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 연기와 화면의 질감과 조명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배우들로 말할 거 같으면, 공유. 군대갔다 온 후 공유는 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군대 가기 전에 예쁘장한 순정만화 남주인공 외모였는데 나이들면서 표정이 풍부해지고 눈빛도 그윽해지고 있다. 이런 거 보면 나이먹는 게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공유가 빛났던 장면은 뻔한 기차씬을 마감하고 경성역에 내렸을 때다. 의혈단을 일망타진하려고 기다리던 일본군들과 싸우는 씬이다. 잡히면 곧 죽음이라는 공포 속에서 말도 안 되지만 영화니까 일본군을 전멸시켰는데도 공유는 말 그대로 정신이 나가서 동료가 다가가도 모른 채 총을 쏘려고 한다. 그 순간 정말 정신이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린다. 동료들이 공유를 붙잡고 한참을 흔든 후 공유는 동료의 얼굴을 알아보고 상황이 종료된 걸 깨닫는다. 이때, 눈에 핏발이 서 있고 시선은 공포와 광기로 차 있는데 공유 만세!하고 외치고 싶었다.

 

상대적으로 다른 인물들은 평면적으로 보인다. 특히 이중첩자인 이정출의 캐릭터에 대한 설득력있는 구성이 많이 아쉽다. 밑도 끝도 없이 이정출의 정보가 드러나고 관객이 이정출의 정체를 알아차릴 즈음에도 이정출은 왜 그래야하만 했나에 대한 그럴듯함이 전달되지 못한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캐릭터인데 송강호의 연기가 (시나리오 탓이겟지만) 다른 영화에서만큼 빛나지 못한다. 아마도 감독이 이정출 캐릭터에 대한 숙고가 부족한 거 같고 그러다보니 송강호의 재능을 다 끌어내지 못한듯.

 

화면의 부드러운 질감과 조명의 사용은 렘브란트가 빛을 사용하는 방식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영화가 회화 특히 인물 초상화는 아니기에 이런 훌륭한 볼거리에도 별로 할 말이 없는 가벼운 오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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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조건 없는 사랑을 믿는 청년. 한 때 사랑을 했는지도 잊은 채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몇 번 반복하면서 세월과 함께 삶에 찌들어 사랑은 없다고 믿는 중년의 여자. 두 사람이 특별한 방식으로 만난다. 청년은 여자의 맞은 편 방에서 망원경 렌즈를 통해 일년 동안 여자를 만난다. 엿보다 사랑하게 되었는지 사랑해서 엿보게 되었는지 알수 없지만 여자대한 사랑이 점점 커져만 간다. 여자를 보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여자집에 우유배달을 하다 청년의 고백은 폭로처럼 이어졌다. 여자는 청년의 방식에 불쾌와 경멸을 표현한다.

 

망원경 렌즈를 통해 보이는 여자의 삶은, 우리가 비루하다고 여기는 삶의 전형이다. 여자는 만나고 있던 남자한테 매달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어느 날은 잘못해서 식탁 위에 우유를 쏟고는 살기 싫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엎드려있는다. 어느 날에는, 청년이 보낸 가짜 우편환을 가지고 현금을 찾으려고 우체국에 뛰어오기도 한다. 누가 보냈는지 묻기보다는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가짜라는 사실에 분개하는 여자는 아마도 삶에 많이 지쳤고 세상에 어떤 희망을 품는 어리석은 일 따위는 안 하는 거 같아보인다.

 

짜증 가득해 보이고 때론 신경질적인 여자가 청년의 고백을 듣고 묻는다. "나랑 키스하고 싶어? 섹스하고 싶어?" 청년이 아니라고 하자 그럼 나한테 뭘 원하냐고 묻는다. 여자의 질문 속에서 여자의 삶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자의 인간 관계는 대체로 어떤 목적을 위해 이루어져 있고 청년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줄 모른다. 그래서 여자는 자신이 아는 방식대로 청년을 대한다. 상대적으로 청정 세계에서 살던 청년은 수치심에 손목을 면도칼로 긋는다. 청년이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목숨까지 버리려는 행동에 메마른 영혼을 지닌 여자는 갑자기 잊고 있던 세계로 눈을 돌린다. 세상은 의도와 목적만으로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그냥 좋으니까, 순수한 관계도 있었다는 걸, 여자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덧. 기억 속에는 변태 청년의 이야기쯤으로 남아있는데 오늘 보니까 <애정만세> 폴란드 버전 같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린 시절 느꼈던 감정을 잃어버리고 척박하게 살아가는 거 같음. 동요없는 평정심을 얻는 대신에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을 잃어버리며 사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무지 슬퍼서 영화가 끝날 때, 눈물까지 흘림.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같은 날, 같은 도시에서 태어난 두 여자의 이야기. 정치적 중의성은 배제하고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하는 반감 대신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시선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살다보면 논리적으로 설명 안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 혹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불안과 자신이 뭘 원하고 찾는지도 모르면서 분주하게 무언가를 찾는...자신을 찾아 나서는 과정은 이렇게 불분명하고 어쩌면 실체가 없다가도 한순간에 퍼즐 조각처럼 일상에서 하나씩 등장하기도 하는 일이 아닌가.

 

가령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 과거 속으로 들어가서 상념에 잠겼다가 불쑥 현실로 돌아와서 어떤 충족감 혹은 상실감을 느끼는 일이 있다. 오늘 오후 집에서 나갈 때 가을 바람에 나뭇잎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 보면서 마음이 한없이 날아올랐다. 아트시네마에서 영화 두 편을 보고 나왔더니 찬란한 빛 대신 어둠이 내리고 맨다리에 닿은 바람은 차갑기만하고, 아트시네마 입구는 스산하고 전철역까지는 걸어서 3분 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 걷는 동안 한없이 마음이 쓸쓸해지는게 베로니카가 이리저리 헤메는 기분이 이런건가 싶기도. 불과 반나절 동안 기분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해 있고 두 다른 감정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물리적 실체가 바로 '나'라는 한 사람. 물리적으로는 이렇게 하나 일 수 있지만 심리적으로 이중이 아니라 다중을 살고 있으니, 베로니카의 삶을 어찌 이해 못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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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2년 처음 개봉 당시, 이 영화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깊은 의미를 받아들이기보다는 분석글로 받아들이고 알고있는 편이다. 오늘 스크린으로 몇 십 년 만에 다시 보니 명작일세. 중저음 목소리로 낮게 말하는 잔느 모로의 내레이션. 독특한 분위기의 제인 마치와 피칠갑하는 홍콩 느와르에 어울릴 법한 외모의 양가휘가 내뿜는 눈빛과 표정. 사이공 촐란과 사이공 근교(?) 빈롱 전경. 모든 것이 새롭다.

 

2.

15세 반이 된 프랑스 소녀와 서른 두살의 중국인 남자의 불꽃같은 사랑이 줄거리지만 그 안에 많은 것이 담겨져 있다. 학교에서 외톨이인 소녀. 잘못된 투자로 가난해진 가정환경. 오빠는 아편 중독자고 동생은 어느 면에서 폭력적이고 수학 교사인 엄마는 커가는 사춘기 딸을 대할 줄을 모른다. 학교와 집의 폭력적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는 성적 쾌락. 십대 소녀의 성에 대한 호기심은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소녀를 쾌락으로 내모는 건 소녀가 속한 곳에서 부적응자였던 탓이 크다.

 

백인 소녀가 동양인 남자를 만나는 걸 가족들은 수치스러워하면서도 남자의 돈에는 관대했다. 남자와 소녀의 가족이 고급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은 소녀가 어떤 폭력에 처해 있는지 잘 표현된다. 백인의 우월감에 동양인을 무시하지만 진수성찬 앞에서 엄마, 남동생, 오빠는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나와서 코를 접시에 박고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댄다. 남자가 단지 소녀의 나이든 친구라는 뻔한 거짓말을 믿는 척하면서 식탐을 버릴 수 없는 이중성을 소녀는 버텨낸다.

 

소녀는 미래를 계획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남자와 식당에 나오면 소녀는 앞에 나온 음식을 열심히 먹고 남자는 원하지 않는 예정된 결혼에 대해 말한다. 소녀한테 남자의 결혼은 비현실적이었다. 남자는 소녀에 대한 감정이 점점 깊어지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버릴 용기가 없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자신을 정의한다. 결국 소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선택하는 남자. 소녀는 사랑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어렸고 남자는 가진 걸 버리기고 사랑을 선택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남자가 결혼한 후 소녀는 프랑스로 와서 누군가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깨닫는다. 자신이 남자를 사랑했는지 확신이 없지만 사랑을 잃었노라고. 그걸 깨닫는 순간 소녀는 울음을 터트린다. 사랑하는 이와의 결별은 눈물로 승화하는 의식을 필요로 한다.

 

3.

이십년도 넘은 영화가 재개봉되는 힘을 지닌 건 아무래도 장 자크 아노의 연출 덕분이다. 줄거리만 보면 자극적이고 막장 드라마인데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표현법에 있다. 배에서 만날 때, 소녀는 남자 모자를 쓰고 한쪽 다리를 난간에 기대어 있다. 신발을 클로즈업하는데 옷과 안 맞게 화려한 비즈가 있는 구두에 흙이 묻어있다. 소녀의 머리는 독립적이고 화려함을 꿈꾸면서도 진창을 피하지 않는 캐릭터다. 비포장 길에 스콜이 내리는 열대. 사방의 길은 흙이고 베드씬에서는 몸에 물인지 땀인지 반짝여서 습한 기운이 화면에서도 전해질 정도다. 프레임 안에 배치된 모든 미장센이 어수선하고 정돈과는 거리가 멀어서 소녀의 정신세계와 맞닿아 있다. 단정한 건 딱 하나, 남자가 옷맵시다. 남자의 빗어넘긴 머리와 단정한 옷은, 그가 자신의 영역을 나올 수 없다는 걸 암시한다. 혼란 속에서 시작된 성적 탐닉은 결국 사랑으로 기억된다. 먼 훗날까지 두 사람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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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뻔한 여름용 재난 영화겠지, 하고 별 기대없이, 더위를 피해 극장을 찾았다. 더위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상상력을 발동하게 하는 여름날이다. 추위도 무섭지만 더위도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줄 수도 있다는 걸 체험하고 있는 요즘이라 재난 영화에 대한 상상력이 극대화되었고 영화를 감상할 자세가 충분히 갖추어졌다.

 

2.

영화는 예상대로 그럭저럭이었지만 유머코드도 있고 핵심을 짚어내는 예리함도 있다. 재난에 대처하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희화화 했다. 부실공사로 터널이 무너졌고 그 다음은 우리가 아주 아주 잘 알고 있는 언론과 당국의 태도가 다시 한번 영화 속에서 등장한다. 언론 보도의 태도는 갇힌 사람의 생사나 구출 보다는 "단독 생존자로서 세계 최고"란 타이틀에 관심있다. 갇힌 사람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토론회를 각계 전문가를 모아놓고 논의하고 한 사람 때문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고 있다는 암시를 던진다.

 

장관 역시 협의 부서가 잘 알아서 하길 지시하고 해당 부서는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 구출작업이 장기화되면서 경제 득실을 수치화한다. 제설차를 보내달라는 구조대장의 말에, 솔직히 거기는 한 사람이지 않냐고, 담당자가 말한다. 처음 듣는 말도 아닌데 영화는 힘이 세다., 그 한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으로 치환하자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린다. 더불어 실제로 일어났던 각종 재난 보도에 처음에만 관심을 보이지 시간이 흐르면서 정말 기사로만 받아들이는 태도가 되곤 하는데 당사자만 억울하다. 다행히 영화 속과 현실에서 재난을 타자화 하지 않는 진정한 도덕적 판단력을 가진 이들이 극소수지만 그래도 여전히 존재한다는데 안도가.

 

3.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희생자의 가족 관점을 꽤 잘 묘사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정수의 아내 역할을 한 배두나의 연기는 언제나 갑이다. 구조작업 중 구조작업 반장이 사고로 죽고 갑자기 이정수의 아내는 죄인이 된다. 죽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계속 살 수 있는 사람을 희생시켰다는 여론과 자책감. 여기서 비난을 받을 사람은 두 희생자가 아니라 정부의 구조적 모순과 방향몰이를 하는 여론이다. 두 사람은 모두 희생자인데 우리는 제3자가 되어서 이 사실을 종종 잊고 여론과 정부과 지시하는대로 희생자들을 비난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사실 현실은 계속 이 패턴의 반복이다. 희생자를 비난할 게 아니라 당국이 한 일을 잊지 말고 감시해야하는데...

 

4.

영화는 해피엔딩이지만 해피엔딩까지 이르는 과정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결국 당국은 여러 욕망들의 층위로 겹겹이 둘러싸여서 생명의 존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집단이다. 생명의 존엄을 아는 사람은 결국 소수의 개인들이다. 터널에 갇힌 이정수 개인의 살려는 불굴의 의지, 자신이 맡은 일이 무슨 일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 일에 대한 책임 의식이 강한 구조대장, 그리고 남편의 생존을 굳게 믿는 아내. 그리고 유일하게 외부소식을 전해주는 클래식 방송 디제이. 어떤 판단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대로 전달하는 관점을 보여준다.

 

결국 사회적 구조는 글러먹었으니까 이런 훌륭한 개인의 의지만이 재난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진정한 해피앤딩인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기 팍팍한 이유가 바로 개인이 모든 책임을 져야하는 구조적 모순 때문인데 그걸 명쾌하게 정리해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행복도 불행도 개인이 모두 책임져야하는 사회.

 

5.

요즘 더위로 몸은 지치는데 감성은 돋아나서 영화를 보면서 문득, 먼 훗날, 내가 극한의 곤경에 빠지면 누가 애달파해줄까로 생각이 미치니까, 쓸쓸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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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14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 영화 그냥 방학용 재난 영화인 줄 알았는데 아니로군요.
한번 보아야겠네요..

넙치 2016-08-16 08:29   좋아요 0 | URL
재밌게 보시고 재미난 글 기대하겠습니다.^^
 
수영장, 자크 드레이

1.

틸다 스윈튼이 나오고 <아이 엠 러브>의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작품이니까 무조건 봐야하는 영화. 틸다 스윈튼은 근사하다, 멋지다, 이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는 배우다. 세상에 신은 어떻게 이렇게 비현실적인 사람을 땅 위에 내려주셨는지.

 

왕년 락스타가 성대 수술을 하고 이탈리아 작은 섬에 휴양하러 왔다. 휴양지 패션이 영화 속에 계속 등장한다. 등이 깊게 파인 검은 블라우스와 주름잡힌 아이보리 치마를 입고 사막에서 부는 모래바람을 맞는데, 정말 황홀하게 아름답다. 늘 느끼지만 틸다 스윈튼은 짙은 메이크업을 하지 않아도 화려하고 우아하다. 틸다 스윈튼을 보는 것만으로도 끊임없는 감탄이 나온다.

 

그리고 폴 역할을 하는 마티에스 쇼에나에츠. <러스트 앤 본>에서 우직하고 성실한 웃음기 하나없지만 삶을 진지하게 대하는 캐릭터였는데 이 영화에서도 비슷한 느낌이다. 얼굴 표정이 풍부하진 않은데 뭐랄까, 진지 열매를 먹었는지 영화배우보다는 성실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연기를 잘 해서겠지만. 더불어 내가 성실하고 책임감있는 캐릭터를 몹시 애정하는구나, 하는 깨달음.

 

2.

자크 드레이의 <수영장>을 리메이크한 영화다. 리메이크 영화는 전작과 비교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 자크 드레이의 <수영장>과 몹시 비슷하지만 루카 구아다니노는 다른데 방점을 찍고 있다. 마리안과 그녀의 남자 친구 폴이 휴가를 보내고 있는 섬에 마리안의 옛 연인 해리와 그의 딸이 불쑥 찾아온다. 알랭 들롱이 폴인 <수영장>에서는 폴과 해리의 딸(제인 버킨)과의 관계가 미묘하게 시선을 교차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하는 추측을 마구 하게한다면 <비거 스플래쉬>는 마리안과 과거의 연인 해리의 관계를 깊게 들여다본다.

 

록 가수인 마리안과 제작자 해리가 연인이었던 과거 시절이 회상 장면으로 종종 등장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케미는 쾌락이다. 마약, 춤, 무대와 분장실로 짐작할 수 있는 화려하고 시끄러운 분위기로 표현된다. 반면에 폴과 마리안의 관계는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어주는 안정된 관계로 묘사된다. 가수가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다큐멘터리 감독인 폴은, 영화 속에서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자살을 시도했던 경력이 있다. 폴의 과거는 알 수 없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시점에서 마리안과 폴은 소울 메이트다.

 

영화는 마리안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편이다. 마리안은 쾌락 메이트 해리도 사랑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폴도 사랑한다. 즉 이 말은 한 사람이 둘 다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이 되겠다. 쾌락과 책임감은 양립할 수 없는 특징이기도 하다. 마리안은 둘 다를 소유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지만 현실은 한 가지를 택해야 한다. 마리안은 쾌락은 과거 속으로 묻고 책임감과 안정을 택한다. 해리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육체적으로는 거부를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해리한테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한다. 해리의 죽음 앞에서도 몸에 상처가 날 정도로 오열한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면에서는 영악하다. 떠나간 사랑 혹은 죽은 이는 돌아올 수 없다. 남겨진 건 성실하고 책임감있는 폴. 마리안은 폴을 힘껏 사랑하기로 한다. 폴의 범죄까지도 눈 감아줄 정도로. 감독은 지독한 사랑의 이면을 다룬다. 타인에 대한 중독적 사랑은 지독한 자기애일 수 있지 않을까. 마리안이 그런 것처럼.

 

4.

인물들 말고도 화려한 볼거리가 있다. 바로 카메라의 움직임. 어찌나 화려한지. 인물을 담을 때 왼쪽 아래쪽에서 시작해서 서서히 중앙으로 이동해서 갑자기 위로 올라간다. 또는 서서히 시작해서 휘익하고 회전을 해서 위로 올라간다. 그래서 대사가 많지 않은 영화인데 몹시 분주하게 화면을 응시하게 된다. 풍경을 담을 때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바라보기 시작해서 조금씩 속도를 내면서 깊게 들어간다. 섬의 전경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인물들이 속한 세부적 풍경을 인식하게 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원작보다는 심리묘사는 조금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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