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만든 제작사 젠트로파에서 제작된 영화라는 홍보문구를 사용하는 영화다. 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제작사란 수식어구가 필요했는가. 일단 스웨덴 영화고 집단 폭력을 다루는 영화인데 친절하지 않다. 제목 그대로 히어here 혹은 데어there 비포before는 알 수가 없다. 영화는 사건 (아마도 누군가를 죽였을 수도 있는) 17살 소년이 일상으로 돌아온 후 학교, 마을, 심지어 가족이 한 소년한테 가하는 집단적 폭력을 다룬다. 미국영화라면 구체적 사건을 이미지화해서 친절한 설명과 함께 자극적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스웨덴 영화다.

 

소년이 소년원에 가게 된 이유를 생략한 채 소년을 대하는 모든 등장인물의 태도로 정황을, 관객이 추측하게 한다. 출소해서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데 아마도 피해자의 엄마일 가능성이 높은 여자가 소년을 구타하는 격한 장면이 등장한다. 분노를 표출하는 직접적 방식에 아마도 가해자였을 소년은 소극적으로 대처한다. 그 후 소년이 주로 생활하는 학교 공간이 등장하고 학교 학생들의 집단 린치를 보여준다. 소년의 전학을 요구하는 부모와 학생들의 서명까지 등장하고. 소년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의문이 드는 건, 소년의 태도이다. 소년이 억울함을 언뜻 말하는 장면이 있다. 즉 소년은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억울한 누명을 썼을 수도 있지만 감독은 그런 부분을 다루지 않는다. 소년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유일한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 전학 온 여학생이다.

 

지역 공동체의 구성원이 다른 의견을 갖기 얼마나 힘든가를 에둘러 설명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한번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믿음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자신의 믿음을 위해 모든 증거(?)를 수집하고 끼워맞추는 우둔함에 갇힌다. 집단 지성이 때로는 유용하지만 얼마나 맹점이 많은지.

 

주변의 핍박 속에서 소년을 믿고 지지해야할 아버지마저도 소년을 저버리는 언행을, 결국 하게 된다. 소년의 집안은 3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치매 걸린 할아버지, 아버지, 소년과 남동생. 엄마나 할머니가 부재하는 남자로만 이루어진 가정이다. 치매걸린 아버지를 돌보고 어린 두 아들을 돌보는 아버지는 심적으로 아들을 비난하는 지역공동체의 일원에 속하는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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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교에 따르면 사랑의 본질은 질투다. 누가 사랑을 온유하며 참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나. 사랑은 편협하고 이기적인 속성이 있다. 특히 이성간에 작동하는 사랑에는 포용이 들어갈 수 없다. 포용은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혹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사랑의 유형이다. 이성간에 사랑은 신과 신도 사이의 사랑이 아니기에, 무수히 들어온 가르침대로 온유를 가장하는 체 할 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이성간의 사랑에서 키워드는 격정이다.

 

<45년 후>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영화다. 45주면 결혼 기념일 파티 일주일 전에 노부부의 일상을 흔드는 소식이 날아든다. 남편의 첫사랑이 죽었다는 소식. 아내와 평지도 산책 안 하는 남편이 첫사랑 시신을 찾았다는 소식에 알프스 산에 가겠다는 말에 아내는 발끈한다. 남편의 과거를 겉으로는 쿨하게 인정하는 아내. 그리하여 남편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척해보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다. 남편의 과거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45년 전, 자신을 만나기 전 남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한테 마음이 온통 가 있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어한다. 객관적으로 이 무슨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인가 싶지만 사람은, 특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한테 쿨할 수 없다. 쿨해진다는 거 자체가 그 대상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이므로.

 

남편은 아내의 이런 마음을 알 턱이 없다. 영화는 전적으로 아내의 미묘한 심리적 출렁임을 다루고 있다. 무익해보이는 이런 질투 아닌 질투는 입 밖으로 말하면 찌질한 내용이기에 말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아내는 고상하고 45년 간 남편의 사랑을 받아왔다. 45년 간 받은 사랑의 크기는 아내한테 중요하지 않다. 아내는 45년 간의 사랑이란 틈 속에 섞여있을 수 있는 이물감이다. 어쩌면 이 이물감은 남편이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이 무덤까지 해로하면서 갔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기도 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근본적 시각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남자한테 과거는 삶을 이루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여자한테 (특히 남자의) 과거는 균질성을 흔드는 커다란 사건이다. 사랑을 바라보는 남녀의 차이는 노인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말하는 영화기도. 그런 격정적 감정의 흐름 속에서도 아내는 그동안 유지되어온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남편을 의심하면서도 파티날 연주할 음악 선곡 전화를 받았을 때, 곡 리스트를 말한다.

 

밋밋한 영화인데 클라이막스는 파티 장면에서 남편이 축사를 하는 장면이다. 45년 전 이 날, 결혼하자고 아내와 장모를 설득한 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이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감동적 축사인데 아내는 다른 이유, 즉 분해서 눈시울을 붉힌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춤을 추는 의식이 이어지고 춤곡이 끝났을 때, 남편의 손을 뿌리치면서 냉랭한 얼굴의 아내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영화가 끝난다. 남편은 아내의 감정 동요를 알 길이 없고 아내와 관객만이 감정의 깊은 파고를 감지한다. 사랑에서 상대를 더 사랑하는 이가 약자다. 아내는 약자라고 부를 수 있고, 남편은 무의식적 무심으로 강자의 위치를 차지한다. 흥미로운 건 남편은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파생되고 남자와 여자가 다른 별에서 산다는 말이 나온다.

 

결혼 45년 후에도 이런 감정을 유지할 수 있는 부부라니,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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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정이 쏠리는대로 살 수 있다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2

<종이 달>은 감정에 따라 사는 한 여자 이야기다. 여자는 부자들 집에 방문해서 저축을 현금으로 받아오는 은행 직원이다.  (견물생심인데 이런 직업이 90년대에 일본에 존재했었다니 놀랍다) 성실하고 조신한 여자가 어느 날, 자린고비 고객의 손자한테 끌리고(이게 사랑인지 육욕인지는 모르겠다) 어린 남자의 등록금을 마련해주기 위해 고객의 예금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어린 애인의 후원자가 되면서 고객의 돈을 횡령하기 위해 문서위조, 거짓말 등등을 해낸다. 흔히 말하는 유흥비로 탕진하는 생활을 하는데 처음에 갖게 되는 망설임은 사라지고 대담함과 자연스러움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때맞춰 남편은 상하이로 가고.

 

거짓말과 위선으로 가득찬 생활은 곧 그 실체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아마도 사랑하는 어린 애인은 다른 또래 여자가 생기고 은행에서는 의심을 받기 시작하고 남편은 상하이에서 돌아온다. 총체적 난국인데 이럴 때마다 여자는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성 세계에서 이탈한 여자에게 멈춤 신호는 없는 것처럼. 그러나 단정한 유니폼을 입고 마른 다리로 페달을 밟는 힘찬 질주에는 불안이 담겨있다. 유니폼과 질주라니, 안 어울리는 짝궁에서 파생되는 불안한 기운.  

 

3

드디어 은행에서 발각되고 횡령 규모에 모두 놀란다. 평생 은행원으로 살아온 또 다른 여인이 있다. 두 여인의 대화 중 인상적인 부분. 평생 직장에 몸바친 여자가 소원이라고 말하는 게 밤을 새는 일이다. 대체 밤을 새는 게 무슨 소원인가 싶은데 그녀의 변은 이렇다. 밤을 새면 다음 날 출근해서 피곤하니까 밤을 샐 수 없다고. 은퇴하면 밤을 한 번 새보고 싶다고. 그러면서 내키는대로 사는 여자한테 말한다. 당신은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살아보지 않았냐고... 뭉클한 장면이었다.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두 사람. 하고 싶은 걸 환경에 맞추느라 억제하면 살아가는 사람은, 범죄일지라도, 그 호탕함을 몰래 부러워한다. 사회 규범을 어기면서 하고 싶은대로 질주하는 여자는, 고장난 브레이크를 장착해서 자신을 파괴할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린다. 이 영화의 미덕은 질주하는 여자를 다시 가두기보다는 거짓 삶을 살아도 질주에 방점을 둔다. 여자는 달아나서 복잡한 인도 시장을 어슬렁거린다. 그녀의 삶은 인도 시장통 만큼 혼돈스럽지만 여기서도 여자는 멈추지 않고 인파를 뚫고 걸어간다.

 

4

그녀는 어린 시절, 기부금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의 지급에서 돈을 슬쩍하고 당당하게 말한다.기부를 위해서는 아버지 돈을 슬쩍하는 게 정당할 수 있다고. 그녀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반칸트적 인물이다. 천성이 반칸트적인데 자신이 동의 못하는 사회 질서 내에서 살아갈 수 없다. 사회 질서, 즉 법제도에서 탈주하는 걸 용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비난을 해야할까. 분명히 이성은 비난을 해야한다고 말하지만 감정은 쾌감을 느낀다.  

 

5

천성적으로 쏠림을 두려워하고 균형을 유지하느라 애쓰는데 안정을 느끼는, 나는 그녀의 불안하지만 호기로운 삶을, 그녀의 동료처럼 흥미롭게 바라본다. 질서에 의문없이 순종하는데 답답증을 느끼지만 질서를 깨고 나올 수 없도록 오랫동안 길들여졌다. 해를 거듭하면서 더욱 더 질서에 갇히고. 이따금씩 내 틀을 깨보고자 작은 시도를 하지만 나는 질주를 두려워하고 틈만 나면 브레이크를 밟는다. 출발은 했지만 정신차려 보면 언제나 제자리에 서 있는 걸 발견한다. 다른 길로 들어섰다가도 얼른 익숙한 길로 돌아와버리는 습성. 이렇게 평생 사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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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나타>

두 주 토요일을 차이밍량 영화와 보냈다. 두 편에 공통점이 있다. 남녀 관계로 얽힌 대중적 공간에서 보는 고독이다. <청소년 나타>는 두 청년과 한 여자의 관계를 그린다. 마치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선댄스와 엣타, 그리고 부치의 삼각관계가 주 내레티브다. 그리고 여자를 짝사랑해서 세 사람을 스토킹하는 소강(이강생)의 이야기다.


오프닝에서 두 청년이 비오는 날,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서 동전을 훔치는 장면이 나온다. 축축하고 눅눅한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영화 전체가 이런 분위기다. 소강은 재수학원을 그만두고 번민을 하는데 엄마와 계부는 소강의 마음의 동요를 독해할 수 없는 타자다. 소강의 심리상태는 오히려 집 바닥에 흥건한 물이나 기어가는 바퀴벌레로 표현된다. 축축한 곳에서 사는 바퀴벌레를 찔러서 잡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고 유쾌한 물의 이미지가 아니라 습하고 바퀴벌레가 서식하는 그런 찐득한 이미지.


롤러 스케이트장에서 일하는 스무살인 여자는 무심한 남자친구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한다. 그녀한테 표면적 고민은 남자친구지만 실은 스무살이 지니는 헛헛한 마음을 대변한다. 후배랑, 오다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십대가 질풍노도의 시기로 상징화돼서 아픈 청춘이 된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내 이십대 일기장을 보면 질풍노도의 시기가 맞다. 까닭없는 불안와 우울이 자주 습격해서 나는 이십대가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는 말을 종종 써놨다. 아무 것도 정해진 거 없는 가능성의 시기지만 무한한 가능성은 불안과 짝궁이다. <청소년 나타>는 인생을 소진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인생을 소진하는 걸 겁내는 이는 더 이상 청춘이 아니다. 그러고보면 불안은 늘 함께하는데 불안의 질이 다른 거 같다는 생각이.

 

<애정만세>

 

1

십 수년 전, 비디오 시절 이 영화를 처음봤을 때의 서늘함을 잊을 수 없다. 여자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한참 우는 장면에 영화를 이렇게 끝낼 수 있구나, 하는 충격과 함께. 사실 어릴 때는 삶의 무게 따위보다는 막연한 불안이 지배적이다. 이제 삶의 무게가 뭐라는 걸 조금 알게 되는 나이가 되고 <애정만세>를 다시 보니 절절하지만 생각보다 경쾌하다.


2

부동산 중개인 여자의 고단한 삶이 꽤 섬세하게 그려진다. 매매할 집을 홍보하고 손님들한테 집을 보여주는 사이에 무단횡단하면 벌금을 무는 도로 표지판을 무시하고 매일 무단횡단한다. 밥도 길 포장마차에서 혼자 먹거나 도식락을 들고 팔 집에 서서 먹는다. 살기 위해서 마지못해 먹는 행위를 하는 삶. 그리고 우연히 만난 남자와 욕정을 풀고. 다음 날 새벽 타이베이 시민의 평온한 일상을 파노라마로 보여준다. 한 공원에서 화단을 꾸미려고 갈아엎은 흙은 배경으로 여자는 무표정하게 걷고 또 걷는다. 카메라는 여자를 계속 따라가다 멀리서 공원에 운동하러 오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더 멀어지며서 공원 밖에 도로를 보여준다. 차들은 신호에 따라 오간다. 무엇하나 흐트러짐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자는 벤치에 앉아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더니 소리내서 한참을 운다. 아, 이 울음이 어찌 그리 절절한지. 이 절절함을 느끼는 데 기뻐해야 할 지 슬퍼해야할 지. 살아온 세월 탓에 여자가 살아내는 일상의 긴장과 반복, 그리고 반복에서 평온과 우울을 동시에 느끼는 걸 공감할 정도로, 내가 살았다는데, 참...


3

또 하나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매물로 나온 빈 집에 기거하는 두 사람. 두 사람은 세일즈맨이다. 한 사람은 납골당을 팔고 한 사람은 노점에서 여자 옷을 판다. 도시 하층민으로 소외된 약자인데 빈 집에 둥지를 틀면서 두 사람은 결국 마주치게 된다. 두 사람은 곧 유대감을 느낀다. 도시에 일정한 거주지 없지 투명인간처럼 빈 집에서 살아야하는 처지. 두 사람이 저녁을 함께 먹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줄담배를 피고 버드와이저를 달고 사는 남자와 자살하려고 손목을 그은 남자가 만나서 음식을 떠주고 콜라캔을 따준다. 같이 밥을 먹는 행동에는 서로 챙겨주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이 들어가 있는 거 같다.


두 사람은 그래서 자신이 일하는 곳에 함께 간다. 노점을 하는 남자는 납골당에 가고 납골당을 분양하는 일을 하는 남자는 노점에 앉아있는다. 가까워진다는 건, 자신의 생활 공간 속으로 상대방을 들어오게 하는 게 아닐까.


4

대도시에서 외로운 익명의 두 남자가 우연히 물리적 공간을 같이 사용하면서 자신의 삶 속으로 서로를 이끌면서 희미한 연대를 이룬다. 이 연대의 정점은, 베드신이다. 여자와 노점상 남자가 누워있는 침대 밑에 납골당을 파는 남자가 누워있다. 닫힌 좁은 공간에서도 세 사람은 다른 위치에 있으면서 은밀히 함께 있다. 하지만 감정적 유대는 얇은 유리같아서 부서지기 쉽다. 잠시 연대했지만 정신차려 둘러보니 다시 혼자라는 느낌을 주면서 영화는 끝난다.


5

정신을 안 차리는 게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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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런닝 시간에도 시계를 들여다 볼 수 없는 잔느의 평범하지만 긴장 가득한 일상. 싱글맘으로 아들을 혼자 키우며 하루의 대부분을 집이란 갇힌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잔느. 칸트의 딸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확한 시간에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잔느. 아침에 일어나서 잠옷 위에 가운을 입고 아들의 구두를 닦고 아침을 준비하고 아들을 깨운다. 아들을 학교에 보낸 후 잔느는 아들의 침대와 자신의 침대를 정리하고 감자, 다진 고기 등 식료품을 사러 나선다. 장을 보고 집에 오기 전에 같은 카페에 들러 커리 한 잔을 같은 자리에서 멍하니 마시고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준비한다. 그리고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 매춘 손님을 받는다. 매춘을 제외하면 특별한 거 없는 일상인데 잔느의 일상은 긴장으로 가득차 있다.


잔느가 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불을 켰다 끄는 행동, 식사 준비를 하면서 여닫는 찬장의 문닫는 소리, 찬장에서 물건을 넣었다 꺼내는 사소한 동작에서 신경질적인 긴장감이 오롯이 전해진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하루 종일 말 없이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동작들이지만 의미를 둘 수 없는 동작들의 단순한 반복에서 보는 내내 신경이 곤두선다. 사는 건 이런 거라고 에둘러말하기라도 하는 듯이, 하찮은 일의 반복을 보다 잔느가 침실 창을 열거나 주방 베란다 문을 열어 잠시 맑은 공기를 쐬면 같이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된다. 일상을 누가 즐겁다고 했나요, 일상은 버텨내는 거랍니다, 하고 말하는 잔느.


그녀가 하루 중 말하는 시간은 장을 보거나 아들의 구두 수선을 맡기고 아들의 코트 단추를 찾아 헤멜때이다. 그녀의 비루한 삶이 아들이라는 축으로 돌아간다. 이는 삶을 이어가는 형식적 구실일 수 있고 잔느는 다른 식으로 살아가는 데 대한 두려움과 체념을 동시에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3일 동안의 잔느의 별 거 없는 일상을 집요하게 카메라가 따라가는데 3일 째 잔느의 일상에 균열을 탁월하게 잡아낸다. 늘 같은 시간 동안 삶았던 감자는 탔고, 늘 마시던 커피와 우유는 개수대에 쏟아버릴 정도로 맛이 이상하다. 평소에 안 넣던 설탕까지 동원해보지만 커피맛을 다르게 느끼는 잔느의 소진된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맞아, 저럴 때가 있지, 하면서.


싱글맘 혹은 혼자 사는 삶의 적막과 고통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는 영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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