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주 토요일, 오랜만에 상암동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에 갔다. MBC가 상암동에 쳐들어온 이후로 영상자료원 밖과 안 모두 사람들로 넘쳐난다. MBC 주변은 대형 식음료 체인점들이 성업 중이고, 이따금씩 갈 때마다 커다란 음악과 지역 마켓 부스들로 광장은 가득찬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미로를 헤치며 간신히 극장에 도착해서 (영화 상영 후에는 입장 불가 정책은 이따금씩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정책이다) 상영관에 들어서면 역시 할아버지, 할머니 관객들로 좌석이 거의 만석이다. 씨네필 노년 인구일 수도 있지만 무료 상영이라 마땅히 갈 곳 없는 노년 인구들이 극장에 앉아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경우 영화 상영 중에도 서로 큰 소리로 대화하고, 전화 받고...ㅜ 우리 아빠도 귀가 어두워서 공공장소에서 전화받을 때 저렇게 크게 소리치듯 전화해서 누군가가 눈살을 찌푸리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이해하려고 한다. 내 귀도 안 어두워지리란 보장이 없으니^^;

2. 영화는 일본으로 온 미얀마 난민 가족이야기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남자는 일본으로 온 이유를 말한다. 살기에 안전하지 않아서 더 좋은 환경을 찾아서 왔노라고. 불안하고 안전하게 느끼지 않는 증거를 내라고 하면 낼 수 없다고 말한다.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불안을 느끼지만 그 증거를 명확하게 내놓기 힘든 것처럼. 남자는 한 식당에서 일하고 좁은 집에서 아내와 두 아들과 산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단칸방에서 밥도 먹고 두 아들과 장난도 친다. 아이들은 생활고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일본 국적을 갖게 되면서 고향이란 개념도 없어진다. 이민 2세대가 그렇듯이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은 희미해지고,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부모는 다르다. 부모의 비자 만료로 불법체류자가 되어버리고, 삶의 무게는 남자의 어깨와 아내의 마음을 짓누른다. 아내는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마음이라도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미얀마로 돌아가기로 한다. 남편은 일본에 남고. 고향에 돌아온 여자는 가족들을 만나고, 아이들에게 미얀마의 문화를 가르치려고 한다. 미얀마에서 아이들은 이방인이 되어 불편하고 불결한 물리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체성 혼돈을 겪게 된다. 자신은 일본인인데 왜 미얀마에서 살아야 하는지 반문하고, 아버지의 부재는 아이들의 마음을 닫게 만든다. 잘 살기 위해 택한 이주가 결국 그 누구의 마음도 편치않게 만든다.

3. 제6회 디아스포라 영화제 때 상영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사는 건 이 가족의 여정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 더 안전해 보이고, 찾아가 볼 만해 보이지만 막상 '그곳'에 가면 '그곳' 역시 불안한 요소들로 가득 차있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곳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걸 확인했을 때, 좌절은 더 크지만 상황 파악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추스리고 수습하는데 힘을 기울이는 게 인생아닐까. 하루하루 살아가다보면 불안과 불확실성도 내성이 생겨 익숙해져서 둔감해지는 날도 오고.

4. 조금만 더 기력이 왕성했으면 좋겠다. 불안과 불확실성에 도전하려면 기력도 중요하니까. 밥은 많이 먹는데 기력이 없는 건 왜 일까. 요상한 결론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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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 이야기를 주로 가족의 부재와 상실을 통해 다룬다. <어느 가족> 역시 가족 이야기인데 가족 바깥에서 휴식을 얻는 유사 가족 이야기다. 전반부에서는 각 구성원들이 낮에 뭘 하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와 모이는지를 보여준다. 학교에 있어야할 어린 아이는 아빠로 보이는 어른과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는 기술을 연마하고, 어린 남자 아이의 동생으로 보이는 더 어린 여자 아이는 별 일 없으면 도둑질에 동참할 미래를 가질 것처럼 보인다. 성년인 언니는 핍쇼를 하는 곳에서 일하고, 엄마는 동네 사람들의 수근거림으로 보아서 전직 성매매를 했던 사람이다. 할머니는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겼고, 그 여자의 자식에게 돈을 받곤했다. 이들이 낮에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제외하면 특별히 다른 게 없는 저녁 시간을 보낸다. 함께 밥을 먹고, 이따금씩 서로 하는 일에 대한 기분을 묻기도 하고 답하기도 한다. 이들은 혈육을 두고 어쩌다가 한 집에서 모여 살게 되었나.

영화 후반부에 가족 구성원들이 모이게 된 배경이 드러나는데 처참하다. 아이는 친부모한테 학대를 당해 새옷에 대한 트라우마를 통해 드러낸다. 새옷을 훔치러 가서 아이에게 새옷을 입히자 아이는 묻는다. 이제 맞는 건가요? 아이의 팔뚝에 뜨거운 다리미로 데인 자국을 보면서 엄마인 여자는 자신의 팔을 내민다. 자신도 다리미로 데인 자국이 똑같이 있다면서. 이들은 피가 아니라 과거 고통과 아픔으로 하나가 된다. 삶을 이어가는데는 무지막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밥을 먹기 위해 일을 하고, 일을 하기 위해 밥을 먹고. 단순해 보이는 일상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개인의 에너지를 집중하는 일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통을 껴안고,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산다. 물론 이들은 법 아래서 범죄자가 된다. 학대하는 남편을 죽이고, 생필품을 훔쳐서 살고, 학대받는 아이를 엄마한테서 유괴한 사람이 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대신 도둑질을 가르치고. 할머니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연금을 받고. 배경을 떼어난 행위 자체만으로는 뉴스룸의 특종감이다. 하지만 그 배경을 담담하게 드러내는 영화는 이들의 범죄행위를 비난하는 걸 멈칫하게 만든다.

가족이란 무엇인지...일본은 자연재해가 많아서 그런가, 아주 절망적인 상황도 차분하게 보는데 이 차분한 태도가 그렇게 절망적일 수 없다. 동정 없는 세상에서도 삶은 계속 되고, 계절은 바뀌고, 아이들은 커가고 어른들은 늙어간다. 몹시 슬픈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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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표면적으로 이해나 공감은 가능한 것 처럼 보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의 슬픔, 더구나 그게 사고였다면 어떨까. 영화는 아주 기이한데 아름답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영화를 처음 접한 건 <더 랍스터>를 통해서다. <더 랍스터>역시 아주 특이한 영화였다. 스타일도, 영화를 전개하는 방식도. <킬링 디어>는 판타지가 현실에 결합되어 어디까지가 판타지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지점까지 극을 밀어붙인다. 문득 그런 이런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초현실은 어쩌면 사실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가령, 내 경우를 보자.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염이 심해진다.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아플 때도 있다. 지난 몇 달간 윗배를 칼로 베는 듯한 통증에 시달렸다. 12월에 위내시경을 했기에 다시 하는 걸 참았다. 수면 마취 부작용 때문에 망설이면서 내 위염에 대해 스스로 스트레스일거야, 라고 최면을 걸면서도 혹시 위염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불안에 떨었다. 몇 달을 이런 상태로 지내다가 이번 달에 스트레스 요인이 사라졌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위염 증상이 사라졌다. 물론 나는 만성위염이어서 언제든 증상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영화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왜 내 위염 이야기를 하냐면, 이 영화가 바로 이런 심리적 스트레스 증상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조건을 가진 한 외과의사가 있다. 병원에서도, 집에서도. 흠 없는 예쁜 아내, 아들, 딸. 식탁에서 벌어지는 풍경에서 어린 아들의 긴머리가 남자는 마음에 안 들지만 결코 강압적으로 자르라고 하지 않는 인품의 소유자이다. 파티에서도 술 한 모금 안 마시고 적절히 사람들과 어울리다 일찍 귀가한다. 집안의 분위기 역시 살균처리 된 것처럼 정돈되고 깔끔하다. 그런데 한 십대 소년과 주기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적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한테 소년은 친구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지만 물리적 나이와 지위를 떠나 대등한 힘이 느껴진다. 이 대등한 힘의 근원을 찾아나가는 여정이 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남자는 수술하다 자신의 실수로,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 소년의 아버지를 죽였다. 남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수술은 문제없다고 말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지만 무의식까지 속일 수는 없다. 그는 안다. 자신의 실수라는 것을. 소년도 알고. 두 사람의 힘의 역학 관계는 여기서 나오고 소년은 아버지를 잃은 대신 남편이 없는 엄마의 남편을 구해주기로 한다. 엄마가 남자를 좋아하니까. 소년은 아빠로 그를 받아들일 적극적 의지보다는 남자에게 엄마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함으로써 남자에게 벌을 준다. 남자는 완벽한 가정이 있을 뿐 아니라 소년의 엄마는 자신의 실수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니까. 이 사건을 계기로 남자는 소년을 멀리하고 소년을 멀리하자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남자의 어린 아들, 십대 딸의 다리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남자가 속죄하지 않으면 그를 제외한 가족이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받는다. 잘못은 남자가 했는데 왜 벌은 가족이 받나...바로 고통이 벌이다. 남자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때, 무너지는 고통을 소년은 원했다.

사실, 영화 속에서 소년은 그 어떤 초능력도 쓰지 않았다. 그저 저주의 말을 했을 뿐이고, 남자는 처음에는 현대 의학을 동원해서 그 저주를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하고 남자와 남자의 아내는 점점 그 저주를 믿게 되고 결국 가족 중 한 사람을 희생하기도 결정한다. 소년의 바람대로. 남자는 결국 자신의 죗값을 치렀고, 완벽한 가족에 구멍이 났으며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게 어떤 고통인지 알게 되었다. 영화 내내 카메라는 남자를 지켜보는 것같은 각도로 남자를 따라다닌다. 그래서 마치 어떤 전능한 힘이 스크린 밖에서 소년과 공모해서 남자의 숨을 옥죄는 것 같은 효과를 주고, 지켜보면서 침을 꿀꺽 삼키게 된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이렇게도 전달할 수 있는 것에 놀라면서 정돈되고 깔끔한 병원 병실, 집안이 아주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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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V무료영화 따위 거들떠도 안 보다가 극장에서 보기는 싫고 다운받기는 더 싫고 했는데 무료영화에 들어있어서 봤는데, 쇼파에 누웠다가 앉았다가 하면서 보기에 아주 좋은 영화이다. 무료영화 자주 이용해주겠어.

2. 영화는 무척 곱다. 일단 영상이 곱고, 사람의 심리를 다루는 것도 곱고, 음식을 하는 장면도 곱다. 시골집도 가끔 가서 누워있다 오고 싶게 곱다.

3. 물론 8할 이상이 판타지이고 의외로 청춘물이다. 시골삶의 고단함을 좀 상상했는데 고단함보다는 시골에서 사는 것도 괜찮지 않겠니, 하고 슬며시 설득하는 영화같다. 혜원이 도시의 삶을 추구했지만 임용고시도 떨어지고 편의점에서 알바하면서 유통기한 지난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게 도시에 사는 청년의 삶으로 보여진다. 대기업에 입사한 재하 역시 월급을 축낸다는 상사의 말을 듣고, 조직에서 개인은 월급만큼의 일을 하는 사람인가 아닌가로 평가받는 것에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며 귀농을 한다. 한 번도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은주. 학교 졸업 후 농협은행에 다니는데 농촌에서 농사일이 아니라 조직생활을 하는 건 도시 삶이나 똑같다는 걸 에둘러 보여준다. 학교 다닐 때는 지금과 삶이 다르게 펼쳐질 것이라고 꿈을 꾸지만 학교를 졸업한 지금, 거창한 꿈 따위보다는 실천할 수 있고,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일이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한다.

철마다 자연이 제공하는 제철 재료로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혼자, 또는 나눠 먹으며 대화하며 웃는 일이 세상살이 아닌가. 아카시아꽃이 피면 따서 얇게 튀김옷을 입혀 화전을, 밤이 열리면 주워서 밤조림을 만들고, 감을 따서 겨울나기 준비로 곶감을 만들기 위해 정성스럽게 깎아서 바람에 말리며 이따금씩 손으로 주물러준다. 또 막걸리를 만들어서 친구들을 불러 지짐이 안주로 꽐라가 되게 마시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일인데 왜 실천하기 힘들까. 삶의 기준 탓인데 그 기준은 버리면 간단한데...간단한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

4. 세 청년의 삶을 부러워하다가도 농가 홍보책자를 만들기 위해 농가 취재를 했던 때를 떠올렸다. 실상은 혜원이처럼 밤 한 톨 한 톨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을만큼 농사일이 한가하지 않다. 농한기에는 병원에 입원해서 아픈 허리 치료를 받고 봄이 되면 다시 일을 한다는 한 농부의 아내도 있고, 뉴질랜드에서 화초공부를 하고 와서 나무를 키우고 싶지만 현실은 하루하루 닥친 일을 해내느라 귀농하면서 처음에 품었던 꿈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농부 등등. 농사일은 끝이 없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몸을 움직이지 않는자는 귀농에 부적격자니.

5. 곱디고운 영화를 보고 굳이 이런 농가 현실을 떠올릴 필요가 없거늘. 쓸데없이 이런 현실을 떠올리면서 판타지로 영화를 정의나 하고.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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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보글을 보고는 별로 안 보고 싶었는데 상영시간이 맞아서 본 영화. 홍보글은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는 43살의 중년 여자가 미국인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서 미국으로 사랑을 찾아 떠나는 로맨틱 코디디처럼 묘사했다.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단순한 사랑을 찾아서 떠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고독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본 사회, 나아가 현대 사회의 외로움과 인간적 윤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상당히 주제가 무겁다.

2. 첫장면이 퇴근길, 사람으로 가득찬 지하철역. 인파 속에서 세츠코의 귀에 잘 있었어요,라는 속삭임을 남기고 한 남자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에 몸을 날린다. 마치 이런 일이 빈번한 것처럼 영화 중간에도 묘사된다. 누군가가 지하철에 뛰어들어 열차 운행이 중지되고 있다고. 이런 말을 주고 받고,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 구성원들의 이야기이다. 세츠코의 회사에서  아마도 강제 퇴직할 수 밖에 없는 중년 여인의 송별회에서 세츠코는 사람들이 그녀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려준다. 나중에 세츠코가 사직을 권고 당할 때, 세츠코가 사무실 문을 닫고 나가자 모두 즐거운 소리로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슬픔이나 아픔에 공감을 보여주지 않는 사회에 익숙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아무하고도 마음을 터놓지 않고 늙어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러다가 조카의 소개로 독특한 수업방식을 지닌 영어 수업에 등록하는 세츠코. 입술을 움직이이 않고 말하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데 익숙한 세츠코는 루시란 영어 이름을 갖게 되고 입을 크게 벌려 상대에게 어떻게 지내는지 묻는 연습을 하게 된다. 수업 시간 전에는 허그를 워밍업으로 하고. 허그는 상징적이면서도 그 힘이 엄청나다. 세츠코/루시가 자신을 루시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 존을 따라 미국에 간거는 맞지만 존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 즉 '허그'를 찾아나선 것이다. 허그에서 오는 사람의 온기를 루시는 갈망하고 있었다. 사람의 체온을 몰랐을 때는 자신이 결핍된 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존을 통해 사람의 온기가 결여되고 비로소 갈망하기 시작한다.

세츠코/루시는 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 과거의 연인을 친언니가 가로채서 결혼했다. 언니의 딸 조카딸 미카 덕에 존을 알게 되었고, 미카는 존과 연인이고 그런 존을 좋아한다고 믿게 되고, 미카는 그 사실을 알고 자살을 하고. 한국일일드라마로 일년은 족히 풀어갈 이야기가 두 시간도 채 안되는 상영시간에 다 들어가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덕보다는 개인의 욕망이 우선하는 가족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나.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건 최소한의 도리이고, 예의인데...라고 쓰면서 급반성을.

3. 낯선 이와의 허그 속에서 세츠코/루시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찾기 힘든 인간적 예의를 발견했기 때문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던 건 아닐까.

4. 영화를 다시 생각하니 우울하네. 고집 내지는 아집이 늘어가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는 요즘인데...공감 능력은 나이들수록 떨어지고.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심드렁하게 받아들이고. 단 하나 긍정적인 점은, 갑자기 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인지는 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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