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분홍달 > "당신의 발에 입맞추고 싶습니다"

위 그림은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다. 어디선가 한번쯤 보신 분들도 많을 것이다. 얼마전, 무용평론가 장광열이 쓴 책 '당신의 발에 입맞추고 싶습니다'를 선물받았다. 내가 돈을 주고 살 책은 아니었지만, 선물한 분의 성의가 고마워 읽기 시작했다. 역시 어느 분야에서건, 세계 최고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최고가 된 사람들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난 발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왠지 정형적이고, 소수 귀족들을 위한 것 같아서 말이다. 또, 토슈즈의 인위적인 선이 무용가의 발이 불쌍해서.... 하지만 그녀의 고운 자태는 사진으로나마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발레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언젠가 그녀의 춤을 꼭 한번 보고 싶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런 가정은 좋아하지 않고, 별로 의미도 없어요 나는 늘  내가 처한 상황에 충실했고, 진실을 다해 사랑했어요 그래서 지나간 일에 대해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없어요 또 미래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 또한 확정된 것이 아니니 미리 단정 짓고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또 발레가 다른 분야에 비해 현역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짧긴 하지만 그걸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또 내가 닥친 순간에 충실할 것이고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그러니 내일 그만둔다고 해도 저는 괜찮아요"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인 그녀에게 언제나 따라 다니는 질문들 ' 발레를 하지 않았다면..'등 수많은 if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단호하게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 있노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보통사람들은 온갖 가정속에서 스스로 상처를 내기도 하고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많은 현자들은 말한다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낭비하지 말라고'..지당한 말씀..그런데 어찌나 돌아서면 잘 까먹는지..종종 영화제목처럼 불안에 영혼이 잠식되곤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늘 뭔가 궁리는 하지만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한 나와, 또 다른 이들에게 혜가선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뜻대로 행동하고 느끼는 대로 가라 주저하지 마라. 이것이 無上의 大道다"

암튼,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발, 발레리나인 그녀의 진실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녀의 진실앞에 형태의 추와 미는 사라지고 누구라도 입을 맞추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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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막 보스턴과 뉴욕의 경기가 끝났다.3패후 4연승으로 보스톤의 승리.....할 이야기가 많아진 경기가 됐다.밤비노의 저주도 깨지고 3패후 4연승도 전후무후한 기록이고....6차전에서 커트 실링의 투혼도 그렇고 연장동점 상황에서 오르티즈의 끝내기 안타와 홈런도 그렇고....남의 나라 경기지만 경기 자체로 재미있었다.

잠시후 1시간 뒤면(지금 시간 1시 5분이다)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헌재의 판결이 있다. 뭐 왠만하면 헌재로 가는 마당에 맘에 안든다. 헌재가 과연 최종적 판결을 내릴 단체인가 하는 의문도 들고.... 헌재의 판단이 가지는 중량감을 생각할 때 그 기관이 과연 시대정신을 읽고 있는지 의문이 되고 그런다.

아는 정보라인에 의하면 헌재에서 대통령의 행정수도 이전에 위헌을 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중계차 타러 가던 기자 친구넘 왈 " 그래도 한번 뚜껑 열린때까지 기다려봐야지...." 한다. 근데 아무래도 안좋은 예감이 든다. 이렇게 틀을 하나 바꾸는게 힘들구나하는 자조섞인 한숨이 나온다.

앞으로 정국이 어찌될런지........    커피나 한잔 마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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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10-21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도 서울은 관습헌법에 해당"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지금 관습법을 사전 찾아보니 이렇게 풀이되어있군요. "사회생활상의 무의식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행동양식인 관습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법이다." 오늘 새로운 용법 하나 늘었군요... 대법원의 국보법 판결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판결 하나 더 나왔습니다...

파란여우 2004-10-2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습헌법....그 관습 깨기가 그렇게 어려운 거라면 우리나라는 계속 뒤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착잡합니다.

마태우스 2004-10-2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스톤 승리는 분명 대단한 일이죠. 하지만 월드시리즈서 우승해야 저주가 깨지는 거니깐... 한번 더 투혼을 발휘해야겠어요. 위헌소송은 전혀 예상 못했고, 할말이 없습니다.
 

전효숙 헌재재판관 "남성 성욕 해소책 마련돼야"

[오마이뉴스 2004-10-19 15:42]
[오마이뉴스 우먼타임스 기자]
▲ 전효숙 헌재 재판관
ⓒ2004 우먼타임스
[황훈영 기자] 헌정사상 첫 여성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주목을 받아온 전효숙 재판관이 지난 15일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성매매방지법와 관련, "과거 윤락행위등방지법에 비해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한층 진보된 법률"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그러나 남성의 성 욕구 해소가 문제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이 고민되어야 한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전 재판관은 이날 한국여성정치연맹이 주최한 47차 오찬 포럼에서 강연을 마친 뒤 성매매방지법 시행의 실효성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또 "남성의 성적 욕구는 여성과 비교할 때 신체적인 구조에 있어서 차별성이 있기 때문에 남성의 성욕 해소와 관련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전 재판관의 이같은 발언은 "남성의 성욕 해소 기회 박탈" 혹은 "공창제 인정" 등의 최근 성매매방지법 시행 이후 불고 있는 역풍과 관련해 주목을 끌고 있다.

전 재판관은 또 이에 앞서 열린 '성인지적 관점에서 본 한국법률'이란 주제 강연에서도 "우리 나라는 성별, 종교, 신분 등의 차별을 기준으로 평등권 위배 여부를 심사하는데, 이때 비례성 원칙을 적용한다"면서 "그러나 성별에 따른 모든 차별이 평등권을 위반한다고 볼 수는 없다. 신체적, 본질적 차이는 차별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되어야한다"고 말했다.

전 재판관은 또 "성과 관련된 사건은 재판관의 성별에 따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고 지적한 뒤 "여성이 남성의 신체나 심리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듯이 남성도 여성의 신체 구조나 감정 변화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양성평등적 판결이 나오려면 어렸을 때부터 양성평등교육이 이뤄져야 하고, 여성 법관의 진출이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성고용할당제나 여성비례대표 50% 할당제의 남녀평등권 위배 여부와 관련, "여성고용할당제나 여성비례대표 50% 할당제는 과거 사회적 환경 속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행해졌던 점에 비춰볼 때 평등권에 위배된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97년 동성동본금혼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 제대군인에 대한 가산점 폐지 등은 소수자의 평등권을 인정하는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  도대체 이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 이해가 안갑니다.남성은 성적 욕망을 억제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풀 방법을 정부차원에서 만들어 줘야 된다는 겁니까?  마치 일제시대 ..군인들의 성욕은 어쩔수 없고 또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성노예"(일명 종군위안부) 가 있어야 된다는 아이들 논리와 똑같군요.헌법재판관은 탄핵심판 할 수 없나????  요즘 마치 공창제가 성매매방지법 적용에 대한 현실적 대안인 양 떠오르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요?  90년대 스웨덴은 과감한 단속과 함께 공창제를 폐지했다고 합니다. 일견 그럴싸한 공창제에 대해 생각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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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0-1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그런거였군요. 저 분의 말씀대로라면 남자들은 성적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짐승적 존재인가 봐요. 이거야 말로 성차별 아닌가요?..님의 말씀처럼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남성분들의 위험(?)을 제어 시키려면 위안부를 두어야 한단 말인지...성질 납니다. 정말 헌재 재판관은 누가 탄핵하죠?

마태우스 2004-10-2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파란여우님과 같은 맥락으로 읽었어요. 남성은 성욕을 억제 못하는 짐승이니, 거세해야 겠군요...................
 

③ 20세기 피아니즘의 흐름

정말로 하늘의 별만큼이나 그 숫자가 많은 20세기의 피아니스트들을 모두 살펴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무대에 오르지 않는(몇 명의 예외는 있지만) 거의 유일한 연주자들이며,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많은 해석의 갈래와 개성, 그리고 무수한 카리스마들이 생겨나는 분야라고 하겠다.

우선 맞닥뜨리는 것이 분류의 문제이다. 각자만의 고유한 개성과 음악적 기질을 띠고 있는 이들을 무슨 수로 헤아려 나눌 것인가. 21세기가 바로 앞에 다가온 이 시점에서 드라마틱한 피아니스트, 서정적인 피아니스트, 혹은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와 아카데믹한 피아니스트 등의 나눔에 공감하는 이가 얼마나 될지도 의문이다. 궁여지책(?)으로 필자는 사람과 사람을 구분하는 가장 일반적인 원칙, 즉 민족과 국가라는 기준으로 20세기를 마음껏 ‘두들겼던’ 대표적 피아니스트들을 일별해 보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1950년 이전에 태어난 피아니스트만을 언급했으며, 선정된 피아니스트는 가급적 제외시키려 노력했다.


19세기 전통의 계승자들

지금까지도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일컬어지던 프란츠 리스트에서부터 현대 피아니스트들의 기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리스트는 잘 알려진 대로 명교사 카를 체르니를 사사했는데, 체르니의 또 다른 제자 테오도르 레셰티츠키는 우리에게 그다지 친숙하지 않다. 레셰티츠키는 폴란드 출신으로, 19세기 초까지 통용되던 다소 딱딱하고 경직된 손모양과 손가락에 부담을 많이 주던 주법을 버리고 릴랙스된 팔과 전신을 이용하는 소위 ‘자연주법’을 개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전에 비해 확연히 무거워진 피아노의 액션이나, 텍스처의 확대에 따라 요구되는 오케스트라적인 음향을 위해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하겠다. 물론 리스트도 그의 연주 모습을 묘사한 삽화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의자와 악기 사이를 넓게 벌려 움직이기에 충분한 공간을 만들고, 팔을 쭉 편 상태에서 상체의 무게를 이용하여 연주하는 ‘그랜드 스타일’의 자연주법을 몸에 익히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우선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를 가로질러 살았던 리스트의 제자들을 살펴보면, 대표적인 인물들로 한스 폰 뷜로·카를 타우지히·에밀 폰 자우어·모리츠 로젠탈·오이겐 달베르트·프레데릭 라몬트·조피 멘터·알렉산드르 질로티·아르투르 프리드하임·콘라트 안조르게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자우어·로젠탈·달베르트·라몬트·프리드하임 등은 20세기의 피아니스트로서 필수라고 할 만한 레코드 녹음(일부는 피아노 롤)을 남겼으며, 지극히 개성적이나 리스트의 학생이었다는 이미지와 다르게 의외로 단정한 표정을 띤 연주를 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특히 지금도 구할 수 있는 레코드로 에밀 폰 자우어가 만년에 녹음한 리스트의 2개의 협주곡은 느긋한 템포로 결코 테크닉적이지 않은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데, 동시에 귀족적이고 장려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훌륭한 솜씨여서 역시 리스트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한편 레셰티츠키의 제자들은 리스트 계열보다 더욱 화려하고 다양한 음악성을 자랑했는데, 스승 스스로가 표현의 자유로움과 자발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그들의 연주는 저마다 극히 유일무이한 개성을 지니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인물로 역시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를 들 수 있겠는데, 거장적이고 루바토를 많이 쓰는 다소 옛스런 스타일의 피아니스트였다고 전해진다. 또 파데레프스키는 역사상 최대의 인기를 누렸던 ‘스타’로 알려져 있는데, 후에 폴란드 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지낼 만큼 강력한 카리스마와 무대에서의 독특한 흡인력이 그 비결이었다고 하겠다. 이밖에도 오시프 가브릴로비치·마크 함부르크·이그나츠 프리드만·엘리 나이·아르투르 슈나벨·파울 비트겐슈타인·벤노 모이셰비치·미에치슬라프 호르초프스키·알레산더 브라일로프스키 등이 레셰티츠키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20세기 초의 대가들인 이들 모두가 전혀 다른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 스타일리스트였다는 데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이들 중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던 슈나벨이나, 실내악 연주에 주력했던 호르초프스키 정도가 19세기풍의 주관적이고 로맨틱한 비르투오시즘을 추구한 레셰티츠키 악파에서 다소 벗어난 이색적인 존재들이었다고 하겠다.


새롭게 선 20세기 피아니즘의 전통

아마도 20세기를 누빈 피아니스트들의 본격적인 시작은 쇼팽의 나라 폴란드부터 살펴봐야 그 순서가 맞을 것이다. 앞서 말한 파데레프스키나 프리드만 외에도 파데레프스키를 사사한 쇼팽의 대가 비톨드 말쿠진스키, 그와 동시대의 할리나 체르니 스테판스카 등과 한 세대 전의 명인 요제프 호프만과 레오폴드 고도프스키를 잊을 수 없다. 단정한 조형과 상쾌한 매력을 지닌 음악성으로 높이 평가되었던 요제프 호프만의 얼마 남지 않은 레코드를 들어보면, 이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예민한 귀와 손가락을 가졌는지 실감하게 된다. 또 그의 친구였던 고도프스키는 쇼팽의 작품을 포함한 각종 편곡의 명수로도 유명한데, 섬세하면서도 세련된 서정미와 웅대한 효과의 테크닉으로 독자적인 피아니즘을 구축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우리 시대 마지막 스타일리스트 슈라 체르카스키도 원래 우크라이나 태생이나, 요제프 호프만을 사사했으므로 폴란드 계열에 포함시켜도 좋을 듯하다.

호프만이나 고도프스키와 라이벌 관계를 이루었던 러시아의 거장이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였다. 그는 대선배격인 안톤 루빈슈타인의 전통을 이어받아 스크랴빈 등과 함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활약했다. 흔히 러시아적이라고 하면 선이 굵고 큰 스케일의 음악만을 떠올리게 되지만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는 거기에 섬세한 뉘앙스와 작품에의 뛰어난 통찰력을 수반한 짙은 표현력이 더해진 것이었다. 이런 전통은 후에도 이어져 미국의 줄리어드에서 활약한 조셉과 로지나 레빈 부부, 러시아에서 많은 피아니스트들을 길러낸 알렉산드르 골덴바이저·겐리히 네이가우스·시몬 바레르·레프 오보린, 여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였던 타티아나 니콜라예바·라자르 베르만·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등이 그 자랑스러운 계승자들이라고 하겠다. 이중 시몬 바레르는 오데사 출신으로 호로비츠보다 여덟 살 위인데, 한때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렸으나 비교적 일찍 숨을 거둔 대가이다. 명교사 펠릭스 블루멘펠트를 사사했으며, 글라주노프는 그를 가리켜 “오른손은 리스트, 왼손은 루빈슈타인”이라 평했다고 한다. 전해져 오는 레코드는 대부분 1930년대의 것으로, 확실히 기교적인 면에서는 호로비츠나 길렐스를 능가하며, 명쾌하고 현대적인 악상도 기억에 남는다. 아울러 바레르는 호로비츠와 더불어 20세기 초 미대륙에서 최초로 성공을 거둔 피아니스트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서구로 눈을 돌리면 전통이라는 면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나라는 프랑스다. 19세기 말 파리 음악원에서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을 배출한 루이 디에메의 공적은 매우 크다고 하겠으며, 그후에 마르그리트 롱·알프레도 코르토·라자르 레비·이브 나트·로베르 카자드쉬·블라도 페를르뮈테르·상송 프랑수아·에릭 하이드섹 등이 프랑스적 에스프리를 뽐낸 바 있다. 이중 롱 여사의 교육자로서의 활동과 나트·하이드섹(프랑스인으로는 다소 이색적인)의 베토벤 연구 등은 금세기를 마감하면서 다시금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또한 프랑스 계열로 넣어야 할 인물에 스페인계이며, 풀랑크의 친구이기도 한 리카르도 비니예스와 루마니아 출신의 클라라 하스킬·디누 리파티를 빼놓을 수 없다. 현재 원숙기에 들어선 라두 루푸도 루마니아 태생인데, 후에 모스크바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에서는 박하우스·기제킹·켐프와 함께 에트빈 피셔를 언급해야겠다. 원래 스위스인으로 라이프치히 악파의 거두 마르틴 크라우제를 사사하여 독일 음악의 정통을 이어받았다. 그의 바흐와 베토벤 연주는 현대 독일 악파의 하나의 규범이 되고 있으며, 레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그의 연주는 고귀하고 세련된 매너 위에 강한 생명력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나타난 피아니스트로는 콘라트 한젠·헬무트 롤로프·한스 리히터·베르너 하스 등이 있는데, 이들의 전통을 가장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피아니스트로는 현재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그 대표격이라고 할 만하다.

오스트리아는 슈나벨 이후 다소 피아니스트의 공백이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나 프리드리히 뷔러·브루노 자이들호퍼, 그리고 교육자로도 유명한 요제프 디힐러 등이 연이어 나타났고, 그후 유명한 빈의 삼총사들이 아직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낙천적인 빈의 전통은 21세기에도 결코 약해지지 않을 전망이다.


신대륙에서 꽃핀 열정과 환희

이탈리아를 포함한 라틴계 피아니스트들의 활동 역시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더욱 거세지고 있다. 우선 라틴계를 살펴보면 오이겐 달베르트의 부인이었던 테레사 카레뇨 정도가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라틴계 피아니스트이며, 남미 출신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던 금세기 초 칠레에서 온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유럽에서 성장하여 성공했다. 그후 알리시아 데 라로차·브루노 레오나르도 겔버·마르타 아르헤리치·다니엘 바렌보임 등이 한 세대 후에 등장했고, 이들의 활약상은 여기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이다. 이탈리아는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의 존재가 너무 커서 양적으로 조금 모자란 듯한 느낌이지만, 만능 피아니스트인 알도 치콜리니가 건재하고, 현대적인 피아니스트의 전형인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바야흐로 대가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어서 든든하다.

이웃나라 프랑스에 비해 화려한 전통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영국의 피아니스트들은 대부분 순수하고 아카데믹한 연주 양식을 고수하고 있어서 호감이 간다. 한때 피아노의 여왕 자리를 차지했던 마이라 헤스·커트너 솔로몬·클리포드 커즌, 그리고 아깝게 일찍 세상을 떠난 대형 피아니스트 존 옥돈 등이 대표격이다. 이중 솔로몬은 20세기 초·중반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서정미의 터치와 강철과 같은 테크닉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또 요즘 들어 그 활동이 뜸한 대기만성형의 피아니스트 피터 도노호 역시 발군의 테크닉과 작품을 꿰뚫는 혜안으로 매니어들의 주목 대상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이다. 미국의 피아노계는 본의 아니게 유럽세에 잠식당한 부분이 있었고, 그 결과 여러 면(특히 우리나라에 소개된 음반)에서 과소평가돼 온 경향이 없지 않았다. 우선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떠오른 피아니스트로는 요절한 윌리엄 카펠, 그리고 유진 리스트·유진 이스토민·얼 와일드 등이 있다. 동 시대의 줄리어스 카첸은 유럽으로 건너가 브람스 등의 해석에 이름을 날렸으나 역시 43세로 사망했다. 그후 레너드 페나리오·바이런 재니스·아베이 시몬 등이 기교파로 명성을 떨쳤고, 이제는 선생님으로 더 유명한 게리 그라프만과 레온 플라이셔 등도 이전 세대를 사로잡았던 대가들이다. 또 텍사스의 영웅 반 클라이번을 위시하여 존 브라우닝·어거스틴 아니에바스·미샤 디히터·앙드레 와츠 등도 여전하다. 이들의 영광은 다양한 레퍼토리의 피터 제르킨이나, 갈수록 깊어지는 예술성을 자랑하고 있는 머레이 페라이어 등에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다음 세기 미 대륙에서 울려퍼질 피아노 소리 역시 더욱 더 흥미로워질것이 분명하다.

글·박정준 기자 / 김주영 피아니스트

-- 자료 ; 월간 <객석> 98년 5월호 특집 기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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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알프레드 브렌델(1931∼ )

브렌델이야말로 20세기의 피아니스트들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존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유난히 개성이 강하고,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워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서 그렇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의 자리까지 올라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어떻게 보면 공기와 같이 원래부터 ‘그저 그냥 있는’ 존재같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다른 연주가들의 떠들썩함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의 연주도 그렇다. 다른 연주가들처럼 자신의 개성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무색 무미 무취의 연주라 할 수 있다. 다른 요소들을 다 배제하고 ‘남은 것은 그저 음악’인 셈이다. 무엇이 그의 연주를 그렇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그는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를 읽어내는 탁월한 혜안을 가졌다. 따라서 다른 요소들을 많이 집어넣지 않고도 그저 구도를 잡아나가는 것에 의해서만 작품의 의미를 청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해 내는 슈베르트와 베토벤은 다른 그 누구의 연주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전혀 노력 없이 직관에 의해서만 그렇게 된 ‘신적인 천재’라는 얘기는 아니다. 브렌델 자신이 고백하길 자신은 절대로 신동이 아니었다 한다. 과거 체코 땅이었던 모라비아에서 태어나 17세 되던 1948년 첫 연주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리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에트빈 피셔라는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스승으로 둔 것만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는 독일-오스트리아계의 정통 피아니스트가 될 자질을 전부 그에게서 물려받았다. 1949년 부조니 콩쿠르에 입상한 경력은 그가 기교적인 측면에서 다른 피아니스트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증명할 뿐이다.

빈에 거주하다 런던으로 옮겨 소리 소문 없이, 하지만 알차고 꾸준히 활동을 전개해온 브렌델. 그는 계속해서 연구하며 저술활동도 펼치는 학구적인 면모도 보였다. 그의 성실성만은 연주에 아주 쉽게 반영되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꾸준한 레코딩을 펼쳐왔다.

이미 그가 필립스에 남긴 녹음들은 상당수가 된다. 베토벤의 소나타와 슈베르트의 소나타가 역시 대표적인 레퍼토리.


7. 아르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1920∼1995)

기인적인 생활을 하다 지난 95년, 마침내 우리 곁을 떠난 또 한 사람의 괴팍한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 그는 20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1939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코르토로부터 ‘리스트의 재래’라 불릴 정도로 젊은 시절부터 테크닉과 카리스마를 자랑했던 그는 다재다능하긴 했으나 좀처럼 굽힐 줄 모르는 곧은 성격으로 좌충우돌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나서는 생각보다 여리고 섬세한 성격으로 결국 자신이 상처를 받는 결과를 낳았다.

마음에 드는 제자라면 돈 한 푼 안 받고 오히려 생활을 돌봐줘가며 데리고 있던 진정한 예술가적 기질의 소유자. 그도 역시 자신의 피아노를 연주에 끌고 다녔고, 별별 기행으로 가는 곳마다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그의 행적을 보면 ‘저게 과연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희한하기 그지없다. 카레이서이자, 의사이기도 했던, 마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시한폭탄 같았던 그다.

제2차 세계대전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독일군에 생포된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기도 했다. 음악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경력 아닌 경력’이다.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서 각광받기 시작한 그는 조금만 기분이 좋지 않아도 연주회를 취소시키기 일쑤였다. 그리고 자신이 계약했던 음반사의 파산으로 경제적 책임을 지게 되자 조국 이탈리아를 가차없이 떠났고, 이후 이탈리아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제대로 된 소리를 재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레코딩은 극도로 기피했던 그에게 내릴 수 있는 판결은 ‘완벽주의자이자 천재’밖에는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리는 가정용도 아닌 콘서트용 피아노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할 정도로 피아노의 물리적인 특성을 속속들이 잘알고 있었다. 또 피아노를 자신의 몸처럼 다루며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믿기지 않는 제어능력으로 초절적인 기교를 자아냈고, 페달링에도 통달해 있어 자신이 원하는 음향을 마음대로 빚어냈던 마술사이기도 했다. 역시 그런 특성에 딱 들어맞는 레퍼토리가 그가 남긴 가장 훌륭한 음반이다.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로 발매된 드뷔시의 전주곡 1집과 2집, 영상 1, 2집과 ‘어린이 차지’가 그것. 이 음반을 들으면 드뷔시를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사람도 드뷔시가 미켈란젤리의 몸을 빌려 그리는 ‘인상주의적인 음화(音畵)’의 마력에 빨려들고 만다. TV 방송용으로 녹음된 줄리니 지휘의 빈 심포니와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음반(DG) 중에 3번과, 5번 등도 유명하다.


8. 마우리치오 폴리니(1942∼ )

미켈란젤리에 이어 폴리니와 아르헤리치가 선정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폴리니는 미켈란젤리에게 고작 6개월간 배웠으나 가장 큰 영향을 받은 피아니스트이자 가장 존경하는 예술가로 꼽는다. 아르헤리치도 미켈란젤리에게서 배운 적이 있다. 미켈란젤리는 세상을 떠났고, 폴리니와 아르헤리치도 나름대로의 예술세계를 찾아 비상하고 있는 중이지만, 이들이 후대에 하나의 유파로 묶여 분류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지금 보기엔 이들의 공통점은 예민함밖에는 없어 보이지만. 예술이라는 마법의 세계에서 스승과 제자의 얘기는 신비로움을 더하는 면이 있다.

폴리니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1960년 쇼팽 콩쿠르에서의 심사위원 만장일치 우승이라는 경력과 함께 거기에 딸린 유명한 일화들을 떠올릴 것이다. 당시 심사위원장이던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 ‘우리 심사위원들 중에 과연 누가 폴리니만큼 연주할 수 있겠는가?’ 하며 감탄했다는 것과, 협주곡이 끝난 후 한 심사위원이 ‘그는 음표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며 한숨을 쉬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폴리니가 콩쿠르 우승 후 곧 바로 잠적했다가 약 10년이 흐른 후에 무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사이 자신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는 일설도 있지만, 이는 분명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폴리니는 쇼팽 콩쿠르 우승 후 약 1년간 꽉찬 일정으로 순회 연주회를 가졌고, 다시 1년간은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5년간 많지는 않았지만 규칙적으로 연주회를 열었고,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연주회 수를 늘려가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르헤리치와의 묘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난 아르헤리치가 1957년 제네바 콩쿠르에서 우승할 당시 폴리니는 2위를 차지했다. 다음해 폴리니는 제네바 콩쿠르에 재차 도전해 1위 없는 2위를 차지했다. 쇼팽 콩쿠르에서의 우승은 폴리니가 먼저 따냈다. 다음회인 1965년의 쇼팽 콩쿠르에서는 아르헤리치가 우승했다. 이는 두사람이 그 세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연주가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연주 스타일을 한마디로 잘 깎여진 다이아몬드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만큼 완벽하게 다듬어진 치밀함과 빈틈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김용배는 그의 연주에 대해 ‘기교가 기교로 느껴지지 않는다. 피나는 노력이 전혀 없이 얻어진 듯한, 즉 선천적으로 그저 타고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엄청난 기교가 그의 몸에 융해되어 있었다’고 평했다.

그런 폴리니가 최근 들어 많이 유해졌다는 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다. 전에는 맑고 투명하기 그지없어 순수한 얼음같이 차가웠던 연주를 들려주던 그가 천부적 기교의 바탕 위에 인간적인 면모를 쌓아가는 법을 터득했다는 얘기다.

그의 음반으로 손꼽히는 것은 역시 쇼팽의 녹음들이다. 하지만 그의 레코딩에서의 관심도 워낙 넓은 편이어서 현대곡에서 그의 진정한 면모를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9. 마르타 아르헤리치 (1941∼ )

아르헤리치는 94년, 기돈 크레머와의 내한 연주회에서 피아노 현을 끊어뜨리는 ‘시범 아닌 시범’으로 가공할 만한 파워와 타건의 집중력을 한국 팬들에게 확인시켜준 바 있다. 그는 20세기 후반을 풍미한 명 피아니스트임에 틀림없다. 그를 특별히 ‘여류’라는 꼬리표를 달아 따로 분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연주는 남녀를 통틀어도 스케일이 크고 힘차며 역동적인 편에 속한다. 그렇다고 섬세한 시정의 표현에 약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특히 아르헤리치를 들어 제멋대로이고 변덕이 심하며 신경질적인 피아니스트라 할 수도 없다. 그녀가 여성이라 그렇다는 얘기는 아예 입 밖으로 내지 않는 편이 좋다. 남성 피아니스트들은 더욱 심하지 않은가! 물론 그가 연주회 취소를 밥먹듯 해오긴 했지만. 최근에는 실내악 연주가 많은 편이라 훨씬 덜하다는 얘기다.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 파트너와의 연주는 취소하는 경우가 드물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인 1949년에 데뷔했으니 그의 연주인생도 올해로 반백년인 셈이다. 16세 때인 1957년에는 3주 간격으로 열린 부조니 콩쿠르와 제네바 콩쿠르에서 연속 우승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그 때문에 혹사당하기 시작했다. 그후 해마다 150회나 되는 협연은 그를 신경쇠약 직전으로 몰고 갔고 급기야 일단 후퇴해서 휴식기에 들어간다.

1961년부터 그는 미켈란젤리에게 배웠다. 너무나 열정적이고 외향적인 그녀의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어서일까? 아니면 정말 무리한 연주로 감각을 잃은 탓일까? 미켈란젤리는 그녀에게 ‘피아노를 그만두라’는 선고를 내렸다. 어쨌든 그 처방은 들어맞아 그녀는 재차 휴식기를 거친 뒤 1965년의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리고 한동안 뒤도 안 돌아보고 질주하던 아르헤리치는 83년에야 멈춰섰다. 그리고 그녀는 실내악으로 연주의 초점을 돌렸다. 마이스키, 기돈 크레머, 그리고 마음맞는 음악친구들과의 공동작업이 역시 성공을 거두며 나타났다.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DG)는 그중 대표적인 명반으로 손꼽힌다.

그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녹음은 모두 3종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인 아바도 지휘의 베를린 필과의 것(DG, 1994년)이 좋으냐 키릴 콘드라신 지휘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의 것 (필립스, 1980년)이 좋으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역시 아바도와의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3번과 라벨 협주곡(DG)이나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와 ‘소나티네’(DG)도 유명하다.


10. 글렌 굴드(1932∼1982)

굴드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너무 주관적이고 독특한 스타일, 그리고 한정된 레퍼토리라는 점에서 그를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 있었는가 하면, 그래도 그가 20세기 후반의 모든 음악인들에 미친 지대한 영향도 있고, 주관적이라 하더라도 피아노를 ‘너무나 잘 치는’ 연주가이므로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의 대열에 꼭 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굴드에 대해선 ‘신경쇠약 직전’이라고 표현하기가 오히려 어색하다. ‘신경쇠약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토록 섬세하고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영혼이 또 있었을까. 그는 진정으로 미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영혼이 음악의 심오한 본질에까지 미쳤다’라고 다시 표현하면 어떨까.

그의 죽음은 어땠는가. 그는 너무 자주 신경증적인 ‘가짜 통증’을 호소했다. 그래서 정작 치명적인 ‘진짜 통증’이 왔을 때 의사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거짓말쟁이 소년과 늑대’라기 보다 ‘가녀린 영혼과 죽음’에 가까운, 너무나 아까운 죽음이었다.

굴드가 그토록 기인처럼 보였던 이유도 이제는 너무나 명백하다. 그는 그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였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진정한 예술의 구현을 위해서 주변의 모든 조건들은 가장 적합한 상태로 준비되어 있어야 했지만 그 어느 것도 굴드의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학대하고 희생해 준비한 것으로 진정한 예술을 들려준 것이다.

그의 연주는 기계적인 정확성과 제어능력을 바탕으로 한 기교의 바탕 위에 섰다. 그리고 성부간의 우열이 없다. 바흐에서처럼 다른 곡들도 각 성부가 평등하게 대화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는지 모른다. 그에 따라 모차르트의 소나타 연주(소니)와 같은 결과를 빚어내기도 했다.

굴드의 최종 목표는 바흐가 항상 그랬듯이 푸가였다. 그의 음반을 말하자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소니)만을 얘기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굴드의 바흐 연주는 모두 굴드가 자신을 희생해서 준비한 위대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예술의 구현을 위해 신경쇠약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는 한,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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