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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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여인의 키스>에 이어서 연속 읽게 된 책이 사랑하는 이가 반정부 활동으로 감옥에 있는 이야기다. 사랑하는 이가 감옥에 있는 시대는 어수선하고 보통의 소설 형식으로는 시대상을 담기에 적합하지 않은걸까. 이 소설 역시 독특하다. 아이다란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한테 보내는 편지글 모음이고 남자는 그 편지에 자신의 생각을 적는다. 편지글은 묘한 힘이 있다. 빈 여백이 많아서 그 여백 사이를 독자가 상상으로 채우게 한다. 이 소설에서 아이다가 여러 가지 애칭으로 불리는 남자와의 관계를 유추하면 두 사람의 만남은 길지 않지만 격렬한 만남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진짜 습관-서로의 품안에서 잠드는 것만 빼면-이라는 게 생길 만큼 충분히 오랜 시간을 가져 보지는 못했어요. 네, 그 점에서 우리의 몸과 잠은 각각의 습관을 가지고 있었죠."(181)

 

"지금 당신을 만져 보고 싶어하는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어요. 너무 오래 당신을 만져 보지 못해 이젠 쓸모없이 되어 버린 손처럼 보이네요."(88)

"이레네, 잘 자요. 꿈속에서 당신을 가질테니..."(189)

 

"부재가 무라고 믿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을 거예요.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시간에 관한 문제죠. 무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고, 부재란 있다가 없어진 거예요. 가끔씩 그 둘을 혼동하기 쉽고, 거기서 슬픔이 생기는 거죠."(115) 이중종신형을 받아서 석방 가능성이 없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결혼 신청을 하는 아이다가 한 말이다. "우리가 사는 삶은 단 하나 뿐이에요, 당신과 나의 삶"(118)

 

그럼 두 사람을 이렇게 격렬한 그리움으로 데려다 주는 건, 두 사람이 영원히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시대상황일지도 모른다. 아이다의 편지는 연서로도 읽히지만 연서 안과 밖에 조각 정보를 얻어서 기워보면, 남자는 반정부활동을 했고 아마도 약사인 아이다도 그 활동에  어느 정도 가담하고 있다. 두 사람은 그러니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에 영원한 사랑이 가능하다.

 

"탈지역화. 단순히 노동력이 가장 싼 곳을 찾아 생산과 서비스가 이동하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자리잡은 지역들을 파괴해 전 세계가 무의미한 곳, 즉 단 하나의 유동성 시장이 되게 하려는 계획을 뜻한다."(36)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존 버거의 사상이 잘 드러난 말이다. 아이다가 보내지 않은 편지에 보면, 무력으로 마을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려는 걸 상상케 하는 지점이 있다. 무력은 사실은 커다란 공포를 만들고 인간의 의지를 약하게 한다. 그래서 많은 독재자들이 무력을 이용하기도 하고. 하지만 무력은 두려움을 연료로 공급받아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들한테 한없이 무력하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꼼짝하지 않겠다는 무서운 결심을 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의지력이 필요할지를 계산해야 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에요."(194) 탱크가 전진해오는데 피하지 않고 사람들이 탱크와 마주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말이다. 탱크는 결국 방향을 돌려 물러난다. "우리, 그들의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젊은 시절이 어땠는지, 다시 젊어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기억하며 흩어졌죠."(196) 뭉클한 묘사다. 두려움에 무릅을 꿇지 않고 옳지 않은 것과 맞서 싸우는 건 회춘이다...

 

제목이 발신자는 A인테 수신자는 변수 X이다. X는 그 누구라도 될 수 있고, 세계 모든 곳에서 X의 삶이 현재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최악의 외부 상황에도 사랑은 싹트고 단단해진다. 척박함을 버티게 하는 건 개인의 긍정적 경험이라고, 존 버거는 말하고 싶은걸까. 아이다와 남자의 사랑이 사회 격동으로 변치않는 사회가 좋은 건지, 평온한 사회가 돼서 늘 함께 있어 서로를 싫증내는 사회가 좋은 건지...둘 다를 이루기엔 인간은 어리석은 걸까.

 

 

존 버거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생각을 독자한테 설교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존 버거의 사계>를 보면 틸다 스윈튼이 존 버거의 집, 알프스 지역의 작은 마을 퀸시에 찾아간다. 두 사람은 생일이 같다. 11월5일 전갈자리ㅎ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다큐를 보면 존 버거의 집이자 작업실을 훔쳐볼 수 있는 것만으로 볼만하다. 시골 마을의 작은 집. 책상은 창을 향해 놓여있고 책상 오른쪽 벽은 아마도 그의 작업으로 짐작되는 그림과 글귀들이 가득 붙어있다. 그림은 그의 글처럼 단순 드로잉에 약간의 채색들이 주고 액자에 넣은 게 아니라 스케치북에서 쭉 떼어내서 테이프로 그냥 붙여놓았다. 틸다 스윈튼과 대화를 하면서도 손은 종이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선을 그리고 형태를 만들어서 급기야 틸다 스윈튼을 그린 그림을 완성하기도 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린 시절 가족 이야기로 이어진다. 틸다 스윈튼은 요리를 하고. 두 거물이 좁은 공간에서 일상적 일을 하면서 친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는 기쁨이 있다.ㅋ 모두 4편인데 첫 편만 그렇고 나머지는 책을 이미지한 느낌이라 흥미가 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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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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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은 텍스트는 읽는 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여지를 담고 있는 거다. <거미 여인의 키스>가 그렇다. 작가는 영화를 공부하고 영화에 재능이 없는 걸 깨닫고 소설로 방향을 틀었단다. 정치범 발렌틴과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몰리나가 감옥의 같은 방에서 고독을 이기기 위해 몰리나가 영화 이야기를 5편이나 한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영화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하고 있다. 구성상 이 소설은 여러 가지를 말할 수 밖에 없다.

 

먼저 나는 몰리나와 발렌틴의 관계가 크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이다. 좌익 게릴라와 게이. 닮은 꼴이라고는 주변인이라는 것 밖에 없던 두 사람의 관계는 같은 공간을 상사용하는 타의적 동료였다. 발렌틴은 몰리나한테 "아름다운 일만 생각하는 네 태도는 위험한 행동일 수 있단 말이야. 그렇게 현실을 도피하는 것은 마약처럼 해로운 거야.(...)그래서 난 책을 읽고 하루 종일 공부하는 거야."(109)라고 말한다.

 

세상을 직시하고 바꾸려는 발렌틴,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에 비관하기 보다는 현실을 잊고 싶어하는 몰리나. 몰리나가 영화 이야기를 하는 건 당연하다. 영화는 훌륭한 현실 도피 수단일 수 있고 어쩌면 몰리나가 발렌틴한테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는 영화가 아니라 몰리나의 상상일지도 모른다. 현실을 잊고 싶어서.

 

서서히 발렌틴은 잠자기 전에 책보다는 몰리나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고 그러다 관계가 극적으로 변하는 시점이 있다. 발렌틴이 심한 설사를 하면서 아프게 되고 몰리나는 발렌틴을 정성껏 돌본다. 몰리나는 프락치였고 자신의 이익(사면)을 위해 발렌틴을 돌본다. 발렌틴의 육체적 고통은 그가 믿었던 남성성에 대한 개념을 혼란에 빠뜨리고 몰리나한테 의존하게 만든다. 두 사람은 아주 다른 지점에서 시작했지만 병이란 매개를 통해 한 공간을 사용하는 동료로서 연대감이 싹튼다. 보살피고 보살핌을 받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두 사람의 감정은 점점 한 곳으로 수렴된다.

 

-널 그리워할 것 같아, 몰리나...

-영화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없을 테니까...

-영화 이야기까지도...

-통조림에 든 과일을 볼 때마다 네가 생각날 거야.

-치킨집 윈도에서 바비큐 치킨을 볼 때마다 널 기억할 거야. (342-343)

 

이렇게 결국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트면서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사이에 분리가 가능한가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움이란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필요충분조건이다. 몰리나가 사면되어 감옥을 나가게 되자 발렌틴이 몰리나 한테 하는 말이다.

 

2

이 소설은 사랑의 담론에 관해 몰리나가 영화를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럼 이 소설은 연애소설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랑하는 커플의 상황과 독특한 사랑 방식을 통해 정치적 우의성을 담고 있다. 전혀 정치적이지 않던 한 개인이 정치적 개인을 만난다. 몰리나는 발렌틴에 대한 우정 혹은 사랑으로 발렌틴의 게릴라 조직에 연락을 하다가 죽는다. 처음에 자신의 사면을 위해 발렌틴을 이용하려 했던 몰리나는 발렌틴을 사랑하게 되면서 발렌틴을 돕는다. 아무리 강력한 독재정권도 개인 간의 사랑을 억압할 수는 없다. 행동은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사람 사이에 튀는 불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감시를 뚫고 이겨내게 한다. 성소수자인 몰리나가 결코 육체적 사랑만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

 

3

-편지를 써.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고. 네가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어.

-넌 세상이 바뀌리라고 믿니?

-그래, 네가 비웃어도 괜찮아...그렇게 말하면 비웃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세상을 바꾸는 것이야.

-하지만 이 세상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어. 너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어. (63)

 

몰리나의 말대로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다. 세상을 지탱하고 바꾸는 원동력에는 개인적 동기가 강한 추진력일 수 있다. 그 동기가 동지애든 사랑이든.

 

덧. 많은 각주, 주로 프로이트와 심리학에 관한 각주가 달려있는데 왜 달려있는지. 독서에 방해된다. 빼줬으면 좋겠다.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해석을 돌려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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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 1
로베르트 무질 지음, 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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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일정 체온을 유지하느라 대기의 더위와 싸우는데에너지를 다 쓰는 것만 같은 힘든 여름날, 로베르트 무질이라니. 오히려 몸이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니까 정신은 더 또렷해지는 것도 같기도. 무질을 읽으면서 습한 여름날 무질의 글과 함께라니 나쁘지 않아, 하고 중얼거리게 된다. <특성 없는 남자>는 문장마다 비유고 언어 논리를 파괴하는 문장들로 가득 차 있어서 읽어내기 쉽지 않다. 몇 년 전 읽는데 한국어 번역판을 읽는데 실패하고 영문판을 샀다가 그 두께에 놀라 밀쳐두었다. 슬금슬금 뇌근육이 간지러운 8월에 책을 다시 손에 들었다. 1권을 다 읽고 감상을 적으려고 밑줄 치거나 접어논 부분을 다시 보면 내가 이 페이지를 읽었나, 하고 새롭게 다가오는 글귀들로 가득 차 있다.

 

소설이 출판된 게 1930년대인데 놀랍게도 역사는 반복되고, 역사의 반복을 꿰뚫는 직관과 통찰을 지닌 작품은 시간을 초월해서 읽힌다.

 

"도처에서 옛것에 도전하는 투쟁이 일어났다. 모든 곳에서 갑자기 올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이건 중요한 일인데-실용적인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지적인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제휴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억눌림을 당했거나 공적인 삶에서는 발휘될 수 없었던 재능들이 점점 발휘되었다. 그 재능들은 너무도 다양했고, 추구하는 목표도 서로 달랐다. 우월한 자가 숭배되었고, 열등한 자도 숭배되었다. 사람들은 건강한 몸과 태양을 찬양했고, 폐병에 걸린 소녀의 연정을 찬양했다."(96)

 

"사람들은 현실을 얻는 대신 꿈을 잃어버린다. (...)유능해지기 위해서는 굶주리거나 꿈을 꾸어선 안되고, 스테이크를 먹고 움직여야만 한다.(67)

 

이런 상황이 어디 30년대만의 이야기일까.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답게 밀도 높은 문체와 냉혹한 시선으로 서늘하다. 더불어 나는 사람이나 상황을 볼 때, 내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어떤 특징을 잡아내는 걸 즐기는데 무질의 글을 읽다보면 아주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단순히 거주자들의 성격으로 설명하는 것은 틀리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한 국민은 적어도 아홉가지 성격, 다시 말해 직업적, 민족적, 국가적, 계급적, 지역적, 성적, 의식적, 무의식적, 그리고 개인적 성격들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자기 안에 통합시키지만 그것들이 사람들을 해체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 인간은 이 많은 흐름에서 생겨난 조그만 협곡에 불과하며, 이 협곡으로 그 흐름들은 모여들었다가, 다시 다른 시내로 다른 협곡들을 채우기 위해 를러나간다. 그래서 모든 지구 위의 인간들은 열번째 성격을 가지게 되며, 그것은 다름아니라 채워지지 못한 방들로서의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 열번째 성격인 환상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는데, 단 한가지만은 허용하지 않는다, 즉 적어도 나머지 아홉가지 성격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허용하지 않는다."(58-59)

 

이런 글만 보면 소설보다는 시론을 읽고 있는 거 같지만 소설이라는 형식에 맞게 나름 줄거리가 있다. 울리히라는 특성 없는 남자가 특성 있는 아버지가 있고(아마도 자전적인 거 같고) 특성 없는 남자가 만나는 특성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파편처럼 나열되어 있다. 울리히가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개인과 개인이 속한 사회의 구조적 매커니즘을 탐구한다. 가령 여성혐오 살인을 한 남자를 통해 심리학을 조롱하고 법질서의 모순, 그리고 언론의 태도를 묘사한다. 또 모두가 간과하는 범죄자의 심리를 들여다 보기도 한다. 또 천재성에 몰입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과정을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고급(?) 문화에 대한 과도한 열정으로 자신이 천재라고 믿는 남자보다 더 피아노 연주를 잘 하게 되었는데도 불행한 여자. 또 평행운동이란 실체없는 개념을 통해서만 평화로울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런 주장을 진심으로 믿는 사교계의 여왕과 그 주변. 마치 창조경제란 실체없는 개념을 신봉하는 것같은 걸 특성 없는 남자는 간파한다.

 

울리히란 남자는 왜 특성이 없어야 했나. 특성 없는 사람은 어디에도 쏠리지 않고 관찰자의 입장이 될 수 있기에 그런 게 아닐까.

 

28장 제목이 "생각을 업으로 삼는 일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은 건너뛰어도 좋은 장"이다. 글의 전반적 분위기는 유머가 전혀 없는 저예산 독립영화같은 분위기인데 유독 소제목이 유머로 넘친다.

 

"머리가 더 좋아지면 질수록, 머리의 존재는 더욱 희미해진다. 사유의 과정이 진행중일 때 그것은 아주 초라한 상태가 되며, 마치 두뇌의 모든 주름이 산통을 겪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그 과정이 끝났을 때 그것은 누군가 사유해온 것들이 유감스럽게도 비인간적인 것이 돼버린 것을 경험할 때처럼 더 이상 사유의 형태를 띠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때 사유는 외연과 마주치게 되며 세상과 소통하는 양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198)

 

재미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대체로 수긍할 만한 말이 책 속 가득히 차 있다. 특성 없는 남자를 다 읽었을 때 쯤, 몹시 특성 있는 여름의 기세도 수그러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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눕기의 기술 - 수평적 삶을 위한 가이드북
베른트 브루너 지음, 유영미 옮김 / 현암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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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틈만 나면 눕는다. 음악도 안 듣고 누워서 주로 눈을 감고 있거나 덜 피곤하면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다. 이런 말을 주변에 하면 비웃음을 듣을 뿐이다. 잘 때 외에는 누워있는 걸 못 참는데 사람들한테 더더욱 나는 요상한 사람. 누워있는 걸 몹시 좋아하건, 실은 저질체력이 한 몫한다. 팔다리 힘이 다 빠지고 등은 중력의 법칙을 따라서 자꾸자꾸 바닥으로 내려가길 원한다. 늘 누울 상황이 펼쳐지지 않기에 직립보행인으로 있어야하는 시간이, 자주 고통스럽다. 근력의 문제라고 보고 운동을 한지 꽤 되지만 기본 체력과 기본 정서는 누워있는 걸 격하게 애정한다.

 

2.

누워있길 좋아하는 내게 <눕기의 기술>이 나왔다는데 읽어봐야지, 암. 누워지내는 데 대한 주변의 공감은 커녕 비웃음을 받아온 터라 이 책을 펼치면서 눕기에 대한 어떤 정서적 공감을 기대했다. 하지만 책은 누을 수 있는 가구, 침대, 의자 등등의 사회문화사에 가깝다. 사회문화사란 접근법까지는 괜찮은데 저자의 서술방식이 갈팡질팡해서 몹시 산만한다. 주로 가구에 대한 인체와 과학적 상관관계를 나열하다가 불쑥 어느 철학자, 작가가 눕기에 대해 한 말을 끼워넣는다. 그래서 뭥미?하게 하는 문장들이 갑툭튀 느낌.

 

3.

침대의 기능성과 특히 편안한 의자에 관심이 많다. 아니 내 정신보다는 허리나 엉덩이가 편한 의자를 더 금방 알아본다. 편한 의자의 원리를 글로 읽는 건 좀 아닌듯. 내가 가구 제작자도 아니고 난 내 허리와 엉덩이를 더 믿으니까ㅋ

 

4.

너무 많은 정보를 담으려고 하다 보니 책 전체가 갈팡질팡하게 된 듯. 부제가 '수평적 삶을 위한 가이드북'이라서 게으름을 찬양하는 이야기라고 기대하고 주문했으나 별로 그렇진 않다. 물론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눕는 것이 얼마나 귀족적이고 신성한 것이었는가에 대한 연대기적 고찰이 있긴 하지만 가구 만들기처럼 구색을 맞추기 위한 역사 다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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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하여 마카롱 에디션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안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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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카롱 에디션이라고 '사랑에 관하여'란 제목을 달고 나오고 표지도 사랑의 달달함을 연상시키는 꽃분홍색이다. 고전을 이런 식으로 포장하는 게 옳은가에 대한 회의와 이렇게라도 포장해야 속아서 고전을 사는 이도 있을 테니, 하는 적절한 타협의 시선을 던지며 씁쓸하다. 개인적으로는 카페나 지하철에서 꺼내 읽기 조금 민망-.-

 

2.

표지가 아무리 기만하려고 해도 체호프 단편집이라는 걸 잊지말자. 총 9편의 단편인데 단편 속에서 기나긴 인생의 흥망성쇠가 우의적으로 담겨있다. 그러니 체호프지. 단편은 감상을 적기가 참 애매한데 인상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좀 보면

 

먼저 <검은 수사> 남녀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권태로 접어들어서 서로한테 치를 떨며 증호하는 과정이, 짧은 이야기 속에 녹아있다. 남자는 결혼 전에도 검은 수사의 환영을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환영을 본다는 게 그 어느 누구한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남자고, 오히려 그 환영은 여자와 대화를 할 때, 활기와 열정을 불어 넣기도 했다.

 

"난 미쳤고 과대망상증에 걸렸었지. 하지만 대신 즐겁고 활기차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했어. 난 재미있고 특별한 사람이었단 말이야. 이제 더 논리적이고 더 근엄한 사람이 되었겠지만 대신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단 말이야. 난 평범함 그 자체야. 사는 게 지겨워...아, 당신들이 나를 얼마나 잔인하게 다뤘는지 알아? 그래, 난 환각을 봤어. 하지만 내가 누구한테 피해를 줬나? 대답 좀 해보라고. 그레 누구한테 피해를 줬지?"(115)

 

남자(코브린)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고 그를 바꾸려는 아내와 아내 주변의 노력으로 남자의 영혼은 피폐해지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는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지 못하면서 한때 가깝고 사랑스러웠던 사람이 괴물처럼 보인다.

 

체호프는 이런 지점에서 일종의 해결책 내지는 구원을 죽음에서 보는 것 같다. 죽은 이의 얼굴에서 "지복의 미소"란 표현을 쓴다. 또 다른 이야기 <상자 속의 사나이>는 죽어서 관에 누운 남자를 묘사하면서, "관에 누워 있는 그의 표정은 유순하고 유쾌하며 심지어 신이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상자에 자기를 담아준 것을 기뻐하는 듯햇지요. 그래요, 그는 꿈을 이룬겁니다!"(164)

 

 

체호프는 사랑을 믿지 않는 거 같다. "인간이 자기 이상에 사로잡히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는 거죠."(177) 인간의 본질을 이렇게 말하고 나는 아-멘!을. 표제 이야기 <사랑에 관하여>는 각자 가정이 있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이들이 사랑이란 애틋한 감정을 오랜 기간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두 사람이 결혼제도 속에 함께 하지 못해서 서로에 대한 환상을 계속 유지했기 때문이다.  즉 사랑의 완성은 이별이란 말씀에 체호프도 동참한다.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상황에서 그녀를 끌어내 똑같은, 어쩌면 더 일상적인 삶으로 데려가서 어쩌겠단 말인가.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내가 병이 나거나 죽으면, 아니 그저 우리의 사랑이 식어버리면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걸까."(199)

 

3.

체호프는 사랑에 대해 말하기는 하지만 표지처럼 달달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체호프의 글의 전반적인 톤이 대체로 요즘 날씨같다. 그냥 기온이 높은 게 아니라 대기가 습기를 잔뜩 머금고 뿌연 공기로 둘러싸서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더위. 마치 이 더위가 영원히 계속 될 거 같은 착각을 줘서 문득문득 짜증이 솟구치려는 그런 미묘한 지점. 아열대같은 여름이 끝이 나는 것처럼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은 결국 언젠가는 끝나고 맙니다."(201)라는 비극적이고 체념적 위안을 던진다.

 

"사랑할 때, 그리고 그 사랑을 생각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선행이나 악행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202) 남자가 평생의 여인을 떠나보낸 후 얻는 깨달음이다. 하지만 깨달음이란 뭔가? 늘 너무 늦게 찾아와서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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