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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하얗게 빨아낸 속옷 같은 책이다. 은은한 세제 냄새, 햇빛에 잘 마른 냄새가 난다.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가 생각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용실, 구멍가게, 문방구, 그리고 세탁소가
조르르 머리를 맞대고 있던 동네. 그 동네의 혼자 살고 있는 노인 앞에 웬 택배 상자가 도착한다.
아내와 사별하고 외동아들도 사고로 잃은 노인이다. 그리고 그가 연 상자 안에 든 것은 로봇이다.
말 그대로 로봇.
로봇이라는 생각도 못한 존재가 나타난 것에 조금은 놀랐지만 그 후 이야기는 그저 담담하게 진행된다. 은결, 이라는 예쁘고도 뜻깊은 이름을 부여받은 소년 로봇은, 다림질도 하고 심부름도 하면서 노인의 곁을 지킨다. 그 와중에 세탁소 동네 아이들은 키도 크고 마음도 커지며 어른이 되어간다.
은결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학습하고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사용하는 과정은 사람이 성장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어쩌면 감정이나 판단이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고 깔끔하기는 하겠지. 사람은 외모가 변하는 것처럼 마음도 정신도 변하고 자신의 의지와 환경이 어긋날 때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은결이라는 로봇은 변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한결같이. 그러나 정말 그러할까.
세탁소 노인은, 은결에게 인간의 시간이란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아 없어지는 그 찰나라고 알려준다. 유한한 인간의 시간, 아등바등 몸부림치지만 점 하나에 불과한 시간. 그 짧은 시간을 인식하는 순간 그저 허무하기만 할까. 은결이 바라보는 그 인간의 시간은 짧기에, 한정되어 있기에 의미 있고 치열하고 비릿하면서도 뜨겁다.
무너져도, 얼룩이 지고 찢겨져도, 살아내야 할 시간, 한 스푼의 시간. 푸르게 남는 시간.
내내 담담하게 조용히 읽다가 어느 순간에는 눈물이 터져버렸고 또 마지막에는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