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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날의 시작 ㅣ 박완서 소설전집 4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네가 아무리 잘나고 공부 많이 했어도 여자는 여자니라하는 시어머니의 준엄한 선고가 그 여자의 온몸을 칭칭 감고 있다. 그런 시어머니에의해 출생시부터 용의주도하게 길들여져 착실하게 그녀의 관념을 세습받은 시어머니의 아들. 그와 살아야 하는 여자는 남자보다 결코 빛나서는 안되었기에 여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하시켜야 했으며,분출되는 자신의 재능을 모질게 모른척 해야만 했다. 능력있는 모든 여자는 날치는 것으로 얕잡고, 여자란 그저 남자의 그림자처럼 남자를 보필해야 한다는 유구한 고정관념으로 아내를 짓누르는 남편. 20여 년의 세월 어느새 육화되어버린 부덕(婦德)을 벗고자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던 아내의 시든 꽃잎같은 입술은 열렸다.
그는 홍박사와의 대결로 어쩔 수 없이 의식하게 된 사회적인 열등감을 아내를 잘못 얻었다는 개인적인 불행으로 변명하려고 했다. 전적으로 자기 책임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긴 싫었다. 열등감조차 책임지기 싫어서 더욱 쩨쩨해지고 있다는 데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열등감에 과민할 뿐더러 허약했다. 차라리 불행감을 견디는 쪽이 수월했다. 불행은 다분히 운명적인 거니까. p152
세상의 목소리는 남들이 다 용서할 수 있는 잘못을 용서 못하는 죄를 뒤집어 씌워 너무나 간단하게도 피해자인 그녀를 명백한 죄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허나 아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어렵사리 털어놓았으나 아버지의 입장을 대변하는 아들을 대하는 순간보다 참담하지는 않았으리라. 아들에게서 남편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그녀는 얼마나 섬찟하고 또 고독했을까. 기세등등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자각을 촉구하는 뻔뻔함, 그 아이러니한 늪에 빠져드는 그녀 못지 않게 나도 옴싹달싹 못할 듯 숨막혔으며 분개했다.
아무리 옳지 못한 것이라도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을 때는 그걸 안하는 게 오히려 옳지 못한 짓이라는 착란에 그 여자는 자주 빠지곤 했다 .그리고 옳지 못한 짓을 안 할 자유조차 없는 것처럼 느꼈다....명백한 잘못은 걷잡을 수 없이 큰 힘이 되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 거기 동조 안하는 쪽을 오히려 부당하게 만들고 있었다. p129
용납하기 싫은 상황들과 의사 표현만으로 반역이 되는,오로지 참여만을 강요당하는 무리에 속한 채 만난 윗 문장은 그대로 내가 된 듯했다...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읽는 내내 난 일상을 밝게 운영하지 못할 만큼 무거웠다. 문청희. 그녀가 어떤 길을 걷게 될런지 알 것 같아 책을 덮은 후에도 무겁다. 20년 전이나 앞으로 20년 후나 아내란 자리,며느리란 자리는 그렇게 고색창연할 것 같은 아픈 생각에 난 며칠을 견뎌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