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 관한 담론은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허구적이다. 연애나 사랑을 다루는 영화들은 거의 대부분 판타지에 기반한다. 사랑의 기쁨만을 주로 부각시켜서 사랑을 못하거나 안하는 걸 좌절스럽게 만를 뿐만 아니라 사랑하면 즐거움만을 기대하게 한다. <연애담>은 판타지적 요소가 하나도 없고 정말 현실적이다. 동성애를 다루지만 연애할 때의 보편적 감정을 잘 포착해내고 있다. 

사랑을 하면 즐겁고 예뻐지는 건 맞다. 상대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외모에도 신경쓰고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면 혼자 있어도 배실배실 웃음이 새어나오고. 이런 시간이 지속된다면 예술 영역에서 사랑을 다룰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런 즐거운 시간은 짧고 많은 시간이 우왕좌왕하고 고통스럽다. 일상에 균열을 가져올 정도로 극도의 우울에 종종 사로잡힌다. 상대에 대한 마음의 크기가 일치 않는데서 비극이 비롯된다. 너에 대한 내 마음이 이렇게나 커, 하고 외쳐도 어느 순간 그 외침은 자신의 메아리로 남아있을 때가 많다. 상대가 귀를 기울이지 않고 마음을 닫아버리면 상황은 더 암담해진다. 

윤주는 지수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윤주는 소심하고 지수는 적극적이다. 윤주는 지수한테 끌리고 오밤중에 지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지수가 나타나자 가슴 속에 식지 말라고 품고있던 (아마도) 군고구마 봉지를 내밀며 "너 한테 잘보이고 싶어서"하고 베시시 웃는다. 이런 사소한 일상적 행위에서 연인은 사랑의 밀도를 감지한다. 하지만 서로를 좀 알아가면서 어떤 반찬을 좋아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자신의 기준에 안 맞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초반에는 상대의 그 모든 것이 호기심이었다가 자잘한 일상, 하지만 하루의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그 일상에 개입하고 싶어진다. "다른 일을 하면 안돼? 나랑 살 생각같은 건 안 해봤어?" 등등. 걱정과 불안이 사랑의 기쁨과 바톤터치를 한다. 미대 대학원생인 윤주는 교수의 총애를 받는 예비 유망작가다. 지수를 만나고 감정의 파도타기로 미래도 엉망이 돼버린다. 

여기에는 지수의 변심(?)도 있는데 그 변심이란 게 성정체성에 대한 서로 다른 방식의 고민이다. 지수는 혼자 살다 집으로 들어가서 아버지랑 함께 살면서 자신의 욕망을 억압한다. 월미도까지 찾아오곤 하는 윤주에게 냉랭하게 대하고 아버지가 주선한 남자와 선을 본다. 윤주 역시 룸메이트한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하자 싸늘한 태도와 맞닥뜨려 정신적 갈등은 배가 된다. 가장 친한 남자사람 친구마저도 겉으로는 윤주의 성정체성을 이해하는 것 같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성애를 기준으로 삼은 공고한 가치관을 내비친다. 애인한테도 이해 못 받고 주변 친한 친구들한테도 이해 못 받는 사랑을 하고 있다. 

하지만 또 사랑이란 게 뭔가...서로 연락을 없이 이렇게 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다가 지수가 어느 날 불쑥 찾아온다. 윤주는 지수한테 화가나서 뻣뻣하게 대한다. 지수가 아무리 애교를 부려도 윤주의 마음은 녹질않는다. 윤주의 집에서 지수가 윤주를 안고 낮게 속삭인다. "보고싶었어". 연인한테 필요한 말은 이 단 한마디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나 설명이 아니라 "보고싶었어." 윤주의 마음이 흔들린다. 윤주와 지수는 다시 원점에 있을 거라는 걸 암시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현실 속 많은 연인들이 그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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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hell or high water>.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란 말이 되겠다. 영화를 보고 나면 원제가 로스트 인 더스트보다 훨씬 적절하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나라꼴이 비슷하게 돌아간다. 박근혜를 끌어내릴 방법과 그 후의 개각에 대한 전문가들의 논의를 보면 법이 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분통이 터진다. 데리다는 법은 그 자체로 전능하고 권위적이라고 지적했다. 법치주의란 결국 국민을 대표한다는 소수가 만든 법이 통치하는 나라다. 법은 성문화되면 그 자체로 신성한 영역으로 들어가버려서 법 아래있는 국민은 법 해석을 통해 합법인지를 따지는 코믹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렇다고 무법의 시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로스트 인 더스트>는 어떤 면에서는 성문법의 틈을 이용한 한탕이 되겠다. 나는 심정적으로 영화 속 은행털이 형제를 지지한다. 대대로 가난한 형제가 있다. 어머니는 대출받아 땅을 샀으나 은행에서 역대출을 해서 삶의 터전인 땅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있다. 핵심은 역대출이다. 은행은 대출을 받아 땅을 사라고 부추겼고 땅을 산 사람은 대출금을 갚지 못해 땅을 담보로 또 대출을 받는다. 그 대출이자를 은행이 내주고 땅 주인한테서 담보물을 빼앗는 구조다. 자, 대출받은 사람의 손에는 결국 뭐가 남나? 빚 과 피폐한 마음만 남는다. 은행은 법의 보호하에서 한 가족의 삶을 몰수 할 수 있다. 형제는 대출 만기에 대출금을 갚기 위해 은행을 털기로 한다. 작은 마을에 있는 작은 은행에서 현금만 적당히 챙겨서 여러 은행을 턴다. 대출금을 맞추기위해.

 

영화는 버디무비처럼 진행된다. 은행털이 형제의 이야기와 은행털이범을 뒤쫓는 보안관들의 이야기. 보안관은 궁금하다. 마약을 사지도 않고 흥청거리며 유흥비에 쓰지도 않고 아침부터 성실하게 일정한 액수만 가지고 은행을 떠나는 이유가 뭘까. 이런 서사 속에 경험많은 은퇴한 보안관과의 추격전이 벌어지고 기시감이 드는 서부영화의 총잡이들의 대결도 찌릿찌릿하다.

 

은행은 총 안든 합법적 강도다. 돈 빌려주고 담보 빼앗고 개인한테 빚만 떠넘긴다. 은행을 털어 마치 카지노에서 딴 돈처럼 세탁을 해서 은행에 신탁을 하면 은행털이범도 주요 고객이 된다. 은행은 돈의 출처 따위는 궁금해하지도 않다. 즉 은행은 정당한 돈과 부정한 돈의 구별을 하지 않은 곳이다. 은행입장에서 돈은 다 하나의 돈일 뿐이다. 대출 만기일 직전에 대출금을 갚고 대출 말소를 시키는데 돈은 꼭 총같은 역할을 한다. 총구를 들이대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듯이 돈을 들이대니까 은행지점장도 위협을 느끼면서 고객의 요구에 충실히 행동한다. 요 장면에서 엄청난 긴장감이 파생되고 총없는 총싸움을 빗대어 잘 담았다.

 

노보안관의 선택도 흥미롭다. 보안관은 동료를 잃고 은행털이범 형제 중 배짱 좋은 형을 사살한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왜 이들이 은행을 '성실히' 털었는가. 결국 동생한테 찾아가 인간대 인간으로 이유를 듣는다. 가난 탈출이고 자신의 자식들한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듣고 노보안관은 그를 잡지 않기로 한다.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사회적 질서를 혼란시켰지만 그 혼란의 근원은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데 동의를 하는 시선이다.

 

아주 재밌는. 그러나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는 장면이 있다. 노보안관과 보안관이 추격전을 벌이며 어느 작은 마을 식당에 들어간다. 입이 걸은 할머니가 주인이고 대뜸, 묻는다. 뭘 먹고 싶은지 말하는 게 아니라 뭘 안 먹고 싶은지 말하라고. 스테이크, 감자, 강남콩 중 뭘 안 먹겠냐고. 자기 기억에 딱 한 사람만이 먹고 싶은 걸 시켰다고. 송어. 산동네 와서 송어를 시키다니 미쳤다고. 두 보안관은 얼떨결에 안 먹고 싶은 건 강남콩이라며 주문을 마쳤다. 식당에서 손님이 왕이란 생각을 버리고 식당 주인이 주는 걸 먹어야하는 룰을 따르는 것. 현대 사회는 법이며 룰이 족쇄가 되어서 선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복장터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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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시 아이젠버그가 나온다. 제시 아이젠버그는 표정이 독특하다. 공허한게 한 곳을 응시해도 아무것도 응시하고 있는 거 같지 않은 표정이다. 말투는 몹시 빠른 편이라 뭔가 허둥대는 느낌, 그래서 그 공허한 표정과 빠른 말투는 불안을 참 잘 표현한다.

 

2.

주말에 어쩌다보니 가족 해체에 관한 영화를 보고 가족 해체에 관한 소설을 읽었다. 이 영화 역시 가족 해체에 관한 영화다. 종군 기자인 엄마의 죽음으로 아들을 출산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는 아버지와 십대 아들은 소통 단절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아버지는 십대 아들을 스토킹하고,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젊은 여선생과 사귀게 된다. 십대 아들은 가슴이 빵빵한 같은 반 여학생을 스토킹하고, 글을 쓴다.  두 사람의 고군분투는 형의 귀향으로 형의 시점에서 교통정리가 된다. 십대는 잠시 대화 상대를 만났고 아버지 역시 대화 상대를 만났다. 하지만사회학  PH.D 학위를 받은 아들은? 도피중이다. 자신이 만난 여자친구와 갓 태어난 아기. 여자친구가 자신을 떠날거란 두려움이 있고, 아마도 집을 떠나기 전 사랑했던 여자를 다시 만나 속 이야기를 한다. 종군 기자인 엄마는 회상장면으로 등장하는데 전쟁터에 있을 때, 다른 남자가 있었고. 아마도 남편의 친구 혹은 부부의 친구.

 

뭐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이런 개인의 내적 갈등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관건인데 영화는 내밀하지도 섬세하지도 않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얽히게 늘어놓다보니 감정을 다루는 중요한 일에는 막상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인물들이 힘들게 사네, 하는 거리두기가 저절로.

 

3.

재밌는 영화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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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률 감독이 영화에서 계속 다루는 주제는 소외된 주변인의 삶이다.  <춘몽>은 지금까지와는 톤이 많이 다르다. 서늘한 톤에서 버티는 삶을 보여주고 고민하게 한 전작들에 비해 <춘몽>은 유머 코드를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이 유머 코드라는 게 좀 석연치않다.

먼저 꿈을 다루는 방식을 보자. 아직 개발이 안 수색동에 동네 건달 삼총사가 있다. 일명 건물주로 통하는 종빈, 화려한 셔츠에 기지바지를 배까지 올려입는 익준, 임금을 강탈당해 1인 시위하는 탈북 이주자 정범. 그리고 그들의 여신 '고향주막'의 예리. 네 사람은 동네친구기도 하고 가족같은 연대감을 보여주기도 한다. 정범이 못 받은 임금을 받아주려 애쓰고, 예리의 휠체어 탄 채 의식이 없는 아버지를 돌봐주기도 하고. 틈나면 넷은 모여서 술도 마시고 시시한 잡담을 한다. 친구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세 건달 삼총사한테 예리는 비현실적인 꿈, 여신의 위치다. 어느날 종빈은 예리한테 묻는다. 어떤 남자가 좋아? 예리의 대답은 정신과 몸이 건강한 사람이면 좋겠다였다. 그러자 삼총사는 모두 고개를 숙인다. 사실 대사는 하나도 유머러스하지 않지만 이 지점에서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이 웃음의 실체가 나는 마뜩찮다. 물론 나도 웃었다.

나를 포함한 관객은 왜 웃나? 세 사람은 예리를 흠모한다. 하지만 예리는 세 사람과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예리는, 삶은 달걀 껍질 까는 장면을 1분이나 보여주는 좀 어려운 영화를 보고 시를 외우고 책을 읽는다. 세 사람은 예리가 평범하다고 여기는 특성을 이미 갖지 못했다는 걸 영화 속 인물만이 아니라 관객도 동의하기에 웃음이 나온다.

종빈은 수색동 건너편 한국영상자료원이 있고 MBC가 있는 상암동을 "저쪽 동네" 혹은 "그쪽"이라고 표현한다. 옥상 위에서 보면 수색동과는 다른 때깔을 갖고 있고 뭔가 자본의 움직임을 내보인다. 그런 동네에서 영화를 공짜로 보여준다고 해서 삼총사는 예리를 따라간다. 여신 예리는 삼총사가 모르는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고 모르는 세상으로 안내하는 길잡이 같은 역할을 한다. 삼총사한테 예리는 '춘몽'이다.

예리는 삼총사한테 의리를 지키지만 내적 공허함은 그녀의 몫. 의식없는 아버지,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한 삼총사, 그녀를 좋아하는 한 동네 소녀, 그 누구도 예리의 꿈이 될 수 없다. 그녀의 핸드폰 배경화면은 정신도 육체도 건강할 거 처럼 보이는 오토바이탄 남자의 사진이다. 길을 가다가 자신의 이상형인거 처럼 보여서 찍었다는, 아무 의미없는 사진이지만 또한 많은 의미를 함축하는 사진. 그러니까 예리는 자신이 속한 공간이나 세계를 밖의 것들에서 꿈을 꾼다. 영화, 책을 포함해서.

2

 장률 감독의 영화들이 내러티브가 친절한 편은 아니고, 이 영화 역시 말이 안 되는 부분도 많다. 신민아가 정범의 변심한 여자친구로 갑툭튀하고 오토바이남인 유인석이 고향주막에  갑자기 나타나고. 생뚱맞은데 꿈이라는 카테고리에 다 포함할 수 있다는 편리한 제목ㅎ

3

양익준 감독, 윤종빈 감독의 연기는 갑 중에 갑. 두 사람의 캐릭터가 이기호 작가 소설에 나오는 변두리 거주자들과 닯아있다. 영화를 보면 계속 이기호 소설들이 떠오른다. 코믹한데다 엉뚱함까지. 그들의 엉뚱함은 순진함에서 나오는데 순진하는 게 웃음 코드로 작용해서 웃는게 썩 유쾌하진 않다. 나는 우월한 입장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불편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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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극장에 못 간지 3주나 된다. 바쁜 탓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체력이 급속도로 저질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짬이 나면 주로 충전을 위해 주로 누워서 보내는 나날들ㅜ 오늘도 할 일은 산더미지만 뒤로 미뤄두고 백만 년 만에 자료원으로 향했는데 강변북로는 올 때 갈 때 모두 주차장 같았다. 가을은 축제의 달로 서울 시내가 온통 들썩인다. 도로는 주차된 차로 넘쳐나고. 극장 안은 계절이나 사람의 기분과는 무관한 아늑함을 선사한다. 좀 더 열심히 극장을 가야지.

2.
<자객 섭은낭>은 몹시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개봉관에서 상영시간이 오묘해서 시간을 맞출 수 없었던 영화. 무협 없는 무협영화. 허우 샤우 시엔의 영화니 대충 짐작은 했다. 영화 내내 산수화를 감상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자작나무 숲에서 두 여인이 대결하는 씬은 박진감이 아니라 느린 템포를 택하고 그럼으로써 파생된 우아한 정서를 전달한다. 인물의 물리적 행동이 아니라 심리적 고뇌와 그로 인한 피로감을 오롯이 전달한다. 하지만 허우 샤우 시엔 감독이 잘 안 사용했던 느린 카메라 패닝이 눈에 띄는 영화. 정말 천천히 카메라가 돌아가지만 결국에 감독이 애정 하는 것은 롱테이크. 수묵 산수화가 움직이는 느낌이라고 해두자.

3.
줄거리는 한 마디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정략결혼을 한 남자 탓에 도인한테 보내져서 자객으로 거듭난 섭은낭. 그녀의 검을 쓰는 솜씨는 도인의 경지에 이르지만 인간의 따뜻한 심장을 버리지 못한다. 자객의 검은 무정한 도구고  심장은 장애물. 섭은낭은 심장을 제거하기 위한 미션을 받는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고 아마도 사랑했을 전계안을 죽이라는 명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섭은낭은 아무 감정 없던 남자의 아이도 너무 귀여워서 죽이지 못 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한때 사랑했던, 그리고 아마도 현재도 사랑하는 남자를 어떻게 제거할까.

감독은 전계안이 첩한테 하는 이야기를 통해 전계안과 섭은낭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사람의 마음, 특히 한. 때. 사랑했을 두 사람의 마음을 잘 묘사한다. 어떤 감정은 말로 변환되는 순간 산화되어 산산이 부서진다. 감정보다는 감정의 찌꺼기만 상대한테 전달될 수 있다. 섭은낭과 전계안, 두 인물은 이런 인간 감정의 본성을 잘 아는 인물이다. 섭은낭의 임무는 한계 안에게 칼을 꽂을 기회가 여러 번 있지만 행동을 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전계안이 자신에 관한 하는 과거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다. 이 커플과 섭은낭 사이에 마음의 벽처럼 작용하는 커튼 역할을 하는 얇은 천이 있다. 한번 변심한 마음에 대한 서운함 내지는 분노는 커튼의 두께가 아무리 얇아도 허물어질 수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섭은낭의 최대 결점은 뛰는 심장. 그녀는 자객의 자격을 갖추는데 실패한다. 사랑하고 있는 남자에 대한 일편단심도 심장의 부적절한 온도 탓이다. 이 영화가 무협영화가 아니라 절절한 사랑 이야기라는 걸 말해주는 이유이다.

4.
배경이 8세기인 이야기이지만 나는 좀 삐딱하게 봤다. 섭은낭이 주체적 인물인데 반해 전계안은 (좋게 말해) 수동적 인물이고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자다. 환경에 잘 적응하고 여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니면 헤아릴 태도도 없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인물이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도 성찰하지 않는 인물로 허우 샤우시엔 감독이 이런 인물을 왜 창조했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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