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독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 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 위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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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시집을 꺼내 보다가 이문재의 <노독>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마흔해도 걸어오지 않았건만 ...발걸음이 무거운가.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때문인가? 아니면 나서 지도 못하면거 그리워하기만 한 죄 때문인가?

시가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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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으로 가는 길/정호승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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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왠지 이 시가 눈에 들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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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2-10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눈에 들어오네요...흠.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딘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 독하게 쓴 시 아닙니까?  늦은 가을이 되면 이 시가 생각납니다.그리고 끝연 3행...부시.....죽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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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1-08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시시가 부시가 죽었다고 보입니다... 최승자 한때 미치게 좋아했더랬지요. 근데 지금은 낯서네요^^

파란여우 2004-11-08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튼, 가을되면 개같은 가을은 단골메뉴로 다들 찾으시는군요.최승자의 시는 가을에 너무 허허로워 일부러 읽는 것을 피하고 있는 중입니다. 허긴, 피한다고 허무함이 안찾아오는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러 찾지는 않아요. 가슴이 뻥돈좁 몸통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마구 느껴지거든요.

드팀전 2004-11-08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요즘 제 정서는 아니에요.근데 가을이 되면 그 절창이라고 할 수 있는 "매독같은 가을" 이 단어가 가끔 생각이 납니다.오늘은 별로 눈에 안띄었던 '부시시..' 를 보고 '부시'를 떠올리며 혼자 키득 거린 것 때문에 올렸어요.

stella.K 2004-11-08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한 시로군요. 음...
 

그러나 나는 오늘 아침의 때묻은 革命을 위해서
어차피 한마디 할 말이 있다
이것을 나는 나의 日記帖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中庸은 여기에는 없다
(나는 여기에서 다시한번 熱老한다
鷄舍건너 新築家屋에서 마치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쏘비에트에는 있다
(鷄舍 안에서 우는 알 겯는
닭소리를 듣다가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담배를 피워물지 않으면 아닌된다)

여기에 있는 것은 中庸이 아니라
踏步다 죽은 平和다 懶惰다 無爲다
(但 [中庸이 아니라]의 다음에 [反動이다]라는
말은 지워져있다
끝으로 [모두 適當히 假面을 쓰고 있다]라는
한 줄도 빼어놓기로 한다)

담배를 피워물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였지만
나는 사실은 담배를 피울 겨를이 없이
여기까지 내리썼고
日記의 原文은 日本語로 쓰여져있다
글씨가 가다가다 몹시 떨린 漢字가 있는데
그것은 물론 現政府가 그만큼 惡毒하고 反動的이고
假面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1960.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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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4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09-15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제는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데가 내 고장이라고 생각한다'.(<낙타과음> 중)
저는 김수영의 균형감각이 너무 좋습니다.^^
 

연못가

                   백거이

산승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데

바둑판 위에 대나무 그늘이 시원하네

대나무 그림자에 가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때때로 바둑 두는 소리만 들리네

 

소녀가 작은 배 저어

연을 훔쳐 따가지고 돌아오네

종적 감출 줄을 몰라

물풀 위로 산뜻 길이 하나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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