 B가 우세하다. 이 때 C가 등장하고 C보다는 B가 호감도가 높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B가 당선되어야하는데 A가 당선될 수 있다는 경우의 수를 예시로 든다. 뭐 이건 우리가 지난 대선 때 겪은 바다. 이정희 후보가 싫어서 그네 공주가 당선었다. 또 지난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 연아양이 앞 순서로 연기하는 바람에 최고의 연기를 하고도 금메달이 아니라 은메달을 목에 건 걸 봤다. 뭐 이런 다기준 의사결정 관점에서 허점을 바라보는 예시를 마구마구 늘어놓는다.

 

하나의 맥락은 법에서도 피겨스케이팅에서 일어날 수 있는 허점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리고 변호사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런 허점을 찾아서 이용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니 막상 법 앞에 서면 억울한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요즘 재판제도가 얼마나 모순된 제도인가를 직접 체험하고 있다. 내용을 잘 모르는 제삼자인 변호인인 더 내용을 모르는 제삼자인 판사한테 뭐가 진실인지 묻는 게 재판 원리다. 그래서 증거재판주의를 채택한다고 하는데 이 증거라는 게 또 하나의 허점이다. 이미 계획적으로 법을 이용하기로 하고 증거를 만들면 증거가 없는 이는 꼼짝없이 법의 구제를 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판사 개인의 신념이나 믿음과 위배되어도 증거라는 물적 형식에 집착해야하는 게 판사의 일이다. 과연 판사가 얼마나 진실을 알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든다. 진실을 모르는 이한테 사실을 입증하려고 하려고 노력하는 일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대체 왜 내가 이걸 입증해야하나, 하고 복장이 터지는데 내 복장 터지는 걸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기에 제도 자체의 모순을 선명하게 목격하면서도 모순된 제도에 순응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현명하지도 용기도 없기에 무변론을 택하지도 않고 자의로 사형을 선고 받지도 않을 것이다. 평범한 나는 모순된 제도를 힘껏 따르려고 애쓴다. 법은 이미 강제하는 성향이 있고 이 강제성을 따라야하는 게 법치주의다.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제도가 아무리 폭력적이어도 그 폭력에 따르는 일이라니,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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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언가의 혹은 누군가의 공통점을 찾아내서 하나의 카테고리에 넣어 계열화를 하려고 하는 게 사람의 속성 중 하나다. 하지만 이 세상의 것들은 하나의 분류에 속하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장르 구별은 무의미하다. 가령, 왓챠는 내 영화 취향을 스릴러, 액션 성향으로 분류한다. 처음에 깜짝 놀랐는데 왓챠가 어떤 기준을 사용하는지 몇 편의 영화 분류를 보니 그럴만하겠더라. 아무튼 이 영화는 공상과학 영화로 분류되는데 헛웃음이 난다. 이 영화가 공상과학영화로 분류된 이유는 전적으로 외형적이다. 솔라리스란 행성이 등장하긴 한다. 영화 절반이 솔라리스에 도착한 우주선 안에서 머무는 세 사람의 이야기다. 우주선에서 본 지구의 바다 이미지도 종종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솔라리스 행성과 지구의 바다는 모두 등장인물의 기억을 소환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솔라리스는 비물질적 기억을 물질화하는 통로다. 즉 솔라리스는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와 같다.

 

2.

그럼 타르코프스키는 어떤 기억을 물질화하고 싶어했나. 타르코프스키가 쓴<봉인된 시간>을 좀 들여다보면,

 

"나는 우리 인간들 모두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특별히 인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 관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숙고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 안에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을 언제나 무시하여 왔다. 인간은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기만적인 우상들을 쫓아 간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들 중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인간 삶의 밑바닥을 이루는 예의 매우 평범한 기본적 부분-즉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기본적 부분은 인간의 영혼 속에서 삶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인간 실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256)

 

3.

<솔라리스>는  사랑에 관해 말한다. 사랑하는 여인 하리를 잃고 솔라리스란 행성에 고립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닮은 행성인을 사랑하게 된다. 남자는 하리의 환영을 좇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리랑 닮은 여자는 남자의 환영을 알아차리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이를 지켜보던 남자는 윤리적 죄책감과 수치를 느낀다. 김영하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수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죄책감은 기준이 타인에게, 자기 바깥에 있다. 남부끄럽다는 것. 죄책감은 있으나 수치는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105)라고 말했다. 타르코프스키는 등장인물을 통해 "수치가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류는 우주탐사를 구원이라고 봤다. 남자는 인류를 대표해서 임무를 수행한다. 남자의 정신적 혼란은 인류가 믿는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인간만이 구원할 수 있다"는 걸 암시한다.

 

4.

타르코프스키는, 인식은 불안과 결핍, 고통과 환멸을 동시에 수반한다고 본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하리와 닮아서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의 도덕적 양심이 작용한다. 양심은 비극적일 수 있으며 존재의 불안을 초래한다. 그래서 멀리 있는 우주의 신비가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바다의 움직임을 보는 게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5.

내용은 심오한데 재미있느냐 하면, 영화 상영 시간 절반은 다른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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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2014-10-19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엇, 저 지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솔라리스 너무 재미있게 보고 완전 열광적인 기분으로 돌아왔는데요...ㅠㅠ.. ^^ 대형 스크린으로 봐서인지.. 암튼 인셉션 등의 영화와는 비교가 안 된다는 느낌.. 데이비드 린치라면 모를까요.^^

넙치 2014-10-21 14:11   좋아요 0 | URL
저도 아트시네마에서 봤어요. 재미있으셨다니..음 전 딴 생각 진짜 많이 했어요. 진짜 솔라리스 행성에 있었던 느낌.^^;;
 
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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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상한 농담이 하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효자는 누구일까? 에밀 졸라ㅋ 뭐 이런 말에 낄낄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테레즈 라캥이 새삼 주목을 받은 건 박찬욱 감독의 <박쥐> 공이 크다. 초반부를 읽다보면 균신, 김옥빈, 김해숙이 머릿속에 출현해서 사라지질 않는다. 영화와 책의 공통점이 손톱만큼 밖에 안 되는데도 자꾸 세 사람의 이미지가 글을 읽는데 방해 요소로 등장한다. 줄거리는 일일연속극이나 아침드라마 처럼 자극적이다. 요즘 일일드라마나 아침드라마에 비하면 한편으로는 도덕적인 면도 있고.

 

자연주의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한다. 졸라가 쓴 이 책 서문에서 자연주의 소설의 정의를 보면 이렇다.

 

"<테레즈 라캥>에서, 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 이 책 전체는 바로 그것을 담고 있다. 나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그들의 회한을 촉구해야 했던 부분은, 단순한 생체조직 내의 무질서, 파괴를 지향하는 신경체계의 반란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영혼은 완변하게 부재한다.(...) 강한 남자 한 명과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욕구불만 상태인 여자 한 명을 설정한다. 그드들 속에서 어리석음을 찾는다. 단지 어리석음만을, 그런 다음 그들을 난폭한 드라마 속으로 내던지고 그 두 존재들의 느낌과 행동을 면밀히 기록한다"(서문 11쪽)

 

이 소설의 요점을 작가가 명쾌하게 정리해 놓은 대목이기도 하다. 다만 성격과 기질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아서 네이버 사전을 찾아봤다. 성격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성이고 기질은 타고난 기본 본성이라고 적혀 있다. 글쎄, 비슷한 말 같기도 한데. 이 소설의 주인공인 테레즈와 로랑 뿐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한테 영혼이 없어 보인다. 병약한 카미유와 결혼한 테레즈, 그후 테레즈와 로랑은 눈이 맞아 카미유를 살해한다. 카미유가 죽은 후 로랑과 테레즈가 변하는 모습은 21세기에 보면 약간 권선징악의 암시처럼 보인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지만 죽은 이의 그림자에 갇혀 새로운 인생 따위는 찾아오지 않는다.

 

21세기 드라마 속에서 악을 행하는 인물들이, 졸라의 말처럼 영혼이 없는 걸 많이 보여줘서 테레즈와 로랑은 오히려 졸라의 의도와는 반대로 읽히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이 영혼이 없어 보이는 이유는, 오히려 졸라의 문체 탓이 크다.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단정적인 문장으로 묘사를 하고 있어서 인물이 살아서 움직인다기 보다는 졸라가 매단 끈 아래서 인형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졸라가 스물여섯 살 때 쓴 소설이라는데 스물여섯은 세상과 맞짱을 뜰 수 있는 나이다. 졸라가 쓴 서문이 그걸 입증한다. 비평가들의 혹평에 맞서는 글로 지식인들한테 사과를 요구한다면서 글을 맺고 있다. 인물들은 내적 갈등이나 혼란보다는 거침없는 기괴함을 드러낸다. 졸라도 거침없고 인물들도 거침이 없다. 이 책을 읽고나서 잔상에 남는 건 졸라의 자신감이라니...나도 기괴한 독서를 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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