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rial (Paperback)
Franz Kafka 지음, Parry, Idris 옮김 / Penguin Classics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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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프카의 <성>을 읽는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 번역본을 읽는데 실패할 때, 영역본을 읽으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든다. 카프카의 글은, 소설이란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플롯을 파괴하는 형식이다.그래서 우리말로 휘리릭 책장을 넘기다보면 하품이 나고 개연성없는 흐름에 책을 덮데 된다. 영역본은 아무래도 외국어다 보니 한글자 한글자 꼭꼭 씹어 읽게 되고 찬찬히 읽는 게 카프카 글을 읽어내는데 반드시 필요한 거 같다.

 

이 소설을 환상소설로 분류해도 될 거 같아서 적잖게 놀랏다.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들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면이 있는데 <소송>도 그렇다. 읽는 내내 고골의 소설이 자꾸 떠올랐다. 뜬금없는 이야기 진행과 주인공 요제프 K를 빼고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서로 전혀 관련이 없으면서도 한통속인 거 같은 느낌이 든다. 이는 K의 소외감 탓일 거다. 어느 누구도 진실을 말하는 거 같지 않고 K만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바둥거리며 허둥댄다.

 

2. K는 서른 살 생일날 아침에 체포됐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체포된 상태고 재판을 해야하지만 은행 직원인 K는 일상을 꾸리는데는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무슨 일 때문에 자신이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지 원인을 알 수 없다. 자신에게 이 일을 알리러 나온 감독관이나 경호원들도 어디 소속인지 알 수 없다. 나중에 봤더니 경호원은 같은 은행 하급직원들이기도 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아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K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숙명에 처한다. 원인을 알 수 없기에 해결책은 없다. K는 점점 불안해지고 은행에서 쌓은 자신의 위치까지도 흔들리는 상상을 한다. 삼촌의 권유로 얼떨결에 변호사를 선임하지만 늙고 병약한 변호사는 적극적인 태도보다는 사법부의 관행인 관계망의 중요성을 강조할 뿐이다. K의 소송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진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소송과 소문으로 K는 자신이 소송을 해결하겠다고 급기야 결심한다. 하지만 자신이 소송을 직접 해야겠다고 하는 것과 결심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도움을 찾아 헤맨다. 판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를 찾아가서 그의 말에 일말의 도움을 기대하는 필사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3. K가 소송 혹은 자신의 기소 이유를 찾으려고 할 때, 독자도 열심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책장을 넘긴다. 하지만 K가 노력하면 할수록  K는 점점 소외돼 가고 독자도 혼란에 직면한다. K는, 아니 카프카는 뭘 말하려는 걸까. 사법부의 뿌리 깊은 부정과 절대 권력으로서의 군림을 말하다가도 갑자기 K의 소외로 돌아오곤 한다. 모든 인물들이 사법부의 관행을 의심하지 않고 대처하는 법을 K한테 조언한다. 피고인으로서 K는 혼자 있을 수 밖에 없다. 관행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의 소외는 처음에는 외부에서 온다. 기소란 보이지 않는 커다란 절대권력이 그를 일상에서 분리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흐르면서 K의 소외는 내면적인 것이 된다. 겉으로는 K는 어떤 변화도 겪지 않기에 K가 소송 중이라는 소문만이 있을 뿐이지만 그 소문에 K는 초조해진다. 난데없이 소설이 끝나기 전에 '성당에서In the Cathedral'란 챕터가 나타난다. 명목은 은행에 거래차 온 이탈리아인들을 안내하기 위해서였는데 이탈리아인들은 나타나지 않고 신부와 K의 대화가 길게 이어진다. 신부가 한 이야기는 이렇다. 한 남자가 법(원) 입구에 들어가기 위해 경비원의 안내를 받는데 그 경비원의 임무는 입구까지만 안내하는 거다. 안으로 못 들어간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평생 그 입구에서 기다리기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두고 마치 철학 수업을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이 서로 의견을 나눈다. 어느 누구도 입구를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지 않았고 경비원은 그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해서 입구까지만 안내했다고. 입구 안으로 안 들어간 건 바로 남자 자신의 선택이라고. 이 대목이 카프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절대 권력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무형이다. K가 이유없이 체포된 것 처럼. 절대 권력에 힘을 실어주는 건 절대 권력을 믿는 개인이다. K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을 의심하지만 의심만으로 보이지 않는 힘을 물리치기 힘들다. 행동을 하기 위해서 의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념이 필요하다. 하지만 신념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마지막에 결국 K는 죽는다. 두 사람이 K를 채석장으로 데리고가서 칼을 K의 눈 앞에서 주고 받을 때 K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칼을 주고 받을 때 어떤 위협적인 분위기는 묘사되지 않는다. 어쩌면 K가 그 칼을 뺏기를 바라면서 K 앞에서 칼을 보여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K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고 결국 그 칼의 희생자가 된다. 마지막 묘사 장면은 이렇다.

 

"With his failing sight K. could still see the gentleman right in front of his face, cheek pressed against cheek, as they observed the decisive moment. 'Like a dog!' he said. It was as if the shame would outlive him."(178)

 

K는 개가 안 되려고 발버둥쳤는데 보이지않은 것에 대한 불신 혹은 불안이 그를 갉아먹었다. 그를 둘러싼 소송이 그를 죽인 게 아니라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의 불안에 영혼을 잠식당했다.

 

4. 제도의 확고함 속에서 버텨보려는 개인의 불안에 방점을 찍으면서 한 개인한테 너무 많은 부담을 지게 하는 건 아닌지, 하는 결말이다. 물론 제도의 부패나 사람들의 굴욕적인 태도에 대해서 상세하게 묘사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제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순응적 태도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K를 비난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 모두 K 니까.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 앞에서 미리 위축돼서 불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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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r : A Novel (Paperback) - 『스토너』원서 Vintage Classics 765
Williams, John L / Vintage Classics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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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웃 블로그 후기를 보고 읽게 되었는데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책을 내려놓을 수 없게 된다. 책 뒷표지에 "<Stoner> is a perfect novel, so well told and beautifully written, so deeply moving, that it takes your breath away."라고 뉴욕타임즈의 소개글이 적혀 있다. 나는 이 말을 을 조금 바꾸고 싶다. <Stoner> is NOT a perfect novel, BUT well told and......라고.

 

2

이 소설은 전반적인 서술시점이 3인칭이다. 그런데 읽다보면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1인칭 같은 착각에 빠진다. 당연히 윌리엄 스토너한테 감정이 이입될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은 스토너의 일대기다. 연대순으로 스토너의 성장과정부터 스토너의 죽음까지를 묘사한다. 스토너의 일대기는 스토너 혼자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평생 우직한 농부였던 스토너의 부모. 스토너를 농대에 보내지만 대학에서 스토너는 농사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깨닫는다. 가르치는 일도 있다는 걸 스토너는 간접적으로 알게 된다. 스토너가 첫눈에 반해 결혼한 아내, 이디스. 이디스는 부서질 것처럼 예민해서 스토너의 고지식하고 우직한 성격과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보수적 시기에 형식적으로라도 모범가정을 유지하는데 두 사람 다 최선을 다 한다. 기껍지 않은 상황에서도 두 사람의 천성은 불쾌나 분노를 표현하는 편이 아니고 두 사람은 딸을 얻는다. 대학시절 전쟁이 일어나고 절친 둘이 입대를 한다. 그 중 한 친구가 죽고 사교성 좋은 한 친구는 같은 대학 학장이 된다. 같은 학과 교수와의 갈등으로 학문 정진의 기회가 닫히고 그 암흑기에 애인을 만나고 헤어진다. 그리고 그를 영문학으로 이끌었던 교수가 시들어가듯이 스토너도 시들어간다. 세월의 더께에 지적 명석함은 바래고 육체도 풍화된다. 바짝 마른 낙엽에 암이라는 강한 폭풍까지 더해져서 그의 풍화는 가속되고 결국 그는 눈을 감는다.

 

스토너 주변 인물들은 스토너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주로 이용된다. 그래서 소설이 입체적이라기 보다는 좀 진부한 면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덮을 정도로 훌륭한게 갈등상황에서 긴장감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이디스와 결혼 전에 만날 때 어쩔줄 몰라하는 초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대학원생 세미나에서 동료 교수 로맥스와 숙적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박사논문을 준비 중인 학생한테 F를 주자 평가위원회가 열린다. 세 사람의 평가위원으로 그 학생을 심사하는 컨퍼런스에서 마치 법정씬처럼 긴장감이 밀려온다. 그리고 캠퍼스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 묘사는 스토너 현재와 미래 심리를 수채화처럼 묘사해서 아름답고 시적이기까지 하다. 불타는 햇빛과 더위가 어떤 때는 스토너의 생기를 암시하고 또 어떤 때는 앞으로 다가올 사건의 긴장을 암시하기도 한다. 스토너가 생기를 잃을 때 눈 쌓인 겨울과 거리의 황량함, 스토너가 마음의 버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는 찌는 듯한 더위 등등으로 표현된다.

 

3

스토너는 작가 존 윌리엄의 자아상일 뿐 아니라 보통 우리의 자아상이다. 스토너는 원칙주의자고 완고해서 철저하게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다 갔다. 그의 출신은 땅이다. 땅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정직하다. 스토너의 전공은 "중세 서정시에 대한 고전 전통의 영향"이고 그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열었던 세미나는 "헬레니즘과 르네상스 문학에서 라틴어 문법의 영향"이다. 그는 문법과 전통의 세계에서 살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벗어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원칙에서 벗어난 경우가 딱 한 번 있었다. 세미나 수업을 듣던 학생이자 신참 선생과 사랑에 빠졌다. 보통은 비난받을 상황이지만 스토너가 단 한번도 자신의 상황이나 세계에서 도망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에 그의 윤리적 일탈을 응원하게 된다. 심지어 친구마저도 그의 일탈을 응원하는 거 처럼 보인다.

 

"In theory, your life is your own to lead. In theory, you ought to be able to screw anybody you want to, do anything you want to, and it shouldn't matter so long as it doesn't interfere with your teaching. But damn it, your life isn't your own to lead. It's-oh, hell. You know what I mean."(207)

 

스토너는 자기만의 방식대로 산 사람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친구가 말했듯이 스토너의 방식만은 결코 스토너의 방식이 아니라 전통과 사회질서가 제시한 방식이었다. 스토너가 문학이 전통을 계승하고 중세 서정시가 라틴어 문법의 변주라고 믿었듯이. 스토너한테 묘한 애잔함을 느끼는데 아마 스토너의 삶의 방식에서 오는 모순을 어렴풋하게 들여다보았기 때문인 거 같다. 그 모순은 스토너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도 하니까.

 

스토너가 죽어가는 과정을 묘사한 마지막 부분에서 스토너는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 40년 간 가르쳤던 일이 단 한 권의 별 볼 일 없는 책으로 남아 바래가도 그것으로 만족하는 거처럼 보인다. 그가 죽음을 보는 관점은 이렇다.

 

"Roman lyricists accepted the fact of death, as if the nothing they faced were a tribute to the richness of the years they had enjoyed. Christian poets of the Latin tradition when they looked to death which promised, however vaguely, a rich and ecstatic eternity of life, as if that death and promise were a mockery that soured the days of their living."(41)

 

스토너는 불행해보였지만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과정을 즐겼으므로. 이 지점에서 실존주의 영역까지 밀고 나갈 수 있겠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삶을 평가할 수 없다. 그 삶을 산 자신만이 자신의 삶을 평가할 자격을 갖는다. 그런데 나이들어 자꾸 꼰대처럼 이걸 자꾸 잊는다.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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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8-1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좋네요. 넙치님..^^
정말 꼼꼼하게 읽으시는게 느껴질 정도예요...

꼰대처럼이라기보다는 보이는게 많아져서이실거예요...
~~~

넙치 2014-08-14 13: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책이 쉬우면서도 묘사가 아름다워서 읽는 동안 즐거웠어요.
나이들면서 다양성에 관한 생각은 넓히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별개로 현실에서는 참 그게 쉽지가 않네요. 자꾸 내 기준으로 재단하는 몹쓸 행동을..ㅡ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 현암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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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과의 우정을 빗대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글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름이 아니라 성이다. 루트비히나 조카 파울 모두 비트겐슈타인 가문이다. 그러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란 제목은 모순이다. 원제를 찾아 봤더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Wittgensteins Neffe다. 제목에서 나온 모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베른하르트가 말하는 루트비히와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파울은 사실 삼촌 루트비히 만큼이나 미치광이였다. 루트비히는 그의 철학으로 유명해졌고 파울은 그의 광기로 유명해졌다. 루트비히는 어쩌면 더 철학적이었을 것이고 파울은 어쩌면 더 미치광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적인 비트겐슈타인이 자기의 광기가 아닌 철학을 종이에 옮겨 놓았기 때문에 철학자라고 믿고 파울이 자기의 철학을 억눌러 세상에 알리지 않고 오직 광기만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미치광이라고 믿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의 두뇌는 모두 너무 비상했지만 한 사람은 자기의 두뇌를 세상에 알렸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심지어 한 사람은 자기의 두뇌를 세상에 발표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의 두뇌를 실천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38-39)

 

파울이 정신병으로, 베른하르트가 폐병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두 사람이 알게 됬다고 한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의 광기를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루트비히와 파울은 공통점이 있다. 오스트리아 명문가인 비트겐슈타인 가문 사람들은 두 사람을 철저히 무시했다고 한다. 제목도 모순되지만 제목도 루트비히의 조카 이야기를 통해 베른하르트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치부를 드러낸 작가라고-베른하르트의 소설 한 권만 읽어보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오스트리아 내에서는 비난을 받았던 모양이다. 신랄하고 이보다 더 혹독할 수 없을 정도로 비판해댄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우정이란 혹은 성인 사이에 교감이란 어떤 교집합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루트비히, 파울, 베른하르트의 공통분모는 일종의 광기일지도 모른다. 광기의 정의는 푸코가 말했듯이,  대상에 대한 타자화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 구조에 기반해 있다. 세 사람은  광의로는 오스트리아 내에서, 협의로는 주변 사람들한테서 배척받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들이다. 파울은 막대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자신도 가난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입지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걸 에둘러 말하는 대목이 있다.

 

"나는 늘 내가 없는 곳에, 이제 막 도망쳐 나왔던 그곳에 있으려 한다. 나는 내가 금방 떠나 온 곳과 달려가는 곳 사이,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만 행복하다. 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이다. 내가 도착하는 곳이 어디든 상관 없이 도착하면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견뎌내지 못하고 떠나 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인간 중 하나다."(119)

 

공감 백만 개를 누르고 싶은 대목이다. 그 여러 인간 중 한 명에 나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내 삶의 스케일이 이들과 다르지만 삶의 스케일이 좁아도 이러저한 일이 있기 마련이다. "떠나 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인간"을 위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덧. 베른하르트의 문체는 아주 독특하다. 동어반복을 늘어놓으면서도 변주를 해서 음악처럼 읽힌다. 같은 멜로디를 듣고 있는가 하면 어느새 변주 파트로 넘어가서 재잘거리는 문장들이 늘어서 있다. 내용은 무거운데 정작 문장을 읽을 때는 경쾌한, 묘한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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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Art and Life (Paperback)
존 러스킨 지음 / Penguin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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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 책 번역본들로 나와 있는 건 너무 지엽적인 것만 돼 있다. 원서를 검색하다가 제목을 보고 주문할 수 밖에 없다. 다른 책이 해외주문인데 이 책은 국내에 이미 들어와 있는 책인지라 더더욱 주문할 수 밖에 없는 구조. 막상 읽어보니 내용은 좀 뜻밖이도 하다. 두 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고딕의 본질The Nature of Gothic과 나머지 하나는 철의 작품 "The Work of Iron.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책을 주문할 때 대체로 목차를 안 보는 걸 깨달았다. 주로 제목만으로 주문을 하는 내 경향을 파악함. 앞으로는 목차도 훑어볼 것.고딕건축 및 고딕예술에 관한 글이라는 걸 알았을 때, 왜 제목에 라이프가 들어가나 분노했으나 책장을 넘기면서 분노는 잦아들고 밑줄 긋는 자세로 바뀌었다. 내가 아는 고딕이란 기독교 문화 절정기에 사치스러운 건축물이라는 단편이다. 러스킨이 제시한 고딕의 특징은 고딕의 기원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러스킨이 주장하는 고딕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Savageness

2. Changefulness

3. Naturalism

4. Grotesqueness

5. Rigidity

6. Redundance

 

고딕의 원시성 내지는 야만성이라니. 원래 고딕이란 단어는 북유럽의 고트족이 풍기는 야만적 특징을 지칭하는 비난조의 용어라고 한다. 남동유럽의 건죽과 대조적으로 견고함과 조잡함rudeness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한다. 어찌보면 고딕을 당연시 받아들이고 그 기원에 대해 의문조차 갖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고딕의 기원은 알려진 바대로 위대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거침 혹은 무례함을 설명하는 러스킨의 시각도 무지 흥미롭다. 러스킨은 거침을 자연주의와 연결시킨다. 그리스인들이 예술에서 완벽을 추구하고 이집트인들이 완벽하진 않지만 "평균"에 도달하는 장인정신을 추구한 반면에 고딕은 "Do what you can, and confess frankly what you are unable to do; netiher let your confession silenced for fear of shame. And it os perhaps, the principal admirableness of the Gothic of the labour of inferior mind; and out of fragments full of imperfection, and betraying that imperfection in every touch, indulgently raise up a stately and unaccusable whole."(12쪽)

 

즉 고딕은 더 높은 것에 대한 완벽보다는 더 낮은 본성의 완벽함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리스 예술이 허용하지 않고 이집트인들이 간과한 점을, 고딕이 성취한 셈이다. 변화의 특징에 대해 러스킨은 고딕을 넘어 일상성으로 시선을 확장한다. 변화란 일상의 단순함을 인식하지 못하면 일어날 수 없는 일다. 우리가 변화란 단어의 의미를 매우 편협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변화 혹은 변화 가능성은 일상성에서 파생한다. 러스킨이 구름을 예로 든 대목이 있다. "wether the clouds be bright or dark, there will be transfiguration behind and within them."(15쪽)

 

이 대목에서 왜 이 책 제목이 삶에 관하여, 로 정해졌는지 알게되었다. 예술은 언제나 변화를 주어야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 우리가 변화란 단어에서 기대하는 정도는 무지 큰데 러스킨이 주목하는 변화는 그야말로 주목해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일 수 있다. 변화가 너무 자주 반복되면 변화가 주는 기쁨은 곧 단조로움으로 변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변화의 미묘한 정도나 강도에 주의를 기울이면 기쁨은 나의 몫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삶의 원리가 아닌가!

 

덧. 두번 째 꼭지는 철의 산화과정 예찬이라고 해도 될 듯한 글. 시각은 새롭지만 수긍하기에는 갸우뚱하게 만드는 예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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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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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성일 씨가, 이 세상에서 제일 읽기 힘든 글이 안 본 영화에 대한 글이라고 했다. 나는 여기에 하나 더해서 안 읽은 책에 관한 글도 포함시키겠다. 이런 편견으로 신형철 씨의 글을 멀리 해 오다 산문집이란 말에 들춰봤다. 이 글은 독자가 안 읽은 시, 안 읽은 책에 관해 쓰고 있다는 걸 전제로 했던 것 같다. 이미 신문이나 여러 지면에 실렸던 글들 모음이기도 하기에. 비평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안 본 책이나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나아가 그 책을 찾아 읽고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향하게, 행동을 부추기는 이가 비평가라고, 생각한다. 이 에세이는 바로 비평가의 의무를 다하는 글모음이다. 이 책의 첫부분이 시에 관한 글들이다. 상상력 부족으로 시를 전혀 안 읽는데 글을 읽고 있노라면 나도 좀 시를 좀 읽어봐야 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찾아온다. 행간을 읽어내는 저자의 탁월한 시선 덕분이다.

 

2.

책머리에 제목에 관한 변이 실려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본문 전에 있는 그저 문장이었다. 책을 읽은 후에는 책머리에 쓰인 말이 느낌표가 되었다. 종종 혼자 남겨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감정이나 정서를 말로 풀어냈을 때 말은 무기력하게 된다. 말은 순간적이고 정서를 공유하기에는 너무 찰나적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이 마들렌느 과자를 커피에 담그면서 과거에 체험했던 특별한 정서로 회귀하는 걸 말로 할 때, 말은 덧없고 무기력하다. 글은 어느 날 행간에서 마르셀이 찾아낸 기억 속으로 시간 이동을 하는 게 뭔지 알 기회를 준다. 유레카 순간에 밑줄을 긋고 언제가 다시 읽어 보겠다는 다짐으로 노트에 옮겨 적는다. 이 때 글은 위안이 되고 작가가 남겨둔 공감의 여지에 교집합을 만들게 된다. 바로 이런 맛 때문에 독자는 책을 읽고 작가는 책을 쓴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호한 존재와 정서를 공유하는 흔하지 않는 순간을 위해서.

 

3.

또 하나는 반성. 나는 내가 끼적인 글을 다시 고치지 않고 바로 등록하기 버튼을 눌러버린다. 전업 작가도 아니고 개인적 글이란 생각에 맞춤법 좀 틀리면 어떤가, 하는 게으름이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맞춤법만 틀리는 게 아니라 다음 날 읽으면 비문도 많고 주어와 동사의 불일치도 빈번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도 '교정'이란 걸 좀 하기로 마음먹었다. 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좀 갖추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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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0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21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