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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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다. 죽음의 집이란 시베리아 수용소를 의미한다. 늘 느끼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은 어마어마한 통찰력과 현재성을 지닌다. 이 소설 역시 시베리아 수용소란특정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어느 사회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의 해석과 집행에 대한 이의제기로 볼 수 있다.

 

이 소설에는 현재는 사라진 태형에 관한 언급도 많다. 태형은 원시적 형태기도 하지만 러시아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아주 최근까지 고문이라는 형태로 우리나라에도 존재했고, 아직도 존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모르는 것일 뿐.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전쟁포로들을 학대했던 미군을 보건대 태형은 원시적 형태가 아니라 타자를 지배하려는 인간이 지닌 원시적 열정은 본능일지도 모른다. 육체적 학대가 20-21세기에도 유효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으로 언도받은 태형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한결같이 어떤 날카로운, 모든 정신적인 것을 짓눌러 버리는 육체적 고통에 대한 공포감과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생기게 마련이다."(308쪽)

 

그리고 이런 말도 쓰여있다.

 

"법규의 무능한 집행자는 법률의 정신과 의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 문자 그대로 법률을 집행한다는 것이 오히려 일을 무질서로 끌어들일 수 있있을 뿐 아니라 다른 결과는 결코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도 이해하는 능력도 없다. 그들은 법률 이외에 건전한 사고, 냉정한 판단이 자신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에 적지 않게 놀라게 된다."(273쪽)

 

어제 자료원에서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을 봤다. 내 머리 속에는 매우 성능 좋은 지우개가 들어있어서 처음 보는 영화처럼 아주 재미나고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 지 흥미진진하게 봤다. 곽도원이 연기한 검사 캐릭터를 유심히 봤다. 처음 봤을 때 안 보였던 부분인데 검사가 바로 무능한 법 집행자다. 최익현(최민식)의 능청스러운 로비를 받아들이지 않고 깐깐하게 구는 캐릭터다. 그는 왜 최익현의 로비를 받아들이지 않았나? 검사는 처음부터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다. 그를 움직이는 동력은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른다. 가장 힘이 센 이의 말에 복종하는 게 검사가 대표하는 공권력이다. 검찰청장이란 타이틀에 야망을 품은 검사가 최익현이란 먹이사슬을 만났을 때, 최익현이 힘이 자신을 그 위치까지 데려다 줄 정도로 힘이 센지에 달려있다. 처음 보여준 검사의 모습은 법의 원칙에 따른 정의로운 집행자처럼 보이지만 곧 검사는 무질서를 일으키는 축이 된다는 걸 암시한다. 부패의 고리는 끊기지 않고 연속해서 뫼비우스의 띠가 돼버린다. 다만 그는 놀라지도 않는다. 그가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유일한 지점은, 자신의 경력에 어떤 장점으로 작용할지에 달려있다.

 

데리다도 말했지만 법 집행의 폭력성으로 법은 그 자체로 딜레마에 빠진다. 감옥이란 공동체 생활은 감옥 밖 공동체와 흡사하다. 감옥에서도 감옥 밖에서도 계급은 엄연히 존재하며 감옥에서 권력 역시 존재한다. 당연히 그 권력을 이용하는 무리도 있고 그 권력에 희생당하는 무리도 있다. 이런 부조리를 고발하는 소설이다. 공권력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문제점이 많다. 개선할 의지가 있는 지가 관건인데 네트워킹의 발달로 육체적 체형은 사라졌을지 모르겠으나 정신적 체형은 여전히 존재하고 가시적 체형보다 지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고발한 사회보다 더 비극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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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ve Affairs of Nathaniel P. (Hardcover)
Adelle Waldman / Henry Holt & Co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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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꽃누나>를 봤다. 배려심 돋는 김희애가 하루 종일 일행과 떨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회였다. 당연히 컨셉이었겠지만 폭풍공감으로 몰입도 200%였다. 나만 혼자 있을 때는 외롭다가도 무리지어 있다보면 지치고 혼자 있는 시간을 그리워하게 되는 게 아니라는 위안 비슷한 걸 얻게 된다. 특별히 모나지 않고 그룹 속에 있을 때 그룹 구성원들과 잘 지내도 한편으로 채울 수 없거나 신경을 건드리는 그 무언가를 참아내고 있게 되는 걸 발견하게 된다. 너무 미묘해서 말하면 하찮고 속 좁아 보이기에 말 안하고 넘어가지만 그런 먼지같은 느낌들이 쌓여서 어느 순간에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사람을 멀리하게 되는 심리. 이런 심리를 다루는 소설이다.

 

한국 소설이라면 읽다 말았을 확률이 높게 짜증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소심하고 때로 찌질한 먹물인 네이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미덕도 많이 존재한다. 네이트의 연애담을 통해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연애담이기지는 하지만 연애담하면 연상되는 통념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네이트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서 하버드에 들어가서 상류층 친구들을 사귄다. 같은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면 편안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속하지 못한 계층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부인할 수 없다. 상류층 출신의 친구들이 보여주는 속물근성을 내심 비웃으면서도 그 속물근성이 중산층이 흉내 낼 수 없는 급이 있다는 걸 잘 묘사한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도 남녀 관계를 묘사하지만 남녀 관계를 초월한 어떤 계급적, 혹은 인간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과 동경이 얽혀 빚어내는 반응을 관찰하고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네이트는 프리랜서 작가로 일정한 직업적 성공이 불투명한 상태고 수입과 지출을 계산하는, 친구들과는 다른 처지로 이성을 볼 때 지적 욕구를 더 중요시 했었던 것처럼 보인다. 네이트 역시 이성한테 어필하는 부분이 그의 지적인 부분이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상은 이상일 뿐이다. 네이트가 감정적으로, 지적으로 좋아하는 한나와 한나와는 전혀 다른 부류에 속하는 그리어의 대비는 흥미롭다. 한나와의 관계에서는 네이트가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한나는 주체적이고 무언가를 결정할 때 네이트의 도움이 필요없는 독립적이며 명석했다. 한나의 장점이 네이트를 주춤하게 했고 둘 사이에 이상 기류를 형성하게 한다. 가령, 뜨거운 밤을 보낸 후 다음 날 한나가 네이트한테 아침을 차려주고 싶어하는데 네이트는 의아해 한다. 한나처럼 자립적 여성이 아침식사로 베이글이 좋은 지 계란 요리가 좋은 지 묻는 건 네이트한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한나한테 너 먹고 싶은 걸로 하라고, 하는데서 한나가 분노한다. 하지만 지적 생물체라는 게 이런 시시한 일에 화내는 걸 수치스러워하기에 분노를 숨기고 씩씩대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작은 균열이 점점 커지면서 큰 구멍으로 발전한다.

 

흥미로운 건 네이트한테 안정감을 주는 여성상이다. 그리어인데 그녀는 한나와 달리 육체적으로 육감적인 편이고 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자신만의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리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여자, 하면 보통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문학에 대해 이야기 하기 보다는 요리할 때 나는 냄새라든가, 자신의 감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네이트의 친구들 모임에 갔다오면 그리어는 늘 불쾌하다고 했는데, 몇 분은 그리어의 이야기를 재밌게 들어주다 다시 그 지적인 토론하는 일상적 태도로 돌아가서 그리어가 소외되는 느낌을 받곤했다. 한밤 중에 기분이 안 좋다면 네이트를 필요로 한다는 지 , 네이트를 위해 요리하는 걸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어. 네이트는 편안함을 느끼고 수 명의 여자친구들을 거쳐 네이트의 기질과는 다른 그리어한테 안착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네이트의 입장은 외로운 것보다 고정적으로 만나는 여자친구가 있는 게 더 낫고,  더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어쩐지 네이트 혹은 네이트로 대표되는 남자의 이성관에 여성 작가가 체념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똑똑한 여자는 분명히 매력적이고 사랑받을 만하지만 곁에 두기에는 부담스럽다, 뭐 이런 작가의 세계관이 투영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작가가 콜럼비아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프리랜서란다. 여자 작가가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남자가 바라보는 이성관, 그리고 남자의 심리를 묘사했는데 나는 작가가 혹은 작가 주변에서 느꼈을 남자 친구에 대한 심리가 느껴진다. 궁극적으로 남자가 여자에 대해 갖는 이상이나 환상은 자신을 돋보이게 해 줄 수 있는 짝이 아닌가, 하는 부정적 생각이. 네이트는 마초적 성향이 전혀 아니고 오히려 초식성에 가까운데도 그러는 거 보면 Y염색체의 비밀은 유전의 법칙이 우선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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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세트 - 전2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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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오면 허무의 쓰나미가 찾아온다. 허무를 떨치려고 여행 사진도 뒤적이고 여행기도 적어 보고 지명이 들어간 책도 찾아본다. 허무의 쓰나미가 밀려왔을 무렵 읽었던 책이다. 첫 부분에 익숙한 지명이 한가득 등장해서 과거 속으로 광속으로 달려 가고 있던 내 기억을 잠시 늦추게 하면서 잠깐 머물렀던 도시에 대해 놓쳤던 여러 가지를 떠올리곤 했다. 독서의 주목적이 위안인데 참 위안이 되었던 책이다. 여러 면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라틴어로 세계란 뜻, 문두스mundus란 별명을 가진 고문헌학자 그레고리우스다. 그의 세계는 책이었다.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가도 서점에만 들리는 사람. 책 속에 있는 삶을 진짜 삶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러다 어느 날 낯선 포르투갈 여인을 잠깐 만나고 포르투갈어로 쓰인 책을 산다. 지은이 아메데우 드 프라두라의 흔적을 좇아 수 십 년간 일했던 학교를 떠나 리스본으로 향한다. 왜 리스본인가. 리스본이란 지명 자체가 갖는 아우라가 있다. 닿기 힘든 이국적인 느낌이다. 칸트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과를 보냈던 사람이 미지의 세계로 갑자기 발을 쑥 집어 넣는 이유가 이렇게 묘사된다.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서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에는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65쪽)

 

시계추처럼 정확했던 그레고리우스가 더 이상 시계추가 아닌 삶을 살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문헌학자답게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꾼다. 프라두가 쓴 글을 읽으며 프라두가 글을 쓰게 되는 배경을 추적해간다. 프라두란 인물이 가족, 학교, 사회적으로 겪는 상대적 정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프라두는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신을 강요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의사란 직업을 통해 존경을 받고 어린 시절 혐오했던 권위자가 되려는 찰라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다 독재정권 시절, 인간 백정이라고 불리는 독재자 앞잡이를 살리고 직업 윤리와 일반적 정의 개념 사이에 혼란을 겪는다. 의사로서 악인을 살렸지만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이를 살려서 사람들을 죽이는데 동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프라두의 견고했던 신념은 모래 가루로 흘러내린다.

 

그레고리우스가 책 속에 파묻혀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명확했는데 책 밖으로 걸어나와서는 쓰고 있던 안경마저도 불안하고 안 보이는 경험을 한다. 살아있는 그레고리우스가 이미 죽은 프라두를 자신의 세계로 불러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두 인물은 같은 사람이다. 한 때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차서 세상은 책처럼 혹은 자신이 알고 경험했던 범위에서 해석이 가능했다. 그레고리우스가 책을 덮고 프라두가 왜 글을 썼는지 주변을 추적하면서 "침묵하고 있는 경험에 색채를 입히고 멜로디를 적는다."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를 따라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경험과 비일상적인 면을 소환해서 지금 걸어가는 길 말고도 다른 길이 있다는 걸 상기하게 된다. 그 다른 길로 접어들지 않더라도 적어도 다른 길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빈 마음에 위안이 될 수 있다. 이 소설이 주는 커다란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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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스본행 야간열차, 빌 어거스트
    from free-floating ennui 2014-06-11 22:39 
    책을 먼저 읽은 후, 영화가 개봉하면 안 보는 편이다. 책의 밀도를 두 시간 짜리 영화가 담아내는데는 데 무리가 있다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많이 궁금했다. 소설이란 틀만 빌린 철학서 같기에 어떻게 이미지로 만들어냈을까, 하는 궁금증과 리스본의 풍광을 배경으로 하는 이미지를 기웃거릴 수 있을 거란 호기심이 만나 극장을 찾았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영화는 책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소설은 추리극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느날
 
 
 
Random House Guide to Good Writing (Mass Market Paperback)
Mitchell Ivers / Ballantine Books /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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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쓰기 작법서다. 지난 달, 강남역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다. 그 날 만난 친구한테 책값(4,200원)을 말하며 글을 안 써도 아깝지 않은 책값이란 농담을 했다. 그런데 올해가 가기 전에 뭔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백만 년 만에 갖게 하는 훌륭한 책이다. 부자들이 부자가 되는 법, 같은 책을 읽지 않듯이 글을 쓰는 사람들은 실제로 이런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글쓰기 작법서를 읽는 이는, 글을 쓰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어떤 동기부여를 받고 싶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실용적 도움을 받고 싶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두 경우 모두를 아우른다고 하겠다. 다만 실용적 부분에서 어법 파트에서 우리말이 아니라 영어 문법과 연결사 사용 주의사항이 나온다. 한국말로 글을 쓰는데는 괴리가 있어서 별 하나를 뺐다.

 

작법서를 읽다보면 하나의 기본 원칙이 있다. 읽는 이를 염두에 두고 써라, 란 말이다. 내가 끄적이는 게 영화 보고, 책 읽고, 여행 후기나 쓰는 게 전부라 무슨 필요가 있나 싶다. 그러다가도 공개 포스팅 자체가 이미 익명의 누군가를 대상으로 하는데 나는 너무 사적이면서도 익명의 누군가를 고려하는 모호한 생각으로 끄적이는 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즉 어떤 정보성 글도 될 수 없고 그렇다고 아주 내밀한 기록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태도를 취하고 있다. 어쩌면 비주류 블로거로서의 정체성의 한계인지도 모른다고 비약해 본다.

 

사실 읽다보면 다른 책에서 한 번은 봤음직한 말이 반복되지만 책을 읽을 때 가장 큰 효과는 망각을 기억으로 소환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러니까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쓰기에의 의지에 대한 불씨를 살려낸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스토리텔링에 대한 구체적 실전은 제시할 수 없어도 기초반에서 배우는 정도의 스토리텔링의 기본을 언급하고 있다. 소설이건, 에세이건, 보고서건 그 장르에 상관없이 좋은 글에 관해 이이렇게 이야기한다.

 

"A well-construncted essay has three elements in common with a traditionally well-constructed short story: a begining, a middle, and an end. The begining is the thesis, the idea that is being put forth. The middle is argument, the body of essay, in which the thesis is defended against its antithesis. The ending is the conclusion, which restates the thesis as it has been expanded by the arguments put forth in the body."(p.43)

 

새삼스러운 말이 아니다. 그러나 실천하기 무지 어려운 지침이다. 또 하나 이 책의 실용적인 면은 챕터가 끝나면 해 볼 과제를 내준다. 물론 해봐야 의미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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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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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요즘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읽는데 몸은 잘 안 읽나,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책이라고나 할까. 당연하지만 기본적으로 통찰력과 성찰력은 있으시다. 초반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본래 사람을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더군다나 다른 나라 사람을 제대로 알기는 더더욱 힘들다. 사람이란 오로지 그 사람 자체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역, 처음으로 걷는 방법을 배운 아파트나 농가, 어릴 적 하던 놀이, 자연스럽게 들으며 자란 민간 속설들, 먹는 음식, 공부한 학교, 좋아하는 스포츠, 읽은 시들, 믿는 신 등이 그 사람을 만든다. 이러한 모든 요소가 그 어떤 사람인가를 규정한다. 이것들은 그저 남에게 전해 들어서는 알 수 없고 직접 경헙해야만 알 수 있다. 스스로 겪고 생활해야만 알 수가 있다. 또한 타국 사람에 대해서는 오로지 관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에 책에서 그들을 신빙성 있게 나타내기란 쉽지 않다."(11-12쪽)

 

이 구절에 유레카를 외치면 옮겨 적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인물들의 일생을 관찰로 서술하는 경향이 있고 그게 전적으로 화자(몸)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게다가 영웅주의에 대한 숭배가 깔려있다. <달과 6펜스>를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 소설은 초반과 다르게 후반으로 갈수록 단점만 눈에 들어와서 끝까지 못 읽겠다.(387쪽까지 읽다 중단함) 래리란 주요 인물이 등장하는데 모든 인물은 래리를 중심으로 수렴된다. 근데 이 주인공인 래리란 인물이 수상쩍다. 스트릭랜드의 도플갱어같은데 다른 인물의 심리는 화자가 대체로 단정짓고 묘사하는데 래리만은 수수께끼같은 인물로 남겨둔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십 년 동안 동양을 여행하다가 파리에 다시 돌아와서는 예수같은 행동을 한다. 물론 래리가 거들먹거리거나 하지 않지만 래리를 묘사하는 시선에는 래리를 성자의 위치로 올려놓는 면이 있다. 그리고는 과거 래리를 사랑한 여자들이 등장한다. 왜 래리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지를 말하는데 래리한테 보이지 않는 강한 자기장이 흘러 저절로 끌려들어가는 인물들이 열정을 이야기한다. 래리와 함께 하진 않지만 자신들이 얼마나 래리에 대한 열정으로 끓어오르는지. 그러나 래리는 부정한다. 이 작품은 몸이 노년에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열정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보인다.

 

"열정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파스칼은, 가슴은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다고 말했지.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건 열정이 가슴을 사로잡으면 가슴은 사랑을 위해 세상을 잃어도 좋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그럴듯한, 심지어는 결정적인 이유들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야. 그래서 명예를 희생시켜도 좋고 치욕도 그리 큰 대가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지. 열정은 파괴적인 거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넬과 키티 오셰이도 결국 열정 때문에 파멸로 치닫고 말았잖아. 그리고 열정은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려. 그러고 나면 수년 동안 인생을 허비했다는 걸 깨닫고 비참한 기분이 들겠지.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면서 무서운 질투의 고통을 견뎌 내고 그 모든 쓰디쓴 치욕을 삼켜야 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 자신이 가진 애정을 전부 가난한 매춘부한테 소진했음을, 어리석고 하찮은 존재에게 자신의 꿈을 모두 걸었음을, 껌 한 쪽만도 못한 상대에게 영혼을 쏟아부었음을 깨닫는 비참한 순간이 찾아오는 거지."(280-281쪽)

 

더 오래 살아 본 후에 하는 말이기에 맞는 말이긴 하다. 래리를 사랑하면서도 평범한 안정을 주는 사람과 결혼한 이자벨, 래리와 결혼하려는 순간에 자신의 습관을 버리기 두려워 도망간 소피.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파괴적 열정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도 인생은 흘러가고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걸까? 이것도 맞는 말인데 위안이 되기 보다는 늙는 거란, 참 재미없게 세상을 바라보는 거란 걸 알려줘서 서글프네. 나는 언제나 열정이 결핍되어 있는 채로 살아왔기 때문에 열정의 옳고 그름보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자신까지도 파괴하는 인물에 격한 애정을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이 차갑고 갑자기 재미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몸처럼 나도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슬프네. 내 노인같은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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