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이 순수한 이타주의를 실행할 수 없다고 믿는 편이다. 그럼에도 이타주의는 어떤 추진력에서 지속될 수 있는데 다르덴 형제가 <언노운 걸>에서 제시하는 건 죄책감이다. 죄책감이나 수치는 사람이 사람답게 행동하게 하는 중요한 감정이다. 우리는 불과 얼마 전까지 수치심과 죄책감이 없는 대통령을 봤었고 일반적 감정이 없을 때, 그 파장이 타인에게 얼마나 큰 공포를 주는지 경험했다.

이 영화에서 평범한 여의사는 주변 환경이 열악한 병원에서 임시로 일하기로 한다. 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보면 사회적 약자들이다. 불법이주노동자부터 정부보조금이 필요한 독거노인, 한부모가정의 가장 등.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이고 젊은 여의사는 임시로 병원을 지킨다. 아마도 다른 가능성을 말하진 않아도 계속 있지는 않을 걸 암시한다. 하지만 한 사건이 여의사의 생각을 바꿔놓는다.

신원을 모르는 한 불법이민 소녀의 죽음이다. 병원근무시간이 끝난 후 소녀는 병원 벨을 누르지만 여의사는 진료시간이 끝났는데 찾아왔으므로 문을 열어줄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그날, 소녀는 죽는다. 문만 열어줬다면 소녀가 죽지 않았을 거란 죄책감에 여의사는 소녀의 이름을 찾아나선다. 그러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여의사의 세계관의 변화이다.

소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소녀를 보거나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모두 죄책감에서 여의사한테 진실 조각을 말한다. 사실 이런 부분은 영화적 판타지, 혹은 다르덴 형제가 제시하는 판타지다. 현실은 죄책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도 많다. 죄책감이란 잘못을 인정해야 생기는데 잘못에 대한 기준 자체가 도덕적이길 기대하기 점점 어려운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게 현실아닌가. 영화에서 소녀의 친언니조차도 소녀의 존재를 개인적 욕망으로 부정하는 게 현실이다.

아무튼 소녀를 목격한 소년, 그리고 소녀의 죽음과 직접 관련있는 소년의 아버지가 모두 여의사에게 고해성사를 하듯이 진실을 말하는 건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였다. 여의사는 정말 객관적 태도로 사람과 행동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본인들이 어떤 판단을 결정하게 한다. 다르덴 형제의 인물이 고상한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여의사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있는 태도를 갖춘 의사로 변해간다. 왕진을 다니는 조그만 지역사회에서 의사의 일은 아픈 부위만이 아니라 환자의 살아가는 방식에도 개입할 수 밖에 없다. 걷는 게 불편한 할머니의 가방을 들어준다든지, 당뇨합병증으로 발바닥이 부어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사회보장카드 충전을 위해 센터에 전화를 해준다든지...이런 삶의 태로를 학습해가는 걸 보여주는 영화여서 왠지 성장영화로 느껴진다.

박근혜 공판 라이브를 잠깐 봤다. 올림머리의 안녕이 몹시 궁금했는데;;; 큰 핀을 이용한 약식 스타일을 보니 그녀도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생각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탄핵 수 자택으로 들어갈 때조차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이제 죄책감 혹은 수치심을 느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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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봤을 때 이 영화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오늘 다시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그 사이에 내가 변한 거겠지.

울먹이는 여자의 미디엄숏으로 시작한다. 잠시 후 누군가의 시선으로 엿보고 있는 뒷모습이 잡힌다. 한 가정이 깨지는 순간이다. 남자는 아내와 딸을 떠나서 애인한테 간다. 두 사람은 무명 배우고 서로 사랑한다. 사랑의 본질은 유동적이라 형태가 없으며 깨지기 쉽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열정으로 잠시 행복하다. 남자는 여자에 대한 열정을 절절하게 읊어대면서도 틈만 나면 다른 여자의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한다. 우리가 바람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본인만 인정 안 할뿐. 황당한 일은 그 다음이다. 바람둥이 남자가 순정을 바치는 여자는 비루한 집에 눈물을 흘리며 가난한 집이 싫다고 하더니 집을 선물로 준 남자한테 가버린다. 남자는 여자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화를 내지만 여자한테 사랑은 변하는 것이다. 남자한테 사랑이 변하고 지켜내기 힘든 것이었듯이.  결국 남자는 자업자득인셈인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 영화가 감정을 섬세하게 짚어냈다는 생각은 안 든다. 흑백의 경쾌함 때문에 인물들의 감정을 흥미롭게 바라보게 되긴 하지만 감정선의 맥락이 없다. 딸의 친구 모녀랑 영화보러 가서 딸의 친구 엄마 손을 슬그머니 잡는 남자는 발정난 수컷 정도로 밖에 생각이 안 든다. 전후 맥락없이 남자는 주변에 사랑을 뿌리는 유전자를 지닌건가... 그러다 자신이 사랑을 잃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안 해본 남자의 황망한 표정이라니. 아무튼 사람의 감정은 단순하게 보이지만 단순하지 않고 행동의 이면에는 복잡한 감정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본인이 아닌 이상 타인의 느끼는 감정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이 모를 때도 많고 지나간 후, 타인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아, 그랬었지 하기도 하고. 감정 변화는 살아있다는 증거지만 요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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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사는 일이 이슈가 되는 건 그만큼 주관대로 살기 힘들다는 말이 되겠다. 21세기에도 여전히. <프란시스 하>는 자신의 삶을 살려는 이야기인데 나이 불문하고 비혼이라면 공감 백만 개 누르고 싶은 주제를 다룬다.

프란스시는 영화 속에서 (남자친구가) "안 생기는undatable" 캐릭터다. 극 중에서 부부 관계를 정의하는 말이 나온다. 하우스 메이트인 남자가 우리는 부부같아. 섹스는 안 하고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 레즈비언 커플 같기도 하고.(뭐 대충 이런 내용) 프란시스의 고민 지점은 남자가 아니다. 일과 우정이다. 오프닝에서 프란시스는 동거하자는 남친의 제안을 거절하고 나온다. 그녀는 이성애 보다는 동료로서의 우정에 더 가치를 둔다.

오랜 친구 소피가 남자친구와 약혼을 해서 도쿄로 떠날 거란 말에 히스테리를 부린다.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인생의 중대사에 개입할 수는 없는 노릇. 섭섭한 마음 한가득이고 소피와 순식간에 소원해진다. 이러저런 허전한 마음에 파티에서 만나 파리에 오면 자신의 집을 사용하라는 말에 카드 값 걱정하며 파리로 1박2일 날아간다. 나는 이 심정을 너무나 이해하겠단 말이지. 정작 파리에 오면 연락하라던 사람은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고 밤에 소피한테 송별파티가 있다고 연락이 온다. 하지만 프란시스는 파리에 왔다는 말을 끝내 하지 않고 못 간다고만 말한다. 자신의 뻘짓을 그 누구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심정, 이 또한 공감가고.

무용수로서의 길은 요원해보이고 매달 집세는 압박스럽기만 하고. 암울하기만 한데 볕은 찬란하다, 포스터는 빛나는 햇살 속에서 프란시스 하가 생계를 위해 사무직을 받아들이고 잠시 나와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다. 곧 넘어질 것 같으면서도 간신히 균형을 잡는다. 머리칼은 이리저리 흔들린다. 사실 이십대의 비혼 여성의 불안한 심리를 다뤘는데 프란시스 하를 연기한 그레타 거윅의 연기는 훌륭하다. 늘 무언가에 쫓기는 것 처럼 달리거나 빠르게 걷는다. 여유없는 생활을 몸으로 보여주면서 보는 이가 같이 안달이 나게 만든다. 그레타 거윅의 프란시스 하에 한참 몰입하다 보면 도쿄에서 소피의 전화를 받게 된다.

소피는 약혼자를 떠나 뉴욕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재회를 하고 침대 위에 누워서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 주고 받는다. 퀴어 코드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친자매나 가족애 같은 걸로 받아들였다. 친자매도 친구도 늘 내 생각과 같을 순 없다. 다음날 소피는 자고 있는 프란시스를 남겨두고 약혼자의 삼촌(?) 장례식장으로 달려간다. 그래, 사람한테는 여러가지 사랑이 필요하다. 우정도 필요하고, 싸우다가 화해하는 이성 간의 사랑도 필요하다. 밥도 필요하고 빵도 필요하듯이. 이렇게 생각하면 소피의 행동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프란시스의 순도는 높아서 한 종류의 사랑만을 좇는 낭만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없는 사랑을 추구하는 이를, 낭만주의자라고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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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퇴원 후 매일 오전 병원행이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병원 예약 없는 날. 모닝 영화로 줄리엣 비노쉬의 데뷔작이라는 <랑데뷰>. 영화를 보면서 문득 일상의 힘에 대해 생각했다. 그 어떤 사고나 고난이 와도 이겨낼 수 있는 원천은 일상이 아닌가, 싶다.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는 말은, 내가 여러가지 터널에서 빠져나와 일상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몸만 불편한 게 아니라 지난 주말 마음도 너덜너덜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차분해진다. 까닭없이 봄볕에 마음이 들떴다가 까닭있어서 마음이 바닥에 누워버렸고 이제 조금씩 마음을 다독이고 있다.

2.
헐리우드나 한국 멜로영화가 판타지로 가득차서 해피엔딩으로 이끌기 위한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면 프랑스 멜로영화는 종종 비극에서 출발한다.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소통의 부재가 주요 테마이다. 사랑하는데도 소통은 분명히 부재할 수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상호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상대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사랑하는 일이 종종 발생해서 사랑은 양방향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벗어나버린다. 사랑은 결국 일방통행일 가능성이 더 큰건 아닐까. 기독교에선 신도 자신한테 충성하길 요구하는 교리를 촘촘하게 적어놨는데.

영화에서 세 명의 주인공은 각기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쾅탱은 분열증 환자처럼 보인다. 가학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피학적이기도 하고. 쾅탱의 친구이면서 처음 니나한테 반한 폴로. 폴로는 성실한 부동산 중개인이고 우리가 흔히 보는 평범한 인물이다. 사랑하면 데이트도 하고 잠도 자고, 같이 살기도 하는. 니나는 배우가 되려고 남부지방에서 파리로 상경했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궁핍해도 자신의 의지를 믿는 혈기 왕성한 청년기의 전형이다.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대는 쾅탱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인정하길 거부한다.

그녀는 왜 사랑에 빠지길 거부했나. 자신과 많이 닮아서가 아니었을까. 격정적이고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쾅탱한테 본능적으로 끌린다. 폴로의 소심하고 단정함을 존중해서 함께 살고 싶어하지만 사랑하진 않는다. 이렇게만 줄거리만 보면 막장인데 우리 마음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매일 막장 드라마를 쓰고 있지 않나. 어느 순간 누군가를 좋아했다가 증오하고 마음 속으로 죽였다가 살리기도 하고...자신이 감독이어서 배치하고 싶은 곳에 둔다. 물론 상상 속에서만. 영화 속 인물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실행력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우리가 생각만 하는 걸 재현해서 보여준다. 이렇게 보면 <랑데뷰> 속 러브 트라이앵글이 보여주는 광기적 발광이 무척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

3.
소통을 원할수록 멀어지는 인간사. 두 주 전, 모임에서 사주를 공부한다는 이가 창의적(?)으로 내 사주를 해석해 주었다. "기도 많이 하세요" "네???" 그 이후 "기도"에 대해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책이 기도고 영화가 기도나니. 엄한 결론으로. 암튼. 일상이 중요하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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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다는 건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결국 혼자 남는 게 아닐까. 나이들면 왜 떠나보내나? 집착이 없어지고 잡을 수 없는 걸 잡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교사인 나탈리는 남편, 딸, 엄마, 제자가 있는 과거에는 아마도 행복의 구성요소라고 부를 수 있는 걸을 다 갖추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겠다고 선언을 하고 공유했던 책까지 가져가버린다. 나탈리를 사랑하는 엄마는 (아마도) 우울증으로 밤낮으로 전화해서 잠이 안 온다, 죽겠다고 말하더 정말 어느 날, 세상을 떠난다. 철학수업의 제자는 이제 아도르노에 관한 책을 냈고, 나탈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어느 순간 나탈리보다 더 큰 세계를 꿈꾸면서 나탈리를 비겁한 아늑함을 추구하는 지식인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총체적 난국이 어딨나...

이런 일은 그런데 일상일 수 있다. 영화라서 한꺼번에 일련의 사건을 두 시간에 보여줘서 우리가 더 잘 인지할 수 있을 뿐이지. 실은 우리의 과거도 현재와 같지 않고 미래는 현재와 같지 않을 것이다. 태양이 매일 동쪽에서 떠도 지구가 매일 태양 주위를 돌고 있어서 각도가 변하는 걸 인지 못하고 우리는 하지, 동지, 여름, 겨울이라는 두루뭉술하게 시간을 나눌 뿐이다.

나탈리가 산에 사는 제자를 찾아가서 "이제 완전히 자유인이야"라고 말한다. "자유인"이란 말이 이렇게 슬픈 단어가 될 수 있다니. 완전한 자유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자세에 대해 말한다. 태양이 우리 눈에 안 보여도 늘 그 자리에 있듯이, 나탈리를 지탱하는 요소들의 자기장은 눈에 안 보일 뿐이지 여러 가지 형태로 그녀의 위성으로 남아있다. 딸을 출산한 딸도 여전히 그녀의 딸이다. 크리스마스 가족 모임이라든지 여름휴가에 그녀를 따르는 제자를 찾아간다든지. 관계가 전과 같지 않지만 끈은 그대로 남아있고 그 끈을 어떻게 연결할지는 나탈리의 몫이다. 이러고 보면 나이들면 체념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데 격하게 공감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말지니.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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